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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9일(주)
* 시작 기도
(창 42:16-17) 너희 중 하나를 보내어 너희 아우를 데려오게 하고 너희는 갇히어 있으라. 내가 너희의 말을 시험하여 너희 중에 진실이 있는지 보리라. 바로의 생명으로ㅗ 맹세하노니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는 과연 정탐꾼이니라 하고 그들을 다 함께 3일을 가두었더라.
주님...
양식을 사러 애굽에 온 형들은 요셉에 의하여 감옥에 3일 동안 갇혔습니다.
이는 단순한 갇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3일의 무덤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3일 동안 무덤과 같은 감옥에 갇혔을 때 그들은 자기들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칩니다(21절).
예수님의 무덤은 새 생명인 부활로 나아가는 과정인 것처럼 이들 역시 무덤과 같은 감옥의 3일이 그러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들끼리 나누는 대화를 요셉이 듣고 형들이 변화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모두 감옥에 가두고 한 명만 베냐민을 데리러 보내겠다고 했던 말을 바꾸어 시므온 한 사람만 볼모로 잡고 나머지 모든 형들을 아버지께로 보냅니다.
나야 말로 십자가와 무덤에 죽고 장사되어야 할 자입니다.
이런 나를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나는 죽고 주님과 연합하여 주님의 무덤에 함께 장사되오니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요 11:17-35
제목 :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5리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 나의 묵상
나사로가 중병이 걸려 그의 두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는 마음이 무거운 상태에서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어 아프다고 전하였다.
예수님은 그 이야기를 들으시고 그의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또한 아들이 이로 인하여 영광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그런 이유로 예수님은 이틀을 더 머무시다가 제자들에게 유대로 올라가자고 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만류한다.
조금 전에도 그들이 우리를 돌로 치려고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자고 하시느냐면서 말이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낮과 밤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낮이 열두 시간이므로 낮에 다니는 자들은 그 빛으로 인하여 넘어지지 않지만 밤에 다니는 자들은 빛이 없으므로 인하여 넘어진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단순히 낮에 비치는 태양 빛을 말씀하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생명의 빛 되시는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사는 이들은 결단코 실족하여 넘어지지 않지만, 생명의 빛이 없이 살아가는 이들은 영생을 얻지 못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는데 내가 깨우러 간다고 하시자 제자들이 나사로가 잠들었으면 이제 낫겠네요, 라고 반응한다.
여기서 주님이 하신 그가 잠들었다는 말은 그가 육신적으로 죽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가 죽을 때 내가 거기에 있지 않은 것이 오히려 너희를 위하여 잘 된 일인 것은 너희들로 믿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시면서 그에게로 가자로 재촉하셨다.
제자들은 아직 나사로의 죽음과 다시 살아날 것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갖고 있지 않았으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의 죽음과 다시 살아날 것이 단순히 나사로의 죽음과 다시 살아남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는 장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높이 들리실 것과 또한 부활을 예표하는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또한 아들이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또한 이 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의 믿음이 더욱 견고해 질 것에 대해서 알고 계셨다.
그렇기 때문에 나사로가 죽을 당시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이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하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제 나사로에게 가자고 하실 때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하면서 따라 나섰다.
한편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사는 베다니에 거의 도착하셨다.
그 때 나사로가 죽은 지 이미 나흘이나 되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한 오 리쯤 되어서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에 나사로의 죽음을 위문하러 많은 유대인들이 와 있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중하러 나갔으나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동구 밖에서 예수님을 맞은 마르다가 원망 섞인 투로 말한다.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우리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지금이라도 주께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그 구하시는 것을 들어주실 것을 믿는다고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시자, 마르다가 이렇게 말한다.
“네 맞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내 오라버니가 살아날 줄을 내가 믿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한 번 더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요,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에 마르다가 대답하기를 “주여, 맞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시며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습니다.”라고 하였다.
마르다의 신앙고백이 참 놀랍다.
물론 지식적인 신앙고백이지만 그의 부활에 대한 고백은 놀라운 신앙이 아닐 수 없다.
이 고백 후에 조용히 들어가서 마리아에게 선생님이 너를 부르신다고 하자 마리아가 급히 일어나 예수님께 나간다.
예수님은 아직도 마르다와 이야기 하던 동구 밖에 계셨다.
마리아가 급히 나가는 것을 본 유대인들은 그녀가 곡하러 가는 줄 알고 따라 나갔다.
하지만 그가 곡하러 무덤에 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맞으러 동구 밖으로 가서 예수님을 만나 원망 섞인 말로 그의 언니와 똑같이 말하였다.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우리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가 우는 것과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마음에 비통함을 가지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말씀하셨다.
“그를 어디 두었느냐?” 그러자 마리아가 “주여, 와서 보십시오.” 하자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
사랑하는 오빠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며 고통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며 인지상정이다.
이를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언니 마르다가 예수님께 원망 투로 말을 할 때에는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마르다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우리 오빠도 살아날 줄 믿는다고 하자,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인데,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물으셨다.
그러자 마르다가 “네 주님, 내가 믿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며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는다.”고 고백하였다.
그러고 나서 좀 있다 마리아가 와서 예수님께 동일한 투로 말을 하면서 울었고,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함을 느끼면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리고선 나사로를 어디 두었느냐 물으시면서 주님께서도 눈물을 흘리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완전한 인간이시다.
그리하여 죽은 나사로를 예수님 자신이 다시 살리신 후에 이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며 또한 이것이 아들 자신에게도 영광이 될 줄을 아셨다.
마르다가 당신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 것은 이리저리 설명을 하면서 넘어가셨다.
그런데 마리아까지 예수님의 그 깊은 마음 곧 하나님의 뜻인 영생을 알지 못하고 표피적인 감정을 따라서 행동하는 모습과 거기에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다니는 유대인들의 모습이 예수님의 마음을 심히 격동시켰다.
그래서 예수님이 심령에 비통함을 여기신 것이다(33절).
여기서 심령이 비통하다는 것은 예수님의 영이 요동하고 격동하며 고통스러우셨다는 의미이다.
“그를 어디 두었느냐?”고 물으시는 것은 나사로를 어디에 두었느냐는 말로서 그가 있어야 할 곳은 거기가 아니라, 바로 내 옆이다.
이는 마치 아담이 범죄하고 난 이후에 하나님의 품을 떠나 동산 나무 뒤로 숨었을 때 하나님께서 아담을 추적해 가시면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아이예카’하고 부르신 것과 같은 의미이다.
심령이 심히 비통하신 우리 주님께서 나사로가 있을 곳은 아들의 생명을 얻은 자로서 그 무덤이 아니라 나로 내 옆, 곧 내 품에 있어야 함을 외치신 것이다.
그렇게 말씀을 하시면서 우신 것은 예수님의 안타까움과 답답함을 여실히 표현해 주고 계신다.
이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완전한 인간이심을 그대로 보여주시는 모습이다.
어쩌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때를 따라 계획된 대로 마치 로봇처럼 행하실 수도 있지만 우리 예수님은 로봇이 아니라 인간의 심성을 그대로 가지고 계심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이런 우리 주님의 모습이 오히려 위로가 된다.
그 눈물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은 눈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적으로 드러나는 눈물이 마리아를 비롯하여 많은 조문객들의 마음을 위로했을 것은 틀림없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은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이다.
이를 위하여 주님이 이 땅에 오셨고 또한 그 생명을 위해서 베다니 나사로의 집에 들르셨다.
나아가 이틀 동안 지체하시면서 나사로가 죽은 뒤에 도착하셨다.
이를 통하여 당신의 하나님 되심과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기 원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을 본 유대인들이 단지 나사로를 얼마나 사랑했으면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는가 보라고 하지를 않나, 또 어떤 이는 소경의 눈은 뜨게 했으면서 병든 나사로는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느냐고 비아냥거리기도 하였다.
바로 유대인들의 깨닫지 못하는 이런 모습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심령에 비통함을 느끼면서 우셨는데 말이다.
나는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의 마음을 너무도 알지 못하는 자였다.
그런 나의 답답한 모습이 예수님의 눈에서 눈물을 자아내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나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심을 알고 믿었다.
그런데 그 믿음이 나를 잘 되게 하는 도깨비방망이로 알았으며 또한 그 눈물이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는 그 정도의 눈물로만 이해하면서 나도 위로받곤 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를 원하셨다.
비록 두 발은 이 땅을 딛고 살아갈지라도 날마다 하나님 나라를 사는 영생의 현존자가 되기를 원하셨고 지금도 동일하시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9장에서 멸망을 앞둔 예루살렘 성을 보시면서도 우셨다는 기사가 나온다.
(눅 19:41-44)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심판)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그토록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면서 예수님 자신을 믿으면 영생을 얻으리라고 외쳤건만 그들은 귀를 바윗돌로 막은 것처럼 듣지 않았다.
그러고서도 지금 예수님이 마치 자기들의 육신의 왕으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예수님을 환영하는 인파로 몰려 있는 것이다.
그들은 지금 축제와 같은 분위기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성을 보시면서 우신다.
그것은 이 성의 앞날이 어떻게 되실 것을 아시기에 그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 아주 격정적으로 우시는 것이다.
이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멸망하여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있을 것이 운명임을 알기에 그토록 격정적으로 소리내서 우셨던 것이다.
지금 이들의 모습이 나의 모습과 똑같지 않은가?
그저 부끄럽고 창피해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이런 나를 심판하신 주님의 그 인자와 사랑은 너무나 깊고도 깊으시다.
예루살렘 성이 당하는 고통도 깊지만 주님의 인자와 신실하심은 그보다 더 깊기에 능히 그 고통을 포용하시며 감싸 안으신다.
이 예루살렘의 고통이 바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심판이며 그 심판과 함께 그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인자와 신실하심으로 나를 감싸 안으신 것이다.
나의 고통 역시 깊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인자와 신실은 그보다 더 깊다.
그래서 아무리 나의 고통이 크다 할지라도 나는 창세전부터 변함없이 신실하신 우리 주님의 그 크신 사랑을 힘입어 아버지 품으로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이다.
이제는 우리 주님의 눈에서 흘리는 그 눈물을 닦아드리는 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아무 것도 모르고 천지를 분간하지 못할 때는 나 좋은 대로 해석하고 나 좋은 대로 행동했던 나였다.
이제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오늘 하루도 영생의 현존자로서 주님의 기쁨이 되어, 아픔과 탄식의 눈물을 흘리시던 우리 주님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드리고 기쁨으로 환하게 웃으시는 우리 주님의 얼굴 보기를 소망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영광의 주님이 안타까움과 탄식이 섞인 눈물을 흘리셨나이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저 인간적인 위로를 받았다고 좋아하던 자였나이다.
나를 심판하시고 그 심판으로 인하여 당하신 그 고통을 우리 주님께서 지시는데 나는 천지를 모르고 나 좋은 대로 행동했던 것을 재와 티끌 가운데서 회개하오니 이 죄인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제 주님의 눈에서 그 눈물을 닦아 드리고 영생의 현존자로서 주님의 기쁨이 되어 우리 주님의 얼굴이 환하게 웃으실 수 있도록 나를 받으소서.
무지몽매했던 이 종이지만 오늘도 주님의 뜻을 따라 살기 원합니다.
내 생각과 내 뜻은 온전히 거두어주시고 오직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한 걸음씩 나아가는 믿음의 종이 되게 하소서.
예루살렘의 마지막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셨던 우리 주님의 그 눈물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하여 이 땅에 사는 우리들이 죄를 깨달아 회개하고 날 위하여 대신 심판받으신 우리 주님의 메시야적 구속행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 이 마지막 기회를 살 수 있도록 믿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육신의 질고는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인자와 신실하심의 표현임을 알아 더 가까이 주님께 나아가는 믿음의 자녀들로 삼아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