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 고려사 : 열전 정지[ 鄭地 ] 鄭地, 初名准提, 羅州人. 刑貌魁偉, 性寬厚. 幼有大志, 好讀書, 通大義, 與人解說, 豁如也. 出入常以書籍自隨. 恭愍二十三年, 檢校中郞將李禧上書, 請習水戰, 王慨然曰, “禧草野之臣, 尙獻策如此, 百官衛士中, 曾無一人如禧者耶?” 衛士柳爰廷進曰, “中郞將鄭准提, 嘗草平寇策, 第未獻耳.” 地以速古赤, 適侍殿陛, 王顧問, 地卽取諸囊中以獻. 王覽之大悅, 以地爲全羅道安撫使, 禧爲楊廣道安撫使, 並兼倭人追捕萬戶. 崔臣吉·朴德茂等亦上書, 如李·鄭策, 以德茂爲京畿倭人追捕副使. 謂宰相曰, “今爵禧等, 卿等勿以爲異. 冀其成功, 激人心耳. 他日無功, 亦當不赦.” 又授地麾下士八十五人, 禧麾下士六十七人, 添設職, 令密直司, 給地·禧千戶空名牒二十, 百戶牒二百. 時地與禧, 再三上, 凡數十條, 其略以爲, “深陸之民, 不閑舟楫, 難以禦倭. 但簽生長海島及自請水戰者, 令臣等將之, 期以五年, 可淸海道. 若都巡問使, 則徒費軍餉擾民生, 乞罷之.” 王召巡察使崔瑩議之. 瑩初巡察六道, 造戰艦二千艘, 欲令諸道軍捕倭, 民皆厭苦, 破家逃散者十之五六. 至是, 以地等建白, 事遂寢. 辛禑三年夏, 倭寇順天·樂安等處, 地以禮儀判書, 爲順天道兵馬使擊之, 斬十八級, 擒三人. 遣判事鄭良奇獻捷, 禑喜賜良奇白金五十兩, 其母米十碩, 地鞍馬·羅絹. 冬又擊倭, 斬四十餘級, 擒二人, 遣判事鄭龍獻捷, 禑賜龍布二百五十匹·馬一匹. 四年, 倭寇靈光·光州·同福等處, 地與都巡問使池湧奇·助戰元帥李琳·韓邦彦等, 追及玉果縣. 賊入彌羅寺, 我軍圍而火之, 遂縱擊, 賊自焚死殆盡, 獲馬百餘匹. 是戰, 地之功居多. 捷至, 賜地及湧奇, 銀各五十兩. 倭又寇潭陽縣, 地與湧奇擊之, 斬十七級, 尋爲全羅道巡問使. 八年, 爲海道元師, 倭舶五十艘入鎭浦, 地擊走之, 追至群山島, 獲四艘. 九年, 又與倭戰, 大破之, 禑賜金帶一腰·白金五十兩. 時方春, 疾疫大興, 舟師物故大半. 有死海上者, 輒出陸以葬, 士卒無不感咽. 地有疾, 禑遣散騎河忠國, 齎酒問慰. 地師戰艦四十七艘, 次羅州木浦, 賊以大船百二十艘來, 慶尙道沿海州郡大震. 合浦元師柳曼殊告急, 地日夜督行, 或自櫂, 櫂卒益盡力. 到蟾津, 徵集合浦士卒, 賊已至南海之觀音浦, 使覘之, 以爲我軍懦. 適有雨, 地遣人禱智異山神祠曰, “國之存亡, 在此一擧, 冀相予, 無作神羞.” 雨果止. 賊旗幟蔽空, 劍戟耀海, 四圍而前. 地叩頭拜天, 俄而風利. 中流擧帆, 船疾如飛, 至朴頭洋. 賊以大船二十艘爲先鋒, 艘置勁卒百四十人. 地進攻, 先敗之, 浮屍蔽海. 又射餘賊, 應弦輒倒, 遂大敗之, 發火炮, 焚賊船十七艘. 兵馬使尹松, 中箭死. 地謂將佐曰, “吾嘗汗馬, 破賊多矣, 未有如今日之快也.” 捷音至, 禑大喜, 遣李克明·安沼連, 賜宮醞以勞之. 軍器尹房之用, 奉使日本, 還道遇倭賊, 被獲鎖頸, 置船底. 及是戰, 賊曰, “若不勝, 必先斬之.” 戰罷, 賊徒盡殲, 而之用乃免. 地以病辭, 未幾, 知門下府事, 請造戰艦于諸道以備倭, 從之. 尋爲海道都元帥楊廣全羅慶尙江陵道都指揮處置使.
十年, 拜門下評理, 禑遣宦者金實, 責地曰, “都統使崔瑩造戰艦, 備水戰, 加以火炮, 其慮周矣. 卿爲海道元帥比來, 倭寇侵擾州郡, 未能掃平, 罪實在卿.” 地頓首謝. 十三年, 地上書, 自請東征曰, “近中國聲言征倭, 若並我境, 分泊戰艦, 則非惟支待爲艱, 亦恐覘我虛實. 倭非擧國爲盜, 其叛民據對馬·一歧諸島, 近我東鄙, 入寇無時. 若聲罪, 大擧先攻諸島, 覆其巢穴, 又移書日本, 盡刷漏賊, 使之歸順, 則倭患可以永除. 中國之兵, 亦無因而至矣. 今之水軍, 皆善水戰, 非辛巳東征蒙漢兵不習舟楫之比, 若順時候風而動, 則易以成功. 但船久則朽, 師老則疲, 且今船卒, 困於傜賦, 日思逃散, 宜乘此機, 決策蕩平, 不可遲疑.” 十四年, 禑遣我太祖攻遼, 地以安州道都元帥隷焉, 遂從太祖回軍. 時倭寇三道, 自夏至秋, 屠燒州郡, 將帥守令, 莫有禦者. 以地威名讋倭寇, 命爲楊廣全羅慶尙道都指揮使, 與諸將往擊之. 倭自咸陽, 踰雲峯八羅峴, 至南原, 地帥都巡問使崔雲海, 副元帥金宗衍, 助戰元帥金伯興, ▶陳元瑞, 全州牧使金用鈞, 楊廣道上元帥都興, 副元帥李承源等, 奮擊大破之, 斬五十八級, 獲馬六十餘匹. 賊夜遁, 地以諸軍無食, 不能追. 時人謂, “非此戰, 則三道民幾盡矣.” 禑賜宮醞段絹.
恭讓元年, 爲楊廣全羅慶尙道節制體察使, 兼總招討營田繕城事. 金佇與邊安烈等, 謀迎辛禑, 事覺, 地以辭連, 流于外. 二年, 遣左獻納咸傅霖, 鞫地于雞林, 臺諫抗, 請論以法, 乃徙橫川. 臺諫復論駁不已, 又徙遠地, 事具安烈傳. 尹彝·李初之獄起, 地逮繫淸州, 栲訊不服曰, “李侍中仗義回軍, 吾以伊·霍故事, 諷侍中, 深有意爾, 復何黨彝·初歟? 言必誓天.” 辭旨感慨, 有足動人者, 獄官不能取辭.地退謂人曰, “人生會有一死, 生何足惜? 但王氏復國, 而死非其罪, 是可痛也.” 明日, 將峻刑鞫之, 以水災免. 三年, 錄回軍功爲二等, 賜錄卷及田五十結. 臺省·刑曹議奏曰, “地以黨安烈坐罪, 實爲誣枉.” 遂釋之. 退居光州別業, 召判開城, 未赴病卒, 年四十五. 謚景烈, 子耕. 국역 고려사 : 열전 정지[ 鄭地 ] 정지(鄭地)는 처음 이름이 정준제(鄭准提)이며 나주(羅州 :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 사람이다. 풍모가 장대했으며 성품이 관후했다. 어려서부터 큰 뜻을 가져 독서를 즐겼는데 책에 나오는 대의에 통달해 남들이 그 설명을 들으면 모든 의문이 시원히 풀렸다. 또 드나들 때 항상 서적을 지니고 다녔다.
공민왕 23년(1374), 검교중랑장(檢校中郞將) 이희(李禧)가 글을 올려 수전(水戰)을 훈련해야 한다고 건의하자 왕이,
“이희는 초야에 묻힌 신하이면서도 이런 훌륭한 전략을 올렸는데, 백관과 위사(衛士) 가운데는 아무도 이희 같은 사람이 없단 말인가?” 하고 탄식했다. 이에 위사 유원정(柳爰廷)이 나서서, 중랑장 정준제가 왜구를 평정할 전략을 기초한 적이 있으나 올리지 못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정지가 쉬구치[速古赤]로 전각 계단에서 왕을 호위하고 있었는데 왕이 돌아보고 정말 그러한가라고 묻자 즉시 자신이 만든 전략초안을 주머니에서 꺼내어 바쳤다. 왕이 읽어 보고 크게 기뻐하며 정지를 전라도 안무사(安撫使)로, 이희를 양광도 안무사(安撫使)로 삼아 모두 왜인추포만호(倭人追捕萬戶)를 겸하게 하였다. 최신길(崔臣吉)과 박덕무(朴德茂) 등도 글을 올렸는데 이희와 정지의 계책과 같았으므로 박덕무를 경기왜인추포부사(京畿倭人追捕副使)로 삼았다. 그리고 재상들을 이렇게 다독였다.
“지금 이희 등에게 높은 벼슬을 준 것에 대해 경들은 괴이하게 여기지 말라. 그들이 공을 이루고 민심을 분발시키기를 바랄 뿐이다. 장차 전공을 세우지 못하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또 정지 휘하의 군사 85명과 이희 휘하의 군사 67명에게 첨설직(添設職)을 주었으며 밀직사(密直司)에게 명해 정지와 이희에게 천호공명첩(千戶空名牒) 스무 개와 백호공명첩(百戶空名牒) 2백 개를 주도록 하였다. 당시 정지와 이희가 두세 번에 걸쳐 모두 수십 조에 달하는 전략을 올렸는데, 그 개략은 이러하다.
“내륙에 사는 백성은 배를 부리는데 익숙하지 못하니 왜구를 막기 어렵습니다. 바닷섬에서 나고 자랐거나 해전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자만 등록시켜 저희들로 하여금 그들을 지휘하게 하면 5년 내에 바닷길을 깨끗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도순문사(都巡問使) 같은 관직은 군량을 허비하고 민생을 소란하게 할 뿐이니 바라옵건대 그것을 없애소서.”
왕이 순찰사(巡察使) 최영을 불러 그 전략에 대해 의논하였다. 최영이 애초 여섯 도(道)를 순시한 후 전함 2천 척을 건조해 각 도의 군사들로 하여금 왜구를 잡게 하려는 전략을 세웠는데, 백성들이 모두 지긋지긋해 하고 고통스럽게 여긴 나머지 집을 부수고 달아나는 자가 열에 대여섯이었다. 이러한 때 정지 등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사태가 수습되었다.
우왕 3년(1377) 여름, 왜구가 순천(順天 : 지금의 전라남도 순천시)·낙안(樂安 : 지금의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등지를 침략하자 정지가 예의판서(禮儀判書)로서 순천도병마사(順天道兵馬使)가 되어 적을 격파해 열여덟 명의 목을 베고 세 명을 사로잡았다. 판사(判事) 정양기(鄭良奇)를 보내어 승첩을 보고하자 우왕이 기뻐하며 정양기에게 백금 50냥을 하사하고 그의 모친에게 쌀 10석을 주었으며, 정지에게는 안마(鞍馬)와 나견(羅絹)을 하사하였다. 겨울에 또 왜구를 공격하여 40여 명의 목을 베고 두 명을 사로잡은 후, 판사 정용(鄭龍)을 보내어 승첩을 보고하니 우왕이 정용에게 베 2백 필과 말 한 필을 하사했다.
4년(1378), 왜구가 영광(靈光 : 지금의 전라남도 영광군)·광주(光州 : 지금의 전라남도 광주직할시)·동복(同福 : 지금의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 등지를 침략해 오자 정지가 도순문사(都巡問使) 지용기(池湧奇) 및 조전원수(助戰元帥) 이림(李琳)·한방언(韓邦彦) 등과 함께 옥과현(玉果縣 : 지금의 전라남도 곡성군)까지 추격했다. 적이 미라사(彌羅寺)로 들어가자 아군이 포위한 후 불을 지르고 마구 공격하니 적은 대부분 불에 타 죽었으며 말 백여 필을 노획했다. 이 전투에서 정지의 공이 가장 컸기 때문에, 승첩을 보고하자 정지 및 지용기에게 각각 은 50냥을 하사하였다. 왜구가 다시 담양현(潭陽縣 : 지금의 전라남도 담양군)을 침략했으나 정지와 지용기가 격파해 열일곱 명의 목을 베었다. 곧이어 정지는 전라도 순문사(巡問使)가 되었다.
8년(1382), 해도원수(海道元帥)가 되었는데, 왜선 50척이 진포(鎭浦 :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군)로 들어오자 정지가 공격하여 그들을 쫓아내고 군산도(群山島 : 지금의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까지 추격하여 배 네 척을 포획하였다. 9년(1383), 또 왜구와 싸워 크게 쳐부수니 우왕이 금대(金帶) 1개와 백금 50냥을 하사하였다. 때가 마침 봄이라 전염병이 크게 창궐해 수군 가운데 죽은 자가 태반이었다. 바다에서 죽은 자가 있으면 그때마다 육지로 나가 장사를 지내주니 군사들이 다들 감격하여 울었다. 정지가 병이 들자 우왕은 산기(散騎) 하충국(河忠國)을 보내어 술을 가지고 가서 위문하게 하였다. 정지가 전함 47척을 거느리고 나주(羅州 :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목포(木浦 : 지금의 전라남도 목포시)에 주둔하고 있던 차에 적이 큰 배 120척을 거느리고 경상도로 침략해 오니 바닷가의 고을들이 크게 동요하였다. 합포원수(合浦元帥) 유만수(柳漫殊)가 위급함을 알리자 정지는 밤낮으로 진군을 독려하면서 어떤 때는 스스로 노를 젓기까지 하니 노젓는 군사가 더욱 힘을 다하였다. 섬진(蟾津 : 지금의 섬진강)에 도착하여 합포(合浦 : 지금의 경상남도 마산시)의 군사들을 징집하니 적은 벌써 남해(南海) 관음포(觀音浦 : 지금의 경상남도 남해군)에 이르러 우리 군세를 정찰하고는 아군이 약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마침 비가 내리자 정지는 지리산(智異山) 신사(神祠)에 사람을 보내,
“나라의 존망이 이번 싸움에 달려 있으니 바라옵건대 저를 도와서 신령께서는 스스로 수치를 만들지 마소서.” 라고 기도했더니 비가 과연 그쳤다.
적의 깃발이 하늘을 가리고 칼과 창이 온 바다에 번쩍이는 가운데 적은 사방으로 에워싸고 전진해왔다. 정지가 머리를 조아리고 하늘에 절을 하자 얼마 뒤에 바람이 아군에 유리하게 바뀌었다. 바다 가운데에서 돛을 올리니 배가 날아가는 것처럼 빨리 달려 박두양(朴頭洋)에 이르렀다.
적은 큰 배 20척을 선봉으로 삼고 배마다 강한 군사 140명씩을 태우고 있었다. 정지가 진공해 먼저 그들을 쳐부수자 떠있는 시체가 바다를 덮었다. 또 남은 적을 활로 쏘니 쏘는 족족 거꾸러져 마침내 크게 적을 격파했으며 화포를 쏘아 적선 17척을 불태웠다. 이 전투에서 병마사(兵馬使) 윤송(尹松)이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전투가 끝난 후정지가 장좌(將佐)들에게,
“내가 이전에도 전쟁터에서 많은 적을 격파했지만 오늘처럼 통쾌한 적은 없었다.” 고 토로했다. 승전 보고가 올라오자 우왕은 크게 기뻐하며 이극명(李克明)과 안소련(安沼連)을 보내어 궁중의 술을 하사하고 노고를 치하했다. 군기윤(軍器尹) 방지용(房之用)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하던 길에 왜적을 만나 포로가 되어 목에 자물쇠가 채워진 채 배 밑에 갇혀 있었다. 전투가 벌어지자 적들은, “만약 이기지 못하면 반드시 너를 먼저 죽여버릴 것이다.”라고 을렀는데, 싸움이 끝나자 적들이 모조리 섬멸되어버렸기 때문에 방지용은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정지는 병 때문에 사직했다가 얼마 뒤에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가 되자, 각 도에서 전함을 만들어 왜구에 대비할 것을 건의해 허락을 받았다. 얼마 후 해도원수(海道元帥), 양광(楊廣)·전라(全羅)·경상(慶尙)·강릉도(江陵道) 도지휘처치사(都指揮處置使)로 임명되었다.
10년(1384), 문하평리(門下評理)로 있을 때 우왕이 환관 김실(金實)을 정지에게 보내,
“도통사(都統使) 최영은 전함을 건조해 해전에 대비하고 화포까지 장착해 주도면밀하게 대응했다. 그런데 경이 해도원수로 있는 요즈음은 왜구가 고을들을 침략해도 소탕하지 못하니 이는 실로 경의 죄다.” 라고 책망하니 정지가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였다. 13년(1387), 정지가 글을 올려 스스로 대마도 정벌을 자청했다.
“근래 중국이 왜를 정벌한다고 공언하고 있는데 만약 그들이 우리 영토에까지 전함을 분산해 정박시킨다면 각종 물자를 뒷받침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또한 그들이 우리의 허실을 엿보게 될 것이 우려됩니다. 왜는 온 나라가 도적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 반도들이 대마도와 이끼도[一岐島](지금의 나가사키현[長岐縣] 이끼도[壹岐島])에 웅거해 가까운 우리 동쪽 변방으로 무시로 들어와 노략질 하는 것입니다. 그 죄를 세상에 공표한 다음 대군을 동원해서 먼저 여러 섬들을 공격해 그 소굴을 전복시킨 다음, 일본에 공문을 보내 빠져 달아난 적을 쇄환해 귀순시킨다면 왜구의 우환이 영원히 제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중국의 군대가 우리 영토로 올 이유도 없어질 것입니다. 현재 우리 수군은 모두 해전에 익숙해 신사년 일본 정벌 당시 몽고병과 한병(漢兵)이 배에 익숙하지 못했던 것과 비교할 바가 아니니 만약 적절한 때에 순풍을 기다렸다가 기동한다면 쉽게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배가 오래되면 썩고 군사가 오래되면 피로해 질 것이며 또한 지금 수군이 군역에 지쳐 날마다 도망칠 생각만 하고 있으니, 이 기회를 타서 전략을 세워 소탕해야지 더 이상 늦추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14년(1388), 우왕이 우리 태조를 보내 요동을 공격할 때 정지는 안주도원수(安州都元帥)로서 태조의 휘하에 있었는데, 결국 태조를 따라 회군하였다. 마침 왜구가 세 도(道)를 침략해 여름부터 가을까지 주(州)·군(郡)의 사람들을 죽이고 불태워도 장수와 수령 가운데 막아낼 자가 없었다. 왜구가 정지의 위세와 명성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를 양광(楊廣)·전라(全羅)·경상도(慶尙道) 도지휘사(都指揮使)로 임명해 장수들과 함께 가서 공격하게 하였다. 왜구가 함양(咸陽 :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으로부터 운봉(雲峯 : 지금의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면) 팔라현(八羅峴)을 넘어 남원(南原 : 지금의 전라북도 남원시)에 이르자, 정지는 도순문사(都巡問使) 최운해(崔雲海), 부원수(副元帥) 김종연(金宗衍), 조전원수(助戰元帥) 김백흥(金伯興)과 ▶진원서(陳元瑞), 전주목사(全州牧使) 김용균(金用鈞), 양광도(楊廣道) 상원수(上元帥) 도흥(都興), 부원수(副元帥) 이승원(李承源) 등을 거느리고 분전해 적을 대파했으며 58명의 목을 베고 말 60여 필을 노획했다. 적이 밤중에 달아났으나 정지는 군량이 떨어져 추격을 중지시켰다. 당시 사람들은, “이번 전투에 이기지 못했다면 삼도의 백성은 거의 다 죽었을 것이다.”라며 안도했다. 우왕은 궁중의 술과 단견(段絹)을 하사하였다.
공양왕 원년(1389), 양광(楊廣)·전라(全羅)·경상도(慶尙道) 절제체찰사(節制體察使) 겸 총초토영전선성사(總招討營田繕城事)가 되었다. 당시 김저(金佇)가 변안열(邊安烈) 등과 함께 우왕을 복위시키려고 모의하다가 발각되었는데, 정지의 이름이 그들의 공술에 나온 관계로 외지로 유배되었다. 2년(1390), 좌헌납(左獻納) 함부림(咸傅霖)을 파견해 정지를 계림(鷄林 :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에서 국문했으며 대간이 항소해 법에 따라 논죄할 것을 청하자 횡천(橫川 : 지금의 강원도 횡천군)으로 옮겼다. 대간이 거듭 논박하자 다시 더 먼 곳으로 옮겼는데, 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변안열전」에 나와 있다. 윤이(尹彛)와 이초(李初)의 옥사가 일어나자 정지는 청주(淸州 :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그는,
“이시중(이성계)이 대의를 바탕으로 회군할 때, 내가 이곽(伊霍)의 고사를 들어 시중에게 풍간한 것은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이니, 그런 내가 어찌 윤이와 이초 같은 자들과 일당이 되겠는가? 하늘에 맹세하고 하는 말이다.” 라며 자복하지 않았다. 그 말의 지닌 의미가 마음 속 깊은데서 우러난지라 능히 사람을 감동시켰기에 옥관(獄官)도 더 이상 진술을 받아내지 못했다. 정지가 물러 나와 사람들에게,
“사람이 나서 한 번은 죽는 법이니 목숨이 무어 그리 아깝겠느냐? 다만 왕씨가 다시 왕위에 올랐는데도 억울하게 죽는 것이 비통할 따름이다.” 고 말했다. 이튿날 혹독한 고문을 가해 국문하려 했으나 마침 물난리가 나서 죽음을 면했다.
3년(1391), 회군의 공으로 이등공신이 되었고 녹권과 토지 50결을 하사받았다. 대성(臺省)과 형조(刑曹)에서, 정지가 변안열과 같은 일당이라 하여 죄를 받은 것은 기실 억울한 모함이라고 간언해 마침내 풀려나게 되었다. 광주(光州 : 지금의 광주직할시) 전장[別業]으로 물러가서 살다가 판개성(判開城)으로 소환되었으나 부임하지도 못하고 병으로 죽으니 나이 마흔다섯이었다. 시호를 경렬(景烈)이라고 하였으며 아들은 정경(鄭耕)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지 [鄭地] (국역 고려사: 열전, 2006. 11. 20., 경인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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