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61
2월9일[연중 제5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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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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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g4Pq0r30eNM
[서울대교구 박진수 사도요한 신부님 집전(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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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께서는 나와 단둘이, 일대일로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땅의 서북쪽 해안 지역, 즉 티로와 시돈을 훑으신 다음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베이스캠프 격인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사목터로 돌아오자 마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치유를 청하십니다.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면서 저도 청력이 조금씩 약화되어 가니, 청각장애인이 겪는 고통과 그들의 심정을 아주 조금 이해하게 됩니다. 심하지는 않으니 그냥 마음 편히 가시고 살라는 의사 선생님의 당부를 순순히 받아들이기까지 참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청각 장애와 함께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이 언어장애입니다. 잘 안 들리다보니 말수도 줄어들고, 결국 말도 어눌하게 되고 더듬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잘 안 들리고 말을 잘못하는 것, 어쩔수 없지, 다른 불치병보다는 괜찮지, 하지만, 당사 입장에서 겪는 고통은 만만치 않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있지만 소통이 안되니 거기서 느끼는 소외감과 막막함, 사회로부터의 단절감과 고립감은 그를 엄청난 외로움으로 몰고 갑니다.
이런 중복 장애인을 치유하시는 과정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우선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르르 단체로가 아니라 주님과 나 단둘이 일대일로 만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만물의 창조주요 구세주이신 하느님께서 오직 나만을 위한 시간과 장소를 마련하시고 나를 특별히 대우하시고 배려하신다는 것, 얼마나 은혜롭고 감사한 일인지요.
그 옛날 그 중복 장애인은 예수님과의 일대일 만남, 그것 하나만으로도 벌써 몸과 마음의 치유가 시작되었습니다. 더 특별한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들, 굳이 접촉하지 않으셔도 말씀 한 마디로, 눈빛 한번으로 치유가 가능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은혜롭게도 그토록 크신 하느님, 지고지순하신 하느님께서 하찮은 우리 인간과 직접 접촉하십니다. 당신의 존귀하신 손가락을 환자의 두 귀에 집어넣으십니다. 손에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환자 입장에서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눈에서는 쉼없이 눈물이 흘러나왔을 것입니다. 입에서는 감사의 기도가 저절로 터져나왔을 것입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 권능으로 가득찬 한 마디 말씀으로 그를 자유롭게 해주십니다.
“에파타!”
오늘도 주님께서는 여기저기 막히고 단절되어 고통당하고 있는 우리에게 힘주어 능력의 말씀을 건네십니다.
“열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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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SA6AXk8v0i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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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누구에게 귀를 열어주시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사람들은 그의 머리에 손을 얹어 고쳐 주시라고 청했지만, 예수님은 다른 방식을 쓰십니다. 곧, 그 사람을 군중 밖으로 데려 내오신 다음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시고 숨을 내쉬신 다음 “에파타!”라고 하십니다. 이 모든 일은 ‘성령’을 주시는 상징적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농부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들을 귀’가 있는 이들은 알아들으라고 하십니다. 들을 귀란 성령으로 말씀의 정신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왜 어떤 사람에게는 그런 은총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주지 않으실까요?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는 어릴 때부터 성체에 대한 신심이 남달리 뛰어났습니다. 그래서 남들보다 빠르게 9세에 첫영성체를 합니다. 첫영성체 한 후 마르가리타는 열병에 걸려 4년 동안 침상에 누워 지냈습니다.
그러다 성모 마리아에게 만약 완쾌되면 꼭 수도자로 하느님에게 자신을 봉헌하겠다는 서원을 합니다. 신기하게도 그 순간에 병이 치유되어 완쾌되었습니다.
성녀는 자라면서 자신이 한 서원을 잊었습니다. 세속의 삶에 빠져들 때쯤 예수 그리스도의 환시를 목격합니다.
그녀는 단순한 환각으로 치부해버렸습니다. 그만큼 세속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시 한번 그녀 앞에 나타나 과거 그녀가 자신을 하느님에게 봉헌하겠다는 서원을 한 것을 상기시키십니다. 그녀에게 자신에게 한 서원을 잊어버린 것을 책망하였습니다.
이 같은 체험을 한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는 성모 마리아 방문 수녀회 소속 수녀원에 입회하여 수도 서원을 한 후 수녀가 됩니다. 당시 그녀의 나이 24세 때의 일이었습니다.
수녀가 된 지 3년째 되던 해인 1673년 12월 27일, 그녀는 다시 한번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습니다. 어느 날 기도에 몰두하고 있던 그녀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 위에는 십자가가 있고 주위에는 가시관이 둘러있는, 사랑의 불꽃으로 타오르는 자신의 성심을 보여주면서 “보라! 사람들을 이렇듯 사랑하였고, 그들에게 이렇듯 많은 은혜를 베풀었건만 이 무한한 사랑에 대해 오직 배은망덕만 당하는 이 성심을! 내 성심은 망각과 무관심 그리고 무례를 견디고 때로는 특별한 사랑의 유대로써 내 성심과 밀접히 결합된 이들로부터 이 모든 능욕을 당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체 성혈 대축 일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후 금요일을 예수 성심을 공경하는 축일(예수 성심 대축일)로 정하고, 그날 영성체하는 것은 물론 제대 위에 성체를 현시함으로써 예수 성심이 받은 불경을 배상하기 위하여 엄숙히 보상하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성심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공경하도록 권하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사랑을 부어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그녀는 매주 목요일 밤마다 한 시간 동안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겪었던 고통의 시간을 묵상하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모든 가톨릭 신자는 첫 번째 목요일 밤마다 한 시간 동안 본당에서 성시간을 갖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계시가 바로 다 믿어지고 받아들여졌을까요? 처음엔 아무도 안 믿었습니다. 특별히 함께 사는 수녀들이 더 안 믿었습니다. 그러한 고통은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를 훈련하셨습니다. 은총을 받으면 약속을 꼭 지키도록. 그래서 끝까지 참고 견뎠고 죽음 직전까지 가며 원장 수녀를 믿게 합니다. 나중에 고해 사제였던 클라우디오 드 라 콜롬비에르 신부의 지지를 받았는데, 그는 마르가리타 마리아 수녀가 정말로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보았습니다. 이 둘은 다 성인, 성녀가 됩니다.
우리도 주님 목소리를 듣고 주님을 뵈옵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입으로 발설하게 되면 세상 모든 이들을 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이것을 견뎌낼 수 없다면 그분은 우리 귀를 열어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마르가리타 성녀에게 예수님은 “너의 모든 것을 바쳐라.”, 또 “내가 좋아하는 것을 너도 좋아하고 그 외에는 아무 판단도 희망도 의지도 가지지 말아라.” 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 귀를 열어주실까요? 곧 들을 귀를 주실까요? 바로 혀까지 봉헌할 사람에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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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아르키메데스는 ‘유레카(Eureka)’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유레카는 뜻밖의 발견을 했을 때 외치는 감탄사입니다. 꽉 막힌 문제가 어느 순간에 풀렸을 때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아르키메데스는 순금과 같은 무게인 물체를 물에 넣어 순금이 밀어내는 물의 양과 다른 물체가 밀어내는 물의 양을 비교하여 순금인지 합금인지 알아내었다고 합니다. 생각이 깊은 사람은 목욕탕에서도 새로운 발견을 하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은 ‘염화시중(拈華示衆)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부처님이 영산회에서 연꽃 한 송이를 대중에게 보이자 마하가섭만이 그 뜻을 깨닫고 미소 지으므로 그에게 불교의 진리를 주었다고 하는 데서 유래합니다. 유레카는 아니지만 살면서 기분 좋은 일이 더러 있습니다. 약속시간에 조금 늦을 것 같았는데 상대방이 늦을 것 같다고 문자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급하게 해야 할 일을 처리하고, 여유 있게 약속시간에 나갈 수 있습니다. 염화시중은 아니지만 ‘찌찌뽕’이 있습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것을 뜻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삶에 유레카와 염화시중이 있다면 삶은 더욱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복음서는 ‘희랍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람어’로 복음을 선포하셨지만 복음서가 희랍어로 기록된 것은 복음을 듣는 대상들이 희랍어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이스라엘을 넘어 아시아로 전파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희랍어는 지식인들이 사용하는 언어였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대부분 희랍어로 표현했지만 3가지 말은 아람어를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이유는 그 말이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케파’입니다. 케파는 ‘바위’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을 만났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희랍어로 베드로라는 뜻이고, 베드로는 우리말로는 ‘바위’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복음서 저자는 베드로에 천국의 열쇠를 맡겨 주시는 그 특별한 순간에 ‘케파’라는 아람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탈리타쿰’입니다. 탈리타쿰은 ‘일어나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소녀를 찾아가셨습니다. 사람들은 소녀가 이미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이미 죽어있는 소녀에게 ‘탈리타쿰’이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활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에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불신에서 믿음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분노에서 용서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교만에서 겸손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25세에 죽고 75세까지 묻히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인생의 잠재력을 완전히 경험하지 못하고 자신의 열정과 꿈을 추구하지 못한 채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절망 중에 있다면, 불신 중에 있다면, 분노 중에 있다면, 교만 중에 있다면 살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의미와 가치를 모르고 산다면 그것은 신앙인의 삶이 아닙니다. 복음서 저자는 죽은 이를 살리는 특별한 순간에 ‘탈리타쿰’이라는 아람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세 번째는 ‘에파타’입니다. 에파타는 ‘열려라’라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에파타!” 곧 “열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시작하였던 성 요한 23세 교황께서도 교회의 창문을 열자고 하였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통하는 주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 가르침은 낯선 곳의 긴장도 쉽게 풀어주고, 새로운 만남을 곧 친숙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것만 잘 지키면 우리는 닫힌 문을 열수 있을 겁니다. “남에게 원하는 대로 남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먼저 말하기 전에 먼저 듣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충실하게 하고,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 둘을 식별하는 지혜를 청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저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특별한 순간에 ‘에파타’라는 아람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복음을 선포하고, 주님은 그들과 함께 일하시며 표징으로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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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7,31-37: 열려라-에파타
예수님은 다시 갈릴래아로 가시자마자 귀먹은 반벙어리를 만나신다. 여기서 예수님은 아주 친절하시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신다. 귀먹은 반벙어리를 따로 불러 친절하게 손가락을 귀에 넣으시고 그의 혀를 만지셨다. 그리고 그 불구를 완치시켜주는 은혜가 어디서 오는지를 알려주시기 위하여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에파타!” 곧 “열려라!”(34절) 하신 것이다. 그는 혀가 풀리고 귀의 닫힌 문이 열렸다. 성령은 “하느님의 손가락”(루카 11,20)이라고 하셨다. 주님께서는 당신 손가락을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귀에 넣으시어,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그 사람의 마음을 믿음을 향해 열어 주셨다. 그분이 귀를 만지신 것은 그의 귀가 막혔기 때문이고, 입을 만지신 것은 그가 말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파타!”, 즉 “열려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의 마음의 입과 귀도 열어 주시기를 청하자.
주님께서는 귀먹은 이들을 듣게 해 주셨다. 주님께서는 이 일을 통하여 진리를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 하느님의 거룩한 말씀을 듣고 이해하게 되리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거룩한 복음을 듣지 않고 행할 바를 실천하지 않는 자들이 바로 말 못 하는 청각장애인이라 할 수 있다. 주님의 능력은 말 못 하는 사람을 제 혀로 다시 말할 수 있게 해 주셨다. 단순한 사건이기는 하지만 이 능력 안에는 미래의 일을 드러내는 또 다른 의미가 담겨 있다. 예전에는 천상의 것에 대해 무지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지식과 지혜의 진리를 깨달아 하느님에 관하여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37절) 감탄하였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인간의 질병을 치유해 주시고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게 해 주셨다. 예수님의 행적을 보고 백성들이 감탄했듯이 오늘의 우리도 다른 이들이 우리의 믿음의 행실을 보고 “참으로 놀랍기만 하구나!” 하며 우리와 같이 신앙을 갖기를 원하게끔 우리의 행위를 예수님의 모습을 닮을 수 있도록 고쳐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니겠는가! 조금씩 하느님의 말씀에 응답할 때, 그분의 속삭임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살려고 노력할 때, 묶여있던 혀가 풀려 올바로 주님을 찬미하고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조그마한 일에서부터 꾸준한 노력의 결실로 나에게 돌아오는 결과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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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전례의 모든 말씀은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라야 함을 전합니다. 제1독서는 이스라엘 왕국이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갈라진 사건을 전하는데, 그 이유는 솔로몬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11,11-13 참조). “듣는 마음”을 청하였던 솔로몬의 마음은 점차 하느님에게서 돌아섰고, 결국 다른 신을 따르지 말라는 주님의 명령에(11,2; 신명 7,1-4 참조) 귀를 닫았습니다. “너에게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너는 낯선 신을 경배해서는 안 된다.”(화답송)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듣지 않은 결과로 이스라엘은 두 왕국으로 갈라졌습니다.
복음은 귀먹은 이를 낫게 하시려고 온 정성을 다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한마디 말씀으로 고쳐 주시지 않고, 일련의 행위를 통해서 치유하십니다. 그를 군중에서 따로 데리고 나가시고,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으시며, 손에 침을 발라 혀에 대시고, 하늘을 향하여 한숨을 내쉬시며, “에파타!”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행위가 끝났을 때 비로소 병자의 입과 귀가 열립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서를 통해서, 교회 문헌과 가르침을 통해서, 전례와 기도를 통해서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사건을 통해서, 우리 안의 양심을 통해서도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믿음이 부족한 우리는 그 말씀을 온전하게 듣지 못합니다. 우리의 닫힌 귀를 열어 주시려고 다양한 방식과 여러 행위로 애쓰시는 주님을 믿으며, 마음을 열어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르도록 합시다. “주님, 저희 마음을 열어 주시어 당신 아드님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복음 환호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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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에파타!>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 더 널리 알렸다.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르 7,32-37)
여기서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를 원문대로 직역하면, “저분은 모든 것을 좋게 하셨다.”인데, 이 말은 창세기 1장에 반복해서 나오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라는 말에서 온 표현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예수님은 새로운 창조자이신 분”이라는 증언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병들고 고장 난 이 세상을 고쳐서 천지창조 때의 좋았던 세상으로 회복시키시는 분”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1,3)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1코린 8,6ㄷ.ㄹ)
그런 관점에서 보면, “에파타!”(열려라!)라는 말씀은, “빛이 생겨라.”(창세 1,3)라는 말씀과 같은 ‘새로운 창조 말씀’입니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통로가 막혀 있는 것을 뚫어서 원래의 ‘열린 통로’로 회복시키신 말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에,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이 차단되었습니다.(창세 3,24) 그 길이 막힌 것은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통로가 막힌 것을 상징하기도 하고,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 막힌 것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길을 복구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고, 구원을 받는 길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이 차단된 일에 대해서 혹시라도 “그것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다.”라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길이 차단되기 전에 먼저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을 피해서 숨어버렸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은 주 하느님께서 저녁 산들바람 속에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과 그 아내는 주 하느님 앞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창세 3,8)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을 피해서 숨은 일은,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통로를 사람 쪽에서 막은 일입니다.
그것은 죄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이 차단된 것은, 사람 쪽에서 먼저 그 열매를 먹을 수 있는 자격을 잃었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자격을 회복시켜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로마 5,17)
오늘의 복음 말씀에서 ‘듣지 못하는 상태’는 인간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상태를 상징하는 것으로, 또 ‘말을 더듬는 상태’는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말씀을 제대로 전하지도 못하는 상태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니까 말씀에 따라 살지도 못하고, 그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지도 못합니다. <제대로 알아듣고, 제대로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만이 그 말씀을 남에게 전해 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장애를 고쳐 주신 일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고, 제대로 실천하고, 남에게 제대로 전해 줄 수 있도록 고쳐 주신 일입니다.
따라서 “에파타!” 라는 말씀은, 예수님 쪽에서는 “열려라!”인데, 우리 쪽에서는 “열어라!”입니다. 들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듣게 되고, 들은 그대로 실천하면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말씀대로 살게 되고, 남에게 그것을 말해 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말씀을 전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들은 것이 없으니 아무것도 말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신앙인으로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9장에 이런 대화가 나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있던 몇몇 바리사이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39-41)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먼저 겸손하게 인정하고 고백해야 하고, 그다음에는 ‘능동적으로’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도움이 없어도 된다고 큰소리치는 사람은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이고,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나라에, 즉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면, 구원과 생명을 받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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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회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치신 예수>
말은 인간과 짐승과를 구분시킨다. 인간은 어떤 일정한 것에 속해있지 않고 그가 무엇을 듣느냐에 따라 그렇게 결정된다. 사실 인간은 존재하는 그대로 있는 존재가 아니고 되어 가는 존재이다. 그가 무슨 말을 듣느냐에 따라 거기에 응답한다.
하느님은 말씀이시고 전달자이시고 자신을 주시는 분이시다. 인간은 무엇보다 귀를 갖고 듣는 존재이고 그 다음은 혀로 말하는 존재이다. 들음으로써 거기에 맞는 대답을 드리게 된다.
하느님과 대화가 시작되고 하느님의 파트너가 되고 하느님과 일치되고 하느님을 닮게 된다. 우리의 믿음은 말씀을 들으면서 성장하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귀먹은 반벙어리는 제일 나쁜 악이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 학자들과 만나 유다인의 전통에 대해 논쟁을 하신 다음 이방인 지역인 티로와 시돈, 데카폴리스 지방을 거쳐 갈릴래아로 돌아 오셨다.
전통에 얽매여 사는 유다인 지역과 우상과 여러 잡신들을 믿는 이방인 지역을 오가시면서 그들이 갖고 있는 높은 벽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허물어버리고 모두 하나 되도록 노력하신다. 바오로는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 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시고 율법 조문과 규정을 모두 폐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유다인과 이방인을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고 원수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하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던 여러분에게 가까이 있던 유다인들에게나 다 같이 평화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에페 2, 14- 17)라고 적었다.
예수님은 오랫동안 이방인들이 사는 지역을 다니시면서 그들이 사는 모습을 직접 보시고 경험하셨다. 이방인들과 함께 머물면서 타락과 부패, 무질서와 비윤리적인 이방인들의 생활을 보실 수 있었다. 이들이야 말로 복음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다. 특히 마르코 복음서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복음서이기 때문에 마르코는 이런 면을 강조하고 있다. 이들은 하느님에 대해서 말할 줄 모르는 벙어리이며 기도할 줄도 모르는 벙어리이고 말씀을 들을 줄도 모르는 귀머거리인 것이다.
오늘 복음은 이런 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쳐 주심으로써 예수님이 왜 이방인들에게 가셨는지 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자 했는지를 나타내고 있다. 예수님은 당신께 반항하는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한테도 복음을 전하셨고 또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방인들의 지역인 여러 지방을 다니시면서도 복음을 전하셨다. 이러한 예수님을 보면 예수님은 그 누구와도 아무런 벽도 없고 또 적도 없다. 모두가 당신의 양들이며 돌보아 주어야 할 양이다. 우리들이 지방색을 따지고 서로 원수가 되고 적이 되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모두 인간의 욕심 때문이며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우리도 서로간에 쌓인 벽을 허물고 서로를 받아 들여야 한다. 지방색을 허물고 자기와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 귀먹은 반벙어리는 어떤 사람인가?
첫째. 신체적인 귀먹은 반벙어리가 있다. 이 사람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신체적인 결함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즉 듣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사람이다. 귀를 갖고 있지만 듣지를 못하고, 입이 있지만 말을 하지 못한다. 따라서 말을 하고 싶어도 말하지를 못하고 듣고 싶어도 듣지를 못하는 사람이다. 들을 수 없으니 다른 사람이 자기를 흉보지나 않는가 아니면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게 되고 불안해 한다.
둘째, 심리적으로 귀먹은 반벙어리도 있다.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지 못하고 자신 안으로 움추려 드는 사람이다. 사람들과의 접촉을 꺼려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기회가 없고 말할 상대가 없다. 함께 어울리고 싶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도 사람들을 만나면 두렵고 용기가 없어서 하고 싶은 말을 하지도 못하고 듣지를 못하는 사람이다. 이로 인해 자신이 받는 스트레스는 엄청나다. 자기 뜻을 표현하지도 못하고 또 상대방의 뜻을 들을 수도 없기 때문에 사람들과의 만남을 기피하게 되고 점점 폐쇄적인 사람이 된다. 서로 대화가 없을 때 오해가 생기게 된다.
셋째, 영적으로 귀먹은 반벙어리가 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도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듣지 못하니까 하느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고 그래서 하느님에 대해서 말을 하라고 하면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런 모든 사람들은 다 병자이다. 귀먹은 반벙어리를 희랍어로 Moghilalos(모길라로스)라고 한다. 뜻은 둔한, 바보, 저능이다. 사람들이 보기에 좀 모자라는 사람, 바보같이 보이는 사람을 말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할 때 우리는 전혀 엉뚱한 말을 한다. 즉 바보같은 생각을 하고 말을 하게 된다. 속에서만 끙끙거리고 밖으로 속시원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좀 모자라는 것 같은 사람이다. 삶의 의욕을 상실한 사람이다. 듣지를 못하니까 모든 것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예수님의 소문이 그렇게 자자하지만 전혀 예수님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오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데리고 와야 예수님께 올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이처럼 귀머거리는 치료를 받을려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도움 없이는 자신의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사람이다. 예수님께 데리고 온 이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문제 만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고 또 예수님께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고 하였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오늘 복음에서 귀먹은 반벙어리를 사람들이 데리고 왔듯이 아직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야 한다. 귀먹었다는 것은 들을 귀가 없다는 뜻이다. 귀가 있어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은 귀먹은 사람이다. 입은 말을 하는데 사용된다.
입이 있어도 하느님에 대해 한 마디도 할 줄 모른다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말이 나오지 안는다는 것은 벙어리이다. 귀먹은 반벙어리는 하느님도 모르고 기도할 줄도 모르는 이방인의 상징이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구원의 신비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외롭고 쓸쓸한 사람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이방인을 찾아 이 지방 저 지방을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하시는 것이다. 그들의 입이 열리고 귀가 열리게 하시기 위해서 그래서 그들도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 말이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의 입이 열리어 하느님을 찬미하게 되고, 귀가 열리어 하느님의 기쁜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예수님께 나아가 손을 얹어 고쳐달라고 청해보자. 귀머거리는 열두 제자들이기도 하다. 예수님을 빵의 기적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도 마음이 무디어져서 알아 듣지 못하였고 예수님을 보고도 유령이라고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는 모습들이 바로 열두 사도들이다. 또한 귀먹은 반벙어리를 가리켜 바보, 저능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아직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느냐? 그렇게도 생각이 둔하냐?"(마르8, 13)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 앞에서 그들은 분명히 둔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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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박영진 베드로 신부님]
오늘 마르코복음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에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중고에 시달리던 장애인을 치유하시는 장면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갖은 정성을 다하여, 곧 ‘병자를 군중 속에서 따로 인도하시고, 당신의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시고,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시고, 또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에파타하고 말씀(33-34절)까지 하십니다.
병자가 치유됨은 물론이요, 그가 주님을 전파하는 증인이 되었고,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에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37절)고 탄복하게 됩니다.
과연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는 교회와 세상을 향한 봉사와 희생에 있어서 얼마나 열과 성을 다하였던가? 반성하게 합니다.
과연 주님을 전파하고 증거 해야 하는 우리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어떠한 평가를 받고 있는가? 묵상하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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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이재학 예로니모 신부님]
<이 녀석들아! 제발 좀 열어라!>
신체장애 중에서 불편하지 않은 것이 없겠지만 특히 말을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힘들 것 같다.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것은 마치 혼자만 뚝 떨어져 있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관계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측은지심이 든 예수님은 귀먹고 말더듬는 이를 치유하신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치유기적은 육체적 장애의 치유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는다. 영적인 귀머거리와 말더듬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영적인 말더듬이는 어떤 사람일까? 신앙을 실천하지 못하고 다른 이들에게 선포할 줄 모르는 사람을 말한다. 평생 신자로 살아가면서도 이웃 사람에게 성당에 가자는 말을 못하는 사람, 기도하라고 하면 못한다고 꽁무니를 빼는 사람,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식사전후기도가 쑥스러워 우물쭈물하거나 허벅지에 십자표시 쓰윽 긋고 밥 먹는 사람, 교회나 하느님을 비판하는 소리를 듣고도 아무 소리 못하는 사람들이 바로 말더듬이 신앙인이 아닐까?
영적인 귀머거리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의 말씀은 좋은 말씀이라고 끄떡이면서도 한귀로 흘려버리는 사람, 그래서 복음적 사랑은 머리와 입으로만 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흔히 천주교를 비판할 때 벙어리 교회라고 한다. 천주교 신자들은 전교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하느님 말씀을 드러내지 못하고 얼버무리는 신자가 많기 때문이란다.
나는 하느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귀머거리는 아닌지, 들어도 못 들은 척하며 하느님 말씀을 이웃에게 전할 용기가 없어 우물쭈물하는 반벙어리 신자는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은 “에파타”라고 하신다. “이 녀석들아! 제발 좀 열어라!”라고 하시는 것은 아닌지 쑥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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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7,37)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여행은 그렇게 짧지 않은 거리(=대략 150km)이고, 쉽지 않은 여행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길고도 험한 여정에서 예수님께서 힘들어하신 것은 그 거리와 여행의 힘듦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힘드신 것은 예수님께서 성서에 아무런 힌트가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과도 흡사한 사람을 그 어떤 지역에서도 만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오늘 복음의 귀먹은 반벙어리 치유 이야기는 단지 눈에 보이는 치료와 치유 사건 이면의 다른 것을 깨우쳐 주기 위한 교훈이 담겨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벙어리dumbness란 본디 음성언어를 발성할 수 없는 청각장애인으로, 태어날 때부터 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이거나, ‘운보 김기창’ 화백처럼, 본디 말을 할 수 있었으나 어떤 원인으로 그 능력을 상실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농아聾啞인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이는 귀먹은 반벙어리로 듣지 못하기 때문에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곧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했지만,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곧 자기 탓으로 듣지 못하기에 진리의 말도 하지 못하는 세상의 수많은 영적 장애인에 대한 본보기입니다. 복음에는 이런 교훈적인 사례가 여러 차례 나오는데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수난 예고를 하신 다음에 꼭 등장하는 장님의 치유 이야기가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마태오 복음 20, 17~19 수난 예고와 예리코의 소경의 치유 이야기, 마태오 복음 20, 29~34의 이야기처럼 귀먹은 반벙어리는 곧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듣는다고 해도 그 뜻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제자들과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더 나아가 세상 모든 사람이 이에 속합니다.
들음과 말함은 상호불가분의 본질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어느 영어 학원 선전에 “귀로 듣고 따라할 수 없으면 영어를 배울 수 없다.” 는 표현도 있더군요. 이처럼 모국어든지 외국어 학습에서 기본은 말하기보다 우선하는 것이 듣기인데,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오로도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진다.”(로10,17)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듣는 인간이며, 구원은 그러기에 듣는 인간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인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을 때 입술에서 진리가 나옵니다.(예레 7,28참조)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치유 과정에서 보여 준 몸짓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광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하고 말씀하셨다.”(7,33~34)고 치유 과정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결국 당신 손가락으로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귀에 넣으셔서 막힌 귀를 뚫으신 다음에,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신 후에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결국 말하지 못하는 이유가 제대로 듣지 못함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하셨기에 먼저 막힌 귀를 당신 손으로 뚫으시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는 메시아가 오시면,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이29, 18) 하고 예언하였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이 오늘 예수님을 통하여 군중들은 실현된 것을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를 보고 더할 나위 없이 놀래서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되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구나.”(7,37)라고 말합니다. 이 치유의 이야기는 그러기에 단지 한 사람의 귀먹고 말을 더듬는 이를 치유한 이야기가 아닌,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고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향한 치유의 몸짓이며, 영적으로 듣지 못하고 말 못하는 사람들을 향한 간절한 소망이 담긴 예수님의 명령이자 외침입니다. 에페타, 열려라! 이는 곧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향해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야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그토록 간절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에파타는 비단 오늘 복음이 선포되는 장소와 시간에 국한되는 말씀이 아니며, 이 말씀은 복음이 전파되는 세상의 모든 곳과 세상 끝날 때까지 영원히 지속될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금도 세례성사에서 ‘열려라 에파타’ 예식 때, “주님, 귀와 입을 열어 주시어, 뽑힌 이들이 귀로 들은 신앙을 입으로 고백하며,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 하고 사제는 기도합니다. 이 예식의 기도문은 오늘 복음 말씀에 기초를 둔 것입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사람들의 막혔던 귀가 열리어 복음 말씀을 듣고, 닫혔던 입이 열리어 하느님을 찬양하게 해주십사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역시도 단지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만 할 것이 아니라 들은 말씀을 입으로 고백하고 삶을 통해 전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다짐합시다.
“주님, 저희 마음을 열어 주시어, 당신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시고, 그 말씀을 입으로 전하게 하시며, 삶을 통해 선포하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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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이제까지 했던 선택 중에 가장 잘한 것을 제게 꼽으라고 한다면, 자신 있게 사제가 된 것을 말합니다. 사제 서품을 받기 전, 신학생 때 다른 길을 가고 싶다는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꽤 시간이 지나 중년의 나이에 들어서는 이 사제의 길이야말로 가장 커다란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돈, 명예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학창 시절 때의 친구들을 만나면, 세상일이 너무 힘들다고 합니다. 힘들다면서도 이 세상을 벗어나지 못하니 계속해서 힘들다는 말만 하고 있습니다.
맹자는 자신의 책 ‘맹자’에서 군자삼락, 즉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을 말합니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천하의 왕 노릇은 포함되지 않는다. 부모 형제가 모두 살아 계시고 무탈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고,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고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다. 그리고 천하의 영재를 얻어 이들을 교육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 천하의 왕 노릇은 그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
저는 이 군자삼락을 거의 가진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부모님 모두 돌아가셨지만, 우리 신앙 안에서는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신 것이니 주님 안에서 무탈하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 안에 살지만, 세상 것을 추구하지 않아 그래도 100%는 아니지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미사 강론과 강의를 통해 교육하고 있으니 이 역시 큰 즐거움입니다. 계속해서 이 군자삼락에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진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세상의 성공과 권세를 쥐는 것이 즐거움이 아닙니다. 하루하루 충실한 삶 안에서만 진짜 행복이 나오게 됩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행복도 세상의 성공과 권세에 있지 않았습니다. 주님과 어떤 사람이 함께했었는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당시에 힘을 가지고 있었던 종교 지도자나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소외되고 힘든 삶을 살고 있었던 병자나 마귀 들린 사람이었습니다. 또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는 세리나 창녀와 같은 죄인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그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하시는 주님을 오늘 복음에서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쳐주실 때, 당신의 전지전능하심을 이용해서 말씀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시지요.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 부모가 어린아이에게 보이는 사랑처럼 하십니다. 그만큼 사랑한다는 것을 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가 느끼도록 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에파타!”, 곧 “열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단순히 치유를 위한 말씀이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마음을 열고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있나요? 진정한 행복의 길을 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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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에파타! 열려라!>
마르코 7,31-37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에파타! 열려라!>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에파타!” 곧 “열려라!”하고 말씀하셨다.(마르 7,32-34 참조)
사람들 사이에
사람 있으니
사람들에게
들을 수 있거늘
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어찌 들을 수 있으랴
말하지 않는
사람들 밖으로
들을 수 없는
사람을 데리고 가시어
몸소 말씀하시는 분께서
말씀하시네
에파타! 열려라!
내가
늘 말하니
귀먹은 그대의
닫힌 귀야
에파타! 열려라!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사람들의
다문 입들아
에파타! 열려라!
사람들 사이에
사람 있으니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거늘
듣지 않는 사람들에게
어찌 말할 수 있으랴
듣지 않는
사람들 밖으로
말할 수 없는
사람을 데리고 가시어
몸소 들으시는 분께서
말씀하시네
에파타! 열려라!
내가
늘 들으니
말 더듬는 그대의
다문 입아
에파타! 열려라!
사람이
말할 수 있도록
사람들의
막은 귀들아
에파타! 열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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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야 한다>
귀가 있어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그는 귀먹은 사람입니다. 입이 있어도 하느님에 관해 말할 수 없다면 그는 말 못 하는 이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복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의 현존을 깨닫기도 전에 나를 사랑하시고 먼저 생각하고 찾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말씀을 믿고 말씀대로 행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로마 10.17)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에파타!” 곧 “열려라!” 하시며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쳐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능력으로 귀를 열어 주시고 말할 수 있게 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사회적으로는 공부도 많이 하고 지위도 있으며 세상 것에 해박하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에는 둔한 사람들이 있다면 들을 귀가 없는 그는 귀먹은 사람이요, 입이 있어도 주님을 전하는 일에 사용하지 못한다면 말 못 하는 이입니다. 그런 우리의 귀와 입을 열어 주시길 청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엘리사벳 자매는 청각장애인입니다. 그분의 취미는 음악 감상입니다. 놀라시겠지만 ‘음악은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분은 육체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주님의 말씀을 듣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지금도 서예를 가르치고 수필을 쓰며 장애인을 위한 활동을 열심히 하시고 말씀도 얼마나 이쁘게 잘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는 육체적인 귀는 닫혔지만, 영적인 귀와 입이 열려 있으십니다. 내면의 귀가 열리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더 큰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환자를 따로 데리고 나가서 손가락을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우리도 한적한 곳에서 주님과 따로 만날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말씀으로 끝날 수 있음에도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자신을 가두어 놓은 주위 환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손가락을 귀에 넣고 침을 발라 혀에 대는 행동으로 당신의 관심과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셨듯이 우리도 구체적인 행동을 통하여 이웃사랑을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꼭 안아주는 포옹으로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그의 손길에 담았습니다. 말보다 사랑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침을 발라 혀에 대는 것은 비위생적이고 단정치 못한 행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고 늘 혼자 외롭게 지냈던 그에게는 큰 사랑의 표현입니다. 엄마가 자식에게 먹을 것을 꼭꼭 씹어서 주는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셨다고 하였는데 하늘을 우러러 본다는 것은 곧 하느님 아버지의 능력을 바라보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길 소망하였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물고기 2마리와 빵 5개로 5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루카 9,16)을 베풀 때도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어떤 처지나 환경 안에서도 하늘을 우러러 보며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은 하늘 아버지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콜로3,2)
성경은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을 찾으면 만나 뵐 것이다.”(신명 4,29)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귀를 열어 주시고 말을 할 수 있게 해 주시는 주님을 뵙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이 말씀에 열리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위로와 구원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너 한껏 네 입을 벌려 보라, 나는 곧 그 입을 채워 주리라.”(시편 80,11)
사람들이 우리의 변화된 삶을 보고,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하고 놀라워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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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들어라!>
-“에파타(열려라)!”-
"주님, 당신 구원, 그 기쁨을 도로 주시고, 정성된 마음을 도로 굳혀 주소서."(시편51,14)
아침성무일도시 마음에 와닿은 시편입니다. 또 본기도 앞부분, "말씀의 빛으로 무지의 어둠을 없애시는 하느님"이란 말마디가 마음을 상쾌하게 합니다.
어제 저녁미사때 강론 원고에 없던 내용의 인용이 새로웠고 잊지 못합니다. 아주 예전 30년전쯤 어느 자매로부터 무심코 들었던 말인데 지금도 생생한 다음 탄식성 말마디입니다. 아마도 자녀로부터 많은 상처와 실망을 받은 분이었을 것입니다.
“음식이 맛이 가면 버리기라도 하는데 자식은 맛이가면 버릴수도 없고...”
하느님의 솔로몬에 대한 탄식도 이와 흡사하리란 생각이 듭니다. ‘맛이갔다!’ 음식뿐 아니라 사람도 변질되면 맛이 갈 수 있습니다. 정말 맛있는 음식도 맛이가면 버리는데 사람은 버릴 수 없으니 참 문제입니다. 밭농사는 일년인데 사람농사는 평생이요,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니 어렸을때부터의 사람 교육이, 훈육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어렸을 때만이 아니라 평생 배움의 여정에 충실하는 평생 공부가 또 얼마나 중요한지, 참으로 마음의 귀를 기울여 듣는 경청의 회개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또 교육을 보면 미래가 보인다는데 오늘날의 학교 교육을 보면 미래가 심히 우려됩니다.
정말 말그대로 죽음에 임박했던 노년의 솔로몬은 완전히 맛이 갔으니 죄의 결과는 이처럼 무서운 것입니다. 새삼 회개하는 마음으로 마음의 귀를 기울여 들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매일미사은총이 사람의 맛이 가지 않게 하는데 얼마나 큰 기여를 하는지 감사하게 됩니다.
말그대로 회개 은총의 효소가 부패인생을 발효인생으로 만들어 줍니다. 다윗의 발효인생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그의 아들 솔로몬의 부패인생입니다. 어제 저녁식사때 식당독서중 2월8일자 성규의 말씀이 귀에 쏙 들어왔습니다. 요즘 식당독서중 규칙서는 가장 긴장에 속하는 “제7장 겸손에 대하여”중 어제는 열한째 단계에 속하는 말씀입니다.
“겸손의 열한째 단계는, 수도승이 말할 때 온화하고 웃음이 없으며 겸손하고 정중하며 간결한 말과 이치에 맞는 말을 하고, 목소리에 있어서는 큰소리를 지르지 않는 것이다. 책에서는 ‘지혜로운 사람은 적은 말로써 드러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500여년전 규칙서인데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도 그대로 공감되니 참 놀랍고, 역시 고전중의 고전인 베네딕도 규칙서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겸손의 덕을 지닌 사람은 참으로 잘 듣는 사람일 것입니다. 문득 ‘온화(溫和)하고’, 즉 ‘따뜻하고 부드럽고’라는 한자 뜻을 대하니 얼마전 성지순례 내용을 담은 수필집을 낸 분의 이름, ‘온화(溫花)’가 생각납니다.
‘따뜻한 꽃’이란 꽃’화(꽃)’자로 원래 한문에는 없는 단어일 것입니다. 참으로 잘 듣는 경청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것입니다. 베네딕도 규칙 맨 첫마디도 “들어라!”로 시작됩니다.
“들어라! 오 아들아, 네 마음의 귀를 기울여 스승의 계명을 경청하고 어진 아버지의 권고를 기꺼이 받아들여 그것을 실행하여라.”(머리1절)
지난 2월3일자 제1독서 열왕기 상권에서 지혜를 청하던 솔로몬의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열왕상3,9)” 말도 생각납니다. 듣는 마음, 듣는 귀를 지녔던 솔로몬이 완전히 변질되어 맛이 가, 마음의 귀가 닫힌 완고한 사람이 되었으니 바로 마음이 하느님을 떠난 죄의 결과입니다.
죄의 결과 다윗 때는 하나였던 이스라엘은 솔로몬 사후 산산히 분열된 나라가 되었으니 바로 오늘 제1독서의 내용입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한 화답송 시편81장의 선정이 참 적절하고 후렴도 잘 어울립니다.
“나는 주님, 너의 하느님이니 너는 내 말을 들어라.”
여기서도 강조되는 말마디가 ‘들어라’입니다. 평생 배움의 여정중에 잘 들으며 공부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공부를 강조한 다산 정약용의 어록중 오늘 2월9일자 말씀이 이채로웠습니다.
“그 어떤 공부도 예술이 함께하면 즐겁다. 지식이 놓친 마음을 예술은 따뜻하게 데워준다. 가르침의 목적과 의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학문을 즐기지 못한다. 그러나 아직 학문을 즐기지 못한 이들에게는 노래와 춤부터 가르쳐야 한다."
그리하여 옛 선비들은 모이면 시(詩)를 짓고 거문고를 타며 노래와 춤을 가무(歌舞)를 즐겼던가 봅니다. 이런 경지의 전인적 공부라면 정말 멋질 것이며, 새삼 끊임없이 시편을 노래하는 우리의 성무일도가 전인적 공부에 얼마나 큰 기여를 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세상에 이렇게 매일 시편을 노래하는 사람들이, 또 성가를 노래하는 미사와 같은 전례가 어느 종교에 있겠는지요.
오늘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치시는 복음도 참 은혜롭습니다. 육신의 귀가 아무리 밝고 좋아도 죄로 인해 마음이 편견이나 선입견으로 굳어져 있으면 즉 마음의 귀가 닫혀 있으면 있는 그대로 듣지 못합니다.
마음의 귀가 열려 있어야 제대로 듣습니다. 입이 열려 있다고 말 잘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중 마음의 귀로 잘 듣는 이가 진짜 생명을 주는 유우머나 청담, 덕담의 참말을 합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복음의 귀먹고 말더듬는 이가 상징하는바 바로 우리들입니다. 죄로 인해 마음의 귀가 먹고 제대로 참말을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다음 예수님의 정성을 다해 귀먹고 말더듬는 이를 치유하는 과정이 그대로 우리를 향한 미사은총처럼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신 뒤 하늘을 우러러 한 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에파타! 열려라!”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 말을 제대로 하게 되니 얼마나 통쾌한지,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죄로 인해 마음의 귀가 먹은 이들은 회개와 더불어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제대로 말하게 하시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기적을 목격하고 마침내 복음 선포자가 된 군중들의 고백은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의 고백이 됩니다.
“주님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제가 참 좋아하는 예수님의 아람어 둘입니다. 하나는 “탈리타 꿈(소녀야 일어나라!)”이고 하나는 오늘의 “에파타!(열려라!)”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탈리타 꿈!” 일어나, 주님과 함께 “에파타!” 활짝 열린, 축제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그런데도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고해인생이 아닌 축제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좋으시다, 영원하신 그 사랑, 당신의 진실하심, 세세에 미치리라."(시편 100,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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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특별한 사랑이 필요합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늘 주님께서는 그 유명한 에파타 기적을 행하십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 ‘에파타’를 우리가 세례 때도 재현합니다.
세례로 이제부터는 주님의 말씀을 잘 듣는 귀가 열리고,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입이 열리라는 뜻이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의 행위가 다른 때와 같지 않습니다. 다른 때는 주님의 행위가 이렇게 은밀하지 않은데 오늘은 주님께서 귀와 입에 장애가 있는 사람을 따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그리고 다른 때는 그저 말씀 한마디로 치유해주시는데 오늘은 여러 행위와 직접 손을 대시며 치유해주십니다. 어떻게 보면 과장된 제스츄어의 연출 같기도 합니다.
왜 이렇게 하신 걸까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신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더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특별한 사랑을 하신 것이고, 그에게 필요한 사랑을 하신 것입니다.
어쩌면 그는 쉽게 열리는 사람이 아니었나 봅니다.
꼭 이렇게 해야만 열리는 사람이었을 수 있습니다.
마음의 문이 굳게 닫힌 사람. 귀와 입만 닫힌 사람이 아니라그로 인해 마음의 문까지 굳게 닫힌 사람일 것입니다.
사실 귀와 입의 장애는 능력의 주님께서 말씀 한마디로
고치실 수 있고 그런 예는 성경에 수도 없이 많지 않습니까?
창세기에서는 말씀 한마디로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백인대장은 한 말씀만 하시면 종이 나을 거라는 믿음을 고백하고,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의 종을 찾아가지 않으시고 한 말씀으로 치유하셨잖습니까?
그러나 오랜 장애로 그의 마음은 정말 굳게 닫혀있었고, 그래서 이 마음의 장애는 능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치유하셔야 했을 겁니다.
내가 너를 정말로 사랑한다. 너만 미워한 것이 아니다. 너만 미워해서 너의 귀와 입을 닫히게 한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너만 고통을 많이 당했다고 생각하니 지금 이렇게 너만 특별히 사랑할게.
이런 주님의 특별한 사랑과 말을 행위에 담아 그에게 말씀하셨을 것이고, 이런 특별한 사랑이 그의 마음에 닿아 귀와 눈과 함께 마음도 열렸을 겁니다.
그런데 이런 특별한 사랑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까?
이런 특별한 사랑이 아직도 우리에게 필요합니까?
아직도 필요하다면 우리의 마음이 아직도 완고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직도 그렇다면 곧 사순 시기가 다가오는데 마음이 아직 사순 시기인 우리는 이런 말씀을 자주 듣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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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들음의 기적!>
오늘 복음(마르 7,31-37)은 '예수님께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에게 "'예파타!' 곧 '열려라!'"(마르7,34)하고 말씀하시자,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1열왕 11,29-32;12,19)를 읽고 묵상하면서 문뜩 떠오르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이 있었는데,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에 관한 말씀(로마10,5-21)'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
그리스도의 말씀은 언제나 선포되고 있습니다. 사제의 복음 선포와 강론을 통해서, 그리고 다양한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선포되고 있습니다.
매일 다양한 형태로 선포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나는 얼마나 잘 듣고 있는가? 얼마나 잘 들으려고 노력하는가? 혹시 그리스도의 말씀이 선포되는 미사 때 집중하지 않거나, 졸거나, 주보를 보거나, 매일미사책을 보거나 하지는 않는지?
구원은 들음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말씀을 잘 들으려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언제나 지금 선포되고, 지금 들려오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하고, 잘 들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들어 깨닫게 된 그리스도의 말씀을 잘 선포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오로의 외침입니다.
들음의 지혜를 청했고, 이 은총의 힘으로 예루살렘 성전도 짓고 엄청난 영화를 누렸던 솔로몬, 스바의 여왕이 감탄한 솔로몬의 영화도 그가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거부했기 때문에, 주님의 분노를 가져왔고, 결국에는 다윗왕이 이룩한 통일 왕국이 다시 남과 북으로 갈라지는 이스라엘 왕국의 분열을 가져왔습니다.
들음과 선포의 은총을 청합시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설명절 연휴 잘 보내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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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g4Pq0r30e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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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열려라!"(마르 7, 34)
설 연휴가
시작되었습니다.
상처를 치유하고
새 힘을
솟게 하시는
주님의 열린
날이며 열린
말씀입니다.
열린 말씀은
가슴을 나누는
열린 대화로
이어집니다.
주님과 함께
열리면
삶의 모든 순간은
사랑스럽지
않은 순간이
없습니다.
열리는 만큼
우리들의
인격적인 관계는
복음처럼
깊어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막혀있는 부분을
열어주십니다.
주님께
열리는 것이
주님께
내어주는
것입니다.
열려서
나누는
우리들의
의견과 주장을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귀기울여
들어주십니다.
소통과
교감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자신이
열려야 합니다.
열린다는 것은
상대방의
비판과 반대를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열리는 길이
건강하게
화합하는
관계의
첫시작입니다.
판단과 평가를
잠시 내려놓고
우리가 먼저
듣는 것입니다.
열려야
들을 수 있고
열려야
보듬을 수
있습니다.
소통과 공감을
가로막고 있는
크나큰 장벽의
장본인은
좀체 열리지 않는
우리자신입니다.
열리는 것이
진정한
감사이며
기쁨이며
기도입니다.
새로워지는 것은
열리는 것입니다.
새롭게
기쁘게
활짝 열리는
기도의 날
은총의 날
되십시오.
열리면
알게되는
삶의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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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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