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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곤 아웅산 국립묘지 추모비
미얀마 양곤에 한국인이 오는 것은 여행 목적도 있지만, 1983년 10월의 한국관련 슬픈 역사유적이 있어서 오는 곳이기도 한다. 아웅산 국립묘지는 양곤 북부 쉐다곤파고다(Shwedagon Pogoda) 북문의 정면 언덕에 있다. 버스가 울창한 숲으로 진입할 때 이곳이 아웅산 국립묘지임을 알리고 있다. 숲 공원을 한참을 달려온 곳에서 버스가 멈추고 내렸다. 바로 앞에 아웅산 국립묘지가 있다. 오늘은 정기휴일로 문이 닫혀 있다. 한국인의 추모비가 담장 곁에 있다. '아웅산 묘역 대한민국 순국사절 추모비'라는 안내판이 조국의 사람들을 맞이 한다. 참으로 어이없는 현장이다. 여기서 우리 대한만국 정치지도자들 17명이 북한의 암살폭파로 죽어간 것이다. 담장 안에는 추모기념관이 있다. 역시 휴일로 문이 잠겼는데 살짝 열린 쪽문으로 들어가서 기념관 마당을 보았다. 마당 끝에 순국한 대한민국의 17명 명단이 새겨져 있다. 기념관 건물에는 부부로 보이는 중년 남녀가 우리를 지켜본다. 기막힌 슬픔의 현장이다. 아웅산 국립묘지와 한국의 추모비를 이해하려면 그 역사와 인물을 알아야겠기에 나는 한국에 돌아와서 아웅산, 아웅산 수치, 1983년 폭파사건 등의 자료를 찾아 공부했다.
미얀마의 독립영웅 아웅산(Aung San)이 1947년 7월 19일 양곤의 회의실에서 행정참사회 회의 도중 동생을 포함한 6명의 행정참사원과 함께 암살당한 뒤 모두 이 곳에 묻혔는데, 묘지 이름은 아웅산의 이름을 그대로 딴 것이다. 이후 미얀마의 국가 요인이나 유공자들이 묻히는 묘소로서, 매년 이 곳에서는 공식적인 헌화 행사가 열린다. 또 미얀마를 방문하는 외국의 국빈들도 방문 도중 반드시 참배하는 국가적인 장소이다. 그러나 이 묘지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1983년 10월 9일, 당시 한국의 전두환 대통령 일행이 이 묘소를 참배하던 중 북한 테러분자가 장치한 폭발물이 폭발하면서 한국인 17명, 미얀마인 7명이 사망하고 50명이 부상을 당하는 대참변, 이른바 아웅산묘소폭파암살사건 때문이다. 이 사건 이후로는 일반인, 특히 외국인의 참관은 엄격하게 제한되고 있다. 이 날 대통령 전두환의 서남아 ·대양주 순방의 첫 방문지인 이곳에서 대통령의 아웅산묘소 참배행사를 위하여 미리 대기중이던 부총리 서석준 이하 여러 정부요인, 취재차 수행했던 기자 등 17명이 북한 테러분자가 장치한 폭발물의 폭파로 사망하고, 합참의장 이기백 등 13명이 중경상을 입는, 세계 외교사상 유례없는 일대 참변이 일어났다. 화를 면한 대통령 전두환 내외는 모든 방문예정을 취소하고 급거 귀국하였다. 국내외의 비분과 비탄 가운데 미얀마정부는 한국에 조문사절을 보내는 한편, 주범 2명을 체포하여 사형을 선고하고 북한과 국교를 단절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인 1984년 10월 미얀마정부는 아웅산사건은 북한의 소행이라고 국제연합에 보고하였다. 버마(현재의 미얀마)의 수도 랭군(현재의 양곤)의 아웅산묘소에서 한국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북한공작원에 의해 저질러진 폭파사건으로 역사에 남는 사건이다. 1983년 10월 9일에 발생했으며, 이 사고로 대통령 공식 수행원과 수행 보도진 17명이 사망하고, 1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또한 현장에 있던 미얀마인 3명도 사망하였다. 사고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묘소에 도착하기 전이어서 위기를 모면했다. 희생된 17명의 명단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서석준 외무부장관 이범석 상공부장관 김동휘, 동자부장관 서상철, 대통령 비서실장 함병춘, 민주정의당 총재 비서실장 심상우, 청와대 경제수석 비서관 김재익, 재무부차관 이기욱, 주 버마대사 이계철, 해외협력위원회 기획단장 하동선, 대통령 주치의 민병석, 농수산부차관 강인희, 과학기술처차관 김용한, 청와대 공보비서관 이재관 등의 공식 수행원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동아일보 기자 이중현, 경호원 한경희, 정태진 등도 사망하였다. 부상자는 합참의장 이기백, 공보비서관 최재욱, 외무부 의전국장 최상덕, 한국일보 기자 윤국병, 중앙일보 기자 송진혁, 동아일보 기자 최규철, 연합통신 기자 김기성, 코리아헤랄드 기자 김기석 연합통신 사진부장 최금영, 문화공보부 직원 임삼택·김상영, 경호원 김상태 등이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서남아시아 및 대양주 6개국을 순방중이었으며, 첫 방문지에서의 이같은 사건에 따라 나머지 순방일정을 취소하고 급히 귀국하였다. 귀국 즉시 열린 비상국무회의에서는 비상경계태세를 결정했으며 10월 13일 희생된 17위에 대한 국민장 거행 후 연일 벌어진 북한만행규탄대회를 고비로 대북보복론까지 대두되었다. 그러나 10월 20일 대통령 특별담화를 통한 대북한 경고와 더불어 자제론이 천명됨으로써 고조되었던 남북한간의 위기국면은 진정되었다. 한편, 미얀마 정부는 사건발생 즉시 5인 특별조사위원회를 만들고 암살범 추적수사에 총력을 기울여 10월 11일과 12일 사이에 북한에서 온 강민철과 진 모 등 2명을 체포하고 1명을 사살하였다. 뒤이어 미얀마 정부는 외무장관을 진사조문사절로 파한했으며, 10월 17일 이 사건이 북한의 특수공작원에 의해 저질러진 것임을 공식발표하고, 11월 4일 북한에 대한 외교단절 및 정권승인 취소조처를 취하였다. 이 조처에 따라 미얀마 주재 북한공관원들이 이틀 뒤 미얀마를 떠났으며, 다음날인 11월 7일 일본 정부가 대북한 제재조처를 취했으며 잇따라 미국 등 우방국들의 대북한 제재조처가 이어졌다. 이런 가운데 북한은 이 암살사건과 무관함을 강변했으나 11월 22일 미얀마 검찰당국에 체포된 범인들이 죄상을 밝힘으로써 북한에서 전대통령과 수행원들을 살해하기 위해 인민군 장교들로 구성된 암살단을 애국동건호에 탑승, 밀파했다는 사건전모가 공개되었다. 그 뒤 12월 9일 랭군지구 인민법원 제8특별재판부에서 두 테러범에 대해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한은 국제여론의 비난 속에 제3세계의 지지기반이 동요되었으며, 우리나라는 남남협력을 내세운 제3세계와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는 진척을 보게 되었다. 이후 2007년 4월에 이르러서야 북한과 미얀마의 국교가 재개되었다.
아웅산Aung San(1915.2.13 ~ 1947.7.19) 은 독립운동가이며 미얀마의 독립운동 지도자다. 1947년 1월 런던에서 영국 총리 애틀리와 아웅산 간에 ‘애틀리-아웅산 협정’을 맺음으로써 미얀마독립을 위한 제1보를 내디뎠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19일 양곤의 회의실에서 행정참사회 회의 중 암살당하였다. 중부 미얀마의 마구에현 나마우시에서 출생했다. 1932년 양곤대학에 들어가, 1936년 동맹휴학을 지도하였다. 같은 해 미얀마 전국학생연합의 초대 서기장에 뽑혔고, 1938년에는 독립을 표방하고 나선 급진정당인 타킨당에 입당, 서기장이 되었다. 영국 당국의 체포령이 내리자 1940년 8월 일본으로 탈출하여 미얀마 공작기관의 스즈키 대좌의 원조를 약속받고 하이난 섬에서 미얀마독립군을 양성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미얀마독립의용군을 이끌고 일본군과 함께 미얀마에 침입, 바 마우가 이끄는 임시정부(1943~1945)의 국방장관이 되었다. 1944년 8월 반 파시스트 단체인 인민자유연맹을 조직, 1945년 연합군의 반격에 호응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인민자유연맹의 총재가 되어 총독의 행정참사회에 참가하였고, 1947년 1월 런던에서 영국 총리 애틀리와 아웅산 간에 ‘애틀리-아웅산 협정’을 맺음으로써 미얀마독립을 위한 제1보를 내디뎠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19일 양곤의 회의실에서 행정참사회 회의 중 형을 포함한 6명의 행정참사회원과 함께 암살당하였다.
아웅산 수치Aung San Suu Kyi(1945.6.19~)는 민주국민연맹 사무총장이다. 1945년생으로 미얀마 건국의 아버지 아웅 산(Aung San) 장군과 도 킨 치(Daw Khin Kyi) 전 인도 대사의 딸로, 양곤(Yangon)에서 출생하였다. 그녀도 미얀마의 정치가다. 노벨평화상(1991), 유네스코인권상(2002)을 수상했다. 2015년 총선 승리를 이끌어 미얀마의 오랜 군부 집권을 종식시켰다. 미얀마의 독립운동 지도자인 아웅산의 딸로 15세 때 영국으로 건너가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정치학 등을 공부하였다. 1988년 영국에서 귀국하여 반독재 시위에 참가하였고, 민족민주연합(NLD)을 결성하여 민주화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군사정변으로 가택연금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쟁을 계속하여 1990년 5월 다당제 선거 실시의 성과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총선거에서 NLD가 친군부세력인 민족통일당(NUP)을 물리치고 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군사정변이 일어나면서 내란을 선동하였다는 이유로 1990년부터 2010년까지 20년간 가택연금과 해제가 반복되었다. 군부 독재에 비폭력 저항을 지속해 온 공로로 1991년 노벨평화상을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군사정부의 귀국 방해를 우려하여 영국인 남편과 아들이 대신 수상하였다. 1999년 남편이 암으로 사망할 당시에도 가택연금 상태로 출국 할 수 없었다. 2012년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압도적인 득표율로 국회의원에 당선됨으로써 제도권 정치 생활을 재개하였다. 1995년 민주국민연맹 사무총장이 되었다. 1989년 7월 ~ 1995년 7월, 2000년 9월 ~ 2002년 5월, 2003년 5월 ~ 2011년 11월 세 차례에 걸친 가택연금을 당하였다. 2015년 11월 총선에서 수치 여사가 이끄는 민족민주연합(NLD)이 압승을 거둠으로써 미얀마의 군부독재를 종식시킬 수 있었다. 외국인을 배우자로 둔 경우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미얀마 법 조항으로 인해 2016년 3월 수치 여사의 운전자 출신이자 측근인 틴초(Htin Kyaw, 1948년 1월 4일생)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2016년 10월 현재 수치 여사는 외교부장관과 대통령 자문역을 맡으면서 실질적인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다. 아웅 산 수 치에게 있어서 1988년은 운명의 해였다. 15살 때부터 시작된 30여 년에 이르는 외국 생활 동안 그녀는 학자로서, 평범한 주부로서의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운명의 1988년 어머니 킨 치 여사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영국에 머물던 아웅 산 수 치는 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해 8월 버마에서는 8888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버마의 국민들은 건국의 아버지 아웅 산의 딸 아웅 산 수 치가 자신들을 위해 행동해주기를 소망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그녀의 운명이자 의무였다. 그저 ‘평범한 여자’의 인생을 살고 싶었을지도 모를 40대 중반의 아웅 산 수 치는 안온했던 삶을 뒤로 한 채 가시밭길 같은 자신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웅 산 수 치는 버마 국민에게 희망의 이름이자 민주화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1988년 8월 민주화 운동에 뛰어든 이후 국민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아웅 산 수 치가 직접적으로 정치 일선에서 활동 한 것은 불과 7년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 14년 세월 동안 그녀는 버마의 군부정권에 의해 가택연금 되어 자유를 박탈당했다. 최근에는 그마저도 불안했던지 군부는 그녀를 버마에서 악명 높기로 유명한 인세인 교도소로 옮겨 수감하고 있다. 현재 버마의 정권을 잡고 있는 군부세력이 말하는 아웅 산 수 치의 명목상 죄목은 내란죄이다. 그녀가 획책한 내란이라는 것은 바로 군부독재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이다. 버마 전체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 아웅 산 수 치가 한번 움직일 때 마다 군부정권은 위협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군부는 쿠데타라는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자신들과 다르게 국민적 지지를 얻고 있는 아웅 산 수 치의 존재는 그 존재만으로 치명적이다. 그러기에 군부는 아웅 산 수 치가 자유롭게 정치 활동을 하는 것을 내버려 둘 수가 없다. 그렇다고 아웅 산 수 치를 여타 정치범처럼 함부로 죽일 수도 없다. 아웅 산 수 치는 버마 건국의 아버지이자 군대를 창설한 국민 영웅 아웅 산의 딸이다. 군부 내에서도 아웅 산 장군에 대한 존경심은 드높다. 군부정권 자체의 뿌리이자 명분일지도 모르는 아웅 산의 딸 아웅 산 수 치는 군부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자유롭게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제거할 수도 없는 존재, 아웅 산 수 치는 그렇게 버마 군사정권에 의해 정치활동 기간의 2/3를 감금당한 채 보내야 했다. 감금은 그러나 그녀의 정치 인생의 끝이 아니다. 아웅 산 수 치의 감금은 그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버마 국민들의 더 강한 지지와 세계적인 명성을 이끌어 내고 있다.
그녀는 영웅의 딸이었지만, 그러나 평범한 인생을 살고자 했던 여인이다. 아웅 산 수 치의 아버지 아웅 산장군은 버마 국민들에게는 국부와 같은 존재이다. 버마는 1824년부터 영국과의 세 차례 격렬한 전쟁 끝에 패배하여 1886년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아웅 산은 버마의 독립투사로 영국과 일본에 무력 항쟁하여 버마의 독립을 이끌어낸 사람이다. 그는 1940년대 영국을 몰아내기 위해 30명의 동지들과 함께 일본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다. 일본과 손잡고 일단 영국 세력을 버마에서 몰아낸 아웅 산 장군은 이후 다시 연합군과 손잡고 버마에 세력을 뻗친 일본을 몰아내고 독립을 획득했다. 그는 60여 년에 걸친 버마의 식민지 역사를 끝낸 버마 건국의 아버지였다. 아웅 산 수 치는 1945년 6월 19일 아웅 산과 그의 아내 킨 치 사이에서 세 번째 아이이자 고명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이름은 아버지 아웅 산의 이름과 할머니 수 그리고 어머니 치의 이름을 골고루 딴 것이다. 그로부터 2년 후 버마의 독립을 획득하고 정부가 구성되기 전에 정적에 의해 암살당하고 만다. 32년이라는 짧은 인생 동안 오로지 버마를 위해 살았던 아웅 산은 그 투명한 삶과 업적으로 인해 버마의 국민 영웅이 되었다. 아웅 산의 유족들은 영웅의 유족으로 추앙 받았고 영웅의 유족답게 살아야만 했다. 1962년 네 윈에 의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까지 아웅 산의 미망인 킨 치는 중앙 정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아웅 산 수 치는 1960년 인도 대사로 부임하게 된 어머니를 따라 인도로 건너갔다. 이때 시작한 외국 생활은 그녀가 1988년 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버마로 돌아오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1962년 아버지의 동료였던 네 윈이 일으킨 군사 쿠데타로 조국은 버마식 군부사회주의 독재정권으로 바뀌었고 아웅 산 수 치는 망명 아닌 망명상태로 외국을 떠돌았다. 그녀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정치와 경제, 철학을 공부하고 뉴욕에 있는 유엔에서 일했다 아웅 산 수 치는 국적을 미국으로 바꾼오빠 아웅 산 우처럼 떠나 온 조국 버마와는 상관없는 인생을 살아갈 것만 같았다. 게다가 그녀는 버마인이 아닌 ‘영국인’ 아시아 연구자 마이클 에어리스와 결혼하면서 조국 버마에 대한 아웅 산의 딸로서의 부채의식을 완전히 벗어버린 듯 했다. 그녀는 남편을 따라 부탄과 영국에서 살았다. 아버지 아웅 산에 대한 책을 쓰려고 자료 조사차 일본 교토에 머문 1년 외에 그녀는 영국인 남자와 결혼한 아시아계 주부로 두 아들을 키우며 평범하고 행복한 일상을 가꾸어 나갔다. 그러나 운명은 그녀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평범한 여인이 가질 수 있는 행복 따위는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어머니가 쓰러지고 조국 버마가 그녀를 불러 들였다. 1988년 8월 8일 아침 8시, 8888항쟁이 발발한 것이다. 당시 버마는 26년간 계속된 군부독재와 이에 따른 경제파탄과 인권유린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아웅 산과 함께 독립 운동을 했고 독립 후 군부의 수뇌가 된 네 윈은 1962년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그는 군부정권의 최고 권좌에 앉아서 젊은 날의 순수한 의기를 잃어버리고 탐욕스러운 독재자로 변했다. 네 윈과 그를 둘러 싼 군사 독재정권은 식민지 기억에 대한 지나친 강박증으로 1960년대 새삼스럽게 대외적으로 쇄국 정책을 폈다. 온전한 사회주의라기보다는 동양적 가치관과 불교가 습합된 버마식 사회주의 경제 체제를 표방하였으며, 서방사회를 적대시하며 제 3세력의 중립외교정책을 표방하였다. 시기 적절하지 않은 정책들과 독재 권력의 부정부패는 경제 파탄을 가져왔다. 버마의 국민들은 폭압과 가난 속에서 질식사할 상태에 이르렀다. 대학생들이 먼저 나섰다. 그들은 식민지 시기 영국에 대항해 독립운동을 하던 때부터 자유와 인권과 독립의 상징이던 공작새가 그려진 깃발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군부는 평화적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했다. 많은 학생들이 군부의 총칼아래 희생되었다. 꽃다운 젊은이들의 희생에 그 동안 잠자코 있던 버마 국민들은 분노했다. 1988년 8월 8일 8시 수도 양곤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하여 불교 승려와 시민들이 대거 참여한 8888항쟁이 일어났다. 군부는 언제나처럼 이들을 총과 칼로 진압하려 하였다. 그러나 진압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시민들의 분노는 그 이상으로 강해졌고 시위대의 규모는 커져갔다. 시민과 학생, 승려들까지 수 천 명의 사람들이 군부의 총칼 앞에 죽어갔지만 시위는 진압되지 않았다. 사태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누군가 나서 잔혹한 군부에 경종을 울리고 선량한 국민들의 대변인이 되어 주어야만 했다. 그 해 4월 버마로 돌아와 오로지 어머니의 간호에만 힘쓸 뿐 정치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아웅 산 수 치는 8888항쟁을 지켜보면서 더 이상 자신이 버마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민중들은 그녀를 원했다. 국민영웅 아웅 산의 딸이 나서 군부를 꾸짖고 새로운 세상을 국민들에게 가져다 주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8월 15일 아웅 산 수 치는 정부에 국민들의 요구에 응할 것을 촉구하는 ‘화평안’을 제안했다. 그리고 8월 26일 희생당한 시민 시위대의 시신이 안치된 양곤의 종합병원 앞에서 몇 십만의 남녀노소 버마 국민들이 운집한 가운데 민주화를 위한 연설을 하였다. 이로써 버마민주화의 상징, 아웅 산 수 치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아웅 산 수 치가 정치 일선에 나서자 버마 국민들은 열렬히 환호하며 그녀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다. 군부도 국민들의 민주화 의지에 어느 정도 양보를 하는 듯 한 제스처를 보였다. 일당 독재를 폐지하고 다당제 정치와 선거를 약속했다. 시민들이 승리한 듯이 보였다. 아웅 산 수 치는 군부정권에 맞서 민주지사들과 함께 민주민족동맹(NLD)를 창설하고 사무총장직을 맡았다. 그녀는 전국을 돌며 새로운 버마에 대한 희망을 연설하고 군부 독재의 종식을 촉구하였다. 아웅 산 수 치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수 천 수 만의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은 그녀에게서 버마의 장밋빛 미래를 보았다. 잔혹한 진압에 대한 국제적 비난과 민주화에 대한 거센 국민의 요구에 잠시 주춤했던 군부는 아웅 산 수 치의 행보에 당황했다. 군부의 양보는 잠시 궁지를 모면하기 위한 임시방편이었을 뿐 추호도 정권을 내놓을 생각이 없었다. 과거 몇 차례 순박하고 평화로운 버마의 국민들은 때때로 군부의 이러한 조삼모사격 음모에 쉽게 좌절하기도 하였다. 군부는 이번에도 국민을 기만하려 하였다. 그러나 아웅 산 수 치의 등장으로 계획은 어그러졌다. 아웅 산 수 치를 따르는 버마의 국민들은 더 이상 총과 칼로 위협하고 몇 개의 당근정책을 내놓으면 거기에 안주하는 다루기 쉬운 사람들이 아니었다. 군부 정권은 아웅 산 수 치를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네 윈의 퇴진 이후 신군부의 소 마웅은 다시금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그 동안 소강상태였던 시위대에 대한 잔혹한 진압을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1989년 7월 아웅 산 수 치를 가택 연금하였다. 아웅 산 수 치를 국민들과 격리시키면 시위는 사라지고 군사 독재가 가능 할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군부의 커다란 오산이었다. 수도인 양곤이나 대도시의 식자층만이 자신들을 반대할 뿐 국민 전체는 아직도 군대를 믿고 따른다고 여긴 군사 정권은 8888항쟁 때의 약속을 지킨다는 명목 하에 1990년 5월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결과는 아웅 산 수 치가 결성한 민주민족동맹(NLD)이 82%의 지지를 받아 압승하였다. 그러나 군부는 엄연한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다. 평화로운 정권이양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군부는 오히려 선거결과를 무효화 하고 민주 인사 수 백 명을 투옥하였다. 총과 칼이 설치는 군부의 공포정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선거 시기만 피해보자는 생각으로 1년 기한으로 연금한 아웅 산 수 치의 가택연금을 무기한으로 연장하였다. 한때 민주주의의 봄이 오는 듯했던 버마에는 다시 암흑이 내려 앉았다. 선거에서는 대승리했다. 그러나 오지 않는 봄이었다.
계속되는 버마의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아웅 산 수 치다. 선거의 승리도 좌절도 아웅 산 수 치는 가택연금 된 상태에서 맞았다. 그녀는 단식도 하였고 국제적인 청원도 하였지만 버마 군부는 아웅 산 수 치를 가둬 둔 채 총칼을 휘두르며 요지부동 지금까지 버마를 통치 하고 있다. 그 사이 아웅 산 수 치는 1991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버마 정부는 아웅 산 수 치의 가택 연금을 풀어주지 않았다. 결국 이 시상식에는 그녀의 남편과 아들이 아웅 산 수 치의 사진을 들고 대신 참석하였다. 1995년에는 국제적 압력에 못이긴 버마 정부가 아웅 산 수 치를 잠깐 가택연금에서 풀어주기도 하였다. 그녀는 이 시기 동안 여전히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 운동을 계속하였다. 1999년에는 남편 마이클 에어리스가 사망하였지만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도 못했다. 외국으로 나가면 군부가 그녀를 버마 땅으로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을 염려해서였다. 결국 2000년에 버마 군사정권은 아웅 산 수 치를 다시 가택연금하고 양곤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였다. 2002년 국제 연합특사가 버마에 대한 경제 제재를 일부 풀어주는 조건으로 아웅 산 수 치를 가택연금에서 풀려나게 했지만 이듬해인 2003년 군사정권은 그녀를 또 집에 가두어 버렸다. 2008년에는 5년 시한이던 가택연금을 1년 더 연장하더니 최근에는 그녀의 집에 낯선 미국인이 잠입한 사건을 꼬투리 잡아 그녀를 인세인 교도소로 옮겨 구금하고 있다. 그녀의 죄목은 ‘공중보안법’ 위반이고 군부의 시나리오에 의하면 5년 형을 내릴 것이라고 한다. 세계는 아웅 산 수 치에 대한 버마 당국의 처사를 맹 비난 하고 민주화를 향한 버마 국민들의 소망을 무시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버마 정부에 대해 경제 제재까지 가하고 있지만, 버마 군사정권은 아직까지도 묵묵부답,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게 위해 오늘도 총칼로 무장한 채 버마를 통치하고 있다. 수지여사는 아웅산을 보고 찍어준 사람이란다. 수지여사가 실세란다. 막후 세력이 막강하단다. 대통령은 군부독재자 네윈이다. 미얀마가 지금은 세금을 거둔단다. 전에는 없던 세금이란다. 아웅산 폭파사건의 현장인 아웅산 추모탑과 미얀마 민주화 운동의 살아있는 역사 인물 아웅산 수치 여사의 박물관도 있다. 국립묘지와 한국인 추모비 담장에도 철조망이 쳐져 있다. 살아서는 그렇게 죽어갔지만 죽어서라도 잘 지켜드리자는 의미로 다가온다. 바로 앞에는 쉐다곤 파고다가 금빛으로 찬연한 자태다. 이곳 묘역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보여진다. 내 조국 순국사절들의 명복을 빌고 시린 걸으로 떠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