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어놓은 페이지 /안희연
목동은 양의 목을 내려친다 양들이 휘청거리다 쓰러진다
너는 새하얀 것을 믿니 여기 새하얀 것들이 쌓여 있어
목동은 양의 발목을 잡아끈다 돌을 쌓듯 양을 쌓아
새빨간 성벽을 만든다
밤 그리고 밤
목동은 미동도 않고 서 있다
그 고요가 숲의 온 나무를 흔들 때
여름의 마지막 책장은 넘어가고
다시 밤은
부리가 긴 새들을 키운다
두 눈을 찌르러 올 것이다
얼마나 멀리 온 발일까
벽에 걸린 그림자를 떼어내도
벽에는 그림자가 걸려 있고
얼마나 오래 버려진 책일까
첫 장을 펼치기도 전에
모래 알갱이가 되어 바스러지는
목동은 구름처럼
양들이 평화롭게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가볍고 포근한
심장을 찌르러 오는 빛
목동은 부신 눈을 비비며 서 있다
언덕 너머에 진짜 언덕이 있다고 믿는다
-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창비, 2018
챗GPT 분석
1. 제목의 의미: 「접어놓은 페이지」
**"접어놓은 페이지"**는 책을 읽는 도중 특정 페이지를 접어두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는 어떤 행위나 사고가 중단된 상태, 미완성된 상태를 상징합니다. 베케트의 관점에서 이는 진행 중인 여정, 끝나지 않은 시도와 실패를 나타냅니다. 접힌 페이지는 과거를 암시하며, 읽히지 않은 다음 페이지는 미래를 예견하지만, 그 미래 역시 모래처럼 바스러질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결국 제목은 무한히 지속되는 실패와 중단의 순환을 담고 있습니다.
2. 주제: 베케트와의 연관성
이 시의 주제는 부조리한 세계에서 존재와 부재를 탐구하며, 무의미한 반복 속에서도 계속해서 나아가야 하는 인간의 조건입니다. 이는 베케트의 주제 의식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베케트는 무의미와 공허 속에서 언어와 존재의 한계를 탐구하며, "도리 없지만 계속"의 철학을 통해 소진을 통한 창조적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이 시에서도 목동은 반복적으로 양을 쌓고, 구름처럼 날아가는 양을 보며 언덕 너머의 진짜 언덕을 믿지만, 이는 희망적이라기보다 허망한 반복에 가깝습니다. 양, 책, 그림자 등은 모두 베케트가 작품에서 탐구한 부재와 존재의 이중적 관계를 상징합니다.
베케트는 1953년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에서 자신은 이미 언어의 표현 불가능에 다다랐음을 고백했다. 하지만 좌절하고만 있지는 않겠다고 말하면서 “너는 계속 해야만 해. 나는 계속 할 수 없어. 나는 계속 할 거야"
<베케트'의 시 '최악을 향하여' 중>
빈칸은 단어가 사라졌을 때를 위해 있다. 도리 없지만 계속할 때를 위해. 그땐 모든 게 그 자체로 보일 것이다. 밝아진다. 단어가 어스름하게 한 모든 게 밝아진다. 말해지지 않고 보여진다. (...) 밝게 보이는 것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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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쁜 빈칸들을 위해 흘러 돌아가자. 도리가 없지만 계속할 때 그것들이 있을 거다. 모두 사라지면 말하지 않는다. 모두 사라지진 않았다. 도리 없지만 계속할 뿐. 모두 사라지진 않았고 도리없지만 계속. 어떻게든 계속하는 지금과 같이 모두 있다. 어스름한 불빛. 공허. 그림자들. 단지 단어만 사라졌다. ‘Ooze’(‘흐르다’라는 단어)가 사라졌다.
3. 상징 분석
목동
목동은 베케트의 등장인물들과 유사한 무의미한 반복 속의 인간을 상징합니다. 그는 양을 쌓아 성벽을 만들고, 언덕 너머의 진짜 언덕을 믿지만, 그의 행위는 결코 결말에 도달하지 않습니다. 이는 존재의 목적 없는 지속과 인간의 조건을 암시합니다.
양
양은 희생과 순수성을 상징하며, 동시에 부조리한 세계에서 대상화된 존재입니다. 양들이 쓰러지고 쌓이는 과정은 삶과 죽음, 창조와 소멸의 순환을 드러냅니다.
"구름처럼 평화롭게 날아가는 양"은 희망적이지만, 이는 결국 환영이며 심장을 찌르는 빛으로 귀결됩니다.
성벽
"새빨간 성벽"은 폭력과 희생의 결과로 만들어진 허망한 성과를 상징합니다. 이는 베케트의 작품에서 종종 등장하는 무의미한 구조물(탑, 성)과 연결됩니다.
그림자
그림자는 부재와 흔적을 상징합니다. 떼어내도 여전히 존재하는 그림자는 인간의 과거와 실패가 사라지지 않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베케트의 "지울 수 없는 흔적"이라는 주제와 유사합니다.
부리가 긴 새
부리가 긴 새의 두 눈을 찌르려는 행위는 인간의 인식과 이해를 부정하는 시도를 나타냅니다. 이는 베케트의 작품에서 자주 나타나는 감각의 무력화와 연결됩니다.
책
책은 기록과 기억을 상징하며, 첫 장을 펼치기도 전에 바스러지는 책은 역사의 무의미함과 인간 지식의 유한성을 드러냅니다. 이는 베케트가 언어와 텍스트의 한계를 탐구한 방식과 일치합니다.
빛
"심장을 찌르러 오는 빛"은 희망과 동시에 파괴적인 깨달음을 상징합니다. 이는 베케트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구원의 불가능성과 절망적 자각을 떠올리게 합니다.
언덕
언덕은 도달할 수 없는 이상, 혹은 희망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이는 베케트의 "고도"처럼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환상일 뿐입니다.
4. 문장별 분석
1. 목동은 양의 목을 내려친다 양들이 휘청거리다 쓰러진다
목동의 행위는 이는 기존 관념에 물든 의미, 언어의 무화를 시도하는 것입니다.
2. 너는 새하얀 것을 믿니 여기 새하얀 것들이 쌓여 있어
"새하얀 것"은 순수와 희망을 상징하지만, 이는 곧 "새빨간 성벽"으로 변질됩니다. 이는 베케트가 탐구한 희망과 환영의 모순을 암시합니다. 기존 관념에 물들지 않은 베케트의 공백, 공허를 상징합니다.
3. 목동은 양의 발목을 잡아끈다 돌을 쌓듯 양을 쌓아 새빨간 성벽을 만든다
양을 쌓아 성벽을 만든다는 이미지는 희생과 폭력으로 이루어진 허망한 성과를 나타냅니다. 기존 관념을 차곡차곡 쌓는다는 의미
4. 밤 그리고 밤 목동은 미동도 않고 서 있다
밤의 반복은 시간의 무의미함을 상징하며, 목동의 정지된 모습은 존재의 무력함을 나타냅니다.
의미의 최소화를 위한 행위입니다.
"베케트의 작품에서 주안공들을 아주 어스름한 불빛만 비추고 있는 황량한 공간에 몰아넣는다. 그리고 더 나쁘게, 더 작아지고, 더 텅 비게 만들기 위해 고심한다. "
5. 그 고요가 숲의 온 나무를 흔들 때 여름의 마지막 책장은 넘어가고
고요 속에서도 세계는 흔들리며, 이는 베케트의 세계관에서 변화와 정지의 공존을 상징합니다.
최소화(고요) 노력 끝에 의미화의 최대화인 여름을 넘긴다는 의미입니다.
"베케트-가장 미미한 최소한의 상태에 도달해 단어들이 사라지게 되면, 모든 것들이 그 자체의 모습 그대로 보이게 될 것"
6. 다시 밤은 부리가 긴 새들을 키운다 두 눈을 찌르러 올 것이다
새들은 인간의 인식을 부정하는 존재로, 베케트의 감각의 무력화를 연상시킵니다.
아직도 정화할 것이 남아 있어 부리가 긴 새들이 두 눈을 찌르러 올 것입니다.
7. 얼마나 멀리 온 발일까 벽에 걸린 그림자를 떼어내도 벽에는 그림자가 걸려 있고
걸어온 여정은 의미를 찾기 힘들며, 그림자는 인간 존재의 흔적과 부재를 상징합니다.
베케트 식으로 계속 실패할 수 밖에 없고 걸어갈 수 밖에 없습니다.
8. 얼마나 오래 버려진 책일까 첫 장을 펼치기도 전에 모래 알갱이가 되어 바스러지는
이는 베케트가 언어와 기록의 유한성을 탐구한 방식과 일치합니다.
9. 목동은 구름처럼 양들이 평화롭게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가볍고 포근한
희망적인 환영이지만, 이는 곧 "심장을 찌르러 오는 빛"으로 전환됩니다. 베케트의 작품에서 자주 나타나는 희망과 절망의 공존을 상기시킵니다.
10. 심장을 찌르러 오는 빛
깨달음의 순간이지만, 이는 파괴적이고 고통스럽습니다. 베케트의 "최악을 향하여"의 철학적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11. 목동은 부신 눈을 비비며 서 있다 언덕 너머에 진짜 언덕이 있다고 믿는다
끝내 희망을 포기하지 않지만, 그 희망은 베케트식으로 환영에 불과합니다.
결론
안희연의 「접어놓은 페이지」는 베케트의 **"최악을 향하여"**라는 철학과 상통하는 시로, 존재와 부재, 희망과 절망의 아이러니를 탐구합니다. 목동의 반복적 행위와 무의미 속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은 베케트가 말한 **"도리 없지만 계속"**의 의지를 상징하며, 인간 존재의 한계와 가능성을 드러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