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오토바이 뒤에 앉아 땅에 질질 끌리는 다리에 온 신경을 두고 도착한 곳은 집 근처에서 제일 큰 “벤비엔 똥녓”(통일병원)이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응급실로 곧장 들어가 접수를 하고 처치를 기다렸는데, 의사가 없는지 20여분을 그냥 침대에 누워 기다려야 했죠. 기다리는 동안 부러진 팔목을 위해 부목을 대고 붕대로 묶어 주었는데, 그 판자 두 장을 둘둘 감는 베트남 간호사를 보면서 15년전 설악산 비선대 철계단을 내려오다 미끄러져 떨어진 후배 교사와의 에피소드가 생각나면서 마음이 웃음으로 가득차면서 행복해지더군요. 부러져 힘없이 떨어지듯 붙어 있는 팔을 해 들고 추억이라는 기억을 떠올리며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있었지만 병원에서는 웬일인지 별다른 조치를 해 주지 않았답니다. 그러더니 한참을 지나서 간호보조원이 와서 X-Ray를 찍으러 가자해서 다시 휠체어로 옮겨 타고 X-레이 사진을 찍고 와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역시 다시 한참을 기다려야 했죠. 그래서 같이 간 베트남 신학생에게 “이거, 뭔가 이상하지 않아?” 했더니, 그가 전하는 말이 재미있었습니다.
“신부님, 이 사람들 말로는 이 병원에서 외국인을 받은 일이 없어 지금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할 지 고민하고 있답니다.” 그래서 다시 상기했답니다.
“아! 그래. 여기가 베트남이었지.”
그래서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냐고 신학생에게 물으니 시골에서 올라온 그도 별다른 대책이 없어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전에 한국인 신자를 한 번 병문안 간 병원이 생각나 조금 멀지만 신학생에게 “벤비엔 쪼 러이로 가자”고 했죠. “쪼 러이 병원은 일본 정부가 이 병원을 현대식을 개축하면서 병원 시설의 일부를 외국인을 위한 시설로 써 달라는 조건을 붙였던 병원으로 호치민시에서도 제법 규모가 큰 병원이죠.
1시간을 그렇게 “벤비엔 똥녓”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벤비엔 쪼 러이”로 향했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택시로 가자고 해서 택시를 타고 가는데 운전기사는 자기가 잘 아는 병원이 있다며 신학생에게 그곳에 가자며 종용하고 있더군요. 신학생이 제게 어떻게 하겠냐고 묻기에 단호하게 “di Cho Ray(쪼러이로 갑시다)"라고 말했죠. 호치민시에는 최근 많은 병원이 세워졌고 특히 외국인들이 세운 병원들은 시설도 좋고 치료도 잘 한다고 들었지만 수도회의 사정상 그런 곳에 가기는 엄두를 내지 못했죠.
쪼러이 병원에 도착해서 응급실에 들어가니 아수라장이 따로 없더군요. 똥녓 병원보다 규모가 큰 응급실임에도 불구하고 응급실을 가득 채운 각종 환자들과 가족들의 어수선한 발걸음과 표정들이 내 마음까지 혼란스럽게 흔들어 놓았습니다. 이 혼란함(카오스)의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새로운 창조의 시간으로 다시 일어서겠죠. 그것이 이곳에서의 새 삶이던, 다른 곳에서의 삶이던 간에……
아마도 그 응급실에 누워 있는 사람 중에 제가 가장 경미한 상처를 입은 듯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5년 전엔가 요도 결석으로 여의도 성모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을 때와 상황이 비슷하네요. 정말 너무너무 아파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라서 응급실로 실려 들어갔는데, 응급실 침대에 눕자마자 하나도 아프지 않은 거 있죠. 휴가 나와 동생 집에 머물다 아침부터 숨도 못 쉴 정도로 아파 아픈 배를 몰아쉬며 동네 의원에서 들어가지도 않는 포도당 주사(링겔)를 맞으며 누워있다 도저히 안 되겠어 신학생을 한 명 불러 3시간여 만에 찾아간 응접실 이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 그때는 정말 창피했답니다. 의사들이 와서 어디가 아프냐고 묻는데 아픈 데가 하나도 없었으니까요. 오히려 아랫배를 강하게 누르며 아프냐고 묻는 의사에게 “아니, 그렇게 세게 누르면 누가 안 아프겠어요?” 하며 항변 아닌 항변을 했던 것처럼 쪼러이 병원 응급실에서의 저의 아픔은 감히 명함도 내밀지 못했습니다.
첫댓글 신부님 잘 도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