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크레파스
석 하
초등학교 시절 나는, 미술시간이 되면 기를 펴지 못했던 아픈 추억이 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파랑새 크레용’조차 마음껏 쓸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낸들 어찌 다른 친구들처럼 크레파스를 쓰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그것은 희망사항이었을 뿐이다.
그같은 바램은 한낱 꿈에 지나지 않았고, 열악한 화구(畵具)를 사용해야만 하는
미술시간이 오면,가난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졌다
그렇다고 내 놓고 불평할 수도 없었다
가정형편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제법 철이 들었던 나는, 등교 시간이 다 되어서야 한 참을 망설이며
엄마의 눈치를 살피다 마지못해 입을 열곤 했다
‘엄마, 나 오늘 미술대회(사생대회)있는데 크레파스 사줘’
‘전번에 엄마가 크레용 사줬잖아’
‘크레용 말구, 크레파스 사줘. 크레용은 다 썼단 말야’
‘그럼 어저께 진작 얘기를 해야지, 갑자기 사 달라고 졸라대면
돈이 하늘에서 떨어지니, 아니면 땅에서 솟아나니?
그랬다
어제 저녁에도 어머니는 행상을 하시던 태석이 어머니에게서 ‘아지나모도’(조미료)를
외상으로 가져오신 사실이 있을 뿐 아니라, 더구나 사친회비(기성회비)도 밀려있는 상황이었다
사정이 그러하니 내게 크레파스를 사 줄만한 돈이 있을리 만무했다
승패는 뻔했다
이 같은 실랑이에서 난, 단 한 번도 어머니를 이겨 본 기억이 없다
이는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진돗개 근성이 없어서 이기도 했지만, 더 이상 떼를 써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깨를 늘어뜨린 채, 소매 끝에 눈물을 찍어내며 학교로 향하는 나의 뒷 모습을 한참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어머니.
어머니도 자식의 학용품을 챙겨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가슴이 찢어졌을 것이다
그런 저런 이유로 나는, 미술시간을 싫어했다
아마, 변변한 크레파스 하나 준비하지 못한 나를 미술시간도 싫어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그림솜씨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생대회에 나가면 심심찮게 입상했던걸 보면......
단지 크레파스에 비해 조악하기 이를데 없는 '파랑새 크레용'을 사용한다는 것이
창피하고 자존심 상했기 때문이다
당시, 선택된 몇 몇 부잣집 아이들은 ‘왕자표 크레파스’ ‘지구 크레파스‘또는 ’모나미 크레파스‘를 사용했다
그도 색깔이 다양한 12색, 16색, 24색 크레파스를.....
맘 먹은 대로 채색할 수 있었던 크레파스와 멋진 화판을 사용하던 친구들.
그들과 나란히 앉아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려야 하는 시간은 견디기 힘든 고문이었다
운동장 한 구석에 다른 아이들과 되도록 멀리 떨어져 묻어나지도 않는 크레용으로
교과서를 밑에 받치고 그림을 그려야만 했던 나는, 차라리 반 대표로 뽑히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마음 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은 꽤나 운이 좋았었나 보다
크레용으로 그린 내 작품이 우수작으로 입상되었던 것이다
멋진 화판을 부상으로 받아 목에 걸고 집으로 돌아온 그 날,
어머니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곤 아무말 없이 윗 방으로 올라가 쌀독을 여셨다
보리쌀 몇 됫박 머리에 이고 나가신 어머니는 얼마 후 16색 ‘왕자 크레파스’를 내 앞에 밀어 놓으셨다
사랑하는 자식의 소망을 들어 줄 수 있는 길이 그 방법밖엔 없으셨던 모양이다
당시만 해도 모든 농사일은 품앗이가 주류였던 까닭에 돈이 귀하던 시기였다
아이들이 학용품을 구입할 경우, 겨란 한 두알 가지고 교문 앞에 있던 상점
(문구점을 겸하고 있었음)에서 물물 교환형식으로 마련하기도 했다
어렵풋한 기억으로는 겨란 1알에 2원 50전~3원 정도였을 것이다
이 정도면 연필 한 자루나 공책 한권 값과 비슷하여서 그 보다 값 비싼 크레파스를 사려면 짚으로 엮은
겨란 꾸러미를 들고 가기도 했는데,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겨란이 깨지기라도 하는 날엔
징징거리고 울던 아이들의 풍경도 간혹 볼 수 있었다
내가 그토록 갖고 싶어 하던 크레파스.
닳아 없어지는 것이 안타까워 도화지에 옅게 칠해놓고 손 끝으로 문질러 쓰던 크레파스는
언제나 노랑 파랑 빨강의 삼원색과 살색 검정색이 먼저 닳았다
촛불이 제 몸을 사위어 주변을 밝혀주듯, 크레파스는 제 몸을 닳게 함으로서
우리들의 마음을 표현해 주었지만, 전후(戰後) 가난했던 시대적 배경을 타고난 우리들은
학용품을 풍족하게 쓸 수 없었던 아픈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가끔 그 날들이 떠 오르는 날이면, 아무 말 없이 보릿쌀을 이고 사립을 나서던 모습과
슬그머니 크레파스를 밀어놓으시며, 알듯 말듯한 미소를 지으시던 어머니가 생각난다.
쌀독을 비워가며 자식의 일이라면 맹목적인 사랑을 베푸시던
그런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콧등이 찡해진다
비록 그 때가 가난하고 배 곯던 시절이었지만, 지금도 그 날들이 문득문득 그리워지는건
이는 아마도 그런 애뜻한 마음이 모여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첫댓글 어깨를 늘어뜨린 채, 소매 끝에 눈물을 찍어내며 학교로 향하는 석하님의 모습이 머리에 그려 지네요, 그런 석하님의 모습을 바라보시던 어머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을까? 저도 그런기억이 있답니다, 새것은 언제나 동생에게 양보하고 나는 언제나 부러지고 색이 부족한 헌 크레파스만 써야했기에 새것 사달라고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해드렸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