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62
2월10일[설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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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진년 새해에도 천주 성부의 은총과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새해 복 많이 지으세요.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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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A4wfiPzPDxw
[서울대교구 황중호 베드로 신부님 집전(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방송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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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묘지 앞에서>
한 형제와 작별하러 공원묘지에 갔을 때입니다. 하관 작업과 추모를 마치고 시간이 좀 있길래 묘원 사이를 거닐었습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거기 누워계시는 한 분 한 분을 위해 기도해드렸습니다.
돌아가신 분들의 이름과 세례명, 생몰연대를 쭉 읽어나가는데, 100년도 훨씬 전인 1900년대 초반에 돌아가신 분이 있는가 하면, 불과 사흘 전에 묻힌 분도 계셨습니다. 백수를 누리고 돌아가신 분이 있는가 하면 꽃다운 20대 초반 나이에 돌아가신 분도 있었습니다.
한 시간 남짓 짧은 시간이었지만, 제 개인적으로 은혜로운 순간이었습니다. 마치 짧은 하루 피정 같았습니다.
공동묘지는 우리에게 죽음이 무엇인지? 생명은 또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 존재가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묵상하도록 초대합니다.
설날을 맞아 교회 전례 독서는 우리를 죽음에 대한 묵상으로 초대합니다. 먼저 떠난 이들의 죽음을 헤아려보며, 우리의 근원, 우리의 처지, 우리의 목숨이 대체 무엇인지도 성찰케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가 지니고 있는 생명과 목숨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합니다. 그 목숨을 조금이라도 연장시키기 위해 발버둥을 칩니다. 이런 우리에게 야고보서는 얄짤 없습니다. 아주 단호하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우리는 우리 각자의 기대수명을 너무 길게 잡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만해도 기대수명이 84세인데, 처음에는 한국인 평균은 되는구나 했었는데, 하룻밤 자고 나니 왜 94가 아니고 84인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의 큰 착각은 우리가 아주 길게, 영원히, 적어도 백 살은 살겠지 하는 생각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루카 복음 사가 역시 칼같이 짜릅니다.
“너희는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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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DOrl4iE6b9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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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자를 믿으면 삶의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은 홍익인간일 수밖에 없다>
오늘은 설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런데 새해부터 마지막 심판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이유는 시작부터 어떤 목적으로 살지 않으면 행복한 결말을 맞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잘 준비된 경기만 이길 수 있습니다. 경기가 있는데 준비하지 않고 있다면 과정에서도 몸은 편할지라도 마음은 불안하고 그리고 원하지 않는 결말을 맞게 됩니다. 그러니 깨어 있는 삶이란 내가 창조 된 목적대로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차가 차로 살아가야 깨어 있는 것이고, 사람은 사람으로, 사제는 사제로 살아야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조자는 그 목적을 ‘홍익인간’(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으로 창조합니다. 자동차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습니다. 사람을 낳을 때 그 아이의 행복을 위해 가족에도 행복이 되고 세상에도 행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창조자는 항상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모든 것을 창조합니다. 그러니 올 한 해 우리 가정과 나라, 세상을 위해 어떤 유익과 행복을 줄 수 있는 지를 생각하며 단 1분이라도 그것에 투자하는 시간을 갖는다면 그것이 깨어 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깨어 있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사명이 있는 삶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주인은 일을 시키는 사람이고 종은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창조는 분명 목적을 전제합니다. 목적 없이 만들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피조물은 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깨어 있음입니다.
차르 니콜라스 2세의 아들인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는 심각한 유전 질환인 혈우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알렉세이의 질병은 왕실과 결과적으로 러시아 역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들을 위한 치료법이나 구제책을 찾고자 하는 황후의 절박함으로 인해 그녀는 신비롭고 자칭 성자라고 불리는 라스푸틴에게 크게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라스푸틴이 왕실, 특히 황후에 대한 영향력과 국가 문제에 대한 그의 개입은 러시아 국민 사이의 불만이 커지는 데 크게 작용했으며 결국 러시아 혁명으로 나라가 무너지게 하였습니다.
니콜라스 2세는 자녀와 가족밖에 몰랐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참다운 사명이 나라의 행복임을 잊고 자기 가족 만을 챙겼습니다. 이 때문에 수백, 수천, 수만 명이 죽어 나가는데도 눈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신앙이 있어도 이런 자세는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창조자가 무엇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지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창조자는 홍익인간의 창조 이념이 무너질 때 마음 아파합니다. 그렇게 온 가족이 한 순간에 한방에서 몰살 당하게 됩니다.
이와 대조되는 크로울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두 자녀는 4만 명당 한 명 꼴로 발생하는 폼페병으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크로울리는 자녀를 치유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둡니다. 그런데 신약 하나를 개발하는 최소 비용은 약 1억 달러, 1,300억 원 정도가 필요합니다. 크로울리는 자신의 노력이 자기 자녀 뿐 아니라 자신의 자녀들처럼 고통 받는 수많은 사람과 그 가족에게 유익할 것이라 여겨 도전합니다. 이 과정에서 스톤 박사를 만나 함께 신약 개발에 나서게 되고 크로울리는 사업 수완으로 1억 달러를 모으게 됩니다. 그리고 몸이 나빠지는 시간을 늦춰 아직도 자녀들이 생존하게 하였습니다. 크로울리는 하느님을 믿지 않더라도 마음 안에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해야 한다는 사명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깨어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설날이고 한 해의 시작입니다. 하루에는 아침에, 일 년에는 정초에, 그리고 평생에는 아이 때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하지 않고 그 허비되는 시간만큼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적을 가지고 사는 삶 자체가 창조자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지닌 삶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언제나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라는 사명이어야 합니다. 모든 창조자는 그런 목적으로 창조하기 때문입니다. 한 해 단 1분이라도 매일 온 세상의 유익을 위해 투자한다면 이미 깨어 있는 참 행복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고 참으로 복 받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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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설’날입니다. 2024년 새해에도 ‘복’ 많이 받으세요. 복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적인 복입니다. 세상적인 복의 기준은 ‘재물, 건강, 장수, 인덕, 선종’입니다. 예전에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가 있었습니다. 재물은 우리에게 편리함을 줍니다. 재물은 우리의 자존감을 높여줍니다. 재물은 자선과 나눔의 도구가 됩니다. 우리가 땀 흘려 공부하고, 일하는 것도 재물을 얻기 위함입니다. 2024년에는 모두가 이웃을 위해서 나눌 수 있을 만큼의 재물을 얻으면 좋겠습니다. 건강은 우리에게 활력을 줍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합니다. 재물을 잃으면 다시 찾을 수 있지만 건강을 잃으면 다시 찾을 수 없다고 합니다. 건강은 타고나기도 하지만 꾸준한 노력으로 건강을 유지할 수도 있습니다. 2024년에는 활력이 넘치는 건강을 유지하면 좋겠습니다. 장수는 모든 생명이 원하는 본능입니다. 진시황은 오래 살고 싶어서 ‘불로초’를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이 있듯이, 장수는 오늘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그토록 원하는 것입니다. 2024년에도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지내시면 좋겠습니다.
인간관계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부모와 형제, 친척과 친구가 없다면 우리는 외로운 섬에 홀로 사는 것과 같습니다. 맹자는 인생삼락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부모가 건강하게 생존해 계시고, 멀리 친구가 찾아와서 대화하고, 좋은 제자를 기르는 것이 인생의 기쁨이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도 바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재물이 많아도, 건강해도, 오래 살아도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면 허망한 것입니다. 2024년에도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맺으면 좋겠습니다. 선종은 착하게 살다가 복된 죽음을 맞이하도록 올바른 길을 가야 한다는 '선생 복종 정로'를 줄인 말입니다. 시작은 미미했을지라도 끝이 좋아야 한다고 합니다. 신앙인들에게 선종은 하느님을 믿고 알아서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박해를 받아서 순교했을지라도, 하느님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었을지라도 우리는 그 죽음을 ‘선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분들은 천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2024년입니다. 우리 모두 선종을 위해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입니다. 예수님은 일반인이 생각하고 있는 이런 복의 개념을 완전히 뒤집어 놓으며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를 통하여 늘 깨어 지키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이 가장 행복하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주인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고 깨어 있는 종들은 행복하다는 말씀입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복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면서 시작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깨어 있고, 믿는 사람이 복되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참된 행복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신앙 안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복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복이 아닙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복은 만남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복은 이 세상에서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복은 이 세상은 물론 하늘나라에서 완성되는 복입니다. 그렇기에 때로 시련도, 박해도, 고난도, 죽음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는 복입니다. 설날입니다.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저희가 조상들을 기억하며 화목과 친교를 이루게 하시고 언제나 주님의 뜻을 따르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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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2,35-40: “준비하고 있어라!”
오늘은 우리 민족의 고유 명절인 설이다. 우리가 설을 맞이하여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생명을 전해주시고 이 땅에 살게 하신 우리 선조들에게 감사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는 이 날, 복음은 종말론적인 가르치심이면서 또한 순간순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시고, 한 해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님은 매 순간 우리에게 오시고 계시다. 그러기에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항상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값진 보물을 차지하는 것은 이미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예수께서 여기서 사용하는 비유는 옛날 일반적이다. 여행을 떠날 때는 기다란 옷을 무릎까지 올려 전대를 묶는 튼튼한 가죽 띠로 묶고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여기에서 여행은 캄캄한 밤에 하는 것이고, 그러기에 밝은 등불을 밝힐 필요가 있다(35절). 다음 말씀은 전혀 반대이다. 여행이 아니고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만나기 위하여 나가는 것이다. 주인이 와서 문을 두드리고 그에게 즉시 문을 열어 주기를 원한다(36절). 오시는 주님은 행복하다고 한 깨어있는 종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들을 위해서 즉시 잔칫상을 차리고 거기서 그들에게 시중을 들어줄 것이다(37절). 종들이 깨어있다면, 주께서는 밤중의 어느 때에라도 오실 수 있다. 깨어있는 중에 말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한밤중이나 새벽녘에 오실 수도 있다. 어떻든 깨어있는 종들을 만나면 영원한 행복의 종말론적인 명칭인 “행복한” 자들이라고 해 주실 것이다(38절).
예수께서는 일상생활에서 확실히 깨어있을 것을 함께 말씀하신다. 가정의 훌륭한 아버지는 확실히 깨어 강도의 침입으로부터 집을 지키기 위하여 강도가 오는 때를 알고 싶을 수 있다(39절). 제자들에게 있어서도 오시는 사람의 아들이 언제까지 늦어지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어떻든 오실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시각에, “강도처럼” 오실 것이다(40절).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은 언제나 오신다. 그분은 나의 아내를 통해서, 나의 남편을 통해서, 나의 자녀들을 통해서, 부모님을 통하여, 내가 만나는 이웃을 통해서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오신다. 쉽게 말하면, 이웃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이웃을 통하여 우리를 만나고, 우리와 친교를 나누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이웃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 때문에도 그 이웃과 더 깊은 사랑을 나눌 수 있다. 이 사랑이 바로 주님께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웃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이정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웃이라는 이정표를 잘못 읽을 때, 우리는 엉뚱한 길로 갈 수 있다.
주님이 오시는 순간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우리에게 항상 오시고 계시지만 우리가 깨어있지 못하면 그분을 만날 수 없다. 깨어있을 때만이 우리는 그분을 뵙고 함께 살 수 있다. 설날을 맞이하여 우리 자신이 모두 항상 깨어있는 삶을 통하여 언제나 주님을 만나 그분과 함께 살며 그분을 닮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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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은 한 해가 새로 시작하는 설날입니다. 모두가 설레는 마음으로 새로운 한 해의 첫날을 맞이합니다. 오늘 독서의 말씀들은 어떤 마음으로 한 해를 시작하여야 할지 알려 줍니다.
무엇보다 먼저 서로 축복을 빌어 주면 좋겠습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사제인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을 축복하라고 이르십니다. 주님께서는 사제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그들에게 복을 내리시고, 은혜와 평화를 베푸실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세례를 받으면 보편 사제직을 수행하게 됩니다. 보편 사제직을 수행하는 하나의 방법은 아론처럼 다른 이를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이웃의 성화를 위해서, 그들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을 청하여야 합니다.
두 번째로 이 모든 시간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제2독서에서 야고보는 생명의 주인이 주님이심을 전합니다. 우리 삶에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우리 힘으로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누구도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모든 시간과 일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분께서 바라시고 허락하시기를 청하면서, 우리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일 것입니다.
세 번째로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언제 올지 모르는 주인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 우리의 마지막 날이 언제 올지는 아무도 모르니 늘 깨어 준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이가 없습니다. 언제 세상을 떠나도 좋을 만큼 오늘 하루를 열심히 또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야 합니다. 한 해를 시작하는 날이지만, 역설적으로 마지막을 옆에 두고 살아가는 종말론적인 삶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임을 기억합니다.
올 한 해 주님의 은총과 사랑이 언제나 함께하고, 진정한 기쁨과 깊은 평화 속에 머무르기를 빕니다. 또한 소망하는 모든 것이 주님의 섭리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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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겸손과 순종>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루카 12,35-40)
이 말씀은 ‘종말’과 ‘재림’에 관한 말씀이고, 설날의 복음 말씀으로 읽는 것은 뭔가 좀 안 어울리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데, 아마도 한 해를 새로 시작하는 시점에서, ‘겸손’과 ‘순종’을 깊이 묵상하고 실천하라는 의도일 것입니다.
1) 신앙인은 ‘나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라고 겸손하게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나의 모든 것’이라는 말은, ‘내 인생과 내 목숨’을 포함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잠시 맡겨 주신 인생을 관리하는 임시 관리자일 뿐이니,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교만입니다.
2) 신앙인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그렇게 노력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또는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이 주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단순합니다. “모든 사람들을 위한 ‘선’이며 ‘사랑’인가?” 나 하나에게만, 또는 내가 속한 집단에게만 선이 되고 사랑이 된다면, 그 일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라는 말씀은, “종말과 재림이 지금 바로 닥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준비하여라.”라는 뜻입니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라는 말씀의 강조점은 ‘곧바로’ 라는 말에 있습니다. ‘지금’ 준비되어 있는 상태로 있어야만 주님을 ‘지금 곧바로’ 맞이할 수 있습니다. 40절의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라는 말씀은, “너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빨리 재림이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뜻이고, 이 말씀도 ‘지금’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새해든지 아니든지,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있는 사람이라면, 제2독서 말씀은 반드시 묵상해야 할 말씀입니다.
“자 이제,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 하고 말하는 여러분!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야고 4,13-15)
여기서 ‘주님께서 원하시면’이라는 말을 우리 교회는 ‘야고보의 조건’이라고 부릅니다. 뜻으로는 ‘주님께서 허락하시면’입니다. 그런데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라는 말과 “한 줄기 연기일 따름”이라는 말을 ‘허무주의’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인생은 허무할 뿐이라고 생각해서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고, 아무것도 안 하려고 하는 것, 그것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 말씀은 아무 계획도 세우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허무에서 벗어나 ‘영원’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마치 영원히 살 사람처럼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되, 지금 곧 떠날 사람처럼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 일이 주님 뜻에 합당한 일이라면, 즉 모두에게 선이 되고 사랑이 되는 일이라면, 내가 끝까지 다 못하고 중간에 떠나더라도 누군가가 그 일을 이어받아서 할 것입니다. <반대로, 주님 뜻에 합당한 일이 아니라면, 아무리 계획을 잘 세우고,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된다고 해도, 결국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고 허무하게 사라질 것입니다.>
신앙의 관점에서, ‘성공한 인생’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으로 판단됩니다. 주님 뜻에 합당하게, 그리고 끝까지 충실하게 살았다면, 남긴 업적이 없더라도 그 사람의 인생은 ‘성공한 인생’입니다. 주님은 그 사람의 업적이 아니라 ‘삶 자체’를 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뭔가 거창한 업적을 남겼더라도 주님 뜻에 합당하지 않은 삶이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실패한 인생’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업적을 자랑할 틈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업적이라고 내세우는 것들이 모두 주님 앞에서 ‘한 줄기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해가 바뀌어서 나이를 한 살 더 먹었다는 것은, 남은 시간이 그만큼 줄어들었다는 뜻이 되는데, 나의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도 어떻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한 것은 주님께서 ‘조금 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믿고 회개할 기회. 더욱더 겸손과 순종을 실천할 기회. 설날은 바로 이런 진리를 더욱 깊이 묵상하는 날, 그래서 더욱더 겸손하게 주님께 순종하는 신앙인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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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석상희 요셉 신부님]
<성실함으로 하느님 축복의 열매를>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민수 6,24)
음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설 명절에 어른들은 새해 인사를 드리는 이들에게 덕담을 해줍니다. “새해에도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지기를…”, “새해에도 건강하기를…”
또 어른들께도 명절 인사를 드리면서 새로운 한 해에도 건강과 평안함을 빌어드리는 전통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도 많은 순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려주기를 청합니다. 완전하지 못한 인간이기에 늘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많은 순간 우리는 하느님의 축복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한순간의 요행처럼 생각하고 청하기도 합니다.
땅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축복이 어떻게 열매 맺는지를 잘 이해하게 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축복인 충분한 햇볕과 알맞은 날씨, 그리고 제때 내리는 비를 간절히 청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축복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인간적인 수고를 통해 잘 준비할 수 있도록 애를 씁니다. 비록 어떤 이유로 원했던 날씨가, 간절했던 비가, 필요했던 햇볕이 충분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하느님을 원망하기보다는 또 다른 뜻을 찾으며 자기 몫의 수고를 묵묵히 해나갑니다.
오늘 제1독서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하느님의 축복을 청하라는 하느님의 명을 받게 됩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민수 6,24) 새로운 문화와 신앙적인 환경에서도 필요한 하느님의 축복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분을 향한 신뢰를 잊지 않도록 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이야기하는 행복한 종은 이처럼 어떤 환경에서도 주인을 향한 마음을 잃지 않는 종을 의미합니다.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주인을 기다리며 묵묵히 자신의 책임에 충실한 종, 그렇게 준비된 종은 주인의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된 종입니다. 그것은 제2독서의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야고 4,15)라고 고백할 수 있는, 그래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것을 성실히 실행하는 종의 모습입니다.
새해 첫날인 설 명절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선물인 당신의 축복에 감사드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빌어주고 청하는 하느님의 축복은 분명 우리의 성실함을 통해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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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류범선 루치오 신부님]
“잘못을 하고도 고치지 않는다”(過而不改)
안녕하세요! 교우 여러분!!오늘은 설 명절입니다. 하느님과 조상님들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미사를 드리도록 준비합시다. 오늘 복음 말씀은 두 가지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혼인 잔치에 관한 이야기와 도둑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삶에 있어서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는 ‘준비하고 있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즉 종말에 대한 준비를 하라고 하십니다.
늘 준비하고 산다는 것은 늘 긴장을 늦추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살면서 어떻게 긴장만 하면서 힘들게 살겠습니까? 음, 그러니까 신앙인으로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면서 닥쳐올 날에 준비를 하라는 것이죠.
여행을 떠나거나, 행사를 치를 때, 꼼꼼하고 세심하게 준비를 잘해 온 사람이 있는가 하면, 늘 뭔가를 빠뜨려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도 있지요. 전국 대학교수들이 한해를 정리하는 사자성어로 ‘잘못을 하고도 고치지 않는다’는 뜻의 ‘과이불개(過而不改)’를 꼽았습니다. 공자는 ‘과이불개 시위과의(過而不改 是謂過矣)’, 즉 “잘못하고도 고치지 않는 것, 이것을 잘못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잘못을 하고도 고치지 않는다면 닥쳐올 종말을 준비하지 않는 사람이겠지요.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를 보면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준비되지 않았고 무책임한 태도만을 드러내는 책임자들을 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준비하지 않은 인간들 때문에 종말을 앞당기는 것 같습니다.
요즘 지구의 종말에 가속도를 붙이는 일들이 많은데 두 가지만 얘기하면, 땅과 바다 그리고 동식물과 심지어 인간에게 피해를 주는 ‘지구의 기후위기’와 ‘미세플라스틱’입니다. 인간의 편리함을 위하여 자연을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탄소배출을 하여 지구를 못살게 합니다. 인간도 고생길이 훤합니다. 또 여기서는 탄소배출을 줄이자고 노력하는데 저기서는 전쟁을 하면서 화염에 휩싸이게 하면 허탈한 맘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기적의 발명품이라고 하는 ‘플라스틱’은 이제 골칫거리가되었습니다. 플라스틱은 가볍고 단단하고 어떤 형태로든 만들 수 있는 마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분해가 되지 않고 삭아서 갈갈이 찢어져 ‘미세플라스틱’이 됩니다. 미세플라스틱은 음식을 통해서 인간도 섭취하게 됩니다. 편리했던 발명품이 이제 인간을 공격합니다. 큰 일이죠. 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게 다~ 인간의 편리와 탐욕 때문에 종말을 당기고 있습니다. 탐욕 때문에 우리가 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동을 수정하지 않는다면, 즉 잘못을 하고도 고치지 않는다면 종말을 준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종말을 망치는 사람이 되겠지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늘 말씀하십니다.
‘과이불괘 하지 말고 준비하는 사람이 되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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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임효진 야고보 신부님]
<내 삶의 첫 자리는?>
오늘은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인 설날입니다. 음력으로 새해가 되면 우리는 부모님과 웃어른들을 찾아뵙고 세배를 하고 덕담을 듣습니다. 그리고 덕담 중에 필요한 것은 마음에 담아 한 해를 살아가는 자양분으로 삼는 것이 자녀된 도리입니다.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새해가 되면 가족과 함께 합동 위령미사에 참석하여 한 해를 허락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조상들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미사 중에 들려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새해 덕담인 복음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한 해를 살아갈 양식으로 삼습니다. 주님께서 새해 첫날에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준비하고 있어라.”입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님의 재림을 깨어 기다리라고 권고하는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인이 언제 집으로 돌아오든 문을 두드리면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준비하고 있어라.”고 하십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 있다는 것은 즉시 일할 수 있게 준비를 갖춘 모습이다. 등불을 켜 놓고 있다는 것도 주인이 언제 오더라도 즉시 맞아들이도록 준비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렇게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밝혀 들고 깨어 있는 종은 자기 삶의 첫 자리에 늘 주인이 자리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언제 무슨 일을 시키든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며 주인은 그에게 더 많은 축복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의 첫 자리에는 무엇이 있어야 할까요? 세상살이가 바쁘고 힘들다 보면 하느님과 신앙은 제쳐 놓고 돈과 재물, 취미생활, 건강 등이 첫 자리를 차지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야고보서의 말씀처럼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야고 4,14) 혹시나 지금까지 내 삶 안에서 하느님이 두 번째 세 번째였다면, 이제 새해를 시작하면서 삶의 첫 자리에 하느님을 모시고 살아갑시다.
오늘 미사의 입당송에서도 읊었듯이 주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마태 28,20)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삶의 첫 자리에 하느님을 모시고, 그분만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간다면 올 한 해도 건강하고 복된 해가 되리라 믿습니다.
여러분 모두 새해를 맞아 하느님 축복 많이 받으시고 무탈한 귀갓길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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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만약 듣지 못하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 중에 딱 한 가지만 선택하라고 한다면 어떤 감각을 포기하시겠습니까? 많은 분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선택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보다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이 더 불편하고 힘들다고 생각하시는 것이지요. 그런데 실제로 앞을 못보는 장애우와 소리를 듣지 못하는 장애우의 행복지수를 비교해보면 시각 장애를 가진 분이 더 행복하다는 결과가 나타난답니다. 왜 그런 결과가 나타나는지는 헬렌 켈러가 남긴 이 말을 들으면 이해할 수 있지요.
“보지 못하는 것은 사물로부터 우리를 고립시키지만, 듣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고립시킨다.”
우리 사회는 제대로 듣지 않아서 생기는 오해와 편견,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듣기 싫은 것에는 귀를 막는데서 생기는 갈등, 제대로 듣지 않고 제멋대로 자기 해석을 덧붙여서 생기는 왜곡 등으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이 하나로 모이지 못하고 분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마음 속에 상처를 안고 살게 되지요.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고 존중받지 못하는데서 오는 상처, 진짜 내 모습 내 생각이 아닌 것으로 인해 오해받고 미움받는데서 생기는 상처, 상대방으로부터 냉대받고 배척당하는 데서 생기는 상처들이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외딴 곳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다른 병자들에게는 해주신적 없는 아주 ‘특별한’ 치유의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가 제대로 듣지 못함으로 인해 생긴 마음의 상처가 그만큼 깊고 심각했기에 특별치료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단순히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기능’상의 장애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고립되고 단절되어 이해와 소통의 문을 완전히 닫아버린 그의 마음 상태가 너무나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물리적인 치유의 과정을 마치신 후 그에게 ‘에파타’, 즉 ‘열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정’의 문을 열고 ‘긍정’의 문으로 들어가라는 뜻입니다. ‘절망’의 문을 열고 ‘희망’의 문으로 들어가라는 뜻입니다. ‘분노’의 문을 열고 ‘사랑’의 문으로 들어가라는 뜻입니다. ‘미움’의 문을 열고 ‘이해’의 문으로 들어가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그 길의 끝에 있는 ‘하느님 나라’의 문을, ‘구원’의 문, ‘희망’의 문, ‘행복’의 문을 활짝 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몸에 장애가 있어야 ‘귀머거리’, ‘벙어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언제든 귀막고 사는 귀머거리, 입 닫고 사는 벙어리가 될 수 있습니다. 타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제 고집만 피울 때 우리는 독단의 ‘귀머거리’가 됩니다. 타인에 대한 비판은 구구절절 잘도 말하면서 타인에 대한 칭찬에 인색할 때, 우리는 부정의 ‘벙어리’가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듣지 않고 제멋대로 살려고 할 때 방종의 ‘귀머거리’가 되고, 하느님께 불평불만을 늘어놓을 땐 청산유수면서 그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데 인색할 때, 우리는 배은망덕의 ‘벙어리’가 됩니다. 듣기 좋은 말만 골라듣고 듣기 거북한 말은 못들은척 할 때, 우리는 감탄고토의 ‘귀머거리’가 되고, 본인이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정작 해야 할 말은 하지 못할 때 우리는 비겁자라는 ‘벙어리’가 됩니다. 이런 귀머거리, 벙어리가 되지 않는 길은 오직 하나, 하느님께 마음을 활짝 열고 그분의 목소리를 들으며, 들은 것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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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도 늘 준비하고 깨어 있어라!”(12,40.37)
오늘은 舊正, 설입니다. 오늘 하루만 부르는 노래인,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 이래요.』를 어느 분은 이렇게 표현하더군요. 까치 설날인 신정에는 해맞이 가고, 우리 설날인 구정에는 세배를 간다, 고. 새해를 맞아 다시금 여러분 모두와 가정에 주님께서 크신 축복을 내려 주시기 간절히 소망하고 기도합니다.
어떻게 음력 첫날 아침, 기쁨과 희망을 안고 깨어나셨나요. 귀성길 힘드셨을 텐데 고향에 무사히 도착하셔서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가족들을 만나 기쁨으로 충만하시겠네요. 오늘의 이 마음을 잊지 않고 올 한해 내내 마음 깊이 잘 간직하고 살아간다면, 어쩔 수 없이 삶에서 직면하는 많은 시련과 고난 가운데도 꿋꿋이 극복해 나가리라 봅니다. 삶의 기적도 그렇고 행복도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라 소소한 것을 통해, 아주 대수롭지 않은 것을 통해서 느끼는 삶의 기쁨이며 특히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하면서 느끼는 행복이라고 봅니다.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명절 보내세요. 참으로 행복한 시간을 가족과 함께 기적처럼 감사하면서 보내시길 바랍니다.
오늘 새해를 맞아 다시금 듣는 하느님의 메시지는 이미 지난 1월 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의 제1독서였던 민수기의 ‘축복을 빌어 주어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오늘 아침 미사를 드리면서 여러분 모두를 기억하고 주님께서 저를 통해 축복을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 내려 주시도록 기도하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축복을 빌어주는 만큼 주님께서 저에게, “당신 얼굴을 보여 주시고 은혜를, 평화를 내려 주시리라 믿습니다.” (민6,25.26) 사실 우리 모두 주님의 축복을 받고 싶어 하지만, 그 축복을 더 많이 받는 방법이란 주님의 이름으로 남에게 축복을 빌어 주는 것입니다. 이는 결국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쓰느냐에 따라 곧 마음 씀씀이가 고와야 복을 받는다는 단순한 이치와 같습니다.
축복을 빌어주는 만큼 축복을 받으리라!! 올 한해 서로서로 축복을 빌어주는 사람들이 되고, 축복을 빌어주는 삶을 살아간다면 세상은 좀 더 행복이 넘치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울러 이런 삶을 살아가노라면 주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당부하신 것처럼 '늘 준비하고 깨어 있어라'는 삶을 살 수 있으리라 봅니다.
세상적인 욕심보다도, 이기적인 자신으로부터 깨어나서 자신보다 그리고 우선 가족 구성원에게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웃을 먼저 배려하고 베풀고 위로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한 해가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이젠 우리는 알게 되었잖아요. 정치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그래서 실망할 필요도 없고 우리 스스로 희망의 불씨를 지펴야 합니다. 사목 현장에서 빗겨 서 있다가 사람들을 다시 만나고 면담하면서, 요즘 많은 사람이 참으로 힘들게 살아가고 있음을 피부로 느낍니다. 그러나 삶의 무게에 짓눌려 힘든 나날을 보내시는 분들이나 우리 모두 내일은 좀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가슴에 품도록 합시다.
희망은 오늘을 살아갈 동력이며 내일에 대한 꿈입니다. 희망은 어쩌면 믿음에서 솟구치는 하느님의 생명력입니다. 어쩌면 척박한 삶을 몸으로 살았기에 희망을 더 갈망했던 푸시킨의 시, 너무 말이 알려져 있기에 너무도 통속적인 표현이 되어 버린 그의 노래를 들으면서 힘을 냅시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결코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노라면 기쁨의 날이 올 것을 믿어라. 비록 현재는 슬플지라도 마음은 늘 미래에 사는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곧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
제가 좋아하는 이승환의 「세 가지 소원」이라는 노래 가사가 제 마음에 깊이 다가왔답니다. 지금도 이 노래는 결혼식 축가로 자주 불린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도 이 노랫말을 제가 새해에 인용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 함께 살고 있는 가족들이나, 함께 길을 걷고 있는 영적 동반자들에게 축복을 빌어주는 마음으로, 우리 또한 세 가지 소원을 빌어주며 살아가자고 초대하는 의미에서 되읊어 봅니다. 세 가지 소원이 참 마음에 와닿습니다. 소원을 빌어주는 만큼 축복을 많이 받으리라 믿으면서, 노랫말은 이렇습니다.
『고마와요 사랑해요. 그대를 위해 기도하죠. 이루어 주소서. 첫 번째 내 소원은 나 없는 곳에서 아프지 말아요. 언제라도 그대 지켜줄께요. 건강해요. 나의 사랑! 오 내 모든 것 모두 주어도 아쉬운 마음 그대는 알까요? 고마와요. 사랑해요. 그대를 위해 기도하죠. 이루어 주소서. 두 번째 내 소원은 우리 힘들어도 속이지 말아요. 혹시라도 우리 어쩔 수 없을 땐 착한 거짓말만 해요. 마지막으로 빌어요. 지금 잡은 두 손 놓지 않도록 해요. 약속해요. 』
내일 일은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그리고 어제 충분히 사랑해 주지 못했지만 그래도 지금 함께 살고 있으며, 새로운 마음으로 함께 하느님을 향한 영적 길을 걷도록 다짐하면서 새해 축하드리며 이 세 가지 소원을 이루며 살아가도록 기도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 한해 내내 몸도 마음도 모두 건강하세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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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오늘은 음력 1월 1일로, 조상님을 기억하면서 차례를 지내고 웃어른께 세배를 드리며 덕담을 나누는 우리 민족의 큰 명절인 설입니다. 어떤 분은 "또 한 살 더 먹는구나."라면서 슬퍼할지 모르겠지만, 그 모두를 뛰어넘어서 또 새해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더불어 나를 이 세상에 존재케 해주신 조상님들께 감사드릴 수 있는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새해인 오늘 새해 인사를 나누면서 덕담을 나누는데, 과연 주님께서는 어떤 덕담을 우리에게 전해주실까요? 책을 읽다가 미국에서 15년 동안 인류학을 가르친 어느 대학교수의 인상 깊은 체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대학교수는 자신이 가르치는 요즘의 대학생들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수업 시간에 발표도 거의 하지 않고, 책도 미리 읽어오지 않고, 교수를 만나러 오지도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학창 시절과 다른 학생들의 이 모습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수 생활을 한 지 7년 만에 맞이하는 안식년에 할 획기적인 결심을 세웁니다. 다시 대학생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새내기 대학생이 된 교수님'은 1년 동안 기숙사에 살면서 강의를 듣고 과외활동하는 등 여느 대학생들과 똑같이 지냈습니다. 어떠했을까요? 교수 때는 학생들이 수업 준비를 제대로 안 해 온다고 생각했는데, 학생 입장이 되어 보니 여러 과목에서 동시에 내주는 자료를 다 읽을 시간도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학생들은 시간 관리를 하느라 사투를 벌이고 있음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을 진짜 알게 되면 더는 그를 증오하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문제는 진짜 알지 못하면서 퍼붓는 혐오의 말과 행동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혐오와 대립과 갈등으로 가득 찬 것이 아닐까요?
앞선 교수처럼 역할을 바꿔서 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처지를 바꿔서 생각하는 데 초점을 맞춰보면 어떨까요? 분명히 상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리게 될 것이고, 이런 헤아림에서부터 사랑이 울려 퍼지는 이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시작은 바로 '나'부터였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복음을 통해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라는 덕담을 전해주십니다. 어떤 준비이겠습니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입니다. 그 준비는 바로 사랑의 실천에만 있었습니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함께 살 수 있는 사랑을 해야지만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사랑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사랑을 세상에 펼칠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올해는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사랑하는 '나'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 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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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설에 벗에게>
민수기 6,22-27 (사제의 축복)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일러라. ‘너희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축복하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야고보 4,13-15 (자만하지 마라)
사랑하는 여러분, 자 이제,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 하고 말하는 여러분!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루카 12,35-40 (깨어 있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설에 벗에게>
오늘은 설이니
주님의 축복이 되어
벗에게 스미어요
서러워서 설이라
설이 서러운 벗에게
따뜻한 품이 되어주어요
낯설어서 설이라
설이 낯선 벗에게
든든한 곁이 되어주어요
새해가 선다고 설이라
설이 설레는 벗에게
벅찬 희망이 되어주어요
한 살 더 먹어 설이라
설이 버거운 벗에게
기름진 밑거름이 되어주어요
사려야 한다고 설이라
설이 조심스러운 벗에게
바른 길이 되어주어요
오늘은 설이니
주님의 축복이 되어
벗에게 스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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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축복을 빌어주는 사람>
구정 명절을 맞이하여 하느님의 복을 풍성히 받으시고 건강 하시길 기원하며 우리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길 빕니다. 아울러 오늘‘통,통,통,통’4 가지 복을 선물로 받으시길 기도드립니다.
1.의사소통, 2.운수대통, 3.만사형통, 4. 쓰레기통입니다.
1. 의사소통을 잘할 수 있기를 빕니다.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뜻이 서로 통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통해야 하고, 이웃과 소통해야 합니다. 하느님과 잘 통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새기고, 살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웃과 잘 통하려면 상대의 말을 경청해야 합니다. 상대에게 가르치려 하지 않고 들어주려고 할 때 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공감하게 됩니다.
그런데 의사소통의 일차적 수단은 언어입니다. 고운 말, 바른말, 따뜻한 말을 사용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말은 마음을 담는 그릇입니다. 마음에 담긴 것이, 밖으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일상 안에서 마음에 잘 담아놓아야 합니다. 친밀감 있는 언어를 사용할 때 벽을 무너뜨리고 잘 통하게 됩니다. 통하면 생명이 주어지고, 막히면 죽음이 드리웁니다. 혈관도, 바람도 통해야 합니다.
2. 운수대통입니다.
운수는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천운입니다. 하느님께서 열어 주신 길에 하느님 전지전능의 은총으로 하는 일마다 크게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잘 되리라는 믿음 안에 지내시길 기도합니다.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 37,5) 하느님께 의탁하는 우리의 삶에 그분께서 넘치도록 채워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앞길을 활짝 열어 주시고 항상 동행하십니다.
3. 만사형통입니다. 모든 일이 형통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일이 뜻대로 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잘 풀리기를 바랍니다.
욕심으로 내 뜻을 이루려고 하면 시끄러워집니다. 관계가 어려워집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서 이루려고 하는 뜻이 무엇일까? 를 찾는 가운데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되라.”(시편 1,2-3)주님께서 강복하셔서 여러분이 하시는 일이 언제나 잘 되길 바랍니다.
4. 쓰레기통입니다. 쓰레기통’의 동의어는 ‘성직자’랍니다.
쓰레기통 같은 사람
남들이 인상 찌푸리는 것을 껴안는다. 아무 불평 없이.
가운데 자리 마다하고 구석으로 간다. 아무 불만 없이.
화려한 것, 화려한 곳만 찾는 성직자가 있다면
그는 쓰레기통 같은 사람이 아니라 쓰레기일지도 모른다. -정철-
각자의 본분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은 쓰레기가 됩니다. 이러저러한 환경이나 여건을 탓하거나 핑계 대는 일 없이 근본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걸맞은 삶을 살아가시길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모두를 품을 수 있는 소중한 사람, 쓰레기통 같은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설은 본디 신일(愼日) 이라고 하여 ‘근신하고 조심하는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데에 삼가고 조심하는 마음이 우선적으로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이날 조상님께 차례를 올리고 웃어른께 세배를 드리며 조상의 묘를 찾아 성묘합니다. 부모님들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설빔을 해 주고 큰절을 받고 세뱃돈을 주며 가정의 화목과 평화, 부와 안녕을 기원하였습니다.
명절의 의미를 두 가지로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감사하는 생활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고향을 방문하여 조상들을 기리며 차례를 지내고 부모 형제, 친척과 어른들을 찾아뵙는 것은 감사드림의 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는 감사의 원천인 하느님께로 먼저 눈을 돌려야 합니다. “나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내게 베푸신 그 모든 은혜를, 구원의 잔 들고서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네.”(시편 116,12)
그리고 혈족만이 아니라 모든 이웃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하느님의 작품이요, 사랑받아야 할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전혀 필요 없을 만큼 완벽한 사람도 없고, 도움을 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도 없습니다.
민수기(6,22-27)를 보면,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빌면 주님께서 몸소 복을 내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복을 받는 일은 먼저 복을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복을 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을 달라고 하기 전에 주님의 이름으로 복을 베푸는 몫을 차지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축복을 빌어주는 생활입니다. 어른에게 세배를 하면서 한 해의 건강과 무사 안녕을 기원하며 덕담을 받고 이웃 형제와 서로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인사 하는 것이 오늘 하루만의 인사치레가 되어서도 덕담으로 끝나서도 안 되겠습니다.
복을 빌어주는 만큼 삶의 모범으로 진정으로 복된 사람이 되어야 하고, 복을 받는 사람도 복 받을 만한 그릇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루카 6,38)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이 아니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받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축복하는 삶, 생활로써 복을 함께 나누고 지켜주면서 감사의 마음을 키워갈 때 우리 주변은 더욱 빛나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기는 아름다운 환경이 조성될 것입니다.
감사와 축복의 날에 주님께서는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너희는 준비하고 있어라.”(루카12,40)고 말씀하십니다. 등불을 켜고 주인을 기다리는 충직한 종처럼 감사와 축복으로 매일을 한결같이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조상을 위해 기도하고 서로에게 복을 빌어주며 이웃과 더불어 만남을 기뻐하는 날, 정월 초하루! 모두 모두 주님의 복을 많이 받으십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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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신희준 루도비코 신부님]
<새해에 실천해야 할 것 하나>
“준비하고 있어라.”
우리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새해의 의미를 되새기는 기회가 해마다 세 번 있습니다. 전례력으로 맞는 새해인 대림 제1주일 그리고 1월 1일 신정과 설, 이렇게 세 번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대림시기와 신정은 온갖 송년회 모임들로 인해 차분하게 우리 삶을 관조할 수 있는 여유가 없겠기 때문입니다. 물론 설 때도 가족들, 친척들과 친구들을 만나 바쁠 수 있지만, 사순절에 맞이한 설이기에, 올해는 더 차분하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새해를 맞이하며 지난해의 아쉬움을 반성하면서 새해에 꼭 실천하고 싶은 일들을 꼽다보면, 매년 별반 발전이 없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 해가 지났는데도 나는 여전히 그 모양 그 꼴이네’ 자괴감이 엄습해오면서, 서둘러 생각의 흐름을 접고 마는 모습 역시 해마다 반복되는 패턴입니다.
그러기에 올해는 실천할 항목을 단 하나로 줄여 실천하도록 노력해보면 어떨까 제안해보고 싶습니다. 예컨대, 나에게 못된 사람, 왠지 미운 사람 등을 위해 매일 묵주기도 5단을 바치면 어떨까요?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제안이니까 부담 갖지 마시고요!
* 하늘나라를 위해 가장 잘 준비된 사람은 자기 원수를 위해 기도하면서 용서를 베푸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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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화의 여정>
-존엄한 품위의 삶-
“감사하십시오, 겸손하십시오, 깨어 있으십시오”
"내 주여, 내 기쁨은 당신 뜻을 따름이오니 내 맘속에 당신 법이 새겨져 있나이다."(시편 40,9)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오늘은 설 명절입니다. 새해 첫날을 요약한 본기도가 참 깊고 풍부하고 아름답습니다. 오늘 설날뿐 아니라 평생 매일 새해 첫날처럼 이렇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고 싶습니다.
“시작이시며 마침이신 주 하느님,
오늘 새해 첫날을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봉헌하오니,
온갖 은총과 복을 가득히 베푸시어,
저희가 조상들을 기억하며 화목과 친교를 이루게 하시고,
언제나 주님의 뜻을 따르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게 하소서.”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하루하루가 새하늘 새땅의 새날이자 첫날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목적없는 무의미한 날이 아니라, 하루하루 주님을 따라 닮아가는 성화 여정중의 선물같이 귀한 날들입니다. 삶은 선택이자 은총임을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하느님을 선택하여 믿지 않으면 불교의 윤회설을 믿든지, 양자 물리학에서 말하는 다음과 같은 인생관에 도달할 수 뿐이 없을 것입니다.
“인생은 무상하기 때문에, 절대적인 것은 없기 때문에, 삶은 의미가 있고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지의 이미지일뿐입니다. 실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얇고 연약한 베일일 뿐이며, 그 너머에는....아무 것도 없습니다.”
요즘 읽은 양자 물리학이 말하는 텅빈 허무의 세계관이요, 여기에는 하느님의 자리가, 영혼의 자리가 없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결코 허무의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를 말할 수 없습니다. 삶의 여정을 말하는 것도 무의미합니다. 물음만 있고 답이 없는 인생관입니다.
어제 수도공동체의 저녁식사 독서중 성규 “제7장 겸손에 대하여” 마지막 부분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성화의 여정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빛나는 희망의 표지처럼 생각되는 완전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겸손의 이 모든 단계들을 다 오른 다음에 수도승은 곧 하느님의 사랑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내며, 이전에는 공포심 때문에 지키던 모든 것을 별로 어려움 없이 자연스럽게 습관적으로 지키기 시작할 것이니, 이제는 지옥에 대한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좋은 습관과, 덕행에 대한 즐거움에서 하게 될 것이다.”
성화 여정의 절정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에 도달하기 까지 항구해야 할 세 덕목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감사하십시오.
감사의 사랑, 감사의 은총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민수기가 주는 가르침입니다. 성화의 여정중 첫째 덕목이 감사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에 대한 자연스럽고 당연한 응답이 감사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즐겨 하시는 일이 우리를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자체가 축복입니다. 이렇게 살아 있음은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 은총의 축복입니다.
오늘 새해 첫날인 설날인 오늘 주님은 제1독서 민수기의 사제의 축복을 이 거룩한 미사전례를 통해 그대로 우리 교회공동체는 물론 하나하나에게 내리십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바로 우리의 하느님은 이런 축복의 하느님입니다. 새삼 우리 모두 축복받은 귀한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새삼 인간의 본질은 무지도 허무도 가난도 탐욕도 아닌 사랑의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저절로 이에 대한 자발적 응답이 감사입니다. 그러니 감사하십시오. 감사하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감사와 함께 가는 기쁨입니다.
둘째, 겸손하십시오.
겸손의 사랑, 겸손의 은총입니다. 제2독서 야고보서가 주는 가르침입니다. 참으로 하느님도 자기도 모르는 무지의 사람일 때 교만이지, 진정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사람은 겸손합니다.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것이 바로 겸손이자 지혜입니다. 오늘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짧은 가르침의 요지는 겸손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 이제,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하고 말하는 여러분!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시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하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만 보면 인생무상의 허무이지만 궁극의 배경이 되시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인격적 주님이, 기도와 소통의 주님이 계시기에 비로소 우리 삶도 의미를 지닙니다. 참으로 이런 주님 앞에 무릎 꿇는 흠숭과 경배의 자세가 겸손입니다. 말그대로 거룩한 겸손입니다. 이런 겸손과 함께 가는 온유(溫柔)입니다.
셋째, 깨어 있으십시오.
깨어 있음의 사랑, 깨어 있음의 은총입니다. 오늘 복음이 주는 가르침입니다. 깨어 있음이 기도입니다. 영성생활이 기도생활이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 깨어 있는 삶입니다. 잠들어 있는 삶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깨어 있는 삶입니다. 참으로 감사하는 사람, 겸손한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깨어 있을 때 깨끗한 마음이요 끊임없이 이어지는 깨달음의 은총입니다. 셋다 “깨”자 돌림입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메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이 아들이 올 것이다.”
막연한 깨어 있음이 아닙니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로 소임상 책임을 다하고 준비하며 주님을 기다립니다. 희망의 주님을 기다리기에 기쁘고 인내롭게 주님을 깨어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기다릴 분이 없으면 깨어 있음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지요. 도대체 주님이 아니곤 평생 누구를 깨어 기다리며 살 수 있겠는지요. 애당초 기다릴 주님이 없으면 한결같이 깨어 있는 삶도 불가능합니다. 참으로 깨어 있을 때 마음의 순수요 지혜입니다.
믿는 이들의 삶은 누구나 성화의 여정을, 존엄한 품위의 삶을 삽니다. 주님을 따라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여정입니다. 성화의 여정과 시작되는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성공적 성화의 여정을 원하십니까?
1.감사하십시오.
주님의 축복에 대한 당연한 자발적 응답입니다. 감사와 함께 가는 기쁨입니다.
2.겸손하십시오.
주님을 알고 자기를 알아 갈수록 겸손입니다. 겸손과 함께 가는 온유입니다.
3.깨어 있으십시오.
희망의 주님을 기다릴 때 비로소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기다림 없이 깨어 있음은 불가능합니다. 도대체 주님 아니곤 누구를 평생 한결같이 깨어 기다릴 수 있겠는지요. 깨어 있음과 함께 가는 마음의 순수요 지혜입니다.
감사의 사랑, 겸손의 사랑, 깨어 있음의 사랑입니다. 결국 성화의 여정은 사랑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이 거룩한 매일 미사은총이 우리의 주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새해 설날을 맞이하여 여러분 모두가 주님의 축복을 가득히 받으시길 바랍니다.
"하느님 찬양하라, 내 영혼아
한평생 주님을 찬미하라.
이 생명 다하도록 내 하느님 기리리라."(시편 146,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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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행복의 근원으로부터>
설 명절은 우리가 우리의 시원을 깊이 성찰하는 날입니다. 시원(始原)이란 우리의 시작과 근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존재와 삶이 어떤 근원에서 시작되었는지 돌아보고, 우리의 존재와 삶이 시작된 근원이 어디인지 돌아보는 날입니다.
그리고 나의 행복의 근원은 어디인지, 하느님이 나의 행복의 근원인지 불행의 근원인지 돌아보는 날입니다.
사실 지금 내가 불행하다면 욥처럼 자기가 태어날 날을 저주하고, 자기를 배었던 어미의 태를 저주하고
마찬가지로 자기를 생겨나게 하신 하느님을 저주할 것입니다. 하느님이 자기의 모든 불행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지금 내가 행복하다면 내가 태어난 날을 축하하고, 내가 왜 이렇게 행복한지, 나만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지, 누가 나를 이렇게 행복하게 했는지 돌아보고 감사할 것입니다.
시원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진정 행복할 수 없습니다. 불행한 사람은 행복을 근원으로부터 찾지 않고 자기 혼자 기를 썼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불교는 행복도 불행도 자기 업보라고 얘기하고,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자기 힘으로 행복하려고 하다가 실패하고 불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를 비롯하여 하느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행복의 근원이 바로 하느님이라고. 하느님께서 복 주시는 분이라고 믿고 그래서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받아 행복합니다.
오늘 민수기의 모세는 그래서 이렇게 백성에게 권고합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그러므로 우리의 존재와 생명이 그 근원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시작했다면 한 해의 시작과 하루의 시작도 그 근원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시작하고,
하느님께서 복 주시기를 빌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내게만 복 주시기를 빌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먼 데 있는 사람까지 하느님께서 복 주시기를 빌 것입니다.
사실 자기 행복만을 위해 비는 사람은 자기 행복에 급급한 사람이고 그러기에 자기도 행복하기 어렵거나 겨우 자기만 행복할 것이고, 멀리 있는 사람까지 복을 빌어주는 사람은 그만큼 행복이 크고 넘칠 것입니다.
저의 올해 목표도 복음 전파이고 행복 전파입니다. 같이 사는 공동체 형제에게 눈 뜨자마자 미사 드리면서 행복을 빌고, 우리 식당을 찾아오는 모든 사람에게도 같은 행복을 빌어주겠습니다.
음식 맛에 끌려 우리 식당에 오지 않고 사랑에 끌려 우리 식당에 오고 오면 행복해지니까 우리 식당에 오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창피한 계획이지만, 올해는 복을 빌어주지 못할망정 저주는 비록 작은 저주일지라도 하지 않겠습니다.
작은 저주란 염병할 놈이나 벼락 맞아 죽을 놈이라고 욕하는 것처럼 누가 진짜 불행해지기를 바라고 욕하는 그런 큰 저주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그저 자주 정치인들을 보고 빌어먹을 놈들이라고 작은 저주를 퍼붓고, 자기밖에 모르는 얌체 족속들에게 못된 놈이라고 지나가는 욕을 퍼붓는 것인데 비록 그런 작은 저주와 지나가는 욕일지라도 올해는 하지 않겠습니다.
아무튼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올해 새해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 많이 받으셔서 부디 자신도 행복하고, 그 행복을 이웃과 나눠 이웃도 행복하게 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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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루카12,40)
<복(福)!>
오늘은 음력으로 새해인 민족의 큰 명절인 '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네 번의 새해'가 있네요. ㅎㅎ
전례력새해(12.3), 양력새해(1.1), 절기새해 입춘(2.4) 그리고 오늘 음력새해(2.10)입니다.
'설명절'에 우리는 먼저 우리의 뿌리이신 조상님들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함께 모여 제사를 지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드리는 '설합동위령미사'도 먼저 떠나가신 조상님들을 기억하며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리고 설명절에는 어르신들께 세배를 드리고, 서로 덕담을 나눕니다.
설명절을 맞이하여 새해 인사를 나눕시다! 그리고 오늘 제1독서(민수6,22-27)의 말씀인 '아론의 축복'으로 서로에게 복을 빌어줍시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주시리라."(민수 6,24-26)
오늘 복음(루카 12,35-40)은 '깨어 있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35-36.40)
'깨어있음의 첫째'는 모든 사람에게 복을 내려주시는 주님의 복(은총)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들(우산들), 곧 내 안에 있는 육의 열매들인 교만과 탐욕과 시기(질투)와 분노와 음욕과 인색과 나태(게으름)의 우산들을 성령의 힘으로 치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야고4,14)
깨어 있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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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_-c5TRla9H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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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루카 12, 40)
하느님과
더 가까워지는
사랑의 체험이
바로 사랑의
본질입니다.
미완성은
준비를 통하여
온전하신
하느님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사계절이 분명한
우리에게서 준비란
성숙한 변화의
삶입니다.
성숙한 삶은
성찰의 삶이며
성찰의 삶은
충실한 준비의
삶입니다.
그래서
준비는 변화를
풍요롭게 하며
변화는 준비를
알차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는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결국
하나가
되는 과정은
준비의
과정입니다.
소중한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들어내는 여정이
바로
준비의 여정입니다.
언제나
준비하는
사람에게
기회가 옵니다.
자신의 역할과
자신의 소임에
충실한 삶이
준비하는
삶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과
함께하는
모든 삶이
우리가 바라는
축제이며
따뜻한
명절입니다.
설명절은
따뜻한
인정과 나눔을
통하여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신
하느님께
우리의 이야기를
올려드리는
가슴 따뜻한
날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실행하게
되는 모든
사랑과
감사가
준비의 주된
마음들입니다.
설명절을 통하여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서
배우고 실천하는
소소한
삶의 지혜를
배웁니다.
멀리서
찾지 말고
바로 우리들의
삶 안에서부터
시작하고
배우는
가장 좋은
설날 되십시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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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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