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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서점에도 화랑세기 책도 있고 해서 달라졌나 했는데 아직 위작 논란이 있더군요
참 질긴건지, 변화가 느려서 오래 버티는건지, 볼 생각이나 있는건지, 그나마 남아있는 우리 역사인데 말입니다
화랑세기 마지막을 장식하는 김흠돌반란사건에서 역으로 보면 흠돌이 아버지, 어머니, 형(동생?), 와이프,이모,외삼촌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김흠운(삼국사기 열전 47권)
김흠운(金歆運)은 내밀왕(奈密王)(내물왕)의 8세손으로 아버지는 잡찬 달복(達福)이다.
흠운이 소년 시절 화랑 문노(文努)의 문하에 있을 때, 낭도들이 아무개가 전사하여 지금까지 그 이름을 남기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 흠운은 분개하여 눈물을 흘리고 그와 같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북돋웠다. 같은 문하에 있던 승려 전밀(轉密)이 말했다.
“이 사람이 만약 전쟁터에 나가면 틀림없이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영휘(永徽) 6년(서기 655)에 태종대왕이 백제와 고구려가 변경을 막고 있는 것을 분하게 여겨 정벌을 계획했는데, 군대를 내보낼 때 흠운을 낭당대감(郞幢大監)으로 삼았다. 이때에 흠운은 집에서 자지 않고 비바람을 맞으며 사졸들과 고락을 같이 하였다. 그가 백제 지역에 도달하여 양산(陽山) 아래 진을 치고 조천성(助川城)을 공격하려 하였는데, 백제인들이 어두운 틈을 타 빠르게 달려와서 동틀 무렵 보루를 기어올라 들어왔다. 우리 군대가 깜짝 놀라 엎어지고 자빠져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적군이 혼란한 틈을 타서 급히 공격해오니 떨어지는 화살이 비오듯 모여졌다. 흠운이 말을 비껴 탄 채 창을 쥐고 적을 기다리는데, 대사(大舍) 전지(詮知)가 달래며 말했다.
“지금 적이 어둠 속에서 움직이니 지척에서도 분간할 수 없고, 공이 비록 죽더라도 아무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더구나 공은 신라의 귀한 신분이며 대왕의 사위입니다. 만약 적의 손에 죽는다면 백제의 자랑거리요, 우리에게는 크나큰 수치가 될 것입니다.”
흠운이 말했다.
“대장부가 이미 몸을 나라에 바친 이상 남이 알든 모르든 매한가지다. 어찌 감히 명예를 구하겠느냐?”
그가 꼿꼿이 서서 움직이지 않자, 종자가 말고삐를 쥐고 돌아가기를 권하였다. 흠운은 칼을 뽑아 휘두르며 적과 싸워 몇 명을 죽이고 자신도 죽었다. 이때에 대감 예파(穢破)와 소감 적득(狄得)도 함께 전사하였다. 보기당주(步騎幢主) 보용나(寶用那)가 흠운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말했다.
“그는 혈통이 고귀하고 권세가 영화로워 사람들이 아끼는 처지인데도 오히려 절개를 지키다 죽었다. 하물며 나 보용나는 살아도 이득될 것이 없고 죽어도 손해날 것 없지 않은가!”
그는 곧 적진으로 달려가 적병 몇 명을 죽이고 자신도 죽었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흠운과 예파에게 일길찬의 직위를 주고, 보용나와 적득에게 대나마의 직위를 추증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이 소문을 듣고 양산가(陽山歌)를 지어 애도하였다.
김흠돌(27세풍월주)(흠돌은 정해년(627) 생이고 병진년(656)에 화랑이 되었다)
26세풍월주 진공편의 일부
진공과 달복공(達福公)의 아들 흠돌(欽突)이 사이가 좋았다. 흠돌의 누나 흠신(欽信)이 보로전군(宝路殿君)에게 시집가서 두 딸을 낳았는데 아름다웠다. 진공과 흠돌이 꾀를 써서 흠신의 두 딸과 정을 통했으나, 흠신과 보로전군은 알지 못했다. 흠신의 어머니 정희(政姬)는 곧 유신공(庾信公)의 누이인데, 진공의 무례함에 노하여 유신공에게 고하여 벌을 주려 하였다. 흠돌은 크게 두려워하여 곧 찰의(察儀)에게 귀중한 뇌물을 주어 보량(宝良)을 설득하게 하였다. 보량은 이에 알아듣고 정희를 제지하며 말하기를 “폭로하면 단지 나의 자녀가 상처만 입지만 감추면 곧 물방울처럼 스스로 없어질 것입니다. 어찌 생각을 깊이 하지 않습니까?” 하였다. 정희가 곧 멈추었다. 이때부터 진공은 더욱 거리낌이 없어졌다.
결론 :1. 삼국사기 열전에 나오는 김흠운의 아버지는 달복이다
2.27세풍월주 흠돌편에는 나오지 않지만 26세 풍월주 진공편에 나오는 달복은 흠돌이 아버지 이다
3.달복의 아들은 기록상에 김흠운과 흠돌이다 그래서 김흠운과 흠돌은 형제이다
4.삼국사기는 고려시대에 만들어 졌고 화랑세기는 신라시대에 만들어 졌고 흠운이 김씨 였다면 아버지도 김씨이다
달복은 김달복이고 흠돌은 김흠돌이다
5.김흠운은 655년에 죽었고 흠돌은 656년에 화랑이 된다 (김흠운이 형일 가능성이 많다 흠돌이가 형이 였다면 655년전투에 먼저 갔겠지)
6.흠돌이 누나는 흠신이다 흠신의 엄마는 정희인데 김유신의 여동생이다 그래서 김정희 이다
김정희의 언니는 김보희와 김문희가 있다
7.달복은 더이상 역사책에는 없다 (경주김씨 족보는보지 못했다)
8.김흠운은 대왕(김춘추)의 사위였다
9.김유신은 남동생(흠순)도 있고 여동생(문희,보희,정희)도 여렷있다 그중에 정희는 책(삼국사기,삼국유사)에 없다
김흠돌이 반란(문무왕이 죽고 신문왕이 즉위할쯤) 을 일으키고 평정이 되었기에 정희는 반란을 일으킨 아들을
둔 엄마로 삼국사기에는 없다 그런데 아버지인 달복은 있다
왜 있을까 반역자의 아버지인데
김흠운때문에 있다 김흠운을 설명하기 위해서는삼국사기 김흠운편에 아버지와 조상을 이야기해야하는데 삼국사기를
만들었던 조직은 편집을 한것같다 내물왕의 8세손이고 아버지는 달복이다라고 나머지는 적지 않았다 (정희는 생략)
10.김흠운은 죽기전 여성과 결혼을 했다 와이프는 요석공주이다 요석공주는 김춘추의 딸이고 남편이 죽고난 다음 과부로
지내다가 남자를 만났다 그는 원효대사이고 그아들은 설총이다(요석공주는 김춘추와 보희의 딸이다?)
화랑세기는 뭘 좀 쓸려고 해도 가족관계가 너무 복잡해서 쓰기가 어려워요(사촌혼/배다른 형제혼/한남자와 두자매혼/아버지,아들과 한여자/엄마와 딸과 한남자 그리고 남첩,여첩 ...)
가족 관계를 알면 이해하기 쉬운데 책인데 아직 흠돌이도 제대로 안나왔는데
* 성골은 무엇인가
이게 참 어려워는데 문득 생각이 났다 이건 역사 자료가 없어서 이야기할 가치는 없다
신라는 박씨가 왕이었다가 석씨가 왕이 었다가 김씨가 왕이 됐는데
석씨는 박씨의 사위로 있다가 왕이 되고 김씨는 석씨의 사위(미추왕)였다가 왕이된다
미추왕 다음에 석씨가 왕이됐고 석씨가 다시 왕이 됐다가 미추왕 후손인 김씨인 내물왕이 왕이된다
그때는 성씨가 없었으니 미추왕 씨족 계통이 계속 왕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성골이란게 없다
내가 아는 성골은 왕과 왕비의 자식만이 성골이다
현재에서보는 내물왕이후의 김씨 왕들은 왕비와 관계해서 낳은 자식 빼고는 대원신통이니 여러 여자들과의 자식들은 성골이
될수가 없다 진골이 된다 왕이 될수없다
성골은 김씨왕과 왕후의 후손이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골로써 처음으로 왕이 된 자는 김춘추 태종무열왕이 있다 김춘추 아버지는 용수이다
용수의 부인은 진평왕과 마야왕후의 딸인 천명공주(선덕여왕 언니)이다 성골이다
용수는 진지왕과 왕후인 지도왕후의 아들이라 성골이다.
그래서 김춘추는 엄마 아버지가 다 성골이라 100% 성골이어야 한다
그런데 용수가 진지왕의 진짜 아들이 아니라면 지도왕후가 왕후가 되기전 다른자와 관계해서 임신을 했고
진지왕과의 결혼후 낳은 자식이라면 용수는 성골이 되지 못하고 그자식인 김춘추도 성골이 될수 없다
1. 지도왕후는 진지왕의 왕비가 되기전에 개에게 물려죽은 동륜태자와 관계를 했다
진평왕도 동륜태자의 자식이다
진평왕은 엄마는 다른 이복동생인 용수를 사위로 삼고 왕위를 넘겨 주려고도 했다
2.용수동생인 용춘이는 갑작스럽게 용수가 사라지고 천명공주와 어린 김춘추를 떠 맡는다
3. 진지왕 와이프인 지도왕후는 진지왕 폐위이후 다른남자를 만나 아버지가 다른 용춘이 동생 염장이라는 아들이 있다
용춘이는 진지왕의 자식이지만 용수는 동륜태자도 금룬태자(진지왕)의 자식이 아니어야만
용수가 성골이 아니므로 김춘추는 진골이된다
*용수는 진짜 진지왕과 지도의 아들이라면 성골이 맞고
성골과 성골이 결혼해야지만 성골이라 가정해보면 용수부인인 천명공주가 진평왕의 딸이 아니고 진평왕과의 결혼전
마야왕후가 여러명과 관계를 했고 거기서 나온 딸이라면 김춘추는 성골이 되지 못한다
3.천명공주를 성에서 내 보냈다
결론: 성골은 왕과 왕비의 자식이여만 된다 나머지는 모름
ps : 왕비가 성골이어야 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개인적으로는 성골이 아니어도 되는것같음)
진흥왕 와이프인 사도는 영실과 옥진의 딸이라 성골이 아님
추측결론
용수는 진지왕의 아들이 아니라 지도왕후의 사통으로 태어났다
그 사실이 숨겨져오다 용수의가 천명공주와 결혼한후 김춘추를 낳은이후에
발각되었고 성골에서 진골로 격이 낮아졌다
그래서 그 아들인 김춘추도 성골이 아닌 진골이다
조선시대에는 후궁의 자식도 왕이 될수 있었지만
신라는 왕과 왕비의 자식과 후손만이 왕이될수 있었다
*황남대총
이무덤은 두개인데 하나는 작고 하나는 크다 작은 무덤에서는 남자의 유골이 나왔는데
큰무덤은 사람뼈는 없지만 장신구가 여성의 것들이 대량 출토 되었고 금관도 나왔다
그중에 부인대라는 한자가 쓰인 유물도 나왔다
그러면 누구인가 그 부인이라는 사람은
황남대총의 년도는 400년후반 500년초기 정도 인데
화랑세기를 아무리 봐도 일치되는 여성이 보이질 않는다
삼국사기에도 이런 여성은 없다
한자를 신라가 쓴 것은 법흥왕때 부터 시작한건데 법흥왕은 540년에 떠났고 30년동안
왕을 했으니 시간 계산으로 화랑세기 내용으로는 그 여성이 누구인지 알수 없다
혹시나 유추해본다면 진흥왕의 엄마이자 법흥왕의 딸인 지소태후 뿐인데 시간상으로 맞지가 않다
작은 무덤은 빨리 죽은 사부지갈문왕이어야 하는데
다시금 탄소년대 측정을 해보길 바란다
여성으로 그리 중요한 인물이었다면 어떤식으로 역사기록에 나와야 한다
*.신라시대 병역
이부분은 화랑세기 사다함편과 문노편을 보면 알수 있다
진흥왕때 대가야에서 반란 사건이 발생했다 그때 풍월주인 사다함은
15세(만14세)였고 대가야 반란사건 전쟁에 참여하고자 한다
그때 사다함에게 어른들이 한 말은 나이가 어려 전쟁에 나갈수 없다고 되어있다
그랬지만 사다함은 전쟁에 참여를 했고 공을 세우고 돌아오지만 그다음은 아주 나쁜 일만 있었다
문노는 처음 전쟁에 참여한것이 16세(만 15세)라고 되어 있다 병역의 끝은 나오지 않는다
사다함과 문노편을 보면 신라시대의 병역은 16세부터시작된다
조선시대의 병역법은 16세~60세까지 이다
조선시대와 신라시대의 1000년이상의 차이에도 다르지 않고 병역시작은 동일하다
황산벌전투에 화랑 관창이 있다 백제 계백장군이 나이가 너무 어려 살려 보냈지만 결국 죽게 되는데
관창의 나이도 많아봤자 16~17세 정도 일 것이다 그러니까 계백장군이 어리다고 살려 보냈을 것이다
관창이 전쟁에 참여한 이유는 20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신라 선덕여왕과 백제 의자왕일때 전쟁이 발생해서 신라의 대야성이 함락될때 성주가 김품석이고
그부인은 고타소인데 그때 백제가 침공을 했고 대야성 내부에 곡식창고가 불타 버틸힘이 없어 항복하게 되는데
김품석과 고타소의 목을 잘라 백제 감옥 밑에 묻어서 죄인들이 밟고 지나가게 했다
그 김품석의 형인지 동생인지 모르겠지만(동생이라고 추정됨) 김품일이 있고 그 아들이 관창이다
백제와의전쟁에 김품일이 장군이었고 그 아들 관창이 참여한 것이다 신라 대장군 김유신의 사위이자 김유신 동생인
김흠순의 아들인 반굴(사촌과 결혼함)이 먼저 선봉으로 죽고 그다음 관창이 죽었다
아 그리고 사다함이 15세에 참여한 대가야 반란 평정 전쟁(561년)에서 대가야는 사라진다
그런데 가야금이 있다 우륵이 만들었다는데 우륵은 대가야 사람이다
충주에 탄금대가 있다 우륵이 거기서 가야금을 연주했다고 전해져 내려 온다
진짜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이 두 이야기가 맞다는 가정하에서 유추해 본다면
대가야 반란사건이후 고령지역(대가야) 사람들을 그대로 둔다면 다시 반란이 일어 날 것을 염려해
사람들을 분산 배치하게 되는데 우륵은 고구려와의 분쟁지역인 충주로 간것같다
충주에는 중원고구려비가 있다 이 부분은 개인적 유추이지 역사 기록은 없다
* 22번째 풍월주 양도
화랑세기를 처음 볼때는 양도는 짜증나는 느낌이 드는 인물이다
보기 싫다는 그런 느낌이 있었다
양도는 보종(미실의 막내 아들)과 양명공주의 아들이다라고 시작 되는데
보종이 양도의 친아버지가 아니다
양도는 누나가 둘 있고 형이 하나있다 네번째로 양명공주에게서 태어난 아들이다
첫째누나(?)인 보라는 김춘추에게 시집가서 고타소라는 딸을 낳았다
삼국통일이되는 나비 고타소가 양도의 조카이다
들째누나인 보량은 양도보다 5살이 많은데 진평왕에게 가서 아들을 낳은후 자기 동생인 양도하고 결혼 하겠다고 한다
양도는 여자가 있는데 말이다
이 양도란 인물의 삶이 너무 드라마틱해서 꼭 한번은 말하고 싶었다
박제상의 와이프 보미, 소지왕의 와이프 선혜, 사부지 갈문왕의 와이프이자 진흥왕의 엄마 지소(서석곡: 지몰시혜)
소녀시절부터 유능하지만 그래서 인지 많은 어버지가 다른 자식을 둔 미실....
대부분은 여자인데 보종처럼 순종하는 타입도 아닌 그의 자식인(친아버지는 아님) 양도는 최고의 지위에 오르지
못했고 이름도 알려진게 없고 별볼일 없는 귀족이다
삼국사기 연대기로 이해하지말자 화랑세기는 나름대로 인물이 행동했던 과정을 적고 있어 이해하기 편하다
삼국사기는 연대기로 쓰여져 있고 대부분 전쟁, 흉년에 대한 나열식으로 재미도 없다
열전에는 일방적인 기록일뿐 이해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