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이원하, 문학동네
첫 시를 보는 순간 너무 좋았다. 신선했다.
긴 제목, 능청스럽다. 경어의 독백체 고백의 시들.
시련을 당하고 제주에 장기여행으로 머물고 있는 화자의 모습.
자칫 제주 자체는 사라지고 여행자의 제주만 남는 모습이 그려지기도 하지만,
그렇더라도 낯선 풍경 속에서 추억과 아픔을 곱씹으며
삶을 꾸려가는 화자의 시는 매력적이다.
그 매력을 뭐라할까? 웃는 여자는 슬픈 여자다, 아픈 여자다.
그 여자가 꼼실거리며 추억과 외로움을 엮은 이야기들이 이 시의 매력이다.
풀잎 위의 앙증맞은 거미를 만나 적 있다.
너무 예쁜 연두거미.
거미를 검지 손끝에 묻혀 보다가 다시 제자리에 놓았다.
이원하 시인은 연두거미같다.
= 차례 =
시인의 말 005
1부 새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여전히 슬픈 날이야, 오죽하면 신발에 달팽이가 붙을까/ 약속된 꽃이 오기만을 기다리면서 묻는 말들/ 나는 바다가 채가기만을 기다리는 사람 같다/ 풀밭에 서면 마치 내게 밑줄이 그어진 것 같죠/ 첫 눈물 흘렸던 날부터 눈으로 생각해요/ 참고 있느라 물도 들지 못하고 웃고만 있다/ 싹부터 시작한 집이어야 살다가 멍도 들겠지요/ 섬은 우산도 없이 내리는 별을 맞고/ 마음에 없는 말을 찾으려고 허리까지 다녀왔다/ 바다를 통해 말을 전하면 거품만 전해지겠지/ 동경은 편지조차 할 줄 모르고 036
2부 싹
초록과 풀잎 같은 것들은 항상 곁에 있는데 보이질 않더라고요 그날부터였을 거예요/ 해의 동선/ 달이 찌는 소리가 나를 부르는 소리였다니/ 털어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요/ 환기를 시킬수록 쌓이는 것들에 대하여/ 빛이 밝아서 빛이라면 내 표정은 빛이겠다/ 필 꽃 핀 꽃 진 꽃/ 빈 그릇에 물을 받을수록 거울이 넓어지고 있어요/ 가만히 있다보니 순해져만 가네요/ 코스모스가 회복을 위해 손을 터는 가을/ 말보단 시간이 많았던 허수아비/ 누워서 등으로 섬을 만지는 시간/ 깊은 맛이라는 개념은 얕은 물에만 있는 것 같아요/ 내가 나를 기다리다 내가 오면 다시 나를 보낼 것 같아
3부 눈
선명해진 확신이 노래도 부를 수 있대요/ 눈 감으면 나방이 찾아오는 시간에 눈을 떴다/ 장미가 우릴 비껴갔어도 여백이 많아서 우린 어쩌면/ 투명한 외투를 걸쳤다면 할일을 했겠죠/ 나를 받아줄 품은 내 품뿐이라 울기에 시시해요/ 그게 아니라 취향, 취향/ 아무리 기다려도 겨울만 온다/ 바다는 아래로 깊고 나는 뒤로 깊다/ 귤의 이름은 귤, 바다의 이름은 물/ 나비라서 다행이에요/ 마시면 마실수록 꺼내지는 건/ 하나 남은 바다에 부는 바람/ 산수국이 나비인 줄 알고 따라갔어요/ 잘 산 물건이 있나 가방을 열어봤어요/ 내가 담근 술은 얼마나 독할까요/ 하고 싶은 말 지우면 이런 말들만 남겠죠
4부 물
눈물이 구부러지면 나도 구부러져요/ 서운한 감정은 잠시라도 졸거나 쉬지 않네요/ 눈동자 하나 없는 섬을 걸었다/ 하늘에 갇힌 하늘/ 저녁 먼저 먹을까, 계절 먼저 고를까/ 그늘을 벗어나도 그게 비밀이라면/ 입에 담지 못한 손은 꿈에나 담아야 해요/ 물잔에 고인 물/ 조개가 눈을 뜨는 이유 하나 더/ 나무는 흔들릴 때마다 투명해진다/ 노을 말고, 노을 같은 거/ 꿈결에 기초를 둔 물결은 나를 대신해서 웃는다
해설│자연에서 자유까지 - 웃는 사람 이원하
│신형철(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