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축복의 사명과 천국소망
□ 본문 : 창세기 47장 27-31절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좋아도 반드시 떠나야 합니다. 이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언젠가는 나에게도 그 날이 오겠지만 먼 훗날의 일처럼 생각됩니다. 솔직히 죽음은 자신과 상관없는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특히 이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성공하면 성공할수록 죽음이 멀리 있다고 생각합니다.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죽음이 멀리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명해지면 유명해질수록 죽음이 멀리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죽음이 멀리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신도 언젠가는 마지막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 그 순간이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가장 중요한 것들을 소홀히 하며 살아가기 쉽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영원한 생명입니다. 천국입니다. 기근 가운데 있던 애굽 백성은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팔았습니다. 지혜로운 선택이었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가축이 많아도, 아무리 넓은 땅을 가지고 있어도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애굽 사람처럼 죽음을 눈앞에 두고 사는 사람은 지혜롭습니다.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가 어렵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에게는 육신의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죽음 뒤에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만약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팔아 천국을 살 것입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13:44) 육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팔았는데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무엇을 팔지 못하겠습니까?
27절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
애굽에 내려온 야곱의 가족들은 생육하고 번성했습니다. 애굽의 총리인 요셉이 뒤에 있으니 얼마나 든든했겠습니까? 걱정할 것도 두려울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렇게 목축하기에 좋은 고센 땅을 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는 축복을 주셨을까요?
이스라엘 족속을 성인 남자만 60만 명인 이스라엘 민족으로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가나안 땅에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그 나라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와 사망의 종노릇 하고 있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족속의 사명입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라고 고센 땅을 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는 축복을 주셨던 것입니다. 축복은 사명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축복이 사명이라는 사실을 잊고 삽니다. 내게 주신 건강과 재능과 물질은 사명입니다. 다양한 인생의 경험도 사명입니다. 좋은 경험, 특별한 경험만 아니라 힘들고 아팠던 것도 사명입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1:4) 바울은 많은 환난을 만났습니다. 그 환난을 통해 하나님의 특별한 위로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이것이 사명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는 사명 말입니다.
건강, 재능, 물질, 다양한 인생 경험이 없으면 사명이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는 건강, 재능, 물질, 다양한 인생 경험과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바로 구원입니다. 구원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구원의 축복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구원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모든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구원의 축복을 받은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이름을 전해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건강과 재능과 물질과 다양한 인생 경험은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이 사명이라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그러면 문제가 생깁니다. 축복이 사명이 되지 않으면 축복 때문에 타락합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삼손입니다.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특별한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나귀의 새 턱뼈를 가지고 블레셋 군인 천 명을 죽일 정도의 놀라운 힘이었습니다.(삿15:15) 칼을 가지고 천 명을 죽이는 것도 기적인데 나귀의 턱뼈를 가지고 천 명을 죽였으니 정말 대단한 힘입니다.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이와 같은 특별한 축복을 주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삼손의 사명이었습니다. 축복은 사명입니다.
그런데 삼손이 그 축복을 가지고 사명을 감당하지 않습니다. 적국 블레셋 가사에 있는 기생에게 들어갑니다.(삿16:1) 나귀의 턱뼈로 천 명을 죽일 정도의 힘이 있으니 두려울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삼손이 가사에 왔다는 사실을 알고 삼손을 죽이려고 사람들이 밤새도록 성문에 매복합니다. 그런데 삼손이 ‘성 문짝들과 두 문설주와 문빗장을 빼어 가지고 그것을 모두 어깨에’ 멥니다.(삿16:3) 성문에 매복했던 가사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두려워서 도망갔을 것입니다. 삼손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으로 사명을 감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기생에게 들어갈 정도로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는 들릴라라는 여인에 의해 머리털이 밀립니다. 두 눈이 뽑히고 적국 블레셋의 조롱거리가 됩니다.(삿16:19-21) 축복으로 사명을 감당하지 않으니 축복을 빼앗깁니다. 빼앗길 뿐 아니라 축복을 받기 전보다 더 비참한 자리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차라리 삼손에게 이런 축복이 없었다면 두 눈이 뽑히고 적국의 조롱거리가 되는 저주는 없었을 것입니다. 축복은 사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축복으로 사명을 감당하지 않으면 축복 받은 것 때문에 타락하고, 심지어는 저주의 자리까지 떨어집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삼손과 같은 극적인 인생을 살지는 않습니다. 삼손과 같은 축복을 받은 사람도 많지 않고 삼손과 같이 타락한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 원리는 동일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축복으로 사명을 감당하지 않으면 타락합니다. 도덕적으로는 타락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타락합니다. 영적인 타락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아닌 세상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 아닌 세상에 있는 것들을 의지하는 것, 이것이 바로 타락입니다.
영적 타락이 도덕적 타락보다 무섭습니다. 도덕적으로 타락하면 자기가 지은 죄를 알기에 회개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회개하면 용서받고 새로워집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타락하면 자신이 얼마나 무서운 죄를 짓고 있는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회개하지 않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살다가 죽음 앞에 섰을 때에 비로소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알게 됩니다. 그러나 늦었습니다. 돌이킬 기회가 없습니다. 그래서 영적 타락이 더 무섭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고센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족속을 축복하신 것은 사명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되어 가나안 땅을 차지해야 합니다. 축복에 마음을 빼앗겨서 사명을 잊으면 안 됩니다.
※ 래디컬(데이비드 플랫, 두란노)에 나오는 한 그리스도인의 간증입니다.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과테말라로 가기로 작정했습니다. 선교의 열정이 있었다거나 과테말라의 백성들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저 말씀에 순종해서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저는 선교사나 목회자가 아니라 한 남자의 아내이고, 아이들의 엄마이며,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정신과 의사입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는 일에 아주 조금 순종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신실하셨으며 저에게 커다란 은혜를 주셨습니다.
죽 한 컵으로 하루를 버티는 아이들 틈에 둘러싸여 일주일을 보내고 버밍엄으로 돌아오면서 어째서 저들은 그토록 가난하게 살게 하시고 내게는 넘치게 부어 주셨는지 여쭤 보았습니다. 주님은 마음 중심에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복을 준 것은 내 영광을 위해서다. 커다란 집에서 멋진 차를 굴리며 편안하게 살라는 것이 아니다. 휴가를 보내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옷을 사 입는 데 돈을 쓰라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일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너에게 축복을 베풀어 세상이 내 영광을 보고 알게 하려는 것이 내 뜻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축복과 그분의 목적을 연결시킬 줄 모르는 상태로 평생을 살았지만, 이제 지난날 보지 못했던 것들을 깨달았습니다. … 주님이 일정한 수입을 주시고, 적절한 교육을 받게 하시며, 갖가지 자원들을 허락하신 까닭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나를 구원하셔서 모든 민족이 주님을 알게 하셨습니다. 복을 주셔서 온 땅이 구분의 영광을 보게 하셨습니다.
(위의 책, pp, 120-121)
이스라엘 족속은 축복이 사명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족속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가나안입니다.
애굽 땅은 영원히 살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영원히 살아야 할 곳은 가나안입니다. 애굽은 잠시 있는 곳입니다. 때가 되면 반드시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애굽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다보면 자신들이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가나안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족속이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애굽 생활이 힘들면 이런 함정에 빠질 일이 없습니다. 애굽에서 사는 하루하루가 고통이라면 가나안을 간절히 사모할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입니다. ‘하나님, 애굽에서 못살겠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십시오.’ 하고 말입니다.
실재로 430년 뒤에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의 극심한 핍박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출2:23)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모세를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십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요셉 시대처럼 살기 좋았다면 애굽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은 기억조차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면, 세상에서 성공하면 천국을 잊어버립니다. 마치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아갑니다. 왜 이게 문제입니까?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은 세상이 망할 때 함께 망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을 노아의 때와 롯의 때에 비유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노아의 때에 하나님께서 죄악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방주에 들어간 노아의 가족 외에는 모두가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마지막 때에도 노아의 때와 똑같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믿음의 방주 안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은 모두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믿음의 방주 안으로 들어오지 않을까요? 예수님의 다시 오심과 세상의 심판에 대해서 몰라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도 노아를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소망이 세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노아 시대의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눅17:27)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들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전부였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전부였다는 것입니다. 죽음과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롯의 때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롯의 때는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불로 심판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도 이 세상에 불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롯의 때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눅17:28-29)
소돔과 고모라는 성적으로 얼마나 타락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부분에 대해서 언급하시지 않습니다. 멸망 전의 소돔과 고모라의 모습에 대해서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리들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고 삽니다. 문제는 이것이 전부였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전부였다는 것입니다. 죽음과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롯의 처를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롯의 아내는 롯과 함께 소돔과 고모라를 빠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소알 성에 들어가야 구원받습니다.(창19:22) 그러나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봅니다. 그래서 소금기둥이 됩니다. 왜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았습니까? 소망이 세상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롯의 아내는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롯의 아내처럼 믿음의 경주, 구원의 경주를 시작했는데 목적지인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우리도 노아 시대의 사람들처럼 롯의 때의 사람들처럼,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는 것이 전부라면, 이 세상이 전부라면, 우리의 소망이 이 세상에 있다면 우리도 롯의 아내처럼 뒤를 돌아볼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이 망할 때 함께 망합니다.
29절, 30절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죽을 날이 가까우매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고 인애와 성실함으로 내게 행하여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 /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 요셉이 이르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야곱은 애굽에서 17년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가나안을 사모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가나안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야곱의 본향은 애굽이 아니라 가나안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애굽에 정착하고 5년 뒤에 애굽과 가나안의 기근은 끝났습니다. 그런데 왜 야곱은 가나안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애굽에 머물렀을까요? 애굽에서의 사명이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갈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46:3)
하나님께서 야곱으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17년 동안 생육하고 번성했지만 여전히 이스라엘 족속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되려면 아직도 멀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가나안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아직 감당해야 할 사명, 애굽에서 큰 민족을 이루는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 사는 이유는 사명 때문입니다.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은 하루라도 빨리 천국에 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사명 때문에 이 세상에서 삽니다.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1:23,24)
바울이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개척한 교회들을 생각하면 이 세상에 남아있어야 합니다. 그 교회들을 위해 바울이 해야 할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사명을 위해 살았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의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사명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동시에 소망은 오직 천국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요셉에게, 자신이 죽으면 애굽이 아니라 가나안 조상의 묘에 장사하라고 맹세시킵니다. 야곱의 소망은 화려한 애굽이 아닙니다. 오직 가나안입니다. 야곱은 이 세상에서 최선을 다해 사명을 감당했지만,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았습니다.
사명과 천국소망은 긴장관계에 있습니다. 천국소망이 강하면 이 세상에서의 사명에 소홀해질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명을 위해 세상에서 열심히 살았는데 자신도 모르게 천국소망을 잃어버리고 세상이 목적이 되어 버립니다. 세상이 소망이 되어버립니다.
전도와 선교를 위해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믿음의 기업을 세워서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합니다. 그런데 어느새 복음을 전하는 것은 나중이 됩니다. 일단은 회사가 안정되어야지 복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다가 어느새 회사가 목적이 되어 버립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천국을 소망한다는 이유로 이 세상에 대해서 무관심합니다. 어차피 멸망한 세상인데 하면서 말입니다. 내 주변에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 예수님을 모르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인생을 살면서 영원한 지옥을 향해 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 무관심합니다. 어차피 나는 천국에 가니 말입니다.
성도는 사명과 천국소망 이 두 가지를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최선을 다해 사명을 감당하면서 동시에 세상이 아닌 천국을 소망해야 합니다. 천국을 소망하면서 동시에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며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사명과 천국소망의 긴장관계를 잘 유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31절 말씀입니다.
“야곱이 또 이르되 내게 맹세하라 하매 그가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니라.”
자신을 애굽이 아닌 가나안에 장사할 것을 요셉이 맹세하자 야곱은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합니다. 우리는 이 모습에서 야곱이 이 세상 사명과 천국소망을 붙잡고 살 수 있었던 이유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예배였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마음이 부어지는 시간입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마음이 부어지면 반드시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①하나님과 더 있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영원히 거하고 싶습니다. 썩어질 육신을 입고도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좋은데, 육신을 벗고 영원한 천국에서 하나님을 만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서 오직 천국만을 소망하게 됩니다. 찬송가 가사 그대로입니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이렇게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85,1)
②동시에 사명으로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죄로 가득한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해 마음이 아픕니다. 어떻게 하면 한 영혼이라도 더 주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을까 너무나 간절합니다. 이 놀라운 사랑과 구원의 기쁨을 친구와 이웃에게 전하고 싶어서 빨리 교회 문을 나서고 싶습니다. 이 구원의 소식을 듣지 못한 곳이 있다면 어디든지 달려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갑니다. 그래서 가족과 친구와 이웃에게 갑니다. 치바뿐 아니라 후쿠오카에도 갑니다. 튀르키예까지 갑니다.
이것이 예배의 축복이고 예배의 능력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이 부어지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예배에 실패하면, 사명도 잊고 천국도 잊고 살아갑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는 것이 전부인 인생, 이 세상이 전부인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롯의 아내처럼 소금기둥이 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사명을 나누고 천국소망을 나누었습니다. 야곱의 인생이 그랬으니까요. 그런데 성령님께서 예배가 결론이 되게 하십니다. 예배가 살아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식으로는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는 인생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종교인은 축복에만 관심이 있지 사명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일평생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부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한 사람의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기쁨으로 사명을 감당하다가, 주님이 부르실 때 할렐루야 하며 천국에 들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께 영광!
치바에서 김성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