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년 전, 중국 산시성(山西省)에서 조선족이 방송에 나왔다.
조선의용군 출신 항일 독립운동가 김강 할아버지. 그때 그분은 ‘학철이’ 이야기를 가끔 하셨다.
‘학철이’는 연변에서 조선족 소설가로 활동하다 작고한 김학철 선생님. 두 분은 친구 사이였다.
할아버지는 그 무렵 자서전을 거의 완성했다고 말했다.
내가 국내에서 출간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는데 손을 내두르셨다. 남한에서 책을 출간하는 게 영 내키지 않는다고.
사연은 이렇다. 할아버지는 해방 후 북한 정권이 세워지면서 초기에 문화부 장관급 고위직에 올랐다.
그러다가 북한에 주체사상이 강화되는 시기를 전후해 이 체제를 견디지 못하다가 중국 망명길에 오른다.
중국 정부는 할아버지의 망명을 받아들였고 여러 가지 편의를 국가에서 지속적으로 제공해주었다. 중국 땅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또 북한과 중국은 ‘혈맹’이었으니까 예우를 해드린 것이다.
문제는 할아버지가 반김일성주의자라는 데 있었다.
남한의 독재정권은 북한과 대치하면서 반공주의 노선을 택했고, 이를 증명할 적임자로서 김강 할아버지 같은 분을 십분 활용했다. 국가기관의 주선으로 김일성과 김정일을 비판하는 자리에 초청하기도 했다.
그러니 할아버지에게는 북한과의 화해와 협력을 모색한 김대중 정부가 그저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분도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 과정에서 만들어진 역사의 희생자였다.
작지만 단아하면서도 품격이 느껴지던 김강 할아버지.
평양(平壤) 숭실학교(崇實學校)를 졸업하고 105인사건에 관련해 체포의 위험이 있자 1912년 간도(間島)로 망명했다.
하얼빈에서 청년들을 규합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용정(龍井)에서 간민회(懇民會)의 일본조사부원(日本調査部員), 대동혁신회원(大同革新會員), 동제회(同濟會) 평의원(評議員)으로 활동했다.
1919년 3·1운동 후에는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의 통신부원(通信部員) 겸 중부경호부장(中部警護部長)으로 1920년 11월까지 활동했다.
1919년 11월 간도청년회(間島靑年會)를 발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