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양태론이아니고삼위일체론삼위하나님의역할분담타종교와다릅니다
이 '삼위일체 학설'은 모든 기독교 신학 주제들의 본체가 되며, 중심이 되며, 기초가 되며, 핵이 되는 아주 중요한 학설입니다. 이것을 성경적으로 정립하지 않으면, 자신의 모든 신학 이론이 잘못될 수 있으며, 모래 위에 집 짓는 격이 될 수 있습니다(마7:26). 본의 아니게 '비성경적' 이단 가르침에 미혹 당할 수도 있습니다(마24:4-5). 그러므로 우리는 '삼위일체론' 위에, '7대 신학 주제들'과 '하나님의 전신갑주'(엡6:11-18)의 집을 지어야 합니다. 아니면 우리의 신학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신학 이론인데, 놀랍게도 초대교회 400년간 이 학설이 정돈 되지를 못했습니다. 교회들이 혼돈해 왔었습니다. 온갖 이단들이 난무했습니다. 교회가 기독교 하나님에 대한 정체성을 정립하려고 무던히 애쓰며 노력해왔습니다. 이중 한 사람이 사벨리우스(Sabelious, 주후215 사망, 리비아 출신 신학자)입니다. 이 사람이 각고의 노력 끝에 기독교의 성부, 성자, 성령 신학을 정리하여 발표하였습니다. 상당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 동안 답답해왔던 기독교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이 사람의 학설이 이러합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며, 그 위(person)도 한 분이시다. 'One God in One Person' 입니다. 이 '하나님'이, 상황에 따라 '성부 역할'도 하시고, '성자 역할'도 하시고, '성령 역할'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상당히 매력 있는 가르침이며,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접근 방법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세계적으로 이 학설을 수용하며 가르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들이 성경적 삼위일체론을 체계적으로 접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벨리우스 가르침을 영어로 'Sabelianism', 또는 'Modalistic Monarchianism'이라 합니다. 한국어로는 '양태론'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학설이, 앞에 언급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주후381)에서 이단으로 정죄 받았습니다. 5대 교구들에 의해서입니다.
당시 5대 교구들이었던 로마카톨릭 교회, 희랍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예루살렘 교회, 애굽 콥틱 정교회가 이 '양태론'을 이단으로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로니하게도, 이 이단학설이 그 후에도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위세를 더 부리며 상기 교회 안에 상존해왔으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종교개혁(주후1517)후 지금까지, 주류(mainline) 개신교단들 안에서도, 이 '양태론'이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적 체계적 삼위일체론' 가르침의 부재 때문입니다. 급기야 상기 로마카톨릭 교회와 정교회 교단들은 물론, 주류 개신교단들에게까지, '종교 다원주의'라는 '적그리스도' 이단 사상이 자리잡게 만들었습니다. '삼위일체론'의 약화와 변질 때문입니다.
그러면 황 목사님, 성경적 '삼위일체론'은 무엇인가요? 이는 'One God in Three Persons' 입니다. '삼위로 계신 한 분의 하나님' 이십니다. '양태론'과 다릅니다. 유일신교를 주장하는 '유대교'와 '이슬람교'와도 다릅니다. 유대교는 성부하나님만 유일신으로 믿습니다. 성령은 성부의 부속 신으로 여기며, 성자는 믿지도 않습니다. 이슬람교도 알라만을 유일신으로 믿습니다. 이들에게 '삼위'(three persons) 개념이 없습니다. 이렇게 신관의 다름으로 해서, 이 두(2) 종교들(유대교와 이슬람교)이 기독교를 배격합니다.
그러면 성경 어디에 '삼위 하나님'에 대한 성구들이 있나요? 구약에 최소한 다섯(5) 곳에 있습니다. (1) 창1:1, (2) 창1:26, (3) 창3:22, (4) 창11:7, (5) 사6:8 입니다. 신기한 것은, 이렇게 성서적 근거가 있는 데에도, 유대인들이 눈이 감기어, 삼위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왜 이럴까요? 이들의 실수나 잘못일까요? 아니면 우연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적 디자인'임을 우리가 배웠습니다(신32:20-21; 시69:22-23; 사6:9-10; 롬11:8-9). 이것을 바울이 '그리스도의 신비'라 했습니다(엡3:4).
또한 구약만 아니고, 신약에도 '삼위 하나님'에 대한 성구들이 있습니다. 최소한 네(4) 곳에 있습니다. (1) 마3:16-17, (2) 마28:19, (3) 고후13:14, (4) 요일5:8 입니다. 이러니 기독교 하나님이 '삼위 하나님'이심이 확실합니다.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신기한 것은, 똑똑하고 종교성이 강하며, 구약에 정통하다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이 이 사실에 눈이 감겨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삼위 하나님'이 독특한 속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1) '존재적, 사역적, 성품적 속성', (2) '동등적 속성', (3) '기능적 속성' 입니다. '존재적'으로 이러합니다. 삼위로 존재하십니다(창1:1,26). 자존하십니다(출3:14). 영원하십니다(신33:27). 불변하십니다(단6:26). '사역적'으로는 이러합니다. 창조자이십니다(창1:1). 전지자이십니다(마10:30). 전능자이십니다(창17:1). 무소부재자이십니다(사6:3). '성품적'으로는 이러합니다. 사랑이십니다(요일4:8). 공의로우 십니다(사45:21). 자비로우십니다(느9:31). 은혜로우십니다(벧전5:10).
또한 삼위 하나님은 '동등적 속성'을 가지십니다. 모든 면에서 동등(equal)하십니다(요5:18, 10:30). 질적으로, 양적으로, 권위적으로, 권력적으로, 계급적으로 동등하십니다. 모든 일을 '공동 회의'에서 결정하시고 진행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삼위하나님은 '기능적 속성'도 가지고 계십니다. 동등하시지만, 기능적으로 하시는 사역이 다릅니다. (1) '성부'는 공동회의 의장으로, 결정된 사항을 선포하시며(요3:16, 6:37-40), 파송하시며(요3:16), 보내시는 발원자(요14:16)이십니다. (2) '성자'는 결정된 사항을 수행하시며 실천하시는 분(요3:16)이십니다. (3) '성령'은 수행, 실천하시는 '성자'께 능력 부여하시는 분(사11:1-2; 행1:8)이십니다.
성경에 '삼위 하나님의 이름들'이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성부'를, 하나님(창1:1; 요3:16)으로, 아버지(요17:1)로, 농부(요15:1)로 입니다. 삼위 중, 이분의 이름이 가장 적게(a few)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분이 피조물들과 직접 관계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자'를 통해서만 관여하십니다. (2) 그래서 '성자 이름'은 100여개 이상이나 됩니다. 피조물들과 직접 관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자의 이름들은 추후에 드리겠습니다. 한편 (3) '성령의 이름'도 10여 가지나 됩니다. 하나님(창1:1), 주의 영(삼상16:14; 눅4:18), 지혜와 명철의 영(사11:2), 계획과 능력의 영(사11:2), 지식과 주를 경외하는 영(사11:2), 아버지의 영(롬8:11), 아들의 영(행16:17; 롬8:9), 하나님의 영(마3:16), 성령(눅3:22; 행1:8), 보혜사(요14:16), 그리스도의 영(벧전1:11), 하나님의 일곱 영(계5:6) 등입니다.
이렇게 '삼위 하나님'에 대한 정보들이, 구체적으로 상기와 같이 성경 전반에 걸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삼위일체론'을 정립하는데, 400년이나 걸리게 하셨나요? 의문입니다. 이것이 정립되지 않아, 기독교계가 엄청 혼돈과 갈등과 분열이 있어 왔었습니다. 그 이유는 신기하게도, 이들에게 이 '삼위일체'에 대한, '지혜와 명철의 영'(사11:2)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안주셨나요?` 그 이유가 무엇인지요? 이 '삼위일체론'이 기독교 신학의 다이아몬드/진주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받으면, 그 가치를 모르거나, 가볍게 여기거나, 무관심하게 됩니다. 인간의 태생적 한계성입니다. 진주를 개나 돼지에게 주면, 그 가치를 모르고, 오히려 그것을 짓밟고, 주신 자를 찢어 상하게 합니다(마7:6). 전지하신 하나님(마10:30)이, 이들이 이렇게 할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놀랍게도 오늘날, 소위 '종교 다원주의자들'이라는 자들이, 이 '삼위일체론'을 짓밟고 있으며, 정통 성경적 '삼위일체론'을 주창하는 복음주의자들을 찢어 상하게 하고 있습니다. 분명 예수님이 예언하신(마24:23-28) 대로, 재림전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복음적 산고'의 일환입니다. 왜 이 '산고'를 허락하셨나요?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이들이 우리를 위한 '대항마'입니다.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우리를 위해, 이 '대항마'를 허락하셨습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에 더 집중하라는 촉매적 '대항마'입니다.
황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그러면 이 어려운 '삼위일체론'을 숙지하는 것이 구원의 요건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지난 2천년 교회시대에, '특별은혜'(예수님의 은혜로 하나님 사랑인 영생 받은 은혜) 받은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이것을 모른 채 죽어 낙원에 갔습니다. '삼위일체론'을 몰라도 천국갑니다. 예수님을 통한 '특별은혜'만 받으면 천국갑니다. 그러나 '특 특별은혜' 받는 자는, 이것을 숙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특 특별은혜' 받은 자라고 해서 모두가 '독수리'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독자들이 이미 '참새과'에서 '독수리과'로 진화는 되었지만, 아직 '애기 독수리' 입니다. 둥우리 안에 있습니다. 머지않아 날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담 가질 필요 없습니다. '부모 독수리'가 가져다 주는 먹이만 잘 먹으면 됩니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의 kairos가 옵니다. 날개를 피고 둥지를 떠나는 때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아직 둥지에 있다 하더라도 부담 가지지 맙시다. 식욕을 가지고 열심히 가져다 주는 먹이를 잘 먹기만 합시다. 배고파 하며 잘 먹는 자가 복 있는 자입니다(마5:6). 그런데 '부모 독수리'의 책임이 있습니다. '무교병 자연식 음식'을 먹여야 합니다. 아니면 '애기 독수리'가 병들게 됩니다. 건전치 않은 이상한 독수리로 변모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전개될 은혜 시리즈가, 여러분들을 위한 '무교병 자연식 음식'이 되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말씀으로 배부르고 자라게 되면, 자연스레 우리를 팔(8)복의 사람(마5:3-12), 즉 사춘기, 청년, 아들(마5:9) 독수리 시각자로, 조금씩 조금씩 성숙케 하실 것입니다. 극심한 산고 속에서도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저세상, 이세상, 저세상의 큰 그림을 보기 때문입니다. 또한 동시에 현미경 시각으로 이 세상의 '팔(8)대 악'(evils)을 보며, 소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는 예수님 이름 때문에 미움도 오해도 소외도 왕따도 핍박을 받더라도(마5:10-11), 평강으로 가득 찰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의 소금'으로 핍박을 받더라도 평강이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소금이 되어 죽어야만 '이 세상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마5:13-16). 빛이 되어야만, 오늘날의 강력한 어두움의 세력인, '두(2) 짐승'이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이들이 힘을 쓰지 못하며, 우리를 두려워하며, 도망갑니다. 우리가 이 두(2) 짐승의 말로를 알기 때문입니다(계19:20).
황 용 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