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어찌 보면 우리는 또 다른 귀먹은 사람이요, 말 더듬는 사람입니다!
‘에파타!’ 복음을 접할 때마다, 제 지난 삶을 되돌아보지 않을수 없습니다. 솔직히 수도회 입회 전까지만 해도, 저는 도통 말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루 온종일 말을 거의 하지 않다 보니, 당연히 말주변이나 말재주가 전혀 없었습니다. 당시 제 모습에 가장 어울리는 표현이 있습니다. ‘꿔다놓은 보리 자루!’
어떤 정소를 가든, 어떤 모임에 가든 저는 조용히 한 구석에 찌그러져 있었습니다. 거의 투명 인간처럼 그렇게 지냈습니다. 학창시절 제 생활기록부에 단골로 적혀있던 표현들이 있었습니다. 조용한 성격, 남 앞에 나서기를 지극히 꺼려함, 내성적이고 수줍음을 많이 탐...
그런데 지금은 스스로가 생각을 해도 깜짝 놀랄 정도로 바뀌었습니다. 얼마 전, 몇십년 만에 해후한 고등학교 동창 친구가 있었는데, 하루는 그가 제가 주도한 한 강좌에 참석했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바뀌어버린, 제 모습에 강의 내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저 역시 크게 변화된 제 모습을 보며, 주님께는 불가능이 없다는 말을 실감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제 신앙 여정 안에 ‘에파타!’라고 외치시며 저를 치유하셨음을 믿습니다. 오늘도 또 다른 깨달음, 또 다른 시야를 지니도록 계속해서 ‘에파타!’ 작업을 지속하고 계심을 굳게 믿습니다.
올바른 목적을 설정하고, 죽기 살기로 노력하면, 놀랍게도 주님께서 힘을 보태주십니다. 선한 의지를 갖고, 한 방향으로 선택과 집중을 해서, 혼신의 노력을 하면 기적이 가능합니다. 제대로 한번 변화되어 보려고, 제대로 한번 눈을 떠보려고, 제대로 한번 깨달음에 도달하려고 총력을 기울이다 보면, 반드시 주님께서는 선한 일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옛날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의 귀를 열어주시고, 혀를 풀리게 하는 사랑의 기적을 행하셨는데, 그 기적은 오늘 우리 안에서도 되풀이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 듣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솔직히 놓치며 살아가는 부분이 너무나 많습니다. 서늘한 가을바람에 실려오는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동료 이웃들의 음성을 통해 전해지는 성령의 목소리를 놓치며 살아갑니다. 주변에서 매일 발생하는 다양한 사건 사고들을 통해 전해지는 시대의 징표를 놓치며 살아갑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는 많은 말을 하며 살아가지만, 정작 중요한 말, 꼭 필요한 말, 반드시 해야할 말은 하지도 못하고 살아갑니다. 어찌 보면 우리는 또 다른 귀먹은 사람이요, 말 더듬는 사람입니다. 부드럽고 감미롭지만, 강한 생명력을 지닌 주님의 한 말씀, ‘에파타!’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내가 더 이상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고 느껴질 때
찬미 예수님.
오늘은 복음은 예수님께서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치유해 주신 이야기입니다. 정말 많은 것을 묵상할 수 있겠지만, 오늘은 그를 데려온 사람들에 대해 묵상해보고 싶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에게 단지 “나을 것이다.”라고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직접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으시고, 침을 찍어 그의 혀에 대시며, “에파타!” 곧 “열려라!”라고 분명히 표현하셨습니다. 이는 그 대상에게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더욱 신경써 주고 계심을 느끼게 하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돈 보스코의 말처럼,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이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도 몸소 실천하신 사랑의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에파타라고 말씀하시면서, 행동과 언어를 결합하여 상대가 체험할 수 있는 사랑을 선사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를 데려온 사람들은 예수님께 그저 “손을 얹어 주십사” 청하였을 뿐입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사랑을 느끼게 하는 힘이 되었는지 우리는 알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은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느 때는 더는 내가 저 사람에게 필요 없는 존재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헤어질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그럼 헤어져야 할까요?
영화 ‘아이 엠 샘(I Am Sam)’은 지적 장애를 가진 아버지 샘이 어린 딸 루시를 키우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샘은 스타벅스에서 일하고 단순한 삶을 영위하는 지적 장애가 있는 사람입니다. 루시가 태어난 직후에 여자는 떠나버립니다. 샘은 자신의 인지적 제한에도 불구하고 루시를 흔들리지 않는 사랑으로 키우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으로 아이에게 제공합니다.
그런데 루시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아버지를 지적으로 능가하기 시작합니다. 그녀가 7세가 되자 그녀는 아버지가 다른 성인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녀는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지만, 아버지는 읽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버지 앞에서만은 일부러 글을 읽지 못하는 척합니다.
샘은 딸과 함께 간 식당에서 어린이처럼 없는 메뉴를 주문하며 떼를 쓰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보는 딸의 입장은 매우 난처합니다. 이런 일이 이어지자 사회 복지 서비스는 샘이 루시를 키울 수 있느냐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재판이 열리고 샘은 결국 아이를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에게 더는 줄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같이 살고 싶어 하지만, 샘은 루시를 위해 그녀를 좋은 집안으로 입양 보냅니다.
딸은 새로운 집에서 잘 적응해갑니다. 샘은 딸을 만나러 갔다가 자신 없이도 잘 지내는 것을 보고는 그냥 돌아옵니다. 그러나 루시는 아빠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기를 그러한 집에서 자라게 해 준 아빠를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아빠와 딸을 키우는 집의 엄마는 마치 공동 육아처럼 서로 협력하여 루시를 키우기 시작하며 영화는 끝납니다.
이 영화에서 샘이 딸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딸을 잘 키워줄 누군가에게 딸을 보내는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녀를 하느님께 봉헌하며 가장 잘하는 일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들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그들에게 감사받는 일입니다.
한국 영화 ‘말아톤’의 초원이 역시 자폐성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이를 키우기 어려웠던 엄마는 동물원에서 아이의 손을 일부러 놓아 아이를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이 기억은 아이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었습니다. 엄마는 아이를 자기 힘만으로 키우려 합니다. 그래서 힘이 듭니다. 아이가 마라톤을 하려고 하자, 페이스 조절을 할 수 없는 아이가 말아톤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엄마와 아이가 화해하는 때는 엄마가 아이에게 말아톤 코치를 소개해주면서부터입니다. 초원이는 달리는 법을 배우고 행복하게 달립니다. 그리고 자신을 코치에게 보내준 엄마도 용서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만이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셨습니다. 그에게 자신을 데려온 그 사람이 치유를 받고 그 사람들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힘만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려 하지 맙시다. 한계에 부딪힙니다. 주님께 데려가는 사람은 당장은 그 사람을 잃는 것처럼 느끼겠지만, 영원히 그 사람에게 감사받고 관계가 끊어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르 7,31-37: 열려라-에파타
예수님은 다시 갈릴래아로 가시자마자 귀먹은 반벙어리를 만나신다. 여기서 예수님은 아주 친절하시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신다. 귀먹은 반벙어리를 따로 불러 친절하게 손가락을 귀에 넣으시고 그의 혀를 만지셨다. 그리고 그 불구를 완치시켜주는 은혜가 어디서 오는지를 알려주시기 위하여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에파타!” 곧 “열려라!”(34절) 하신 것이다. 그는 혀가 풀리고 귀의 닫힌 문이 열렸다. 성령은 “하느님의 손가락”(루카 11,20)이라고 하셨다. 주님께서는 당신 손가락을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귀에 넣으시어,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그 사람의 마음을 믿음을 향해 열어 주셨다. 그분이 귀를 만지신 것은 그의 귀가 막혔기 때문이고, 입을 만지신 것은 그가 말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파타!”, 즉 “열려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의 마음의 입과 귀도 열어 주시기를 청하자.
주님께서는 귀먹은 이들을 듣게 해 주셨다. 주님께서는 이 일을 통하여 진리를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 하느님의 거룩한 말씀을 듣고 이해하게 되리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거룩한 복음을 듣지 않고 행할 바를 실천하지 않는 자들이 바로 말 못 하는 청각장애인이라 할 수 있다. 주님의 능력은 말 못 하는 사람을 제 혀로 다시 말할 수 있게 해 주셨다. 단순한 사건이기는 하지만 이 능력 안에는 미래의 일을 드러내는 또 다른 의미가 담겨 있다. 예전에는 천상의 것에 대해 무지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지식과 지혜의 진리를 깨달아 하느님에 관하여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37절) 감탄하였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인간의 질병을 치유해 주시고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게 해 주셨다. 예수님의 행적을 보고 백성들이 감탄했듯이 오늘의 우리도 다른 이들이 우리의 믿음의 행실을 보고 “참으로 놀랍기만 하구나!” 하며 우리와 같이 신앙을 갖기를 원하게끔 우리의 행위를 예수님의 모습을 닮을 수 있도록 고쳐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니겠는가! 조금씩 하느님의 말씀에 응답할 때, 그분의 속삭임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살려고 노력할 때, 묶여있던 혀가 풀려 올바로 주님을 찬미하고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조그마한 일에서부터 꾸준한 노력의 결실로 나에게 돌아오는 결과일 수 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어떤 사람이 아주 귀한 보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보석 감정사도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석’이라고 감정한 보속이었습니다. 이 보석을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선물했습니다. 그리고 보석 감정사도 인정한 최고의 보석이라는 말을 전했지요. 그러나 청렴한 이 사람은 보석 받기를 거절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보석을 보배로 여기지만, 저는 탐내지 않는 마음을 보배로 여깁니다. 제가 이 보석을 받으면 우리 둘 다 보배를 잃어버리는 일이 됩니다. 그러니 보석을 가지고 돌아가십시오.”
보석의 귀중함을 알지만, 이 보석이 자기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게 하는 마음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이런 태도를 갖추어야 생각대로 되면 기뻐하고, 생각대로 되지 않아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이런 마음을 통해서만이 이 세상의 물질적인 것에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주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즉, 지금의 상태를 넘어 그 너머로 향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많은 물건을 바라봅니다. 이 물건의 중요함을 알되, 그 물건 자체 때문에 ‘나’의 삶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됨을 자주 깨닫습니다. 그래야 나를 넘어 그 너머의 주님께로 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도 이런 우리가 되기를 원하시는 마음입니다. 그래야 구원의 길로 들어서게 되고,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세상 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주님의 말씀이 자기에게 가장 귀한 보배임을 인정하고 그 말씀을 따르도록 노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머리에 손을 얹어 주시지 않고 다른 방법을 쓰십니다. 먼저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시지요. 이 예수님의 행위는 중요한 것을 상징합니다. 즉, 성령을 부어 주시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파타!”(열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성령을 받은 뒤, 그는 귀가 열리고 입이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세상 것을 받아들이는 것과는 다릅니다. 더 큰 가치인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는 길입니다. 성령을 받음으로 인해 세상 것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귀가 열리고 입이 풀려서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나무는 제 손으로 가지를 꺾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제 마음으로 가까운 이들을 베어버린다(톨스토이).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사람과 그 아내는 주 하느님 앞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창세 3,8)
만일 우리가
해 저문
저녁 산들바람 속에서
홀로 거닐고 계시는
하느님의 발소리를 듣고서
반갑게
뛰어나가지 못하고
하느님 앞을 피하여
어디론가 숨고 싶어진다면
그것은 분명,
우리가
언제 어딘가에서
너무도 많은 선악과를
따먹었던 탓이리.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복음적인 시각은 무조건 신뢰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향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필수적인 관점의 변화는
교회가 하느님 중심으로
생각을 바꾸는 데 있습니다.
그래야 영적인 쇄신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인간 중심적인 사고 전환을
하느님 중심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제는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제는 열려 있어야 합니다.
내가 막혀있고 닫혀 있는데
어떻게 남을 열려 있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제가 꽉 막힌 사제는 아닌지
먼저 살펴야 하겠습니다.
“에파타!”곧 “열려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02.14.금.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7, 34)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접촉으로
우리는
건강한
소통을
다시 배웁니다.
막혀있는
접촉을
예수님께서
열어주십니다.
소통하지 못한
우리의 아픔을
치유자이신
예수님께
내어드립니다.
인격은
존중입니다.
존중은
막힘 없이
잘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파타이며
이것이
열림입니다.
진정한 열림은
판단과 평가가
아닌 진정한
공감으로
한 사람을
치유합니다.
소통은
소통의 과정을
지나갑니다.
소통의 과정은
진정성과
소중함의
과정입니다.
소중함의
과정은
우리 삶의
현장에서
드러나는
가장
가치있는
나눔입니다.
예수님이
따로 있고
소통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 삶의
진정한
소통이 되십니다.
우리의
귀가 열리고
우리의
묶인 혀가
풀려서
우리들 또한
건강한 소통
건강한 인격으로
살아가는
열린 오늘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르7,37)
'치유자이신 주님!'
오늘 복음(마르7,31-37)은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 지역인 티로와 시돈과 데카폴리스에서 구원 활동을 하시고 갈릴래아로 돌아오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시고,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두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으며 따라가고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제대로 듣고, 제대로 말할 수 있게 하시는 분입니다. 인간답게 그리고 각자의 성소에서 신분에 맞게 듣고 말할 수 있게 하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우리를 '참된 길'로 인도하고, '참평화와 참행복과 참기쁨'이 있는 '하느님의 나라'로 이끕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그 반대의 모습인 비구원의 상황, 지옥의 상태에 빠지곤 합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느님의 말을 하지 않는, 귀가 닫혀있고, 입이 막혀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저기에서 하느님의 소리(말씀)가 들려옵니다. 성경을 통해서, 성직자들을 통해서, 그리고 너를 통해서 들려옵니다. 기후위기나 김하늘 어린이의 죽음을 통해서도 들려옵니다. 그리고 비상계엄 등과 같은 여러 이슈나 사건들을 통해서도 하느님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렇게 들려오는 하느님의 소리(말씀)를 듣지 못하는 귀먹은 장애인, 그리고 하느님의 말, 사랑의 말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 장애인은 아닌지? 그리고 뱀의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짓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 나의 모습을 성찰해 봅시다!
복음말씀
제1독서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것이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3,1-8
1 뱀은 주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에서 가장 간교하였다.
그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
2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를 먹어도 된다.
3 그러나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 열매만은,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 하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4 그러자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6 여자가 쳐다보니 그 나무 열매는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다.
그래서 여자가 열매 하나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자, 그도 그것을 먹었다.
7 그러자 그 둘은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
8 그들은 주 하느님께서 저녁 산들바람 속에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과 그 아내는 주 하느님 앞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예수님께서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7,31-37
그때에 31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32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34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35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36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37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