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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 인생>
지난 수요일 우리 성당 초대 부회장님을 지내셨던 안드레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평생을 농군으로 묵묵하고도 성실하게 살아오신 어른이셨기에 마지막 떠나시는 길에 참으로 많은 분들이 오셔서 함께 기도하셨습니다. 더구나 아드님 한 분이 수도회 신부님이셨기에 우리 범서 성당 생긴 이래로 가장 많은 신부님들, 거의 서른 분에 가까운 신부님들이 이 제대를 꽉 채우고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사람의 가치는 살아 빛나질 않고 죽어 빛나는 것이 진짜입니다. 살아 빛나는 것은 아직 검증이 되지 않은 껍질과 같습니다. 죽어보면 그 진면목이 드러납니다. 죽어 남는 것이 진짜입니다. 돈 있고 능력 있을 때야 사람도 많이 모이고 친구도 많은 것 같지만, 그건 조건 때문이고 정작 중요한, 한 사람의 진짜 향기가 드러나는 것은 그 모든 것이 말끔히 거두어진 죽음의 자리, 그리고 그가 떠난 빈자리에서 묻어나오는 참된 마음이 아닐까 묵상하게 만들어준 장례미사였습니다.
바자회를 마치고 다들 피곤에 지쳐 있을 때 본당의 큰 행사가 끝나기를 기다려, 그것도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님의 기념일 날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장례미사를 주례하며, 참으로 안타까웠던 것은 안드레아 할아버지와 같은 농사꾼 아버님들 세대가 남겨주신 근면함이라든지 성실함이라든지 정직함 따위의 가치들이 갈수록 설자리를 잃어가는 세태 때문이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예전에 초등학교를 다닐 때 교실 뒤에 붙어 있던 급훈이 대개가 그랬던 것 같습니다. ‘성실’, ‘근면’, ‘정직’, ‘협동’. 하지만 요새 이젠 이런 단어들은 하나 둘 유통기한이 다 지나버렸습니다. 요즘 부모들이, 학교에서 이렇게 가르치지 않지요. 만약에 그렇다면 어떻게 몇 백 만원씩 하는 족집게 과외를 쏟아 붓고 원정출산이네 조기 유학이네 하며 어떻게 하면 내 자식이 남보다 더 높은 데서 시작할 수 있게 만들까... 고민하게 만드는 이런 세태는 생기지도 않았겠지요. 그래서 요즘은 성실, 근면이니 하는 이 따위의 말들은 학교의 급훈으로도 쓰이지 못합니다.
요즘 학교에 걸려 있는 급훈들 중에 재미있는 것을 골라봤습니다. 아마 여고 학교에 걸려 있는 것일텐데요, ‘30분 더 공부하면 내 남편 직업이 바뀐다’ 남고에는 ‘10분 더 공부하면 마누라 미모가 달라진다’, ‘대학가서 미팅할래? 공장가서 미싱할래?’, 살벌하지요? ‘한국의 16강 진입, 우리는 서울권 진입’, ‘공부만이 살 길이다. 열시간 서울대, 8시간 연대, 7시간 이대’, 이것도 압권이었습니다. 급훈 ‘엄마가 보고 있다’ 그리고 이것보고는 넘어갔습니다. “니 성적에 잠이 오냐?”
재기 발랄한 학생들의 면면들이 참 보기 좋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아이들의 머릿속에 대단히 빠른 속도로 공부에 대한 가치가 소유의 상승과 신분 편재의 도구로 뒤바뀌고 있음이 씁쓸했습니다.
세태가 이렇다보니 요즘은 정직하게 성실하게 근면하게 살면 도리어 무능하단 소리 듣습니다. 사는 일이 대단히 피곤해집니다. 그리고 근면하고 성실하면 장가가기도 힘들지만 장가가서도 고로케만 살면 마누라 속 뒤집어놓을 일 한 둘 아니고 잘못하면 마누라에게 쫓겨나기 십상입니다. 어째든동, 성실 근면 정직 노래하기보다 이겨야 합니다. 눌러서라도 나는 승리해야하고 나는 잘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기는데 있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하는 것이 요새 세상의 처세입니다. 정직이니 성실이니 보다는 아부와 아첨이 더 빠른 출세의 지름길입니다.
그래서 요즘의 처세술이란 것을 보면 기가 막힐 지경입니다. 건설교통부의 직장 협의회가 띄운 2005년도 승진 비결 처세술을 보면, ‘1000Kg의 성실보다는 1g의 아부가 더 큰 가치를 지닌다’ 고 이야기 하고, 전국 공무원 노조 정책연구소장이라는 사람은 ‘합법적인 방법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진하는 것이 장땡이니, 승진을 위해서는 화장실을 갈 때라도 두꺼운 서류철이나 결재판을 들고 다녀라, 일 많다, 어렵다는 말을 자주하고 다녀라...’ 따위를 처세술로 내겁니다.
기관장의 일정표를 유심히 봐둔 다음 빠트리지 않고 찾는 것은 기본이요, 늘 그 주위에서 성심을 다해 맴도는 것이 성실함의 기준으로 바뀌다 보니 형형색색 희안하기 이를 데 없는 처세들이 읽을꺼리랍시고 서점에 난무합니다.
‘나이 들어 호강하는 법’, ‘절대로 안 짤리는 월급쟁이 되는 법’,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법’, 이거 대박입니다. ‘합법적으로 돈 떼어 먹는 법’ 제목만 들어도 이 세상, 참 편하고도 쉽게 살 수 있을 것만 같은 내용들이 즐비합니다.
세상의 모든 처세들이란 것이 결국 이런 식입니다. 어떻게 하면 올라설 수 있고 어떻게 하면 편하게 살 수 있고 또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을 잘 이용해서 내가 승리하고 성공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런 것들이 세상에서의 성공하는 삶이라고 이야기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녀들도 이런 경쟁과 처세를 빨리 배워 남들보다 더 빨리 성공에 진입하는 삶이 마치 대단한 출세이고 잘 사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잘 살고 싶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속내입니다. 못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근사하게 잘 살고 싶어서 이리도 아웅거리고 있습니다만은, 사실 사는데 있어서 정작 중요한 것은 잘 사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사는 것 아니었습니까? 잘 사는 삶이 행복하게 사는 삶과는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잘 살기 위해 발악하다보니 행복하게 사는 것은 죄다 놓치고 마는 허무한 인생들이 더 많아져 버렸습니다.
일종의 두려움 때문이지요. 남처럼 살지 못하는 것의 두려움, 가난과 병고와 실패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현재와 미래의 불안정함에 대한 두려움, 그렇게도 잘 살길 바라면서도 또 가만보면 우리 모두가 30년 전보다 훨씬 더 잘 살고 있으면서도 도대체가 이 불안은 사라지질 않고 그 때보다 지금이 행복하다고 자신하기도 어려운 세상입니다.
무엇이 빠져서이지요? 뭐가 문제이기 때문일까요? 그 답이 오늘 복음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오늘 복음은 바로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여행길입니다. 그런데 이 여행길은 궁극적으로는 무엇인가요? 예루살렘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십자가의 죽음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그것을 아셨습니다. 당신을 적대하는 사람들이 당신을 죽이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음을 명백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최후를 세 차례나 제자들에게 미리 알리십니다. 그리고는 그 길을 피하지도 않고 도리어 묵묵히 그 길을 걸으십니다.
그래야만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짐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느님의 뜻 오직 사랑. 하느님과 인간이 단절된 관계를 극복하고 그 죄를 씻기 위한 대속의 제물이 필요함을 아신 다음 그분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걸고 지금 죽음의 길을 가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들어도 모릅니다. 이 길이 승리하는 길인 줄 압니다. 그래서 서로 다툽니다. 나중에 한 자리를 차지할 때 누가 제일 큰 사람이냐로 싸우는 것입니다. 스승은 죽을 길을 가는데 제자들은 성공하는 길, 잘 나가는 길만 꿈꿉니다.
그래서 스승께서 그들을 세워 이렇게 이야기 하시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승리하고 싶다면, 진짜로 첫째가 되고 싶다면 꼴찌가 되어라고, 마치 이 땅에서야 큰 사람이 가장 높은 사람이지만 그것을 하늘에서 재면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높은 사람, 가장 큰 사람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세상의 처세와는 정반대의 하느님의 처세를 말씀하십니다. 아니 세상의 처세를 거슬러 오르는 전혀 다른 처세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는 이 신앙, 이 믿음은 어떻게 우리가 하느님을 잘 믿어 이 세상에서 잘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천주교 신자들은 하나도 아프면 안 되고 모두가 승진하고 합격해야 합니다. 모두가 로또 복권 매주 당첨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편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어떤 것이 하느님 편에서 잘 사는 처세입니까? 그것은 바로 누가 높느냐 누가 낮느냐 누가 잘나고 누가 능력 있느냐가 아니라 누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느냐입니다. 내가 잘나면 사랑 절대로 못합니다. 못난 사람이 사랑도 잘 합니다. 못났다는 말을 잘 알아들으십시오. 모자란다는 말이 아니라 그만큼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제대로 된 사랑을 합니다.
사랑에 있어서 잘난 사람은 본전 생각 가득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사랑을 장사로 하려고 덤빕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애시당초 손해 보는 짓입니다. 그런데도 그 손해를 모르고 도리어 그 사랑 때문에 행복의 극치를 맛보는 일이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너무나도 사랑했습니다. 다 주어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고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그 때에는 내가 너무 못나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 밖엔 난 몰랐기 때문에, 사랑 앞에 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없어도 행복했던 내가 슬슬 기어오릅니다. 그저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사랑했고 감사했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있는 것만으로는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나에게 도움이 좀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 것을 좀 채워야 하겠습니다. 내가 지한테 어떻게 했는데, 내가 지를 어떻게 길렀는데... 이러기 시작하면 이젠 사랑한다는 이름으로 죽을 만큼 싸울 일만 남았습니다.
보십시오. 우리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낳을 때, “임신입니다. 축하합니다.” 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우리 어머니들 마음이 어땠습니까? 이 아이가 공부를 잘해 시험도 턱턱 붙고 서울대학 정도는 가주어서 내 위신도 좀 세워주고... 뭐 이런 걸 바라셨습니까? 그런 부모 있다면 그거 도둑놈입니다. 아니지요. 무엇만 바라셨습니까? 솔직히?
그저 건강하기만을 바라셨지요. 그냥 눈 코 입 귀 있을 자리에 다 붙어만 있어주고, 손가락 제대로 꿈지락 거리기만을 바라셨지요? 그리고는 임신인 줄도 모르고 걸쳤던 한 잔 술도 내내 걸리고 감기약 먹은 걸 두고 행여나 제대로 안 붙어 있으면 어떻하나 오만 걱정과 번민으로 잠 못 이루셨겠지요?
그러다 출산 날 정신이 돌아와 의사 선생님에게 제일 먼저 뭘 물으셨습니까? 잘 생겼습니까? 공부 잘하게 생겼습니까? 이런 거 안 물으셨지요? 그저 “건강합니까?” 하고 물었을 때 “예, 건강합니다.” 하는 소리 들으면 눈물이 주르륵 흐르지 않던가요? 그냥 그 소리만 들었을 뿐인데도 하느님 감사합니다 소리가 절로 나오질 않습디까?
그런 자녀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녀, 지금 단지 건강하다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흐를 만큼 감사하고 행복하십니까? 아니지요? 지금은 그것만 가지고는 죽어도 안 되지요. 말도 잘 들어야 하고 공부도 잘해야 하고 이것저것 기본 이상은 해주어야 겨우 만족하는 정도 아니십니까?
그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애시당초 나에게 그렇게 귀한 생명들이란 말씀입니다. 내가 아무 댓가도 보상도 바라지 않았을 때 나는 그저 있다는 것만으로 세상을 다 얻은 것만 같은 사랑과 행복을 맛보았다는 말씀입니다.
행복한 길은 사랑하는 길입니다. 제 아무리 잘 살아도 사랑이 안 되면 그 사람은 초라한 사람입니다. 남길 것 하나 없는 인생입니다. 그럼 어떻게 사랑해야 하나? 왜 그렇게 사랑이 안되나?
이것이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보상 없이 사랑하는 것, 댓가 없이 사랑하는 것, 우리가 사랑에 있어서 감동을 받는 모든 순간은 바로 보상 없이 사랑하는 모습을 볼 때입니다. 헌신적이라고 하지요. 본전생각하나 없이 사랑하는 모습 앞에 우리는 눈물을 흘립니다. 그것입니다.
본전생각을 사랑에서 빼어버리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내가 제대로 사랑할 수 있는 길입니다. 본전생각 자꾸 하면 사랑하면서도 억울할 일 천지요, 사랑한다하면서도 나만 서글프고 나만 서러울 일 지천입니다.
예수께서도 이를 아셨기에 어린이 하나를 우리들 앞에 내세우십니다. 왜 이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사랑하라 하셨을까요? 어린이는 약합니다. 그들은 약해서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이 어린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런 댓가도 치룰 수가 없습니다.
엄마에게 하루 종일 매달려 젖 먹고 있는 어린 애가 “엄마 고맙습니다.” 라고 말하는 법 없습니다. 아무 댓가를 지불할 수조차 없는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사랑하면 우리가 훨씬 더 하느님의 사랑을 잘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애시당초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아무런 댓가를 바라지 않으셨으므로, 애시당초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아무 댓가 없이 우리를 위해 철저히 꼴찌의 죽음을 선선히 선택하셨음으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댓가 없이 난 목숨들입니다. 유일하게 댓가를 치르신 분은 단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뿐이십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당신이 그리하셨던 것처럼, 그 댓가 없는 사랑을 그저 나의 이웃들에게 전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이 요구가 부당합니까? 이 요구를 도저히 수용할 수가 없으십니까? 죽어도 용서 못한다고 뻐팅길 일도 아니요, 나만 억울하다고 하소연 할 일도 아닙니다. 어짜피 세상은 나 하나 잘 되기 위해 사는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 하나 잘 풀린다고 그거 잘 사는 인생이 아니라 너를 살려 내가 복 되게 사는 인생, 그것이 하느님 편에서의 복락을 걷는 인생입니다.
세상은 공부해서 남주나, 돈 벌어서 남주나 하지만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남 주는 공부하고 남 주는 돈을 법니다. 이 세상을 다르게 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의 출세 죽으면 그만이지만 하느님 안에서의 출세는 죽어도 삽니다. 아직 우리 모두 결판이 나질 않았습니다. 지금 있는 것 중에 헛 것들 다시 지우면 됩니다. 똑같이 안 살아도 그거 불행한 것 아니요, 똑같이 못 쓴다고 그것 박복한 인생도 아닙니다.
하느님 뜻 바로 세우는 사람이 잘 난 세상에서는 꼴찌처럼 보여도 하느님 나라에서는 1등이니까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일등인생, 다들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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