진주시에 있는 明新高等學校는 1983년에 설립되어 본래 사립고등학교로 시작되었던 학교였으나, 학교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1991년 남명학숙 재단 김장하 이사장이 당시 100억 상당의 학교를 전부 국가에 헌납하면서 공립이 된 학교이다.
학교의 이름 明新은 대학(大學)에 나오는 명덕신민(明德新民)을 뜻하며 풀이하자면 참된 나를 찾아(明德), 세상을 이롭게 한다(新民) 라는 걸출한 뜻을 가지고 있다.
당시 김장하 이사장은 명신고를 조건 없이 국가에 헌납하였는데 이러한 사례는 현재까지도 전무후무한 사례라고 한다.
MBC경남에서 이러한 김장하 이사장의 일화를 담은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를 제작하였으며 2023년 7월부터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다큐멘터리 전반적으로 명신고등학교와 관련된 이야기와 인물들의 인터뷰가 나온다.
김장하는 경남 사천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후 친구들이 학교를 다닐 때 삼천포의 한 한약방에서 점원으로 일하면서 낮에는 약을 썰고 밤에는 공부를 했다.
열아홉 살 최연소의 나이로 한약업사 자격을 얻어1963년 사천시 용현면 석거리에 한약방을 개업했고, 9년 뒤인 1972년 진주시 동성동으로 이전했다.
이곳 남성당한약방을 약 50년 동안 운영하였고 2022년 5월 말 은퇴하면서 문을 닫았다.
그러나 정작 김장하 선생은 한약방을 운영해 번 돈을 개인을 위해 쓰지 않고 이 돈을 지역사회를 위한 지원으로 돌렸다.
일평생 동안 수많은 사회운동과 자선사업을 하며 나눔을 실천해 온 독지가로, 대표적인 사례로는 1983년 학교법인 남성학숙을 설립해 이듬해 100억 원이 넘는 사재를 들여 명신고등학교를 설립해 10여 년간 이사장을 하면서 체육관과 도서관 등 모든 학교시설을 완비한 후에 1991년 국가에 기부채납한 일이다.
그는 20대 젊은 시절부터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남몰래 장학금을 주었고, 지금까지 김장하의 장학금을 받은 사람이 1000명을 웃도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의 지원은 교육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예술, 역사, 여성, 인권 등 지역사회 모든 영역에 걸쳐 있다.
그는 진주 지역의 각종 문화예술단체나 언론·역사·환경운동 등 시민사회 전 영역에 걸쳐 조건없이 지원해왔다.
1990년대 시민주로 창간했던 옛 <진주신문>의 주주·이사로 참여했고, 1995년부터 27년간 '진주가을문예'를 지원했다.
국립 경상대학교 최초의 기부 건축물인 남명학관을 건립하는데 앞장섰으며 '진주문화를 찾아서'라는 문고 발간 사업도 계속하고 있다.
형평운동기념사업회와 진주문화 연구소는 직접 설립에 앞장섰고, 남성문화재단을 통해 장학사업도 꾸준히 진행하는 등 건강한 지역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동분 서주했다.
이외에도 지금은 진주를 대표하는 지역 서점이 된 진주문고가 어려웠던 시기 지역 서점을 살리기 위해 두 차례나 큰 도움을 주었고, 여성 평등 기금 조성으로 가정폭력 피해 여성 지원에도 힘쓰는 등 여성운동에도 아낌없이 지원했다.
극단 현장이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을 때도, 진주여성민우회가 창립될 때도 김장하의 도움이 있었다. 남명학, 진주오광대, 진주솟대놀이가 재조명되는 데도 그의 손길이 닿았다.
2000년에 설립한 남성문화재단을 통해 다양한 후원을 이어왔던 김장하는 2021년 재단이 해산되자 당시 남은 기금 34억 원을 경상국립대학교 발전기금재단에 기탁하며 사회에 환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