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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
1. 개요
현대 공동체주의 윤리, 덕윤리의 대표 주자인 스코틀랜드 출신 철학자.[3]
2. 생애
1929년 스코틀랜드에서 출생. 1945년 퀸 메리 런던 대학교에 입학하여 1949년 고전학 학사를 시작으로 맨체스터 대학교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연구했다.[4] 그 이후 1951년부터 맨체스터대학교,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강사 생활을 시작하였고 1969년 미국으로 옮겨 브랜다이스 대학교를 시작으로 수많은 미국 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했다. 현재는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객원교수로 재직중이고 노터데임 대학교[5]에서 선임 교수로 재직중이나 수업은 진행하지 않는 것 같다. 전형적인 학자스타일로 대중매체와의 인터뷰 등으로 사생활을 노출시키지 않아 에피소드들이 전부다 교수 경력에 관한 이야기들 뿐이다. 대표작으로《덕의 상실》이 있다.
3. 사상
3.1. 도덕의 위기
매킨타이어는 지금 이시대의 도덕이 위기에 처해 있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결정을 '도덕'에 호소함으로써 정당성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의 호소는 절충적이고 일관성이 없으며 도덕 용어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자의적인 선택을 옹호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조종하는데 사용되는 일종의 도덕적 수사학이 되어 버렸다. 또한 관료제 정부는 가치 판단의 문제에 있어서 사회과학적 지식을 그 판단의 근거로 사용하게 됨으로써, 도덕 가치의 판단의 문제를 외적 유용성의 문제로 탈바꿈시킨다.
이는 개인의 차원에서는 '나에게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심미적 주관주의로, 그리고 사회의 차원에서는 '성공적인 것이 좋은 것이다'라는 관료제적 합리주의로 양극화된다. 이를 통해 현대 서양사회는 일종의 "유령적 자아"[6]를 산출한다고 매킨타이어는 비판한다. 이러한 현상은, 도덕적 언어는 한갓 감정의 표명에 불과한 것으로, 정의적 의미만 가지기 때문에 규범윤리학(도덕)은 학문으로 성립할 수 없다는 '정의주의(emotivism)'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즉 우리는 도덕 용어들이 더이상 사회적 역할을 못하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2가지 방법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니체를 따라서, 전통적 도덕 추론의 자의적 요구에 맞서 '개인 각자의 가치판단에 따른 자율성'을 옹호하거나, 아니면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서, 도덕 형성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조사하여 '어떤 도덕의 내용이 합당한지를 구체적으로 찾아 보는 것'으로 나누어진다. 하지만 니체처럼 자유라는 권리와 유용성만을 외치는 유령적 인간은 정말 바람직한 인간인가? 도덕적 실천과 정체성 형성은 오로지 개인의 '선택'에 맡겨야 되나? 그렇다면 도덕적 인성교육은 쓸모없는 것인가? 라고 매킨타이어는 반문하며,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에 따라 '도덕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찾아가보자는 제안을 한다.
3.2. 덕의 3단계
우리는 어떤 내용의 도덕을 따라야 하는가? 매킨타이어는 이에 대한 설명을 세 단계로 진행한다.
첫째 단계는 '실천'에 내재적인 선들을 성취하는 데 필요한 성질들로서 덕들을 고찰한다. 실천을 통해서 목적과 목표들이 발견되거나 재발견되고 이 목표들을 성취할 수 있는 수단들이 강구된다. 즉 실천(경험)을 통해서만 내재적 도덕 가치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파악되고 그 목적을 평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단순히 머리로 아는 지식'과 '수많은 경험을 통해 얻는 연륜적 지식'은 다르다는 것을 안다.[7] 매킨타이어가 말하는 덕은 후자를 말하는 것으로, 도덕이란 실천적 경험들을 통해 얻어지는 미덕(virtue)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미덕을 실천에 옮길 때 뿌듯한 감정(행복, 만족감)[8]을 느끼는데, 이것이 바로 도덕을 판단하는 첫번째 단계가 된다.
다만 실천을 통해 오는 모든 만족감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매킨타이어는 내면적 덕과 외면적 덕을 구별한다. 돈 권력 명예 등 외부의 것들을 얻음으로써 실천의 만족감을 느끼는 외면적 덕은, 공동체 모두의 도덕이 되기에 부족하며 그래서 우리는 내면적인 도덕만을 살펴봐야 된다고 매킨타이어는 말한다. 또한 내면적 미덕의 실천은 그 미덕의 본질(telos: 텔로스)을 목적으로 해야하며, 따라서 그 실천의 결과가 어떻게 되느냐와는 상관없이, 그 실천의 과정자체를 수행함으로써 오는 뿌듯한 만족감에 큰 가치를 둔다. 예를 들면 '인내'라는 덕목은, 그 인내의 결과가 어떻게 되느냐와는 상관없이, 그 인내를 실천하는 것에서 오는 내면적 만족감이 그 덕목을 덕목답게 만든다는 것이다.
둘째 단계는 '전체 삶'의 선에 기여할 수 있는 성질들로서 덕들을 다룬다. 이는 '인간 삶의 서사적 통일성'을 요구한다. 따라서 일시적인 덕목은 제외된다. 예를 들면 '무정함'은 생존하기 위해서는 훌륭한 덕목이며, 위험으로부터 생존하는 동안에는 그 실천의 내면적 만족감을 얻게되지만, 가정의 삶을 세우고 유지하는 데는 적절하지 못한 덕목이기 때문에 부족함이 있다. 즉 서사적 맥락에서 '무정함'은 일시적 덕목에 해당되므로 공동체의 도덕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서사적 통일성을 요구함으로써, 인간 삶의 서사적 맥락안에서 도덕을 살피는 일관성을 지니게 되며, 이를 통해 어떤 것을 선택해도 옳다는 상대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난다.
"나는 누군가의 아들 또는 딸이고, 누군가의 사촌 또는 삼촌이다. 나는 이 도시 또는 저 도시의 시민이며, 이 동업조합 또는 저 직업집단의 구성원이다. 나는 이 씨족에 속하고, 저 부족에 속하며, 이 민족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좋은 것[9]은 이러한 역할을 담당하는 누구에게나 좋아야 한다. 이러한 역할의 담지자로서, 나는 나의 가족, 나의 도시, 나의 부족, 나의 민족으로부터 다양한 부채와 유산, 정당한 기대와 책무들을 물려받는다. 그것들은 나의 삶에 주어진 사실과 나의 도덕적 출발점을 구성한다. 이것은 나의 삶에 그 나름의 도덕적 특수성을 부분적으로 제공한다."
이진우(역), 1997, "덕의 상실", 서울: 문예출판사 324쪽
더 나아가 공동체에 속한 개인은, 공동체가 지금까지 써온 이야기를 이어쓰는 서술자인 동시에 공동체가 지금까지 만들어온 틀 안에서 연기하는 연기자이다. 따라서 어떤 도덕이든지 인간이 살아온 삶의 맥락(전통) 안에서 그 도덕을 파악할 수 밖에 없다. 이 맥락(전통) 속의 자아가 바로 '서사적 자아'다.
셋째 단계는, 이러한 전통의 맥락 속에 있는 덕들은 '인간존재를 위해 좋은 선(善)'이어야만, 우리는 그 전통이 앞으로 계승되어 나아갈 우리의 덕목과 가치관으로 적절한지를 파악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이 셋째 단계는 상대주의적 명제일수도 있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어떤 전통이 경쟁 관계에 있는 상대 전통보다 인간존재를 위해 더 설득력있는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그자체 결함이 다양한 방식으로 수정되고 확대될 기준의 관점에서 이루어진다면, 이 전통의 추종자(서사적 자아)들은 그들이 그 속에서 살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도덕적 삶의 실체를 빚지고 있는 전통이 미래의 도전들을 성공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수단들을 발견할 것이라는 사실에 상당한 신뢰를 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어떤 것이 '인간존재를 위해 좋은 선'인지를 밝히는 것은 상대주의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사실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인간존재라는 그 자체만으로 존중받아야 된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결국 이 문제를 마주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어느 전통이 옳은지 그른지'를 밝혀낼 수 없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인간 존재를 위해서 '더' 합당한 설명을 하는 '덕'은 찾을 수 있고, 이를 통해 우리의 전통을 수정해 나가야만 한다고 매킨타이어는 주장한다. 인간존재에 대한 존중은 부정할 수 없고 부정해서도 안 된다는 점에서, 이러한 방법이 최선이라는 것이다. 즉 타 전통과 비교하여, 우리의 전통이 '인간존재를 위해 좋은 선'이라는 점을 '더 설득력있게 설명'할 수 있다면 우리의 전통을 계승해 나가고, 타 전통이 더 설득력있게 설명한다면 타 전통을 통해 우리의 전통을 '수정'하여 나가자는 것이다. 이렇게 수정된 전통은 미래의 도전들을 성공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가장 그럴듯한 방법[10]이 된다.
요약하자면, 매킨타이어의 덕윤리론은 '내면적 덕의 실천', '인간 삶의 서사적 통일성(전통)', '인간존재를 위해 좋은 선'의 세 단계로 완성되어진다.[11] 실천을 통해서는 개인 삶의 활동과 덕의 관계가, 인간 삶의 서사적 통일성에서는 공동체의 전통과 덕의 관계가, 인간존재를 위해 좋은 선에 의해서는 인류와 덕의 관계가 설명된다. 어떠한 인간적 특성도 세 단계의 조건들을 충족시키기 이전에는 결코 덕으로 간주될 수 없다.[12]
3.3. 전체주의의 위험성?
공공적 덕에 대한 공화주의적 복종의무에서 전체주의와 테러의 기원을 발견한 ㅡJ.L. 텔몬, 이사야 베얼린, 다니엘 벨 들이 그 예이다ㅡ 몇몇의 후기 작가들이 있다. 그들의 명제에 대한 간단한 대답은 어느 것이나 어쩔 수 없이 부적절할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덕에 대한 모든 복종의무가 엄청난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기를 희망한다고 응수하고픈 마음이 든다. 적어도 그들이 혐오하는 몇가지 결과를 산출한 것은 덕에 대한 복종의무가 정치적으로 제도화되는 방식들이지, 복종의무 자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나는 주장하고자 한다. 실제로는 대부분의 현대적 전체주의와 테러는 덕에 대한 어떤 복종의무와도 상관이 없다.
이진우(역), 1997, "덕의 상실", 서울: 문예출판사 p.349
가끔 생윤 교사나 윤리 관련 유튜브에서 매킨타이어나 공동체주의를 말할 때 전체주의로 빠질 위험성이 있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들은 『덕의 상실』을 읽어보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매킨타이어는 도덕은 '제도적으로(또는 이에 준하는 방식으로) 강제되지 않아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즉 '공권력이나 다수에 의한 폭력으로 강제되는 경우'는 매킨타이어가 말하는 바가 아닌 것이다.[13]
만약 전통이나 관습을 내세워서 전체주의와 테러를 일으키는 예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매킨타이어의 덕(virtue)과 관계가 없다. 매킨타이어는 『덕의 상실』에서 "덕은 인간존재를 위해 좋은 선(善)이어야 한다"[14]고 말했기 때문이다. 전체주의와 테러를 두고 '인간존재를 위해 좋은 선'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따라서 전체주의와 테러는 매킨타이어가 말하는 도덕에 해당되지 않는다. 만약 다수에 의해 전통이라는 명목으로 이러한 복종의무의 위험이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매킨타이어에게 있어서는 그러한 상황[15]에서 복종의무를 거부하는 것은 마땅한 것이 된다.[16]
하지만 굳이 공적인 강제력이거나 폭력이 아니더라도, 도덕의 이름으로 사회가 개인에게 압박을 행사할 수 있다는 문제점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 자유에 대한 압박을 제거하기 위하여 도덕의 긍정적인 효과를 아예 무시해도 좋은지는 따로 다시 따져봐야할 문제이다. 전체주의나 테러가 없는 한에서, 우리는 도덕이 사회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이 적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도덕적 인성 교육'을 통해 얻는 효과는 그 부정적인 면을 덮고도 남을 정도로 거대하다.
자유주의는 개인 각자의 다원적 가치를 존중하기에 도덕은 상대주의적 여러 가치들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며, 그리하여 도덕을 개인의 선택과 취향에 맡긴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공동의 가치를 추구하는 도덕'을 붕괴시키게 된다. 이러면 앞서 언급했던 '나에게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가치관을 가진 '유령적 자아'를 산출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자유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덕이 아예 없어져야 하냐? 그렇진 않은 것 않느냐? 도덕도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 매킨타이어의 주장이다. 즉 개인은 항상 사회 속에서 존재하며, 사회가 있으면 사회적 연대감이 필요하고 그것은 도덕으로 이루어진다. 개인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조심한다면 도덕을 통해 '개인 가치관의 형성과 사회적 연대감을 형성'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며, 오히려 필수적이다.
4. 저서
《윤리학 소사: A Short History of Ethics》(1966) : 한국번역명《윤리의 역사, 도덕의 이론》
《세속화와 도덕적 변동: Secularization and Moral Change》(1967)
《덕 이후: After Virtue》(1981) : 한국번역명 《덕의 상실》
《누구의 정의이고, 어떤 합리성인가?: Whose Justice? Which Rationality?》(1988)
《제일원리, 최종목적, 그리고 현재의 철학적 문제들: First Principles, Final Ends and Contemporary Philosophical Issues》(1990)
《도덕적 탐구의 세가지 경쟁적 입장들: Three Rival Versions of Moral Enquiry》(1990)
5. 여담
생활과 윤리에 등장하는 현대 철학자 중 한 명이다.
메킨타이어가 주장한 공동체주의는 전통적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개인의 자유가 완전히 없어져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그가 지적하는 바는 자유주의도 전체주의와 마찬가지로 '이념적으로는 또다른 극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17] 도덕만 강제하는 것(전체주의)도 문제가 있지만, 자유의 방종만 말하는 것(자유주의)도 '이념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메킨타이어의 공동체주의는 자유주의와 전체주의의 중간에 위치하여, '맥락(전통) 속의 자유'를 추구한다. 이 맥락(전통)은 강제되는 것이긴 하나, 인간존재의 보편적 선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를 '전부 다' 희생하라고 강제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유는 왜 굳이 맥락(전통) 속에 있어야 하는가? 그것은 자유주의적 방종으로 사회를 구성할 순 없으며, 인간이 사회를 구성한 이상, 그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18] 인간의 자유는 최소한 맥락(전통)이라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의 자유가 보장될 수 있는 것은 그 사회의 맥락 안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현실적인 상한선을 말하는 것이지, 맥락(전통)이 개인의 모든 자유를 엄격하게 통제해라는 말은 아닌 것이다. 쉽게 말해서, 공동체주의는 자유주의(방종)와 전체주의(무자유) 그 사이에 있다.[19]
한국에 번역된《덕의 상실》의 역자 이진우 교수는 번역된 문장에 가독성이 떨어지는 편이다. 독문과 출신에 독일에서 대학을 나와서 그런지, 글을 읽다보면 뭔가 매끄럽지 못하고 끊기는 느낌이 드는데, 이럴 땐 매킨타이어 원서《After Virtue》의 영어 원문을 참조해서 읽으면 이해에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