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마을, 가버나움의 축복과 비극
마태복음4:12-17
2019년에 개봉된 ‘가버나움’ 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리뷰를 통해서 조금 알고 있을 뿐 처음부터 끝까지 본 적은 없습니다.
영화는 주인공 자인이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님을 고소하고 싶어요.’하는 말로 시작됩니다.
칼로 사람을 찌르고 교도소에 갇힌 12살 소년 자인은 왜 부모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까요?
이유를 묻는 판사에게 자인은 ‘태어나게 했으니까요. 이 끔찍한 세상에 태어나게 한 게 그들이니까요.’ 라고 대답을 합니다.
영화는 몇 명인지 알 수 없는 아이들이 뒤엉켜 사는 혼란스런 집안 모습에서 시작해서
강한 자들만이 살아남는 비열한 거리에 내몰려 갈 곳 없는 아이들의 모습을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레바논의 도시 베이루트와 그곳 사람들의 모습 특히 시리아 난민들의 끔직한 삶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실제로 주인공인 자인은 베이루트 거리에서 배달 일을 하던 10세 소년이었고,
동생 역을 맡은 여자 아이는 시리아 난민 출신으로 거리에서 껌을 팔던 소녀였습니다.
제가 이 영화를 생각하면서 주목했던 한 가지가 있습니다.
지금의 베이루트와 그 곳 사람들의 참혹한 모습을 그린 영화의 제목이 왜 ‘가버나움’이냐는 것입니다.
가버나움은 지금의 베이루트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혹시 지금의 베이루트와 성서시대의 가버나움이 비슷했다고 생각을 한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 당시 가버나움은 다메섹에서 이집트, 지중해까지 잇는 해안도로가
통과하여 상업과 어업, 무역이 성행하던 국경도시였습니다.
어업과 수입 관세로 상당한 수입을 얻었기에 세관도 있었습니다.
세리 마태도 가버나움 세관에서 일하다가 주님의 부름을 받은 제자였습니다.
로마 군대가 주둔할 정도로 가버나움은 겉으로는 흥왕하고 번성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내면의 모습은 겉으로 보여 지는 모습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마 11:23~24)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가버나움을 소돔에 빗대어 말씀하신 것을 보면
또한 소돔성보다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내면의 모습은 겉모양과는 달리 가버나움의 영화에 나오는
베이루트 뒷골목의 처참한 모습을 갖고 있었지 않는가?
그래서 베이루트의 처참한 모습을 그린 영화를 만들면서
그 제목을 ‘가버나움’으로 정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집니다.
가버나움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746년 이스라엘을 덮친 지진의 여파로 폐허가 되기 시작했고 급기야 16세기에는 세상에서 완전한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1838년 미국의 성서학자이며 탐험가인 에드워드 로빈슨이 돌무더기로 방치돼 있던 폐허를 발견하고 발굴 작업에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회당과 베드로의 집터 등 신약시대의 유적이 발견되면서 성경 속 가버나움인 것이 확증되었습니다.
지금 가버나움 유적지에 가면 ‘예수의 마을, 가버나움’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버나움은 예수의 마을이라고 불릴 정도로 예수님과 큰 인연을 갖고 있었습니다.
먼저,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곳입니다.
13절 말씀을 보면,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했습니다.
예수님의 고향은 나사렛이었지만 고향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했기에
주님은 그곳을 떠나시고 가버나움에서 사셨습니다.
그곳에서 비로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면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요한이 헤롯에게 잡히는 것을 기점으로 시작됩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이 보내셔서 메시아의 오심을 증거하고 준비시켰던 마지막 선지자였습니다.
그 선지자가 감옥에 투옥됨으로 더 이상 활동을 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더 이상 세례요한의 활동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메시아의 오심은 이미 선포되었고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므로 메시아 맞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마음이 충만했습니다.
요한은 할 일을 다 했고 이제 남은 것은 메시아가 등장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 메시아의 길을 시작하신 곳이 바로 가버나움입니다.
가버나움에서의 시작은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일찍이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를 향하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고 예언하였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오셔서 메시아의 길을 시작하심으로 이 예언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시대부터 당시까지 무시 받던 이방의 갈릴리 지방에서 빛이 되시는 메시아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역의 특징입니다.
주님은 무시 받고 천대받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이방의 갈릴리 지역인 가버나움을 찾으셔서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나라가 받은 축복이고 우리가 받은 축복인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사는 곳 어디인들 흑암이 아닌 곳이 있으며 사망의 땅과 그늘이 아닌 곳이 있겠습니까? 마는
조선 말기 우리나라의 형편이 바로 이와 똑같았습니다.
정연희 씨가 쓴 소설 ‘양화진’에 보면 당시의 형편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혼돈의 구역,
메말라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은 옮겨와 앉았습니다.
그 넓고 넓은 바다와 대륙을 지나 어떻게 건너 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 곳,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의 영과 권력의 야욕과 인습에 묶여 있는 사람들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 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담배연기 너머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질 않습니다.
이 나라 권세들의 내심도 보이질 않습니다.
검은 천으로 가려진 여자들에게는 복음을 전할 기회가 영영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어둠이 가득차서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는 곳을 하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가버나움을 찾아오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아 있는 조선을 불쌍하게 여기사 이 땅을 찾아오셨고 수많은 선교사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흑암에 앉아있던 조선백성들에게 주신 한줄기의 빛이었습니다.
그 복음의 빛이 우리나라를 살렸고 지금 이렇게 잘 사는 나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아 있던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가 찾아오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했다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심으로 복음을 전해주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이 얼마나 큰 은혜고 축복인지 모릅니다.
찾아오신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게3:20) 했습니다.
주님을 영접할 때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동행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축복이고 구원입니다.
가버나움의 축복은 메시아이신 주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가버나움은 예수님 사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가버나움을 거점으로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등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얼마나 많은 기적을 행하였는지 마태복음 11장에서
‘네게 행한 일을 소돔에서 행하였다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을 것이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 악한 소돔성이 회개할 정도로 많은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 예수 그리스도가 말하자,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 다시 살아났습니다.
-12년간 혈루증을 앓아온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옷에 손을 대자 병이 나았습니다.
-지붕에서 침상 채 내려진 중풍병자는 죄 사함 받아 스스로 일어나 침상을 가지고 걸어 나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중풍병에 걸린 백부장의 하인과 열병으로 앓아누운 베드로의 장모 등 온갖 병자들을 다 고쳤고,
-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다 위를 걷는 이적을 행한 곳도 가버나움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가버나움은 예수 사역의 중심지였고 수많은 기적과 능력을 베풀었던 곳이었습니다.
저는 가버나움이 받은 이러한 축복이 한국교회가 받은 축복이라고 믿습니다.
복음이 이 땅에 전파되면서 얼마나 많은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성령의 역사로 수많은 병자들이 일어나고 귀신들이 쫓겨 가고 기도원마다 차고 넘쳤습니다.
성령의 은사가 집회마다 임하면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교회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했고 세계 10대 교회는 다 한국에 있었습니다.
세계교회의 성장의 모델이 되어서 수많은 외국사람들이 한국교회를 배우기 위하여 찾아왔습니다.
유럽교회의 전성시대가 끝나고 미국교회도 쇠퇴기에 접어들면서 한국교회가 이제 세계 중심에 서게 되었다고 자랑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축복입니다.
가버나움에 베풀었던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한국교회에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한국교회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운데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기적의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세 번째로, 그런데 가버나움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 많은 일들과 기적들을 행하셨음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마 11:23~24)
전통적으로 가장 악했다고 하는 소돔사람들도 회개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많은 기적을 경험했으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악한 도시가 가버나움이었습니다.
소돔성의 악한 모습보다 더 악한 곳이 가버나움이었습니다.
심판 날에 소돔 땅보다 더 심한 고통을 받게 될 정도로 가버나움은 회개하지 않았고 죄악 된 모습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 후 가버나움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주후 746년에 일어난 지진으로 폐허가 되었고
세상에서 종적을 감추어버리고 지금은 하나의 유적지로만 남았습니다.
가버나움은 ‘예수의 마을’에서 ‘신도 버린 마을’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가버나움의 축복과 비극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정말 복 있는 삶이되기 위해서는 처음보다 나중이 좋아야 합니다.
가버나움은 축복으로 시작해서 비극으로 끝난 안타까운 도시였습니다.
이런 가버나움의 안타까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버나움에서 첫 번째로 선포하신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회개는 나의 잘못된 삶을 깨닫고 고백하고 삶의 방향을 180도로 바꿔서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향하여 사는 것을 말합니다.
천국의 삶을 누리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바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버나움을 향한 말씀일 뿐 아니라 오늘 우리들, 한국교회를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단적으로 말씀드려서 한국 교회가 가버나움같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이렇게 성장했고
세계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고 세계교회의 성장의 모델로 자리매김했었지만
그동안 우리는 얼마나 교만했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나누지 못하고 우리만 잘 사는 모습으로 흥청망청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이 어려운 시대에 시대적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 잘못은 얼마나 큽니까?
진영논리로 나누어지면서 서로 헐뜯고 비방하는 일에 얼마나 힘을 쏟았습니까?
세계 선교의 중심지, 세계 교회의 중심지라고 자랑만 했지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던 한국교회가 살 길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한국교회가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가 언제 가버나움과 같은 모습으로 변할지 알 수 없습니다.
가버나움의 이야기는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난 과거의 일을 자랑하면서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더 겸손해야 하고 더 기도해야 하고 더 순종해야 합니다.
한국교회에 베풀어주셨던 축복이 계속적인 축복이 될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우리의 마음을 다짐하고 결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3.08.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