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로석 엘레지
김부회
아파트 화단에 연둣빛 치맛단이 펼쳐진 어느 봄날. 초등학교 동창들과 봄 소풍을 갔다. 중년이라는 말을 뛰어넘은 반가운 얼굴들. 저마다 어깨에 가방을 둘러멨다. 헤실바실 사라져 버렸던 오래전 한때, 40년쯤 묵은 초록빛 유년의 꿈이 가방 속에 가득 담겨 있다.
목적지에 도착한 후, 점심을 먹고 이런저런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한 친구가 겪은 지하철 사연을 이야기한다. 새벽까지 야근하다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 안에서 어쩌다 경로석 앞에 서게 되었다고 한다. 옆에 있던 어느 어르신께서 “어르신 앉으시죠!” 하며 자리를 양보했다고 한다. 친구가 보기에는 자신보다 훨씬 더 늙어 보이는 분이 베푸는 친구에 대한 배려. 고마우면서도, 하필이면 경로석 팻말이 붙은 자리를 양보해주시는 마음을 고마워해야 할지? 서글퍼해야 할지? 우물쭈물하다 얼른 다른 칸으로 옮겼다며 멋쩍게 웃는다. 엄밀하게 말하면 친구는 학창 시절부터 애늙은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동년배보다 좀 더 겉늙어 보이는 얼굴이기는 하다.
착각은 일상의 다반사, 실수하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이제 겨우 지천명을 넘긴 우리에게 어르신 앉으시죠! 라는 말은 웃음 뒤끝에 씁쓸한 뒷맛을 갖고 있다. 『오후 3시』라는 라파엘 앙토방의 책 제목처럼 무언가 새로운 시작을 하기에는 너무 늦거나 이른 애매한 시간. 그 어중간한 틈새에 걸쳐있는 어정쩡한 우리다. 아직도 많이 남은 생의 긴 여정인데 인제 그만 뜀박질을 멈추고 편안한 의자에 등을 기대라는 말. 비에 젖어 길바닥에 착 달라붙은 낙엽을 떠올리게 한다. 당혹하게 만드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 현실을 긍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 나이라는 말이다.
“너 왜 이렇게 삭았냐?” 반가움에 농을 섞어 덥석 튀어나온 내 말에 부메랑처럼 돌아온 친구의 묵직한 한 마디. “아이 셋을 혼자 키운 지 20년이다.” 친구가 보낸 몇십 년 세월이 스크린에 펼쳐진다. 홀로 세 아이를 키우느라 삶의 트랙을 경주마처럼 뛰어다니던 친구는 얼굴이 먼저 저 멀리 가 있었다. 안 그래도 또래보다 조금 더 늙어 보이는 친구에게 숨어 있는 삶의 그림자. 짙고 굵은 음영의 윤곽들이 선명하게 내 마음속에 각인되는 것을 느낀다. 한 발자국 뒤에서 본 것으로 절대 타인의 삶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이 천둥처럼 머릴 스치고 지나간다.
김밥에 삶은 달걀을 들고 나섰던 유년의 소풍 길. 그 첫걸음부터 오늘 이곳, 잠시 걸음을 멈춘 종점 근처의 중년이라는 정류장을 두리번거리는 우리. 분명 주어진 시간과 환경은 아주 달랐지만, 공통점은 하나. 누구도 제 몫의 등짐을 내동댕이친 채 꽃구경에 한눈팔다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다. 이런저런 변명을 마음속으로 하고 있을 때 슬그머니 젊은 시절의 사진을 보여주는 친구. 선한 눈빛에 듬직한 체구, 20년 전 사진 속 친구는 무척 꽃미남이다. 아이 셋을 키우며 최선을 다해 살아온 친구의 우직한 가족사랑. 싱그럽게 웃으며 사진을 자랑하는 친구에게 뭐라 할 말을 찾다 곤궁 끝에 넌지시 말을 건넨다. 얼굴에 새겨진 깊은 삶의 주름을 보며 왜 이렇게 삭았느냐는 섣부른 내 경솔을 사과한다.
“나 할아버지 됐다!” 피식 웃음과 함께 겸연쩍은 듯 손자 사진을 보여준다. “세상에! 이 나이에 손자라니!” 하면서도 젊은(?) 할아버지의 건강하고 유쾌한 웃음이 무척이나 살갑다. 몇몇 짓궂은 친구들의 절대 부럽지 않은 질투에도 뭐가 좋은지 연신 털털 웃는다. 우리 모두 그의 웃음 바이러스에 전염돼 한소끔 웃음꽃을 피운다. 둘레길을 산책하는 친구의 등 뒤로 듬뿍 내려앉은 봄 햇살이 곱다. 화려하지 않은 햇살 뒤에 숨어 있는 온기가 따듯하다. 나이보다 조금 더 늙어 보이는 친구의 얼굴 뒤로 얼핏 눈부신 후광을 본 것 같다. 친구의 후광엔 묵묵하게 세 아이를 보듬어 안고 살아온 로맨스 그레이의 회색이 있다. 까만 굴곡과 하얀 즐거움이 뒤섞여 이제는 본래의 색조차 불분명해진 친구의 회색, 고단했지만 가족에게 온유했던 내 아버지의 회색처럼 그 배후는 잔잔하면서도 중후한 빛을 머금고 있다. 산다는 것은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동화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 이웃에, 환경에, 가족에, 상황에 동화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노화라는 생각이 든다.
삶은 그렇게 서로의 자리에서 각자의 살아온 궤적을 이해하고 인정하며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득 친구 얼굴과 살아온 시간이 올해 여든여덟인 내 아버지의 얼굴과 오버랩된다. 지하철 경로석에 안온하게 앉아 짧은 여행을 즐기며 졸고 계시는 아버지를 닮은 듯하다. 이제는 스스로 연세도 잊은 지 오래된 아버지의 모습에서 좀 더 늙어 보인다는 말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새삼 알았다.
늙음과 젊음, 그리고 중년이라 일컬어지는 이 지점을 되돌아보다 문득 영화 은교의 한 장면 중 로스케 시인의 말을 인용한 명대사가 생각난다.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듯, 나의 늙음도 나의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것에 가장 자연스럽지 못한 언어를 사용했다는 자책이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보물찾기 하듯 하나둘 추억을 찾다 산수유와 진달래 사이에 또 다른 추억을 심고 내려오는 길, 봄바람이 구멍 뚫린 호주머니 사이로 빠져나간 어린 날의 유리구슬을 되돌려 준다. 골목을 달음박질하던 소년과 소녀. 줄달음질하는 왁자하고 숨찬 소리. 내 기억의 울림판이 공명하며 짤랑거리는 그 파장의 끄트머리를 쭈뼛대는 중년의 나. 기억 주머니를 탈탈 털어 본다. 어쩌면, 몇 일쯤 남아 있을 유년의 유리구슬 속에서 나머지 삶의 반면교사를 찾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겉의 민낯을 내려놓고 속의 진중을 한 짐 더 올려놓은 중년의 지게가 한결 가벼워진다.
아직 갈 길 먼 일몰의 고갯길 저 너머, 금빛 노을이 구르는 언덕 위에 우뚝 멈춘다. 마치 서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멋지게 휘파람을 불어 보는 봄빛 유쾌한 어떤 날. 때늦은 소풍의 귀갓길을 마중 나온 영산홍이 발그레 수줍은 미소를 흔들고 있다.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는 유행가 한 소절이 오늘따라 발뒤축을 가볍게 만든다. 우리는 그렇게 조금 더 익었다. 세월의 나무에 달콤하게 영근, 나이라는 이름의 과일, 꼭지를 따고 하나둘 수확을 해야 할 때가 왔다.
선수필 겨울호 <시인이 쓰는 에세이>
김부회 시인, 문학평론가
2011년 〈창조문학 신문〉 신춘문예 당선/중봉문학상 대상/모던포엠 문학상 평론 부문 대상/ 문학세계 문학상 평론 부문 대상/가온문학상 수상/시집 『시, 답지 않은 소리』(러시안룰렛), 평론집 『시는 물이다』 계간 문예바다 부주간, 도서출판 사색의 정원 주간, 김포신문, 대구신문 시 전문해설위원, 디카시집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출근 길) 공저 시집 (사람과 시 두번 째 엔솔로지) 외 다수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