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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 Dei 개념의 출현을 전후로 본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의 발전약사
작성자:ysong777
작성시간:2007.12.18 조회수: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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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 Dei 개념의 출현을 전후로 본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의 발전약사
Ⅰ. 서론
교회의 선교 역사에 있어 19세기 처럼 왕성했던 시대는 없었다. 위대한 선교의 세기(The Great Century)였다. 20세기에 이르러 교회는 협력과 연합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서구 교회는 해외 선교의 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단독교회나 교파의 개별적 행동으로는 많은 결실을 거둘수 없다는 수긍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상 기독교 역사에 오점으로 남아있는 교파주의나 편협한 교리적 다툼은 불행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서구 교회들이 자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교회들의 협력과 연합의 의지는 곧 선교의 국제회의나 모임체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1860년 영국 리버폰에서의 국제선교회의, 약 2000명이 참가한 1888년의 영구 런던 선교회, 1900년의 뉴욕회의 등들이다. 특별히 뉴욕 국제선교회의 에는 약 4000명이 참석한 초 대형대회였다. 이 대회의 특징은 초교파적인 선교적 열정과 선교적인 협의체를 구성하여 가동시키는데 시발점을 이룬 ‘에큐메니칼 선교회의’(Ecumenical Missionary Conference)였다.
초기 한국의 선교역사에서도 이러한 에큐메니칼 연합선교 활동의 흔적을 엿볼수 있다. 한국에 내한한 선교사들은 그들의 소속 교단을 초월하여 한국 개신교 복음주의 선교협의회를(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Missions of Korea)구성하여 상호협력하에 효율적인 선교를 전개 하였다. 이러한 연합과 일치의 필요성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념으로 구체화 되었고 더 나아가서는 선교개념의 변화를 아울러 초래하게 되었다. 이 변화란 고전적 선교 개념에서 현실참여적인 선교개념으로의 전환을 가져오게 됨을 의미한다. 과거에 선교는 보다 효율적인 선교의 방법(How)이나 전략의 문제고 임무였다. 선교가 무엇(What)이냐가 논란되었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에큐메니칼 운동의 발전은 What 에 대한 논란의 증폭을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특별히 1952년 뵐링겐 대회에서 채택된 하나님의 선교(Mission Dei)라는 광의의 선교적 개념의 출현을 가져 오게된 것이다.
Ⅱ. 용어의 정의
‘선교’라는 용어는 그 유래가 라틴어 ‘Mitto'즉 보낸다에서 나왔다. 헬라어는 아포스텔로( )와 펨포( )에 해당된다. 이 뜻은 ’파송‘을 의미한다. 신약성경에는 ’ ‘135회, ’ ‘가 80회 등장한다.
이뜻은 수동적의미로서 보내는 자에 의해서 보냄을 받게 된다는 의미로 해석될수 있다. 이러한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중세기 피란치스칸 수도원에소 였는데 그 수도원에 속한 수도사들을 ‘선교사’라고 부른데서 시작되었다.
에큐메니칼 운동이란 교회일치 혹은 교회연합 운동을 말한다. ‘에큐메니칼’이란 뜻은 “우주”, “사람이 거하는 세계”를 의미한다. 헬라어 ‘ ’에서 파생되었다. 신약성서에 약 15회 사용되었다.
사실상 교회의 연합은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다. 사도신경의 고백에도 나타나있듯이,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I Believe in the Holy Catholic Church the Communion of Saints.........)라고 되어 있으며 니케아 신조도 교회의 일치와 연합, 보편성, 사도성 및 교회의 거룩성을 말하고 있다.
(Credo unam Sanetam Catholicam Ecclesiam):에 교회 연합의 목적과 조직은 교회의 본질적 사명인 선교에 있어서 보다 능력있게 효율적으로 선교할수 있었다.
1910년 영국 에딘버러에서 모였다. 세계 교회 협의회(W.C.C)가 그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시발이었으며 1961년 인도 뉴델리에서 세계선교협의회(I.M.C)와 세계 교회 협의회가 하나로 통합 되면서 에큐메니칼 운동의 세계적 박차가 가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주의깊게 관찰해야 할 점이 있다. W.C.C 운동만이 세계적 연합운동의 에큐메니칼 결성체 만은 아니다. 그 외에도 W.C.C 계통의 선교론에 동조하지 않는 복음주의를 주장한 또다른 에큐메니칼 그룹이 있다는 것을 간과 해서는 안된다. 예를들면 화란과 미국의 개혁신학을 주지하는 교회들의 모임인 개혁측 에큐메니칼 대회(Reformed Ecumenical Synod), 맥킨 타이어가 주도한 세계 기독교 협의회(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 아메리카 복음주의 협의회(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등이 있다.
또 한가지 우리가 주목할 만한 것은 위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I.M.C가 W.C.C에 합병되게 된 큰 이유중의 하나는 1950년 하나님의 선교(Mission Dei)신학 사상의 등장으로 1961년 인도 뉴델리 총회때 W.C.C에 합병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연합의 시대적 사건은 개인 구원 뿐만 아니라 사회 구원이라는 폭넓은 선교관을 출발 시키는데 근거를 제공했고, 급기야는 개인의 고백적 신앙보다 선교가 곧 인간화, 해방화라는 현존(現存)의 개념으로 변형 시키는데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본인은 Mission Dei를 출현시킨 벨링켄 대회를 전후 깃점으로 살펴보자한다. 즉, 에딘버러 대회에서~월링겐 대회까지 벨링켄 대회에서 케냐의 나이로비에 대회까지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고찰하고자 한다.
Ⅲ.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에서 ~ 벨링컨 대회 Missio Dei 개념의 출현까지
1. 에딘버러 회의
1910년 영국의 에딘버러에서 세계선교대회(Edinburgh World Missionary Conference)가 개최되었다. 전세계에서 신학자, 선교단체장, 선교실무자, 선교사, 성직자 등 1335명이 모인 초대형 회의였다. 아시아 지역에서도 17명의 대표가 참석할 정도로 주목된다. 이 선교대회 에서는 주로 선교의 방법론을 다루는 것이 주제(How Mission)였다. 아울러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보편성을 찾아 교파적인 분열을 배제하고 편협한 분열적 사고에서 탈피하자는 의견이 강하게 부각된 회의였다. 이 회의가 본래 목적대로 선교적 방법을 모색하는 회의였기에 우선적 과제로서 구체적인 선교전략 및 비기독교 문화권에 복음을 증거하는 과제를 논하였다. 우리 나라 에서는 1명의 한국인과 주한 선교부가 참석하였다.
우리가 주목할 만한 것은 이 대회에서 주한 외국인 선교부가 나와 한국교회가 잘 성장하고 있음을 보고하였다. 1910년은 한일 합방이 이루어진 해로서 한국의 정치, 경제, 상황을 말할수 없는 절망의 그늘이 엄습하고 있을때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이 선교의 좋은 토영임이 전세계 선교단체에 알려짐은 한국선교의 발전에 분기 였음을 엿볼수 있다. 에딘버러 대회가 남긴 두가지 귀중한 유산이 있다.
첫째는 선교가 어느 개인이나 한 선교단체만의 과제가 아니라 지상교회의 과제임을 강조하였다. 즉 교회의 연합을 통한 책임있는 선교의 진행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둘째는 선교단체와 토착교회(Indigenous Church)와의 연합과 협력을 모색하였다는 점이다. 지금까지의 선교는 선교단체의 일방적인 선교였다면 에딘버러 대회에서 부터는 토착교회와 지역의 타종교, 문화를 고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작으나마 나오기 시작 하였다는 점이 괄목할 만한 점이라 하겠다. 결국 에딘버러 대회에서 구성된 상임 위원회는 장차 구성될 W.C.C 운동의 시발점으로 작용했다고 볼수있다.
기독교 신앙의 보편성을 추구하며 교단적, 교파적 분열을 넘어 세계 교회가 하나로 움직이자는 일치운동의 싹이 트이게 된점이 이 대회의 의의라고 하겠다. 에딘버러 대회는 8개분과 위원회로 구성되어 세계 선교에 대한 제반 문제와 교회 일치 문제를 주제로 다루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①비기독교권에 복음전달
②피선교지 교회
③기독교와 교육
④타종교권에서의 메시지 적용
⑤선교사와 준비
⑥선교본부
⑦선교와 국가
⑧교회 협력과 일치 등이었다.
에딘버러 대회는 세계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가 교회간의 불필요한 교리와 신학의 차이점을 논쟁하는 일은 피하고 연합과 일치의 중요성을 논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분열과 갈등의 원인이 무엇인지 논의함으로써 적극적으로 극복 하려고 시도한 회의였다.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
생활과 사업(Life and Work)
선교(Missions)을 다각적으로 논의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장차 세계 교회 협의회(W.C.C)의 태동이 이루어진 뉴델리(1961)대회의 통합에 결정적인 신학의 제공과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이 대회의 의의가 있다.
2. 예루살렘 대회(Jerusalem)
1928년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의 갈람산에서 개최되었다. 이당시 참가인원은 50여개국가에서 231명의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이때 특이한 만한 것은 참석인원중의 4/1에 해당하는 52명이 신생교회를(Younger Churches)을 대표하는 학자 및 선교 단체자들 이었다. 한국 대표로는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김활란 박사가 참석하여 한국 교회를 대변하게 되었다.
1920-1930년은 세계 대공항 기로서 시대적으로 볼 때 많은 나라들이 경제적 곤핍과 좌절을 경험하고 있을 때였다. 또한 탈 서구적인 생각이 싹트면서 기독교만이 진리의 가르침이며 유일한 종교의 대안인가? 라는 질문이 제기되었다.
예루살렘 대회의 사상적 흐름을 살펴보면 앞서 열린 에딘버러 대회와는 많은 차이점을 보게된다. 에딘버러 대회가 1910년에 개최되었고 예루살렘 대회가 1928년에 개최됨으로서 18년의 격차는 나타내는데 이 18년동안 세계는 세계 1차대전이라는 4년간의 재화를 경험했고(1914-1918),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다. 실로 엄청난 변화와 고통을 경험한 후에 열려진 회의였다.
세계 1차대전의 경험은 많은 사람들에게 정신적․육체적 공허와 삶의 방황 사상적인 갈등과 변화를 야기시켰다. 세계대전의 상처와 아픔은 기독교 메시지의 내용과 방향까지도 바꾸어 놓았다. 즉 복음의 메시지로서 그리스도의 필요성은 개인의 영혼구원만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즉 개인의 생존의 삶의 터전인 사회의 변화를 촉구해야 된다는 참여 정신을(Social Concern) 요청받게 되었던 것이다. 개인의 삶의 변화와 고백이 사회의 변화와 분리될수 없다는 논리가 강하게 부각되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퍼스펙티브의 변화는 어떤 개인적인 신학자의 자격으로 주장되어진 내용이 아니라 당시의 실존적인 삶의 터전에서 요청되어진 현실적 입장이었던 것을 부인 할수없다. 세계 1차대전 같은 참혹한 결과를 다시 경험하지 않으려면 단순한 개인의 중생경험적 차원에서만 다룰 수 없는 것이므로 범사회적인 변화를 책임지는 교회의 확장된 역할 분담론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당시 흥미로운 사실은 1차대전의 전쟁터였던 유럽지역은 보다 빨리 확대된 사회 복음주의를 지지한 반면에 전쟁의 직접 피해를 덜 입은 미국에서는 사회 참여적인 복음을 덜 수용하는 입장을 관측할수 있다. 유럽측의 환란은 직접경험한 위기론과 피해가 덜한 미국대륙의 낙관론의 대치는 어떤면에서 인간 삶의 정황에 자연스러운 고백일지도 모른다. 결국 신학 사상과 흐름은 시대에 따라 인간으로의 삶을 대변하고 고백하는 방편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엿볼수 있다. 중새의 신학적 입장은 항상 교회와 세상의 분리됨 사상을 고수해 왔다. 즉 세상과 교회와는 전혀 다른 대치의 극면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예루살렘 대회 이후 많은 선교의 사상적 변화를 엿볼수 있다. 세상을 적대감으로 대해서는 안된다는 수용의 입장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또한 선교교회는 피선교지의 교회 정황을 타종교와 타문화를 좀더 적극적인 수용의 입장에서 대하여야 된다는 수용론이 주장되게 되었다.
보다더 두들어진 변화가 있다면 기독교 복음의 사회적 책임을 부각시켰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대회는 세계 제 1차대전이후에 개최되었고 세계 1차 대전이후에 온 인류는 경제적 대공황하에 몸부림치게 되었다. 전쟁의 참화속에서 경제공황까지 몰아 닥친 모진 상황이었다.
여기서 교회는 상처받은 영혼의 문제 뿐만 아니라 사회 문제에 좀더 적극적 개입을 요청받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고전적인 선교개념인 개인의 영혼구원보다 사회 참여와 사회 복음에 영적음 두게 되었다.
결국 예루살렘 대회에서 두두러진 특징 세가지를 정리한다면
첫째, 타종교의 가르침에 대한 배타적 자세에서 수용적 자세로 전환된 것과 둘째, 교회의 의무중에 사회적 책임의 강조점을 두게 된점과 셋째, 사회를 선교의 장이라는 확대전도의 개념(Larger Evangelism)의 출연등을 들수 있다.
이 사상들은 보다 교회의 적극적인 사회개입과 참여에 중요한 동기를 제공했지만 그동안 유지해온 고전적인 선교개념에 혼란을 야기하게 되었다. 확대전도 개념을 교회의 대 사회적인 참여와 역할이라는 입장에서는 의미가 있었으나 본질적인 선교개념의 변질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는 점을 인지 해야할 것이다. 세계1차 대전은 1914-1918년 사이에서 4년간이나 지속되었고, 1917년에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해였다. 1929년이후에는 세계 경제 대공항이 일어나면서 국제질서와 국가간의 협력 체제가 무너지고 국가간의 갈등이 재 증폭되는 시점이었다. 이러한 사상적이며 세계 정치적인 소용돌이는 교회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리하여 교회의 국제운동과 연합을 해야 한다고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D. Bonhoeffer)는 교회들이 세계의 시사적 바람을 타지말고 세계 교회가 더불어 일치와 만남을 가져야 할 것을 역설하였다. 선교시장에 또 한가지 지대한 영향을 끼친이는 하버드 대학의 교수인 윌리암 E. 호킹(W. E. Hocking) 박사이다.
그는 타종교권에 있는 비기독교 인들에게 기독교적 복음을 강요할 필요가 없다는 새로운 폭탄적 반증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선교의 무용론이나 다름없는 주장으로서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시도에 정면으로 대항한 학자는 칼 바르트(K. Barth)신학적 입장을 바탕으로 타종교와 기독교간의 엄격한 불연속의 문제를 지적한 헨드릭 크레머(H. Kraemer)의 주장이 야기되었다. 전쟁, 공항, 국제질서의 혼란, 교회신학의 갈등, 타종교에 대한 인식, 교회와 사회관계등 이러한 문제가 새로운 이슈로 등장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3. 마드라스 탐바라 대회(Tambaram-Madras)
세계 2차 대전의 발발이 예기되는 위기적 상황에서 1938년 인도의 탐바라 라는 조그만 타운에서 개최되었다. 탐바라는 마드라스에서 10여마일 정도 떨어진 동네였다. 회의 규모는 전세계 약 70여개국에서 470여명의 대표들이 참여한 가운데 제 3차 세계 선교협의회(I.M.C)총회가 열리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대표를 파송하지 말하였으나 제3국과 그 외 지역의 신생교회에서 많은 회원들이 참석하였다.
신생교회들에서는 회원들이 본 대회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게 된 것은 기독교세계 선교에 큰 수확으로 여겨지게 되었으며 선교의 큰 의의를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세계도처에서 대표회원들이 모였으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 몸을 이룬 보편적인 세계 교회에 속한 다른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인도 탐바라에서 개최된 이 회의에서 다루어진 주제들은 아래와 같다.
①신앙의 본 뜻
②교회의 기능과 본질
③전도
④타종교권에 대한 문화인식
⑤교회일치와 협력
본대회의 특징을 요약하자면 바르트와 브르너의 신학적인 영향으로 보다 보수적인 신학적 입장을 고수하였다. 자유주의적 입장을 배제하고 성경신학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또한 교회론에 있어서는 보다 전통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즉, 교회야 말로 선교의 중심이며 교회확장이 곧 복음선교의 수확으로 인식하였다. 타종교와 문화에 관한 견해는 다소 열린 입장을 취하였다. 타종교와 문화와 기독교 사이에 놓여있는 차이점을 인정하고 타종교에도 나름대로의 가치와 도덕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게 되어 다소 상대주의적 입장을 뛰게 되었다. 이러한 입장은 화란의 개혁주의 신학자 바빙크(J. H. Babink)의 이론에서도 찾아볼수 있다. 그는 타종교와의 접촉점을 모색하여 기독교의 진리를 소개하는 방편을 주장하고 있다. 이를테면 사도행전 17장의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를 예로들고 있다.
접촉점은 결국 타종교와의 대화를 모색함으로 얻어지게 되는 방법론으로서 이사상은 기독교가 타종교를 인정하게 되어 당시는 상대주의적 입장에 빠지지는 않았지만 훗날 종교적 대화(Religions Dialouge)의 빗장을 열게되는 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었음을 간과할수 없다.
마드라스 탐바라 대회는 또한 선교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교회와 교회의 일치와 협력 선교단체와 선교단체의 협력과 일치의 중요성을 주장한 회의였다.
4, 휘트미 대회(Whithy)
이대회는 인류에게 파괴와 절망을 안겨준 세계 2차 대전후인 1947년에 캐나다 휘트미에서 개최되었다. 본 I.M.C 대회의 규모는 전세계 40여개국가에서 112명의 대표가 회집된 회의로서 많은 회원 국가에서 참가하지 못한 아쉬움을 남긴 회의였다. 전쟁직후 열렸었기 때문에 가슴에 상처를 안은채 또한 전후 바뀌어진 세계의 상황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필요로 한 회의였다. 아울러 새로운 선교 신학적 입장의 표현을 요청받게 된 것이다. 전쟁으로 인한 화해와 좌절, 인권 유린, 사회 정치적인 문제, 새로운 민족주의의 등장 등으로 여전히 각국 대표들간의 갈등과 상처가 상존하는 상황이었다.
이 대회는 직전의 마드라스 대회의 특징과 방향을 초월하지는 못한 회의였으나 진일보된 점이 있다면 복음 선교에 대한 교회의 책임과 의무를 강조한 점이었다. 교회는 선교의 구체적인 활동 체로서 이 세계의 문화와 종교간의 접촉이 불가피하며 이러한 접촉은 선교의 기회라는 입장을 정리하였다. 선교는 세계와 문화의 정복으로서가 아니라 이 세계와 일치하는 것이 라는 관점을 갖게 하였다. 결국 일치사상은 세상과 교회간의 이격을 좁히는 역할을 낳았으나 신학의 세속화를 야기 시킬 수 있는 가능성과 동기를 유발했다고 평가할수 있다.
지상의 교회는 다른 환경과 상황과 지리적 간격을 초월하여 하나의 유기체적 관계임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교회의 에큐메니칼적인 기능을 인식한 것으로서 선교사는 통해 선교국가 선교사를 통하여 선교를 받는 피 선교 교회를 막론하고 모두 복음전파의 지상과제를 뛴 하나의 교회라는 일치와 협력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 회의였다. 선교교회의 지도자와 지배자의 자세에서 공존개념으로, 협력자의 위치로 변화되었다. 당시 전쟁의 영향으로 독일에서는 종말론적 신학이 활발히 일어 낳고 바르트의 신학의 영향권에서 R. 볼트만의 신존론적 신학이 여러 가지 난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는 상황이었다. 종말론의 신학적 입장은 도드(C. H. Dodd)의 ‘실현된 종말론’을 반영시켰다.
바르트 신학이 제 2차 세계대전이전에 널리 기반을 이룰때는 신정통론의 신학이 선교신학에 영향을 제공했으나 볼트만 신학의 실존론적 해석은 곧 성경관 및 선교 신학에 영향을 끼쳐 자유주의적 개념과 세속화 신학의 출현이 가시화 되고 있었던 정황이었다. 예를 들자면 1938년 마드라스 대회때까지만 해도 선교의 구심점은 교회에 두려고 하였으나. 휘트미 대회에 와서 선교의 구심점은 세계에 두게 된 것이다.
샬롬이 진정 교회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적극성을 뛴 세속화 신학이 강조된 것이다. 여기에 일조한 학자는 호켄다이크(Johannes Hookendijk)로서 교회의 삼중과제외에 봉사를 또한 강조하였다. 선포(Kerygma), 교훈(Didache), 교제(Koinoia)외에 교회의 봉사를 강조하게 되었다.
이점은 교회의 사회참여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인식시킨 행동신학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세상의 상처와 슬픔 비애등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現存)으로만 치료될수 있다는 입장을 뛰게 된 것이다. 교회는 전쟁의 영향을 어떻게 평가하고 대하여야 되는가? 깨어진 세계에 대한 복음의 관련성은 무엇인가? 에 대해서 심도있는 토론이 이루어졌다.
전쟁의 참화 이전에는 교회가 사회자체에 대한 간섭과 참여를 거추장스럽고 불필요하다고 인식되었으나 전쟁후에 교회의 대 사회관에 변화가 일어났으며 격동하는 세계속에서 교회의 책임을 생각하게 만든 회의였다. 휘트미 대회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복음화-그리스도인의 증거’(Evangelism-Christian Witness)가 곧 교회의 시대적 책임이라는 결론을 갖게 만들었다. 또한 피선교지 교회를 영구적으로 지원받는 체제에서 자립체제로의 전환을 가져와야 된다는 주장이 야기 되었다. 소위 자력전도 또는 자립선교의 공식이된 자립, 자치, 자력이라는 선교 이론(Three-self Formula)이 등장하게 되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이 자립선교의 강조는 피선교지 교회의 자립촉진은 물론 선교지 교회의 군림과 통치의 자세에서 동역자의 자세로의 저환을 가져오게 되었다. 세계 2차대전의 아픔을 안고 진행된 휘트미 대회는 인종과 국가를 초월하여 세계교회의 일치와 연합, 동역의식, 사회참여, 적극적으로 상황에 대한 인식과 수용의 문을 열게된 회의였다.
이제 세계 기독교는 하나의 담장안에 공존하는 유기체라는 공동의식을 강화시킨 회의였다.
Ⅳ. Missio Dei 출연을 가져온 월링겐 대회에서-나이로비 대회까지
1. 윌링겐 대회(Willinggen)
독일의 월링겐에서 1952년에 제5차 세계 교회 협의회(I.M.C)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의 가장 큰 주제는 “교회의 선교적 의무와 본질”에 대한 논의 였다. 이 대회기간에는 한국전쟁이 일어나 계속진행중이었고 중국대륙이 공산화되어 최대 규모의 선교 단체인 중국내지 선교부(China Inlanal Mission)가 눈물을 머금고 철수해야만 되는 입장에 서 있었다. 이 대회에 앞서 열렸던 1948년 제 1회 W.C.C 대회는 새로운 선교신학의 출연을 야기시켜 선교사상에 있어서도 혼동과 혼조의 양상을 뛰게 되었다.
윌링겐 대회때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선교개념의 새로운 방향이다. 하나님의 선교라는 Missio Dei 개념의 출현이었다. 선교활동의 본질과 내용은 교회중심적인 차원에서 머무르지 말며, 교회를 세우는 선교사들의 활동만에 국한시키지 않고 역사와 세계안에서 주권적으로 임재하시고 일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활동(Missio Dei)에 참여하는 모든 일을 선교의 영역으로 보는 시각이었다.
교회의 선교는 우리와 교회가 주역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므로 ‘교회의 선교’ ‘우리의 선교’ ‘선교사들의 선교’ 라는 개념대신에 ‘하나님의 선교’라는 용어로 바뀌어야 된다는 것이다. 이 대회에서 아래와 같이 선언되어졌다.
“교회의 선교적 사명과 일치는 하나님 자신의 품성에서 비롯된다. 교회의 사명은 하나님 안에서 연합과 일치를 이루는 것이며 온 세계에 말과 행위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다”
전통적인 선교개념인 교회 중심의 선교에서 하나님의 개입이 이루어지는 모든 것이 선교라는 광의의 해석은 탈교회화, 세속화 신학, 교회의 사회참여 사상에 촉발제가 되었다. 전도의 개념도 한층더 전통적 개념에서 희석되어졌다. 회개를 통한 개종에서 후퇴하여 성경밖에서 혹은 교회밖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추구하는 진보주의적 입장으로 선회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교 즉, missio Dei의 개념의 영향을 끼친 학자는 호켄다이크, 틸리히, 도드, 프라이타그, 할렌슈타인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휘테돔(G. F. Vicedom)의 ‘선교가 하나님께 속한 활동’이라는 주장은 Missio Dei 개념의 발전을 가속화 시켰다.
호텐다이크는 ‘하나님의 선교를 하나님의 행동’으로 간주했으며 교회중심적인 선교사상에 반기를 들었다. 그 이유는 선교의 진정한 상황과 장은 교회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는 관점이다. 즉 하나님의 왕국-선교-사도-세상 이라는 도식으로 설명되어진다고 볼수 있다.
이 사상은 곧 보편구원설 혹은 만인 구원론적 입장을 견지하게 되어 불신자와 신자 사이의 간격을 좁히는데 역할을 했지만 오직 그리스도의 속죄로 죄사함을 얻는 회개를 통한 개종이 전도라는 개념은 후퇴시키게 되었다. 아울러 에큐메니칼적인 선교론적 개념과 복음주의적 사이에 거리를 두고 양론을 펼치는 대치적 국면을 가져오게 만들었다.
2. 뉴델리 대회(New Delhi)
1961년 인도의 뉴델리에서 개최된 회의로써 W.C.C와 I.M.C가 통합된 역사적 총회였다. 사실상 I.M.C와 W.C.CrhksrPss 1938년 이후에 계속적인 접근을 시도하여 1939년에는 양 기구의 통합을 위한 ‘통합 위원회’가 결성되었고 구체적으로 통합을 위한 접촉이 계속되어진 결과였다. 통합의 과정에 이르기까지 많은 단체들의 해결이 필요하였다. I.M.C 측에서도 없어야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I.M.C는 대부분 국가적, 지역적 협의회들이 구성원 이었으므로 많은 반대 의사가 진행되었고 선교단체와의 관계도 단절해야 되는 문제가 야이되었다. I.M.C활동이 ‘신앙과 직제’ 처럼 중립적 입장이 되고 제약을 받게 되며 W.C.C와 통합될 경우 I.M.C의 신학적 입장와 특색이 퇴색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남게 되었다. 이러한 염려와 갈등속에서도 1958년 가나(Ghana)에서 열린 제 6차 I.M.C 대회는 통합을 원칙적으로 찬성하는 의사를 나타냈다. 1961년에 이르러 뉴델리 W.C.C 제 3차 대회에 이르러 통합의 결실을 보게 되었다. 많은 줄다림과 우려속에서도 양대기관은 하나의 목적을 고백했기 때문이다. 교회의 본질적 사명은 선교이며 선교는 교회의 본질적 과업으로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통합후 I.M.C는 W.C.CSO의 세계션교 및 전도회(CWME)라는 분과의 위치로 축소되었다.
뉴델리 대회는 통합후 증거, 볼사, 일치라는 3대분과로 나뉘어 졌으며 사회속에서 교회의 역할에 관한 토의가 진행되었다. 결국 20세기를 이끌고온 「국제 선교협의회」「신앙과 직제」「생활과 봉사」라는 세 흐름이 W.C.C라는 기구에서 통합을 이루어낸 것이었다.
뉴델리에서 빛을 본 통합은 2가지 점에서 획기적인 변화의 모습을 뛰게 되었다. 기독교가 타종교를 이해함에 있어서 타종교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포용하는 우주적 그리스도론(Cosmic Christ)개념이 등장되었다. 즉 “그리스도를 통하여 타종교인들에 말씀하시고 그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또한 말씀하신다” 라는 개념이 나오게 되었다.
또 한가지는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과 역사의 현실에 대한 교회의 적극적 참여를 유도하는 해방신학적 개념이 등장하는 발판이 마련되어 보수와 진보간의 격렬한 논쟁이 유발되었다.
4. 박콕대회(Bankok)
태국의 방콧에서 1972-1973에 개최된 회의였다. 이에 앞서 움사랄 대회(1968)가 개최되었는데 이미 이 시대의 다원적 종교상황은 현실대로 수긍하며 타종교와의 공존을 인정하고 대화로서 풀어 나아가야 된다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이러한 움살라 대회의 급진적 선교신학의 전환이 방콕대회에 큰 영향을 준 것이 사실이다.
방콕대회는 ‘오늘의 구원’이라는 주제로 개최되었다. 여기서 구원의 의미는 죄에대한 회개와 개종의 의미보다는 사회적 정치적 관계속에서 접근하였다. 즉 경제적 정의의 실현, 인권의 쟁취, 인간소외와 인간성 회복, 사회조직 및 체제의 변화 등을 촉구하는 현실에 문제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이는 불과 수년만에 일어난 것이었다.
Ⅴ.양대 선교개념에 대한 평가 및 정리
1. 에쿠메니칼 운동의 선교개념
20세기의 기독교 교회에서 제일 중요한 운동중의 하나는 에큐메니칼 운동일 것이다. “위대한 세기"(The Great Century)인 19세기에 서구 교회는 전세계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서구 교회는 교파의 다양화로 말미암아 선교지에 혼란을 줄 뿐 아니라 선교에 큰 장애가 되었기 때문에 교회연합 운동이 선교지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교회연합 운동인 W.C.C의 창설은 자유주의 신학사상으로 인하여 도리어 선교에 변화와 장래를 초래하였다. 그 결과 20세기 세계 기독교 운동과 선교운동에 큰 역할을 했던 서구 교회지도자들은 전통적 선교 개념을 포기하고 사회 구원의 선교 신학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회 구원의 신학은 하루 아침에 등장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통하여 서서히 발전된 것이다. 1928년 예루살렘에서 모인 국제 선교회의에서 이미 “대전도”(Larger Evangelism)의 개념이라는 신용어로써 선교는 영혼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 문제도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론이 등장하였다. 이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던 뉴욕 신학교 선교학 교수인 Johannes C. Hockendyke는 “종교 개혁자들의 전총적인 선교와 복음전파에 대한 개념이 자나티게 일방적이고 시간적 제한을 받고 있음을 지적하였다.그는 선교의 목적을 교회 설립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하면서 선교(복음 전파)의 목적이 개인의 구원에 있기 보다는 땅위에 평화를 건설하는데 있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자유주의 W.C.C 운동은 전통적 선교 개념을 진부한 것으로 배격하고 사회적 관점에서 출발하여 1960년에는 인간화로 1970년에 와서는 ‘해방의 선교’라는 정치화로 비약 발전되었다.
더 나아가서 화란의 선교학 이론의 대가였던 Hendrik Kraemer는 “교회는 선교이다. rygjl가 세상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그 자체가 선교이다.”라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Roman Hoffman 교수도 “기독교 선교란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십자군 운동이나 정복으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현대의 선교는 타종교와의 인도적인 대화를 통해서 서로 주고 받으며 가르치며 배우는 일을 힘써야 한다. 그리고 선교의 목적은 개종과 회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증거와 봉사와 대화”라고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자유주의자들은 선교의 개념을 지상의 평화, 해방, 인간화, 대화, 교회 안의 모든 활동등 모호하고도 광의적인 의미로 사용하였다. 이 Willingen대회 이후에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이는 독일 게오르규 F. 휘체돔(George F. Vicedom)이었다. 그는 “선교란 더 이상 교회의 선교가 될 수도 없고 오직 그의 선교 곧 하나님의 선교”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선교란 하나님께서 오늘도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일하고 계심을 말해주는 표적이며 교회가 하는 모든 일 즉,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하시기를 원하시는 모든 일을 선교의 일”로 보았다.
그리고 그는 선교를 하나님이 세상에 그 아들을 파송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이 파송안에서 하나님은 항상 일하신다”고 본다. 더 나아가 선교활동의 내용을 선교사들의 활동에 국한시키지 않고 역사 안에서 일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활동에 참여하는 모든 일을 선교활동으로 보았다.
결국 이 하나님의 선교는 오늘날 교회생활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였으며 목회나 전도는 물론 사회 사업이나 구제, 인권운동이나 혁명운동도 선교라고 보게된 것이다.
이렇게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선교의 본질이 개인의 영혼구원보다는 대화와 상호이해에 있으며 교회설립보다는 사회적 경제적 및 정치적 구조악을 제거하여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오는 데 있으며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서로 이해하고 협력하여 이 땅에 평화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2. 복음주의 선교개념
영어의 “missionary"는 13세기 천주교의 수도원에서 사용되었는데 그 의미는 세상에서 사도의 생활과 사역을 위하여 보냄을 받은 자를 자칭하였다. 그러나 16세기와 17세기에 와서 교회가 세워지지 않은곳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파송받은 자들에게 ”선교사“란 명칭을 부여하였다. 천주교 선교시대(1950년대-1730년대)이후 개신교도 세계 선교를 시작하면서 이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특히 ”선교학의 시조“라 할 수 있는 독일의 선교 학자 구스타프 바르넥(Gustav Warneck)은 이 선교의 개념을 ”기독교 세계에 교회를 설립하기 위한 복음전파“라는 개념으로 체계화시켰다.
일반적으로 “선교”라는 명칭은 성경에 기록된대로 개인 영혼구원, 교회설립, 자력전파, 하나님께 영광돌림으로 이해되어 왔다. 또한 그리스도의 봉사자로사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고전 4:1)로서 파송되는 것이 성경적 선교 개념이다.
티. 에스. 솔로우(T.S. Soltau)선교사도 선교의 목적은 “토착교회를 설립할 전망으로 그리스도의 명령대로 모든 지역의 비회심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김.활.영(M.L.Young) 선교사도 선교란 “잃어버린자의 구원과 토착교회의 설립, 하나님 왕국의 출현, 또한 하나님의 모든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통하여 그의 완전한 말씀을 모든 나라에 선교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사자들을 보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바르넥의 선교 개념은 20세기에 들어와 그대로 유지되었는데 이는 전통적인 신학과 일치하며 미국내 보수적인 복음주의 진영의 세계 선교협의회의 2대기구인 I.M.F.A.(The International Foreign Missions Association)와 E.F.M.A.(The Evangelical Foreign Missions Association)의 주도하에 미국의 휘튼대학에서 모인 국제대회를 통해 “선교의 쇄신에 대한 선교의 입무”라는 내용의 휘튼선언(The Wheaton Declaration)(1966)이 발표 되었으며 뒤이어 프랑크푸르트선언(The Frankfurt Declaration)(1969)이 발표되었다.
“휘튼선언이 기독자의 수평적인(사회적)의무를 인정하면서 수직적인(선교적)의무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라면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선교적 의무의 우위성을 신학적으로 강조하면서 선교의 본질이 사회적 또는 정치적 요인으로 결정될 수 없으며, ‘인간화’가 선교의 목적이 아니라 복음화 운동의 결과이며, 타종교에 있는 ‘Cosmic Christ'이론을 공격하여 만인 구원론과 반대미래적 종말론의 해소를 논박하고 있다.”
그러나 복음주의 내에서도 폭넓은 선교 개념을 주장하는 지도자들이 있다. 선교를 타문화권 전도로만 국한하지 아니하고 전도와 사회봉사를 선교로 간주한다. 영국의 죤 스톳트(John Stott)는 에큐메니칼 선교와 복음주의 선교“라는 말이 좋은 것 같으나 사실상 과장이다. 교회는 봉사의 단체일 뿐만 아니라 예배의 단체이며 예배와 봉사가 서로 소속이긴 하지만 혼동된 성질의 것이 아니다.”고 하면서 에큐메니칼 선교를 부정한다. 도시에서의 그는 복음전도와 사회활동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선교관을 주장한다.
하버트 케인(Herbert Kane)도 선교를 영혼구원과 사회봉사로 해석한다. 그는 “복음주의는 선교를 전도와 동일시하여 영혼구원은 잘하지만 다른 활동에 참여하는 데는 느린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사회봉사에서는 잘하지만 영혼구원에는 관심이 없다.”고 양자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그에 의하면 성경과 선교역사에서 살펴볼 때 선교는 전도 뿐만 아니라 교회개척과 의료봉사, 교육사업, 농업사업등 모든 봉사활동도 선교에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전도는 “복음의 구속적 선포”라는 활동이며 선교는 전도와 사회봉사를 다같이 포함한다.
독일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작성한 프랑크푸르트 선언도 선교, 설교, 성례, 봉사를 통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정의하였다. 다만 여기서 사회봉사는 전도의 결과로 해석하는 점에서 강조의 차이가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선교란 교회와 충분한 권위를 부여 받은 전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설교, 성례, 봉사를 통하여 영원한 구원을 증거하고 제시하는 것으로서 이 구원은 모든 인류를 위하여 단번에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십자가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원은 먼저 결단을 요구하는 선포를 통해서 개인에게 실현되어지며 그리고 세례를 통하여 신자들로 사랑의 봉사를 하게 한다. 신앙이 회개와 세례를 통하여 영생에 이르는 것처럼 불신앙은 구원의 메시지를 거부함으로 정죄에 이른다.
이 복음주의 선교사상이 집약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은 1966년의 베를린(Berlin) 선교대회와 1966년의 휘튼(Wheaton)선언과 1970년의 프랑크 푸르트(Frankfurt)선언과 1974년의 로쟌(Lausanne)선언과 1975년의 서울(Seoul)선언의 내용이었다. 이 모든 모임들은 복음주의 학자들이 인본적으로 흘러가는 자유주의 선교동향에 도전하면서 성경에 기초한 전통적 선교의 내용을 다시금 밝혔던 대회들 이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은 선교를 개인 영혼구원, 교회설립, 자력전파, 하나님께 영광돌림의 전통적 선교 개념을 고수하고 있으며, 이에 더 나아가서 사회 봉사까지 수용하려는 경향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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