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10일(월)
* 시작 기도
(창 43:1)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
주님...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에서 돌아와서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애굽의 총리가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야곱은 더 깊은 근심에 빠집니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는데 막내인 베냐민도 빼앗아 가고자 한다면서 이 모든 것이 다 자신을 해롭게 하려는 것이라고 한탄을 합니다.
이렇게 베냐민을 어떻게 할지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 가운데 가져온 식량은 다 떨어져 갑니다.
그런 와중에 1절에서는 그 땅에 기근이 더 심해짐을 기록합니다.
이것은 그의 우유부단함이 주변의 상황을 더 힘들게 할 뿐임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입애굽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따라서 요셉만 아니라 모든 형제와 아버지 야곱을 비롯한 온 가족이 입애굽을 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애굽을 비롯한 팔레스틴 지역에 기근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를 알지 못하는 야곱은 그저 자신을 해롭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푸념을 할 뿐입니다.
주님의 언약을 알지 못하면 이렇게 자기연민에 빠져 푸념을 일삼는 것이 야곱이요 또한 나임을 고백합니다.
이러한 자기연민에서 헤어 나와 주님의 뜻을 아는 자로 서게 하옵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우소서.
주일 이후 한 주간을 새로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입니다.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사오니 나는 죽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한국의 날씨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이곳 하이퐁도 많이 쌀쌀해서 몸이 움츠러듭니다.
그래도 주님의 사랑의 온기로 온 대지를 입혀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요 11:36-44
제목 : 나사로야 나오라.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 나의 묵상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으신 후에 이틀을 계신 곳에 더 머물다가 나사로의 집이 있는 베다니로 가셨다.
동구 밖에서 마르다와 마리아를 차례로 만나고 그들의 원망 섞인 투의 말을 들으셨다.
마리아의 울음과 함께 조문객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이 격동하셨으나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받아주신다.
나사로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아버지의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며 이를 통하여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라고 그렇게 말을 하였으나 마르다는 지식적인 부활 고백에 그치고 마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우셨던 것이다.
이런 그들의 믿음 없음을 보시고 안타까우신 주님 역시 눈물을 흘리셨다.
또한 유대인들의 비아냥거리는 말에 한 번 더 마음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면서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셨다.
굴로 된 무덤의 입구가 돌로 막혀 있어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시자 마르다가 자신의 오라버니는 죽은 지가 나흘이나 지나서 이미 부패하여 냄새가 난다고 반응하였다.
그 때 예수님께서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고 하시자 사람들이 돌을 옮겼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아버지께 기도를 드린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합니다. 또한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도 압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은 주위에 있는 무리들을 위함인데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하여금 믿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기도하시고 무덤을 향하여 큰 소리로 외치신다.
“나사로야 나오라.”
이에 죽었던 나사로가 온 몸을 베로 동인 채 나오는데 얼굴은 수건으로 싸였다.
예수님께서 그를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7개의 표적 가운데 이렇게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표적을 마지막으로 표적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표적이란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타내고자 하시는 일을 보이는 것이다.
(요 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나사로의 죽음 역시 그의 죽음과 다시 살리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며 이를 통하여 아들이 영화롭게 되는 것이다.
(요 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이와 같이 눈에 보이는 표적은 결코 눈에 보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생 곧 하나님께서 나타내기 원하시는 일인 하늘의 일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이는 나사로의 죽음과 다시 살리심을 통하여 아들의 죽음과 부활을 예표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이기에 이것이 표적인 것이다.
우리의 오감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그치는 것은 표적이 아니라 마술에 지나지 않는다.
오병이어 역시 이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는 생명의 떡을 알지 못한다면 그 또한 썩을 양식이요 마술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실 때 마르다의 반응을 보시면서 예수님께서 얼마나 많이 마음이 무너졌을지를 생각하면 내 마음이 아프다.
마르다의 반응이 이렇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이는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그토록 네 오라비가 살아날 것이라고,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당장 살아날 것이라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다.
그러나 마르다는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적인 부활 신앙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런 마르다의 반응에 예수님께서 그에 대하여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실 때 주님의 목소리가 많이 격앙되고 떨렸을 것 같다.
도대체 나를 향한 너의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듯이 말이다.
그런데 마르다의 믿음은 단순히 그녀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나의 모습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 지식은 많이 알고 있으나 그것이 실재가 되지 않는 신앙 고백, 그것이 죽은 신앙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입은 살아 있어 설교는 할 줄 알지만 그 선포한 말씀이 진짜 살아 역사하는 주님의 말씀으로 실재가 되느냐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죽은 나사로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나는 것 곧 부활은 바리새적 신앙이다.
이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1년에 한 차례씩 맞아 부활절 감사예배를 드리는 연중행사와 전혀 다르지 않다.
나도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대부분의 부활절 설교는 부활의 첫 열매 되신 예수님을 따라 나도 그 마지막 때에 부활할 것에 대한 감사에 그치고 마는 것이 허다하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그토록 강조하시는 것은 나사로가 지금 당장 살아난다는 것이다.
그의 부활은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일어나는 사건이며 그것을 믿으라고 입이 닳도록 말씀하셨으나 마르다를 비롯한 사람들은 이를 믿지 못하였다.
그들의 지식을 뛰어넘지 못한 것이다.
물론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마지막 때에 우리의 죽은 몸이 부활하는 것은 진리이다.
그러나 그 미래적인 부활 신앙으로만 있으면 우리의 신앙이 관념과 지식적으로 치우쳐버릴 공산이 크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적 행위로서의 복음 곧 십자가 죽음과 무덤에 장사됨 그리고 부활은 우리의 삶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현재적인 실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현재적 부활을 누릴 때 미래적 부활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가지게 된다.
우리의 신앙은 결코 지식이나 관념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와 장사됨 그리고 부활이 현재적으로 실재가 될 때 그 믿음 또한 장차 이루어질 소망으로 확실하게 되는 것이다.
이 시간 나의 믿음 없음을 고백한다.
나는 그 부활이 미래적인 것으로만 알았기에 현재로 누리는 부활을 알지도 못하고 성도들에게 가르치지도 못했다.
‘나사로야 나오라.’
이 장엄한 선포는 미래가 아니라 오늘 나에게 일어나는 부활의 현재성이다.
매일 나는 죽고 또한 주님과 함께 장사되어 매일 주님과 함께 주님의 생명으로 부활하여야 한다.
우리 주님이 이런 선포를 하시는 것은 날마다 아버지와 함께하시는 교제와 사귐이 있기 때문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42절).
이것이 바로 영생의 참 의미이다.
(요 17:3)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일 2:24-25)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아들은 아버지와 늘 함께 하시고, 우리는 그 아들의 품속에 있을 때 자연스럽게 아버지 안에 거하게 된다.
(요 17: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이런 주님을 아는 영생의 의미를 내가 알지 못하였으니 가르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나 자신 또한 맨날 헤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땅의 것만 전할 수밖에 없었으며 예수 믿고도 썩어질 것을 구하는 일에 천착할 수밖에 없었다.
주님의 표적을 신기한 기적으로만 알고 내게도 그런 기적이 마술처럼 펼쳐져 보여지기를 얼마나 많이 고대했던가?
이런 믿음 없는 자에게 주님은 긍휼을 베푸셔서 복음으로 찾아오셨고 그 복음을 통하여 생명을 주셨다.
이제 이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이 오늘도 나를 영원한 그 나라로 이끈다.
그리하여 날마다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장사되어 그 주님의 생명으로 살아나는 부활이 현재가 된다.
그래서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음이 오늘 나의 고백이 되는 것이다.
주님의 신실하신 그 사랑이 오늘의 나를 살게 하기 때문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무지몽매한 나, 죽기에만 합당한 나를 어찌 참고 기다리셨는지요?
귀가 막혀도 이렇게 막힐 수 있는지.....
눈이 닫혀도 이렇게 닫힐 수 있는지.....
생각이 멈춰도 이렇게 멈출 수 있는지.....
정말 내가 생각해도 도무지 답이 없는 나인데, 그런 나를 끝까지 참고 인내하시어 결국 복음을 주시고 그 복음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해 주시니 그저 내가 할 것은 감사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주님의 기도가 나의 기도가 됩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감히 내가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것은 날마다 순간마다 주님의 품속에서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품속에서 나는 없어지고 오직 주님만 드러나오니 주님 영광 받으소서.
장엄하고 영광스런 주님의 선포, ‘나사로야 나오라.’는 이 말씀이 오늘 이 시간 나에게 하시는 선포가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주님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믿음의 종 되게 하소서.
눈에 보이는 것에 얽매이지 않게 하시고 믿음의 눈으로 주님의 표적을 보게 하시어 그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는 믿음의 사람들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