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어떤 음식을 먹느냐에 따라 몸이 그대로 만들어지듯이
말씀을 먹는 제 영혼은 점점 더 강건하게 될 줄 믿습니다.
새날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도 말씀의 식탁에 앉혀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보혈로 정결케 된 영혼에 진리의 말씀을 담게 하시고
그 말씀이 저를 주장하게 하옵소서.
진리의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17.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18.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19.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
(본문 주해)
12~13절 : 유월절은 유대 땅의 사람만이 아니라 여러 나라에 흩어진 유대인들도 절기를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오는 날이다. 이 많은 무리가 예수님이 여러 가지 기적과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일을 듣고서 그가 메시아일 것이라고 기대를 한다.
그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시니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들이 두 가지 특별한 모습으로 예수님을 맞이한다.
첫째는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는 것이다.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외치는 것은, 왕을 환영하는 상징이다. 군중들은 왕을 맞이하는 이런 상징물을 가지고 예수를 영접하였다.
둘째, ‘호산나’로 외치는 것이다. ‘호산나’는 ‘여호와여 지금 우리를 구원하여 주십시오’라는 뜻이다.
이는 시편 118편 25절의 내용을 담고 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시118:25)
당시의 유대는 로마의 식민 지배하에 있었다. 유대인들은 다윗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왕과 시편 118:25절의 여호와의 구원을 알고 있기에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서는 그가 자신들의 왕으로 구원하여 달라고 호산나라고 외치는 것이다.
무리의 고백과 외침은 진리이다.
그들은 구원받아야 할 존재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죄에서 구하여 주실 메시아를 생각하지 못하고, 예수님이 그들의 정치적이고 종교적이고 현실적인 왕이 되어 주시기를 외치며 따라갔던 것이다.
14~15절 : 이러한 시점에 예수께서는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
이것은 자신이 메시야임을 공개적으로 나타내는 행위이며, 이렇게 나귀 새끼를 타고 가시는 이유는 기록된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함이다.
“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9:9)
왕이 오시는데 전쟁용 말을 타신 것이 아니라, 짐을 나르는 나귀 그것도 새끼를 타신 것이다.
그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심으로써 그가 이스라엘 왕인 것은 맞지만, 정치적 메시아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분명 왕의 위엄으로 입성하나, 이 세상에 속한 왕의 위엄은 아니다( 세상에 속한 왕은 말을 타고 입성한다). 그는 비천한 모습으로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데, 그것은 죽음을 향해 나귀를 타고 가는 것이다.
16절 :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신 뜻을 처음에 깨닫지 못하였다.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 이 일이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된 것임을 알게 된다.
예수님이 영광을 얻으신 후란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의 사건을 가리킨다. 그 영광의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시니 성령이 임한 사도들이 예수님의 이 일이 구약 성경의 성취임을 깨닫고 증언하게 된 것이다.
제자들도 진리의 영이 오기까지 예수의 왕 됨이 무슨 의미인 줄 몰랐다면, 환호하는 무리가 그 의미를 알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17~18절 : 유대인들은 메시아 오심을 아주 간절한 마음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죽은 자까지 살리셨다는 증언을 듣게 되니 그 예수를 왕으로 세우고자 한 것이다.
그렇게 많은 무리가 호산나를 부르며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모습을 본 바리새인들이 체념하는 말을 한다. 이미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지만, ‘저렇게 많은 무리가 따르니 우리가 그를 죽일 수 없겠다’는 체념의 말이다.
(나의 묵상)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이다.
이미 예수님의 표적에 대해 들은 것이 많고, 거기다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셨다는 증인들의 말을 들은 무리들이 열광적으로 예수님을 환호하며 맞이한다.
로마의 식민지라는 답답한 현실 속에서 자신들을 구하여 줄 분, 그토록 대망하던 메시아가 이분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종려나무를 흔들며 왕으로 대접하고, ‘호산나’로 외치며 상황적 현실에서 자신들을 구하여 줄 것을 외치는 모습이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어린 나귀 새끼’였다.
당당하게 멋진 말을 타고 오시는 힘을 가진 왕의 모습이 아니라, 짐을 실어 나르는 초라한 나귀, 그것도 힘이 없는 어린 나귀새끼를 타신 우스꽝스런 모습인 것이다.
어쩌면 무리들도 이 모습에 약간 당황했을 것이다. 하지만 개의치 않는다. 흥분된 군중심리 속에 자신들의 열망을 이루는 것에 들떠 있었으리라.
그러나 예수님이 타신 나귀새끼는, ‘나는 너희가 원하는 그런 왕이 아니다’라고 침묵의 표현인 것이다. 즉 예수님은 이 세상 나라에서 인간들의 소원이나 들어주는 그런 왕이 아니라는 것이다.
비천한 모습으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겸손의 왕, 그는 죄악 된 인생들을 자기의 죽음으로 살리시려는 참된 왕이셨다.
나도 그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던 무리들 가운데 있었다.
그분이 나귀새끼를 타신 것이 내 눈에 못마땅했지만, 나는 그 이유를 구태여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수많은 표적을 보이셨고, 얼마 전에는 죽은 나사로까지도 살리셨으니, 이분만 따르면 이 땅에서 형통하게 되리라는 생각이었다.
교회를 다닌 세월이 30년이 넘었어도 내가 생각하고 믿는다는 예수님과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님이 너무도 다르다는 것을 나는 깨닫지 못했다.
“예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이것을 깨닫지 못하였으나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다음에야 이것이 모두 예수를 두고 기록된 것이며 또 이런 일들이 그대로 예수께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16절, 공동번역)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부활하셔서 하늘로 오르시고 성령을 보내주시기까지 제자들도 몰랐던 것처럼 나도 말씀에서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일깨워주시기까지는 청맹과니(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나 실제로는 앞을 보지 못하는 눈)로 살았던 것이다.
이제 말씀의 교제를 통해 진리를 보게 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감겨진 눈과 실눈을 크게 뜨고 주님께 집중한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너무도 가슴에 와 닿는 말씀이다.
수많은 표적을 보고 입을 떡 벌리며, 또 다른 표적을 구하며 몸과 마음이 우루루 몰려다니던 무리에서 벗어나, 기록된 말씀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고작 내 소원이나 이루어주시는 분이 아니라, 영생을 주시는 분임에 분명한 확신을 갖게 되니, 새삼 가슴이 벌렁거린다.
그러니 세상에서 사람들이 흥분하고 열광하고 몰입하는 것들이 다 시시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이것이 내게 행하신 주님의 위대하신 일이다.
그러니 주님에 대해서는 안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여전히 표적에만 머물며, 그것을 자랑하고 구하는 안타까운 영혼들을 지금도 보고 있다.
그들은 모두가 주님을 알지 못하여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외치는 무리들인 것이다.
그들의 특징은 자신들의 그 열정에 도취되어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여기저기를 쫓아다니며 기도한다고 하지만, 주님을 가장 확실히 계시하는 말씀 앞으로는 나아가지 않는 것이다.
이제 내가 전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욱 뚜렷해진다.
예수님을 알아가는 삶, 바로 영생의 삶을 증거하는 것이다.
스스로는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이 일을 성령께서 내게 행해 주신 것처럼, 택한 주의 백성들에게도 속히 베풀어주실 것을 기도한다.
(묵상 기도)
주님,
제게 베푸신 은혜가 차고도 넘칩니다.
이것을 다 적어내지 못하는 묵상의 기록은 그저 횡설수설할 뿐이지만,
제 마음을 주님께서 아시리라 생각하니 평안입니다.
세상 무엇보다 주님을 알아가는 이 기쁨이 가장 귀하고 귀하니
한결같이 이 영생을 누리며 증거 하는 자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