唐詩三百首 五言古詩
17. 서시영(西施詠)-왕유(王維)
〈서시를 노래하다〉
서시(시쓰, 西施, 생몰년 미상)는 고대 중국 4대 미녀 중 한 명으로, 본명은 시이광(스이광, 施夷光)이다. 중국에서는 서자(시쯔, 西子)라고도 한다. 기원전 5세기(춘추 시대 말기)의 사람이다. 현재의 저장 성 사오싱 주지 시 출신이다.
월왕 구천이 오왕 부차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자 월나라 구천의 참모 범려의 전략에 따라 패전의 처리에 대한 공물로 오나라 부차의 여인이 된다. 서시가 부차에게 총애를 받자 부차의 후궁 위희부인이 서시를 질투하여 서시를 비밀리에 제거하려 했던 적이 있었다. 서시에게 빠진 부차는 월나라를 끝까지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던 오자서를 죽이면서까지 월나라 경계에 소홀하게 되고, 결국 국력을 키운 월나라에 패망하게 된다.
오나라가 패망한 뒤의 서시는 월왕 구천의 후궁이 되어 총애를 받지만, 구천의 정부인인 월부인에게 비밀리에 제거당한다.
서시영(西施詠)-왕유(王維)
미색을 천하가 중히 여기니
서시가 어찌 오랫동안 미천하리오
아침에는 월나라 개울가 여인이더니
저녁에는 궁궐의 왕비가 되었네
미천한 시절엔 뭇 여인과 달랐겠는가
귀하고 나서야 드문 미녀임을 알았구나
시녀를 불러 분단장 시키고
비단 옷도 혼자 입지 않네
임금이 총애하니 교태 더해지고
임금이 아껴주니 옳고 그름이 없구나
빨래하던 때의 동무들
함께 수레타고 들어온 이 없네
이웃 여인에게 권고하노니
찡그림 흉내 낸다고 어찌 총애 바랄 수 있나
《西施詠》 王維
豔色天下重(염색천하중),西施甯久微(서시녕구미)
朝為越溪女(조위월계녀),暮作吳宮妃(모작오궁비)
賤日豈殊眾(천일개수중),貴來方悟稀(귀래방오희)
邀人傅粉粉(요인부지분),不自著羅衣(부자저나의)
君寵益嬌態(군총익교태),君憐無是非(군련무시비)
當時浣紗伴(당시완사반),莫得同車歸(막득동거귀)
持謝鄰家子(지사린가자),效顰安可希(효빈안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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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釋] 여인의 아름다움은 세상 사람들이 중시하는 것이니, 서시와 같은 미녀가 어찌 오래도록 미천할 수 있겠는가. 아침에 그녀는 월계(越溪)에서 연꽃을 따고 빨래하는 여인이었지만, 저녁이 되자 吳宮의 왕비가 되었다.
그녀가 빈천하였을 때, 뭇 여인들과 무엇이 달랐겠는가. 부귀한 때에야 비로소 그녀가 세상에서 드문 미녀임을 알았다. 궁에서는 사람들이 그녀를 위해 화장을 해주고, 비단옷을 입는 것 또한 스스로 할 필요가 없었다. 임금이 그녀를 총애하자 그녀는 더더욱 교태를 부리고, 임금이 그녀를 사랑하자 그녀는 총애를 믿고 시시비비를 분별하지 못하였다.
당시 월계에서 함께 빨래를 하던 동무들 중 그녀와 함께 수레를 타고 오나라 궁에 갈 수 있던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웃집 여인에게 권고하노니, 미모가 없다면 그녀의 미간 찡그리는 것만 배워서 어떻게 총애받기를 원할 수 있겠는가.
[解題] 이 시는 왕유의 초기작품으로, 西施의 지위 변화와 東施(동시)의 效顰을 들어 炎凉世態를 개탄하고 있다.
앞의 네 구는 서시가 출중한 미모로 인해 미천한 신분에서 하루아침에 吳王의 妃가 되었음을 말하였고, 다음 여섯 구는 총애를 얻은 후 달라진 서시의 지위를 묘사하였다. 마지막 네 구는 이 시의 주제부분인데,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을 분명히 알아야 함을 勸戒하고 있다. 만약 서시와 같은 미모가 없는 사람, 즉 東施와 같은 이가 서시를 흉내 내 미간을 찡그려 총애를 얻고자 한다면 이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가소로운 일이 된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이 시는 당대의 정치현실을 풍자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즉 당시 李林甫ㆍ楊國忠ㆍ韋堅ㆍ王鉷(이임보.양국충.위경.왕홍)의 무리들이 임금의 총애를 믿고 날뛰는 것을 비판하여 지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集評] 염량세태를 사람의 눈앞에 다 묘사하였으니 제목에 국한되지 않아야 이 뜻을 알 수 있는데, 후인의 손에 들어간 뒤에는 전고만 끌어다 댈 뿐이다.
당나라 사람의 詩意는 반드시 제목에 있는 것은 아니다. 右丞(왕유)의 〈息夫人(식부인)〉은 원망하며 “지금의 총애로 이전의 은혜를 잊을 수 없네. 꽃을 보니 눈물 가득하여 초왕과 더불어 말하지 않네.[莫以今時寵 能忘舊日恩 看花滿眼淚 不共楚王言]”라고 하였는데, 가령 패설(稗說)에 寧王(영왕)이 떡장수 부인을 빼앗은 것 때문에 지은 시가 실려 있지 않았다면 후인들이 무엇으로 그 뜻을 알 수 있겠는가.
〈서시〉편의 “미천한 시절 뭇 여인과 달랐겠는가, 귀하고 나서야 드문 미녀임을 알았구나. 시녀를 불러 분단장 시키고, 비단 옷도 혼자 입지 않네. 임금이 총애하니 교태 더해지고, 임금이 아껴주니 옳고 그름이 없구나.[賤日豈殊衆 貴來方悟稀 邀人傅脂粉 不自著羅衣 君寵益嬌態 君憐無是非]”에서 당시 李林甫ㆍ楊國忠ㆍ韋堅ㆍ王鉷의 무리들 때문에 지은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주
역주1> 西施(서시) : 춘추시대 월(越)나라 미녀로, 성은 시(施)이고 이름은 이광(夷光)이다. 본래 저무산(苧蘿山) 땔나무 장수의 딸이다.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절세미인인 서시를 범려(范蠡)로 하여금 오왕에게 바치게 하였다. 오왕은 서시에게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게 되었고, 이 때문에 망하게 되었다.
역주2> 朝爲越溪女 暮作吳宮妃(조위월계녀 모작오궁비) : 서시는 어렸을 때 월계(越溪)에서 연꽃을 따고 빨래하던 소녀였으나, 후에 오나라 궁에 들어가 오왕 부차의 총비(寵妃)가 되었다.
越溪는 若耶溪로 浙江省절강성 紹興縣소흥현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서시가 연꽃을 따고 빨래하던 곳이다. 吳宮은 오왕이 서시를 위해 세운 궁궐인 館娃宮(관왜궁)으로 香徑(향경) 響屧廊(향섭랑)을 갖추고 있으며, 터는 江蘇省(강소성) 吳縣(오현) 靈巖山(영암산) 위에 있다.
역주3> 邀人傅脂粉 不自著羅衣(요인부지분 부자저나의) : 서시가 오나라 궁에 들어간 뒤에는 존귀해졌으므로 궁녀들이 그녀가 화장하고 옷 갈아입는 것을 시중들었다.
역주4> 持謝鄰家子 效顰安可希(지사린가자 효빈안가희) : ‘謝’(사)는 알려주는 것이다. 예전에는 남녀 모두 ‘子’라고 하였다. ‘效顰(효빈)’은 《莊子》 〈天運〉에, “서시는 가슴앓이 병이 있어 찡그렸는데, 마을의 추녀가 그것을 보고 아름답게 여겨 돌아가서는 자신도 가슴을 잡으면서 찡그렸다.[西施病心而矉 其里之醜人 見而美之 歸亦捧心而矉]”라고 하였다. 후에 서시에 대비되는 추녀를 ‘東施’라 하여, 쓸데없이 남의 흉내를 내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거나 남의 단점을 장점인 줄 알고 본뜨는 것을 비유하여 ‘東施效顰(동시효빈)’이라고 하였다. ‘希’는 총애를 얻기 바란다는 뜻이다.
<사단법인 전통문화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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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4대 미인>
1. 서시(시쓰, 西施, 생몰년 미상)는 고대 중국 4대 미녀 중 한 명으로, 본명은 시이광(스이광, 施夷光)이다. 중국에서는 서자(시쯔, 西子)라고도 한다. 기원전 5세기(춘추 시대 말기)의 사람이다. 현재의 저장 성 사오싱 주지 시 출신이다.
월왕 구천이 오왕 부차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자 월나라 구천의 참모 범려의 전략에 따라 패전의 처리에 대한 공물로 오나라 부차의 여인이 된다. 서시가 부차에게 총애를 받자 부차의 후궁 위희부인이 서시를 질투하여 서시를 비밀리에 제거하려 했던 적이 있었다. 서시에게 빠진 부차는 월나라를 끝까지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던 오자서를 죽이면서까지 월나라 경계에 소홀하게 되고, 결국 국력을 키운 월나라에 패망하게 된다.
오나라가 패망한 뒤의 서시는 월왕 구천의 후궁이 되어 총애를 받지만, 구천의 정부인인 월부인에게 비밀리에 제거당한다.
2.왕소군(王昭君, 기원전 1세기)은 흉노의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 복주누약제 선우(復株累若鞮單于)의 알씨(선우의 처)로, 본래 한나라 원제의 궁녀였다. 이름은 장(嬙, 출전은 한서)이다. 성을 왕, 자를 소군이라고 하여 보통 왕소군이라고 불리며 후일 사마소(司馬昭)의 휘(諱)를 피하여 명비(明妃), 왕명군(王明君) 등으로도 일컬어졌다. 형주 남군(현재의 호북성 사시) 출신으로 양귀비, 서시, 초선과 함께 고대 중국 사대 미인의 한 사람에 손꼽힌다.
3.초선(貂蟬, 175년~199년(소설상 나이))은 서시, 왕소군, 양귀비와 함께 중국의 4대 미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삼국지연의》에서 왕윤의 수양딸로 등장해 동탁과 여포 사이를 이간질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여포가 동탁의 이름 없는 시녀와 염문을 가졌다는 정사의 기록과 왕윤이 여포를 부추겨 동탁을 죽이게 했다는 사실을 연의에서 각색한 것이다.
초선은 비록 삼국지 상에서는 가공의 인물이지만 이에 해당되는 실존인물은 있었다. 정사 후한서 여포전에 의하면 여포는 동탁의 시녀와 밀통을 하고 있는데 계속 밀통하다가 동탁이 이를 알자 여포에게 수극을 던지며 둘의 연애를 반대했다고 나온다. 이를 이용하여 왕윤이 여포를 적극적으로 설득하여 결국 동탁을 죽이도록 만든다. 정사 후한서 여포전에 의하면 여포와 밀애를 한 이 동탁의 시녀는 이름이 알려진 바 없으며 왕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다만 나관중은 이 사실에 대해 삼국지연의를 집필할 때 동탁의 시녀 대신 왕윤의 양녀라는 설정으로 변경하고 초선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4.양귀비(楊貴妃, 719년 ~ 756년)는 당 현종의 후궁이자, 며느리이다. 서시(西施), 왕소군(王昭君), 초선(貂蟬)과 더불어 중국의 4대 미인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그녀의 성은 양(楊)이고 이름은 옥환(玉環)이며, 귀비는 황비(후궁)로 순위를 나타내는 칭호이다.
당 현종 이융기에게 총애를 받았지만, 그것이 과도하여 끝끝내 안녹산과 사사명이라는 두 호족 세력 무장 대표가 공동 주도하여 반란을 획책한 이른바 안사의 난이 발발하는 원인이 되었고 이 역사적 배경을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고도 부른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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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시영(西施詠:서시를 노래하다-중국의 4대 미인)-왕유(王維)[당시 삼백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