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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해파랑길 49코스
여행일 : ‘20. 9. 19(토)
소재지 :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및 현내면 일원
여행코스 : 거진항→해맞이봉→응봉→생태박물관→이기붕·이승만 별장→해양박물관→초도항→대진항→금강산콘도→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거리/시간 : 14.5km/ 4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실질적으로는 해파랑길의 마지막 구간이다. 통일전망대까지 가는 50코스의 대부분이 사전 신고한 차량만 출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최근 코스의 조정이 약간 이루어졌다. 49코스의 종점을 ‘명파초등학교’에서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로 바꾸면서 해당 구간을 50코스에 편입시켰다. 해파랑길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도 이곳으로 옮겨졌음은 물론이다. 그건 그렇고 이 구간은 해파랑길 종주꾼들이 꼭 아니어도 찾는 이들로 항상 넘친다고 한다. 눈에 담아둘만한 볼거리들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단연 응봉에서 조망이 아닐까 싶다. ‘8’자 모양으로 생긴 ‘화진포 호수’가 그림처럼 펼쳐지는 것이다. 거기다 활처럼 휘어져나간 화진포해변의 금빛 모래사장까지 더해지니 어찌 환호성을 지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가슴에 담아두어야 할 볼거리들도 많다. 역사안보전시관으로 이름을 바꾸어 문을 연 이승만과 이기붕, 김일성 별장에 들러 굴곡진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는가 하면, 생태박물관과 해양박물관에서는 화진포 호수와 인근 바다의 생태계를 엿볼 수 있다.
▼ 들머리는 거진항(고성군 거진읍 거진리 22-51)
동해(속초-삼척)고속도로 속초 IC에서 내려와 56번 지방도를 이용 교동지하차도 사거리(속초시 교동)까지 온다. 이어서 ‘동해대로(7번 국도)’를 타고 북쪽(간성 방면)으로 올라가다 자산교차로(거진읍 자산리)에서 빠져나오면 잠시 후 거진항에 이른다. 해파랑길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은 ‘고성수협 바다마트’ 앞에 세워져 있다. 참고로 이곳 거진항은 매년 초겨울 몰려드는 사람들로 붐빈다고 한다. 순전히 도루묵 때문인데, 어느 글쟁이는 이를 두고 ‘갈매기 못지않다’는 표현을 썼을 정도이다.
▼ '거진1리' 방향으로 몇 걸음 걷다가, 도로 좌측의 나무계단으로 올라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참! ‘거진리’를 소개하는 안내판이 계단 아래에 세워져 있으니 한번쯤 읽어보는 게 좋겠다. 1930년대의 거진항은 120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던 작은 어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해방 전 정어리가 많이 잡히던 때는 이를 처리하기 위한 공장이 3개나 들어서기도 했단다. 갑작스런 흉어로 옛 얘기가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현재의 거진항은 명태가 만들었다고 한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전국 명태 어획량의 60~70%가 이곳에서 잡혔단다. 그 덕분에 신선한 명태 아가미만을 따내 무채와 함께 버무린 '명태 서거리'와 차좁쌀로 버무린 '명란식혜' 등이 이 지방의 별미 음식이 되었단다.
▼ ‘갈 지(之)’자를 써가며 위로 오르는 계단의 좌우 끄트머리는 전망대로 조성했다. 개개의 전망대는 사진 찍기 딱 좋게 꾸며져 있다. ‘사랑합니다’라는 글자 조형물은 연인들에게 인기가 좋겠고, ‘햇살 품은 거진항’이란 명찰을 단 포토박스는 가족사진용으로 제격이겠다.
▼ 등대로 올라가는 산비탈의 한쪽 귀퉁이에 성황당이 들어서 있었다. 이곳 거진항은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하는 민초들이 고단한 삶을 이어가던 현장이었다. 그러니 어선이 출어할 때마다 무사고와 만선을 기원하는 성황굿을 펼쳤을 것이다. 그 현장이 바로 저곳일 게고 말이다. 아무튼 저 안에는 아득한 옛날 고기잡이를 나간 남편을 기다리다 사망한 젊은 여인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매년 음력 3월 성황굿을 해오고 있으며, 3년에 한 번은 풍어제를 올린단다.
▼ 조금 더 오르면 길이 둘로 나뉜다. 왼편은 등대로 가는 길, 우리 부부는 오른편 소나무 숲길을 따랐다. 고성군, 특히 화진포 일대는 소나무가 일품 아니겠는가.
▼ 숲길을 걷다보면 거진항(巨津港)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거진항은 오징어가 호황을 이루던 1970년대에는 인구가 25,000명에 이르기고 했단다. 마을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을 증명했다고나 할까? 500년 전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던 한 선비가 이곳을 지나가다 ‘클 거(巨)'자 모양으로 생긴 지형을 보고 장차 거부장자(巨富長者)가 많이 늘어날 것이라 했다니 말이다. ‘거진리(巨津)’이라는 지명의 유래이기도 하다. 거진리는 두어 개의 다른 이름도 갖고 있다. 거탄진리(巨呑津里)라는 옛 기록이 있는가 하면, 자산천이 둘로 나뉘면서 1km 정도를 길게 돌아 우회한다고 해서 수회리(水廻里)로 불리기도 했다. 두 갈래였던 물줄기를 곧장 바다로 흐르게 고친 후, 넓은 하천부지와 해안 매립부지를 택지로 조성해 현재 모습으로 만들었단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5분, 모퉁이를 돌아서자 ‘거진 등대’의 후문이다. 거진항이 잘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이 등대는 현재 무인등대로 운영되고 있다 한다. 원래는 유인등대였지만 어로한계선이 북상되면서 조금 더 북쪽에 위치한 대진등대가 유인화되면서 1991년부터 무인등대로 전환되었단다. 때문에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고, 대신 담벼락에 그려놓은 다양한 형태의 등대들을 보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참! 등대를 우회한 탓에 ‘명태 축제비’는 구경하지 못했다. 거진항은 명태로 유명하다. 전국 명태 어획량 중 60% 이상이 이곳에서 출하된다고 한다. 명태의 종류는 다양하다. 갓 잡혔을 때는 생태, 생태를 얼리면 동태, 생태를 반쯤 말리면 코다리, 추운 겨울에 얼렸다 녹이기를 반복하면 황태, 바짝 말리면 북어, 새끼 때는 노가리라고 한다.
▼ 등대 근처 전망 좋은 곳에는 정자를 지어놓았다. 흔하지 않은 경관이니 쉬엄쉬엄 즐겨보라는 듯 벤치까지 놓아두었다.
▼ 난간에 서면 에메랄드빛 바다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발아래 해안가에는 거진항의 명물인 ‘백섬’이 자리 잡았다. ‘흰섬’이라고도 불리는 이 거대한 바위섬은 마치 칼로 조각해낸 듯 기기묘묘한 형상이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오죽했으면 그 형상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해상데크’까지 만들고 있겠는가.
▼ 해맞이봉으로 올라가는데 ‘강원도 명품길’ 안내판이 눈에 띈다. 그 옆에는 ‘화진포 해맞이 산소길’의 안내앱 설치 QR코드도 만들어놓았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이 강원도에서 선정한 ‘명품 둘레길’ 가운데 ‘화진포 해맞이 산소길’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거진항에서 응봉 정상을 거쳐 화진포성에 이르는 길이 4.3km의 이 구간은 강원도에서 공모한 '명품길'에 선정(2019년)된바 있다. '화진포 해맞이 산소길(1.9km)'과 '응봉 숲길(0.7km)', '화진포의 성 숲길(1.7km)' 등 3개 구간으로 나뉘어 있는데, ‘화진포 해맞이 산소길’은 거진항에서 ‘해맞이 다리’까지를 일컫는다.
▼ 주변을 기웃거리며 10분쯤 걸으니 ‘해맞이봉’이다. ‘거진해맞이봉 산림욕장’이라는 거대한 빗돌과 함께 2층짜리 정자를 지어놓았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조망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 전망대에서 내려와 '빨래골 체육공원'으로 향한다. 해맞이봉은 공원으로 꾸며져 있었다. 잘 가꾸어진 산책로를 축으로 체육시설과 전망대를 배치했다. 곳곳에 벤치를 놓아두었는가 하면 심지어는 화장실까지 만들어놓았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산책로 곳곳에 배치한 각종 조형물이 아닐까 싶다. 광어를 닮은 '기다림'이란 작품과 복어 형상의 '강인의 미덕', 등대 등 바다와 관련된 작품들이 보이는가 하면 이슬람 건축에서 볼 수 있는 원형정자 ‘키오스크(kiosk)’와 ‘십이지신상’도 세워놓았다.
▼ 아래 사진은 '일출, 안녕하세요'란 작품이다. 하얀 대리석에 'BUON GIORNO(봉 쥬르노)'라고 적혀있는데, 이는 ‘Good morning, Good day’의 이태리어 인사라고 한다. 근처에는 '등대, 소원의 등불'이란 작품도 있었다. 이 작품에도 'FARO'란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등대(燈臺)를 나타내는 스페인어라고 한다.
▼ 능선을 따라 걷다보면 바다를 끼고 구불구불 이어지는 해안도로의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다. 이제 막 붉은 색으로 물들어가는 산자락의 오른편으로 시원한 바다와 파도의 흰 물거품이 다양한 색깔을 그려내며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반대편인 서쪽으로는 백두대간의 마룻금이 기다랗게 펼쳐진다.
▼ 탐방로는 한마디로 곱다. 신작로처럼 길이 널찍한 것은 기본, 경사가 거의 없는데다 조금만 가파르다 싶으면 어김없이 계단을 놓았다. 그런 길을 걷다보면 ‘해오름 쉼터’의 입구와 헬기장을 지나게 되고, 매 1일과 6일에 장이 선다는 거진 전통시장으로 빠지는 길(1.5km)이 왼편으로 나뉘기도 한다. 길 찾기에 주의할 곳도 있다. '병력 하차지점' 팻말을 지나자마자 만나게 되는데, 포장도로를 벗어나 숙부인 묘지 좌측 흙길로 들어선다. 이정표의 방향표시가 다소 애매하지만 ‘화진포 소나무산림욕장’ 방향이다. 이후의 이정표들은 방향표시를 ‘응봉’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따르기보다는 이정표에 붙어있는 해파랑길 표식이나 시그널을 따르길 권한다. 해파랑길을 나타내는 다양한 표식을 찾아가는 것 또한 해파랑길을 걷는 묘미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나무에 걸려 있는 리본 패널, 가로등에 붙어 있는 고리형 패널, 바닥에 그려놓은 방향표시가 길을 알려줄 뿐 아니라 어릴 적 보물찾기하던 추억의 순간을 끄집어내주니 말이다.
▼ 그렇게 30분을 걸으니 '화진포 해맞이교'가 나온다. 길이 34m에 폭이 2.4m인 보행자 전용 사장교(斜張橋)이다. 고성 대진등대에서 울진 월송정까지 330여㎞의 도보길을 조성하는 '관동팔경 녹색경관길'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2014년에 완공했단다.
▼ ‘해맞이 다리’를 지나면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아니 ‘갈 지(之)’를 쓰고 나서야 겨우 위로 오를 수 있을 정도로 가파르다. 이 길은 한 사람이 오갈 정도로 좁기까지 하다. 하지만 소나무에서 나오는 피톤치드로 인해 깊은 숨을 저절로 내쉬게 만드는 기분 좋은 구간이다. 가파른 길보다는 좌우로 길게 우회할 수 있도록 길을 조성해 놓은 것도 소나무숲길의 매력이다. 하긴 ‘강원도 명품길’에까지 끼어있는 둘레길(해맞이교에서 응봉까지의 0.7㎞ 구간은 ‘응봉 숲길’이다)’인데 어련하겠는가.
▼ 해맞이교를 건넌지 15분 만에 응봉(鷹峰, 122m)에 올라섰다. 산의 생김새가 매가 앉은 형상과 같다고 하여 ‘매 응(鷹)’ 자를 붙여놓은 봉우리이다. 뭉툭하니 솟아오른 정상에는 정상석 외에도 정자와 싱가포르 리셴룽 총리 부부가 고성군을 방문했다는 내용의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2015년 12월 14일 개인 휴가로 고성군을 방문한 리셴룽 총리 부부는 페이스북에 통일전망대와 화진포(미니골프장, 해변, 화진포의 성, 숲길, 응봉) 일대를 방문한 글과 사진을 올렸다고 한다. ‘화진포는 아름다운 해변과 고요한 호수를 간직한 곳’이라는 설명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 두 개의 호수가 8자 모양으로 연결된 화진포의 내호와 외호, 동해, 금구도 등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정상에서의 조망은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바닷물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며 만든 석호(潟湖)와 개미허리 같은 모래사장을 사이에 두고 파도가 출렁이는 풍경이 화진포의 진가를 제대로 보여준다. 누군가는 화진포의 전체 모습을 보려면 응봉을 올라야 한다고 했다. 맞다. 정상에 서면 화진포에 왜 옛 남북 권력자들의 별장이 모여 있는지 금세 이해가 된다. 참! 호수 뒤 멀리 바위봉우리들이 보이는데 함께 걷던 일행은 ‘금강산’이라고 했다.
▼ 눈이 호사를 누렸으면 이제 산을 내려갈 차례이다. 화진포 호수를 바라보며 잠시 내려서자 응봉 정상을 오가는 인원을 체크하는 기록기가 나오고, 이어서 몇 걸음 더 걸으면 시멘트포장 임도이다. 사거리인 이곳에서 임도를 건너 직진하면 ‘화진포의 성(김일성별장)’으로 연결되고, 오른편은 ‘소나무숲산림욕장’, 그리고 왼편은 ‘화진포 호수’로 가는 길이다. 우리 부부는 왼편에 보이는 데크로드를 따르기로 했다. 지난번 여행 때 둘러봤던 김일성별장보다는 관목원과 습지원이라는 또 다른 볼거리를 눈에 담아보고 싶어서이다.
▼ 데크로드에 이어 나타나는 흙길을 잠시 걷자 ‘관목원’이 나온다. 하지만 특별히 눈에 담을만한 풍경은 없었다. ‘관목(灌木)’의 일반적인 의미처럼 자그마한 봉우리에 키 작은 나무들이 엉성하게 심어져 있을 따름이다. 그렇다고 실망할 것까지는 없다. 이어서 나타나는 소나무숲길이 이 모든 것을 보상해주고도 남기 때문이다. 양탄자처럼 보드라운 흙길만 해도 고마운데, 거기다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이라니... 이 어찌 행복하지 않겠는가.
▼ 어깨를 활짝 펴고 가능한 크게 숨을 들이킨다. 걸음은 한껏 느리게 옮긴다. 그렇게 한참을 걷자 울울창창한 소나무 숲속에 팔각정이 들어서 있다. ‘화진포 호수’의 조망을 돕기 위해 2층으로 지어놓았으나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웃자란 소나무들이 풍경화의 아랫도리를 완전히 잘라먹어 버렸기 때문이다. 참! 이 구간이 고성군의 둘레길인 ‘갈래구경(九景)길’의 제1경(관동별곡 팔백리길)이라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응봉에서 화진포관광안내소까지 이어지는데, 화진포 성과 이승만 대통령 별장 그리고 이기붕 별장이 위치한 화진포 역사안보전시관이 대표적인 볼거리다. 여기에 울창한 소나무 숲과 넓은 호수 그리고 탁 트인 바다가 어우러져 천혜의 자연경관을 선사하는 곳이기도 하다.
▼ 관목원에서 1㎞쯤 내려왔을까 이번에는 ‘습지원’이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와 돌계단이 있을 뿐 이곳도 역시 눈에 담을 만한 풍경은 없다. 살펴볼 것도 없이 다시 길을 나서니 잠시 후 ‘화진포 호수’에 이른다. 화진포(花津浦)는 초도항 바로 아래. 실제 포구는 없고 해변과 호수로 이루어진 유원지다. 모래톱에 갇힌 바다, 석호(潟湖)를 아우르는 지명이기도 하다. 해변과 폭 200~300m의 가느다란 육지로 분리된 화진포 호수는 16km 둘레에 산책길이 조성된 동해안 최대 자연호수다.
▼ 호안(湖岸) 도로를 따라 잠시 걷자 ‘화진포 생태박물관’ 입구가 나온다. 아니 역사안보전시관인 ‘김일성 별장(화진포의 성)’과 이기붕 별장, 그리고 군의 휴양시설인 ‘화진포 콘도’도 함께 들어있는 집단 시설지구이다. 입장권은 생태박물관 옆에 있는 매표소에서 팔고 있었다. ‘화진포의 성’과 이승만 별장, 이기붕 별장 등 역사안보전시관 그리고 생태박물관을 모두 둘러볼 수 있도록 통합발권 시스템으로 운영되는데 어른 기준으로 3,000원을 받는다. 관람시간은 오전 9시~오후 6시(동절기에는 오후 5시 30분)이며 연중무휴로 문을 연다.
▼ 관심분야가 아니었기에 생태박물관의 내부는 들어가 보지 않았다. 대신 외부를 둘러봤는데 '화진포에서 맺은 사랑 노래비'와 함께 고니와 털게 등 생태 조형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참고로 3개 층으로 이루어진 전시관은 각종 동물의 박제와 골격, 화석류와 영상·실물모형 등을 통해 화진포호의 생성과정과 동·식물의 생태계 등을 관찰할 수 있다고 한다.
▼ ‘화진포 관광안내소’가 들어서있는 널따란 주차장을 지나자 ‘화진포 해안’이 나온다. 이곳에는 여러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거북이’를 형상화 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화진포 앞바다에 두둥실 떠있는 ‘금구도(金龜島)’를 모티브로 삼은 모양이다. 광개토대왕의 능(陵)이라는 가설까지 적어놓은 걸 보면 말이다. 고구려 연대기에 394년(광개토대왕 3년) 화진포 거북섬에 광개토대왕의 왕릉 축조를 시작했고, 414년(장수왕 2년)에 광개토대왕의 시신을 안장했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옆에는 고성의 특산품인 ‘명태’ 조형물도 세워놓았다.
▼ ‘사랑의 열쇠’ 조형물도 보인다. ‘사랑의 열쇠’하면 떠오르는 곳이 ‘퐁네프(Pont Neuf)’이다.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로 유명해진 이 다리 난간에 ‘마법의 주문’이 담긴 열쇠가 빽빽하게 걸려 있기 때문이다. 영원한 사랑을 바라는 젊은 연인들이 매달아 놓은 자물쇠이다. 이곳을 찾은 연인들은 자물쇠를 난간에 걸고 두 손을 꼭 잡는다. 그리고 기도하듯 주문을 외운다. ‘우리 사랑 영원하게 해주소서.’ 뒤이어 열쇠를 강물을 향해 힘껏 던져버림은 물론이다. 열쇠가 없으니 자물쇠는 영원히 봉인될 것이고 그네들의 사랑도 끝없이 이어지지 않겠는가. 참고로 우리나라도 서울 남산 타워에 가면 퐁네프 못지않은 자물쇠가 주렁주렁 달려있다.
▼ 오른편에 위치한 ‘김일성 별장(화진포의 성)’은 무시하기로 했다. 그곳에 전시되고 있는 한국전쟁과 북한 관련 자료는 지난번 탐방 때 이미 둘러봤기 때문이다. 대신 찾은 곳은 ‘이기붕 별장’, 1920년대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지어진 건물로 해방 후 북한 공산당의 간부휴양소로 사용되어 오다가 휴전 후 부통령이던 이기붕(李起鵬, 1896-1960)의 처 박마리아가 개인 별장으로 사용하였으며, 1999년부터 전시관으로 개수해 운영하고 있다. 별장은 집무실과 응접실 등이 갖춰져 있으며, 주전자, 촛대, 문갑, 그리고 그들이 입었던 옷들이 보관되어 있다.
▼ 다음 행선지인 이승만 별장으로 가려면 울창한 솔숲을 지나야 한다. ‘화진포교’로 연결되는 이 길은 백 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소나무들이 꽉 들어찬 기분 좋은 숲길이다. 사람들은 이 일대 4ha의 송림(松林)을 '화진포호수 금강소나무 숲'이라고 부른다. 이곳의 소나무들은 구불거림이 적고 대체로 하나의 줄기에서 가지가 뻗어 나와 나무 자체만으로도 보기에 좋다. 나무의 키는 15m 내외이고 직경도 20~40㎝로 크진 않지만 울창하게 덮여있어 여간 상큼한 게 아니다. 하긴 ‘(사)생명의 숲 국민운동’과 산림청 그리고 유한킴벌리가 공동으로 주최한 ‘제15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공존상’까지 수상했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 남호와 북호를 잇는 물길 위에 놓인 다리(화진포교)를 건너자 단층 석조건물인 ‘이승만 별장’이 길손을 맞는다.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이 부인과 함께 수시로 찾아와 낚시를 즐기던 곳이라고 한다. 건평 89.25㎡의 자그만 이 건물은 1954년에 신축된 뒤 1961년에 폐허가 되었다가, 1997년 육군이 재건축하여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했고, 1999년부터 전시관으로 운영해오고 있다. 그의 평생의 염원이었다는 '북진통일(北進統一)'이란 휘호(揮毫)가 눈길을 끄는 내부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 등 일대기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다양한 유품이 현대적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별장 뒤 새로 지어진 건물은 이승만의 친필 휘호와 의복, 소품, 관련 도서 등이 전시되어 있는 기념관이다.
▼ 기념관을 빠져나오니 ‘화진포 호수’의 전설에 등장하는 며느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호수가 생기기 전 이곳에는 ‘열산현’이라는 고을이 있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 인색하고 성질이 고약한 이화진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어느 날 금강산 건봉사 스님이 시주를 왔더란다. 그런데 이 고약한 늙은이가 곡식 대신 소똥을 퍼 주었던 모양이다. 이를 본 며느리가 쌀을 퍼서 스님에게 시주하며 시아버지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이에 스님은 ‘나를 따라오면서 무슨 소리가 나더라도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했는데, 며느리는 고총고개에 이르러 ‘꽝’하는 하늘이 무너질 듯한 소리를 듣고 그만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그러자 하늘에서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시아버지가 살던 집과 전답이 전부 호수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참! 애통해 하던 며느리가 그만 돌이 되어버렸고, 후세 사람들이 이 심성 착한 며느리를 서낭신으로 모셨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 ‘화진포교’ 다리로 되돌아와 또 다시 호안도로를 따른다. 화진포 호수를 왼편 옆구리에 끼고 걷는 아름다운 구간이다. 화진포는 두 개의 호수가 8자 모양으로 연결된 형태다. 남호가 더 크고, 바다와 통하는 물길은 북호에 있다. 화진포교에서 15분쯤 되는 지점인데 이 물길에 놓인 다리가 ‘금구교(金龜橋)’이다. 다리 입구의 난간에는 고니 조형물이 올라앉아 있었다. 고니가 화진포 호수를 찾는 진객(멸종위기 야생조류이자 천연기념물)인지는 몰라도, 다리 이름에 걸맞게 ‘거북’으로 바뀌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다리를 건너자 배 모양으로 생긴 건물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패류박물관과 어류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는 ‘화진포 해양박물관’이다.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으나 패류박물관에서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각종 조개류와 갑각류, 산호류, 화석류, 박제 등 1,500여종 40,000여점을 전시하고 있으며, 어류전시관에서는 수중생물 125종 3,000여 마리를 각각의 서식 환경과 컨셉에 따라 보여준다고 한다. 박물관 앞 광장에는 ‘관동별곡 八백리, 답사 一번지 高城’라고 적힌 거대한 빗돌이 세워져 있었다. 고성군의 둘레길인 ‘갈래구경길’의 제1경(관동별곡 팔백리길)이 이곳에서 출발한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또한 조개 모양의 조형물이 눈에 띈다. ’거인조개(Giant Clam)‘라고 하는데 해양박물관의 특징을 살리기 위해 만들어 놓은 듯 싶다.
▼ 박물관의 앞은 ‘화진포 해변’이다. 화진포와 바다 사이의 사주(砂洲)가 발달하면서 호수와 바다 사이에 형성된 길이 1.7㎞의 백사장이다. 남한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해수욕장으로도 유명한데, 수심이 얕은데다 경사까지 완만하여 해수욕장의 조건을 고루 갖추고 있단다. 그래선지 백사장에는 금(禁)줄을 쳐놓았는데도 불구하고 꽤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 가운데 대부분은 캠핑족. ‘코로나19’로부터 피난 나온 가족들이 아닐까 싶다.
▼ 해변에 내려서면 금구도(金龜島)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이름 그대로 거북이를 쏙 빼다 닮았다. 이곳 화진포에서 바라봤을 때 거북이처럼 생긴데다, 섬 위쪽에 군락을 이루는 대나무 숲이 늦가을부터 한겨울까지 금빛을 띤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니 말이다. 다만 오늘은 금거북이가 아니고 초록거북이로 변했다는 것만 다를 뿐이다. 아무튼 금구도는 신라시대에 수군기지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를 뒷받침하듯 섬에는 화강암으로 축조된 이중 구조의 성벽과 보호벽, 방파성 등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한다. 참! 금구도는 초도항에서 열리는 '성게·바다축제' 때 일시적으로 개방된다니 시기를 맞추어 찾아보면 좋겠다.
▼ 해수욕장을 벗어나 모퉁이를 돌아서자 ‘초도항’이 모습을 드러낸다. 인근에 있는 거진항이나 대진항 등에 비해 아주 작은 규모이나 대신 한적한 어촌 풍경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자그마한 포구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작은 배들이 아기자기한 풍경을 자아낸다. 이곳은 ‘성게’ 주산지로도 유명하다. 그래선지 초도항을 나타내는 조형물도 성게를 형상화 시켰다. ‘성게’를 테마로 한 축제도 열린다고 한다. 초도어촌계가 주관하는데 성게 맨손 잡기를 비롯해 성게 높이 쌓기, 성게 무료 시식 등 성게를 활용한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진행된단다.
▼ 방파제로 들어가자 나란히 세운 ‘해녀상’과 ‘성게상’이 여행객을 반긴다. 많은 해녀들이 인근 해역에서 물질을 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했지 싶다. 두 동상 사이에는 ‘화진포에서 맺은 사랑’노래비가 있는데, 초록색 버튼을 누르면 1960년대 인기를 끌었다는 이시스터즈의 노래가 포구에 가득 울려 퍼진다.
▼ 탐방로는 이제 ‘초도1리 해변’과 ‘초도2리 해변’을 연이어 지난다. 각각의 길이가 500m 및 200m라지만 구태여 구분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아니 ‘1리 해변’이 늘상 개방되어 있는데 반해, 군사시설 보호구역인 ‘2리 해변’은 관할 군부대의 협조를 얻어 한시적으로 개장된다니 염두에 둘 필요는 있겠다. 그건 그렇고 해변은 태풍 '마이삭'이 남긴 생채기들이 곳곳에 널려있었다. 파도가 몰고 온 쓰레기들이 백사장을 뒤덮고 있는가 하면, 도로도 해조류와 모래로 어질러져 있었다. 그나마 인명피해가 없었다니 다행이라 하겠다.
▼ 대진항과 대진등대를 바라보며 걷는 길, 왼편으로 멋진 풍광이 펼쳐지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가을의 전령’. 활짝 피어난 은빛 억새꽃이 파란 하늘과 앙상블을 이루며 펄럭인다. 여름 내 초록에 밀려 서러웠던 은백색 깃털들, 깊어가는 가을 따라 드넓은 바다 위를 나를 날이 머지않았다.
▼ 바다는 낭만적이다. 쉬지 않고 들락거리며 모래밭을 애무하는 파도의 숨결, 모래사장에 촘촘히 찍힌 갈매기들의 발자국. 거기다 바닷가를 걷고 있는 아낙네들의 여유는 '낭만'으로 이끄는 손짓이다. 저 여인들은 아까 '바다는 줄곧 마음 한켠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떠벌리며 신발을 벗어들었을 것이다. 그렇다. 바다는 향수의 눅눅하면서도 따뜻한 원초적 기억을 자극하는 몸짓이다.
▼ 날머리까지는 아직도 멀다. 그 길과 잇닿아 있는 바다가 하얀 포말로 부서지며 걷는 이들에게 아는 체를 해온다. 파도와 더불어 이 길을 걷다보면 굳이 '해파랑 길'이라고 지은 이유를 깨닫게 된다. 하늘을 봐도, 그 하늘을 닮은 바다를 봐도 온통 쪽빛 푸르름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 초도항을 출발한지 40분 만에 도착한 대진항. 남방파제 바깥 활어회센터 앞에는 길이 152m(폭 6m)의 ‘해상공원’이 만들어져 있었다. 파도가 넘실되는 바다 위의 스릴과 재미를 더해준다는 곳이다. 하지만 문이 굳게 닫혀있어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 입구에서 50m쯤 떨어진 ‘Y’자 갈림길에는 그늘막 쉼터를 만들었고, Y자 좌·우측에는 안전하게 낚시를 즐길 수 있도록 낚시잔교를 설치했다. 또한 해상데크 끝에는 이층 전망대를 설치해 아름다운 대진항과 청정 동해바다를 조망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그늘막 쉼터에서는 인근 활어회 센터에서 구입해 온 회를 먹을 수도 있단다.
▼ 대진항(大津港)은 동해안 최북단에 위치한 1종 어항이다. 북위 38°30′. 그러니까 삼팔선이라 부르는 휴전선이 곧게 그어졌다면 북한 땅이 되었을 곳이다. 우리나라 지도를 세로로 접으면 서해 최북단 섬인 백령도에서 북쪽으로 50km나 떨어진 황해남도 과일군이 대진항의 대칭점이 된단다. 그건 그렇고 대진항은 명태가 많이 잡히는 항구로 유명하다. 지금은 예전보다 줄어들기는 했지만, 아직도 700여 척의 어선이 드나드는 동해안의 대표적인 어항이라고 한다. 하지만 요즘은 문어가 대세인 모양이다. ‘저도어장 대문어 축제’까지 열리는 걸 보면 말이다. 맞다. 문어는 바위에 붙어산다. 그러니 기암괴석이 많은 고성은 문어로 유명할 수밖에 없다. 그것도 ‘대왕문어’로 말이다. 어느 요리평론가는 죽기 전에 먹어야 할 음식으로 이곳 대왕문어를 꼽기도 했을 정도이다.
▼ 대진항에 들어서는데 ‘청진호’란 횟집 간판에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채널A’의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패널로 고정 출연하는 ‘박명호’씨이다. 북한에서 20년간 직업군인으로 살다가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귀순한 그는 북한군에서의 경험을 살려 ‘머구리’로 삶을 이어가고 있다고 했다. ‘머구리’란 잠수복과 투구, 신발과 납으로 만든 추까지 60㎏에 이르는 장비를 갖추고 해저 30m에 내려가 해산물을 채취하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어로방식이다. 문어와 우럭, 해삼, 홍합, 소라, 성게 등 목숨을 담보로 잡아온 해산물을 저 ‘청진회 횟집’에 파는 것이다. 하지만 직접 먹어보지는 못하고 인사만 나눈 뒤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함께 걷던 갑장이 찾는 ‘성게’는 제철이 아니었고, 준비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활어회는 그럴만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 속초해양경찰서 대진출장소 앞을 지나서 왼편 대진등대로 오르는 길로 들어선다. 우리나라 최북단의 등대인데 어찌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팔각형 콘크리트 구조로 지어진 이 등대는 설치 당시 1개의 유인등대와 또 다른 보조 등대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대진등대가 설치된 목적이 어로한계선을 표시하는 도등(2개의 등대를 연결하는 선이 어로한계선)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란다. 그러다 지난 1991년 어로한계선을 북쪽으로 5.5㎞으로 상향 조정하면서 도등의 역할을 마치고 1993년부터 일반 등대로 전환했단다.
▼ '대진등대'를 둘러본 뒤 다시 해파랑길을 따른다. ‘금강산 콘도’를 바라보며 걷는 이 구간은 ‘대진1리 해변’을 오른편 옆구리에 차고 걷는다. 등대 형상의 환기구를 단 화장실이 눈길을 끄는 이 해변은 희고 고운 모래가 350m나 깔려 있는데다 수심까지 얕다는 장점을 갖고 있으나 군사시설 보호구역이라서 해수욕장 개장기간에만 개방된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텅 비어있는 해안가를 10분 남짓 걸었다 싶으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금강산 콘도’가 나타난다.
▼ 금강산 콘도를 지나자 이번에는 ‘마차진 해변(麻次津 海邊)’이 나온다. 백사장의 길이가 240m라는 이 해변도 수심이 얕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곳은 ‘대진1리 해변’보다도 훨씬 더 엄중한 모습이다. 아까는 여염집 담장 같은 울타리로 막혀있었는데, 이곳은 아예 군의 경계용 철조망으로 꽁꽁 막아놓았다. 그래선지 이곳도 역시 텅 비어있었다. 참! 이곳은 ‘무송정해수욕장’으로 불리기도 한단다. 해안이 무송대(茂松臺)라는 섬으로 이어지면서 활처럼 휘어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은 무송대를 일러 ‘바닷가에 우뚝 솟은 봉우리가 있으니 전에는 송도(松島)라고 하였으며 송림이 무성하고 모랫길로 육지와 이어지고 바닷물이 불으면 섬에 들어갈 수 없으며 파도가 치면 모래가 스치는 소리가 난다(沙鳴)’고 적었다. 또한 무송부원군 윤자운(茂松府院君 尹子雲)이 관동지방을 순시하면서 이 섬에 머물러 갔다고 해서 무송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했다.
▼ 트레킹 날머리는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고성군 현내면 마차진리 188)
삭막한 풍경의 마차진해변이 끝나자 'GS 주유소'가 나오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트레킹이 종료되는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에 이른다. 통일전망대는 이곳에서 신고를 마친 뒤 10분 정도의 안보교육을 받아야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총 14.5㎞를 걸었다. 핸드폰의 앱에 찍힌 시간은 4시간, 시간당 4㎞를 못 걸었으니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고 보면 되겠다. 참고로 해파랑길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은 신고소로 들어오는 입구 오른편 모서리에 통일전망대 안내판 및 민족통일대장군·민족공조여장군 장승과 함께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