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아프리카에서 복음을 전하고 36시간의 긴 여정 끝에 이제 돌아온 주의 종들에게 은혜를 부어주옵소서.
돌아온 집이 주님 품속이 되어 평안함을 누리게 하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인간적인 생각과 부추김을 십자가에 못 박고
겸비함으로 주님의 뜻을 구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보혈을 의지하오니 정결케 하여 주옵소서.
성령님, 말씀을 조명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9.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10.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1.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본문 주해)
1~2절 : 유대인들은 몸을 성결하게 하고자 유월절 전에 예루살렘에 와서 준비한다. 예수께서도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집으로 오셨다. 이곳에서(마태와 마가복음서에서는 문둥병자에서 나음을 입은 시몬의 집이라고 한다.) 예수를 위하여 잔치가 열렸다.
마르다는 일을 하였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잔칫상에 앉아 있었고, 마리아는 예수께 향유를 붓는다.
3~8절 :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였다.
지극히 비싼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의 가치로서, 한 데나리온은 성인 한 사람의 하루 품삯이기에 일 년 동안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하는 큰 돈이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서 그 발에 입을 맞추는 것은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입은 것을 아는 것이고, 한걸음 더 나아가 이 향유 사건은 결국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비하는 사건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자들도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예수님의 죽음을 마리아는 과연 알았던 것일까?
마리아가 늘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에 집중한 것(눅10:39)을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여 주신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준비하여 향품을 부은 것이라고.(7절)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내 장례일을 위하여 하는 일이니 이 여자 일에 참견하지 마라.”(공동번역)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로 두어라. 그는 나의 장사 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다.”(새번역)
마태(마26:13)와 마가복음(막14:9)에서는,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이 마리아가 행한 일도 말하라고 한다. 그것은 마리아를 기억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알라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마26:13)
한편,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모르는 가룟 유다는 마리아의 행동을 책망한다.
유다는 그 돈이면 가난한 사람에게 더 도움이 될 것인데, 쓸데없이 허비했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사실 유다는 가난한 사람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가 도둑이어서 돈궤를 맡고 거기에 있는 것을 마음대로 썼다고 요한은 설명한다.
“유다는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가 도둑이어서 이런 말을 한 것이었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아가지고 거기 들어 있는 것을 늘 꺼내 쓰곤 하였다.”(6절, 공동번역)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아는 것은 너무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십자가 외에는 생명을 얻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구제 그 이상이다. 사람의 생명으로 나서 멸망을 향해 가는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9~11절 :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이미 결의하였다.(요11:53)
그런데 이제는 나사로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많아지니 나사로마저 죽이려고 모의한다. 나사로가, 예수님이 생명과 부활임을 증언하는 증인이기 때문이었다.
(나의 묵상)
오빠인 나사로가 죽었을 때만 해도 마리아는 ‘예수님이 계셨더라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텐데요...’ 라고 말했었다.
그때는 생명과 부활이신 예수님을 알지 못했을 때이다.
오늘 마리아는 자신의 마음 전부를 담은 귀한 향유를 예수님께 부음으로 예수님의 죽으심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인다.
여전히 생명과 부활이신 예수님을 다 알지 못하는 상태이지만, 이때 마리아는 예수님이 죽으셔야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안 것 같다.
물론 마리아도 예수님이 죽는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싫었을 것이고, 또 자신의 향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유를 부음으로 예수님의 죽으심을 준비하게 된 것은 예수님이 죽으셔야 만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향유를 붓고 주님의 발을 자신의 머리털로 닦았으리라.
아무것도 모르고 교회를 다닐 때도, 종교란에 쓸 일이 있으면 ‘기독교’라고 썼다.
그때만 해도 내가 믿는 기독교는 ‘성공의 종교’인 줄 알았다.
믿음이 좋아지면 질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음으로 이 땅에서 하는 일마다 잘 되는 줄 알았던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당황스러운 일이 생긴다.
그것은 나의 기독교가 너무도 비실비실한 종교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겸손, 양보, 희생, 헌신......너무도 힘짜가리가 없다.
물론 어느 정도 겸손하고 양보하는 것까지는 할 수 있다. 더 큰 이득을 위해서라면 잠시 양보하는 것도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드디어 십자가에 이르면.....아무 힘도 없는 그 십자가, 성공을 향한 걸음에 걸리적거리기만 하는 십자가가 되니 아예 외면하고 살았던 것이다.
겉으로는 예수님의 죽으심, 구원을 듣고 말하였지만, 도대체가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가 내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그것은 나 자신이 구제불능의 새까만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기본적으로 좀 괜찮은 인물인데, 좀더 괜찮은 인물이 되고자 하는 차원으로 예수님을 불렀으니 동상이몽도 그런 동상이몽이 없는 것이다.
누구보다도 예수 이름을 많이 불렀지만, 내가 만든 예수를 믿었으니 열심히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의 강권적인 인도하심으로 복음을 듣게 되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말씀 묵상을 시작하게되었다.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한 말씀이 들리고 보이기 시작한다.
나의 기독교는 성공의 종교도 아니요, 세상 힘의 종교도 아니었다. 아니, 종교가 아니라, 생명이요 진리였다.
베드로가 흥분하여, ‘주님, 절대로 죽으시면 안됩니다’ 하고 외치던 자가, 마리아처럼 향유를 붓고 주님의 죽으심을 준비할 뿐 아니라 그의 죽음에 연합되기를 원하는 자가 된다.
주님이 죽으심으로 구제불능의 새까만 이 죄인에게 살 길이 열렸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알기 전에는 세상의 것으로 주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펄펄 살았고, 거기다 세상의 물질과 재능과 건강과 여러 관계를 통해 주의 일을 멋지게 해 내어야겠다고 생각했으니, 향유를 허비하는 마리아가 못마땅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무슨 그런 쓸데없는 일이나 하고 있느냐?’ 고 하는 것이다.
이제 주님의 죽으심의 십자가에 내가 연합되는 일이 너무도 중요한 일임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으심이 바로 생명을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향유를 판 돈으로 많은 사람을 잠시 구제할 수 있어도 그것으로 그들에게 생명은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대해 내가 죽음으로, 십자가에 연합된 나를 통해 주님의 생명이 전해짐을 생각한다. 주님께서 그렇게 나를 살리셨듯이, 나도 죽음으로 생명을 살리는 도구가 되길 기도한다.
그리고 주님 곁에 그저 말없이 앉아 있는 나사로처럼 생명과 부활이신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가길 기도한다.
(묵상 기도)
주님,
주님의 죽으심이 생명을 주시는 일임을 알게 됩니다.
땅에서의 성공, 행복 그리고 위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영원한 생명임을 기억합니다.
이 생명의 일에 쓰임받는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남은 저의 생이 주님께 부어드리는 향유가 되게 하옵소서.
그러나 저는 간사하고 연약합니다.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성령님을 의지하여 나아갑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