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악루(月岳樓) 소고(小考)
당시 우리 집은 충주 월악산 송계와 가까운 제천군 한수면 北老里에 있었는데, 나의 할머니와 일가가 되는 金世均과 그의 아들 金明鎭도 서울에서 내려와 살고 있었다. 김세균은 경상감사와 이조판서를 지낸 분으로 대원군과 친분이 두터워 그 손자 金斗漢을 대원군의 손녀딸(고종의 형인 이재면의 딸)과 혼인시키기도 했다. 이렇듯 우리 집안과 가까웠던 김세균은 또한 민영환의 장인이기도 했다. 이런 관계로 명성황후의 간곡한 당부를 받은 민영환은 자신의 처조카가 되는 김두한으로 하여금 월악산 근방에 사는 사람으로서 이 막중한 대사를 비밀리에 맡아 줄 사람을 물색했다. 그 지역에 사는 사람으로서 주변으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어야 함은 물론 경제적 여건도 갖추고 있어야 했다. 김두한은 친한 사이인데다 믿을 만하다고 판단하여 나의 선친(徽庵 李冑承)을 추천했고, 선친께서도 팔을 걷고 나서셨다. 하지만 이 일은 외부에 알려져서는 절대 안 되는 일이었다. 즉, 말 한마디 잘못하면 집안이 쑥대밭이 되는 일이었으므로 모두들 쉬쉬하며 일을 진행시켰다. 나의 선친과 김두한은 당시 걸인 행색을 하고 다녔던 金鎬景이라는 분을 연락책으로 삼고, 선친의 아저씨뻘로 뒷날 의병활동을 하셨던 李冕宰, 김두한과는 같은 항렬로 서자 출신이면서 우리 집안의 마름 일을 보기도 했던 金成漢, 재정 담당으로 선친의 도움을 받아 받은 바 있는 李萬源, 權灝善, 그리고 우리 집에서 선친의 그림자처럼 움직였던 윤중과 김두한의 집 하인인 ‘쇠’ 등을 움직여 일을 진척시켜 나갔다. 한편, 정부에서도 內帑金을 내리고 부족한 자금은 월악산 인근의 부호와 벼슬아치들에게 원납전을 내게 하였다. 당시 우리 집과 척분이 있는 權敦仁의 집안도 근처에 있었는데 몇 천석을 하던 집안이었다. 그런데 그 손자 권영이 원납전을 내라고 하니까 그게 싫어서 날마다 술을 마시다가 폭음으로 돌아간 일도 있었다. 성을 쌓고 대궐 짓는 일이 진행되어 나가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의병운동사적 1권』에 수록 되어 있는 이면재의 ‘1894년 일기’에 보면 송계에 살던 그분의 장인이 말하기를 “번화한 기상은 자못 큰 도회지 같아 한편에 魚藿전과 한편에 비단 포목전이 있으며, 거간꾼, 깡패들까지 우글거려 출입하려면 다투고 싸우는 것이 일이다. 순박한 풍속은 없어졌다. 그 고장 사람들은 이제 평소에 지니고 있던 마음을 잃어버리고, 열이면 여덟아홉은 본업인 농업을 버리고 상업에 종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더욱 어려운 일이 있으니, 사방에서 환자들이 들어와 마을마다 병막을 이루고 있어 출입하기도 어렵고 마음 놓고 다닐 수도 없다.”라고 할 정도였다. 차츰 성의 모습이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월악산 덕주사 쪽으로는 동문, 충주 쪽으로는 서문, 수안보 쪽으로는 남문, 제천 쪽으로는 북문이 완성되었고, 궁궐도 제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은 길이 좁고 험준하여 가히 한 사람만 서 있어도 만 명의 적이 뚫을 수 없다 하여 “一夫當關 萬夫莫開”라 할 정도로 철통같은 요새였다. 주변에 논과 밭이 있어 식량도 충분했으므로 유사시에 몇 천 명 정도의 군대를 데리고 들어와 막으면 몇 년은 넉넉히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듯 순조롭게 진행되던 충주 이궁의 공사는 1895년 8월 명성황후가 시해당하는 바람에 순식간에 중단되고 만다. 그 많던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수년에 걸쳐 피땀 흘려 쌓은 성은 퇴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 같은 이야기를 나는 어린 시절에 선친으로부터가 아니라 우리 집에 있던 윤중으로부터 듣곤 했는데, 그때는 아직 일제시대라 극히 조심해야 했기 때문에 선친께서는 일부러 말씀을 하지 않으신 것 같다. 그 후 나의 선친은 해방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시게 되었고, 나 또한 여러 가지 일로 정신이 없어 이 일을 잊고 지냈다. 그런데 몇 해 전 충주 이궁의 南門을 보수하면서 현판을 써달라는 부탁이 내게 들어왔다. 나는 ‘月岳樓’라는 현판을 쓰면서 불현듯 옛 기억이 떠올라 감회에 젖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은 나의 선친께서 깊이 관여하셨던 일인데다가 나 자신도 전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내가 어렸을 적에 이 이궁의 안채에는 조동관이라는 분이 살았는데, 그분이 무엇 때문인지 이사를 간 후로는 이 안채가 간이학교가 되었다. 이 간이학교는 한수면에 있는 보통학교의 분교로 보통학교 6년 과정을 2년에 마치도록한 학교였다. 나는 이 학교의 교사였던 韓暢斅 선생을 우연히 알게 돼 이야기를 나누면서 비로소 세상 물정을 알게 되었고, 이 일로 인해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새롭고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충주 이궁은 이러한 사연들이 모두 알려지지 않은 채 현재는 그저 제천 德周山城이라는 이름으로 門樓와 성벽 일부가 보수되고 있는 중이다. 더구나 서문의 경우에는 흩어져 있던 돌들마저 모두 가져다 썼는지 이제는 그 흔적조차 찾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제 충주 이궁을 지어 무너져 가는 나라를 지탱하고자 했던 우리 선조들의 발자취는 역사에도 기록되지 않은 채 잊혀져 가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출전 : 이구영, 2003,『月岳樓 小考』 |
▲월악산 덕주사 쪽의 동문, 수안보 쪽의 남문, 제천 쪽의 북문은 현재까지 흔적이 남아있는데, 충주 쪽의 서문은 살필 수 없다. 송계계곡의 지형은 남쪽과 북쪽으로 북류하는 계곡을 차단하면, 서문은 수립할 필요가 없다. 즉, 서문은 산줄기가 계곡을 따라서 南北間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한 서문은 궁궐을 완성하면서 궁안을 출입하는 문지를 말한 것으로 보인다. 명성황후와 관련한 별궁과 연계한 북문의 수립 연대와 일치한다. 즉, 조선후기 충주 덕산면에 소속한 동창이 소재한 이후에 성문을 수립했기 때문이다. 한편 남문과 동문은 덕주산성과 관련한 성곽으로서 복합적인 성문을 소명할 필요가 있다. 아무튼 별궁을 외호하는 북문, 남문, 동문과 궁안을 출입하는 서문의 실존을 간과할 수 없다. [淸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