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여행13 - 니시키 시장에서 점심을 먹고는 후시미 이나리 신사를 찾아가다!
간사이 여행 사흘째인 2024년 9월 20일 교토 니조성에 도착하는데 니조성에는 입장료가
2가지가 있으니 700엔 짜리는 정원만 보는 것이고 궁전까지 보자면 1,300엔 짜리를
끊어야 하며 초등 학생은 300엔이고 중학생은 400엔으로 성문 안에 2차 해자가 보입니다.
니조성 (二条城 이조성)은 동서 480미터에 남북 360미터 로 무척이나 크고 넓은 성이니, 폭 13미터, 깊이
17미터인 해자를 두르고 있으며 니조성 니노마루 입구 문에는 지붕의 재질이 특이하게도 신사에서
처럼 히노키피즙 나무 껍질로 만들어졌으며 처마는 검은 옻칠 바탕에 화려한 금박으로 장식을 했습니다.
궁전과 정원에 천수대 까지 구경하고는 니조성을 나와 다시 렌터카를 타고 20여분을 달려 니시키
시장에 도착해 차를 넣고는...... 시장을 구경하는데 재래 시장인지라 울 마눌은 신이 났습니다.
그러고는 시장에서 조금 떨어진 식당으로 들어가서는 7명 대가족이 테이블 2개를 차지하고는
우동과 소바에 불고기 정식 등을 시켜서 잘먹는데..... 착한 가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교토는 헤이안 시대부터 옛 일본 수도로 천년이 넘는 세월을 거치며 오닌의 난을 비롯한 센고쿠 시대의 잦은
전란으로 무로마치 시대 이전 수많은 고건축들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현재 교토에 있는 문화재들은
대개 센고쿠 시대 말기나 에도 시대 초기의 작품으로 이러한 난리통 속에 교토의 시가지도 다소 바뀌었습니다.
수도 지위를 상실한 이후에도 교토는 '서쪽의 수도(사이쿄, 西京)' 로 칭해졌고 다이쇼 덴노
와 쇼와 덴노의 즉위식이 거행되는등 정통성 있는 고도로서 역할을 인정받았으며
또한 교토대학을 비롯한 유수의 연구기관들이 설립되어서는 '학문의 메카' 로 성장했습니다.
한국의 노벨상 수상자는 평화상 1명에 금년에 한강씨의 문학상 1명 합계 2명이고 중국과
인도가 10여명 정도인데 비해,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는 그 3배에 이르는 30명이
넘는데.... 노벨 문학상 3명과 평화상 2명을 빼면 과학상 수상자가 무려 26명에 이릅니다.
이 중에 여기 교토시에 자리한 교토 대학 출신자는 물리학상은 유카와 히데키, 도모나가
신이치로, 아카나시 이사무이고 화학상은 후쿠이 겐이치, 노요리 료지,
요시노 아키라이며 생리 의학상은 노네가와 스스무, 혼조 다스쿠등 모두 8명에 달합니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노벨 과학상을 많이 수상한 이유 중에 하나는 아인슈타인의 공
인 것 같은데.... 규슈 모지코의 구 모지 미쓰이 쿠라부 俱樂部
Club 는 1921년 미쓰이물산 숙박시설로 세운 이래 사교클럽으로 애용되었습니다.
미쓰이 쿠라부 俱樂部 Club 2층 메모리얼 룸은 일본을 방문한 아인슈타인
부부가 숙소로 이용한 곳으로 일본 어린이들의 합창 환영에 그만
즐거워져서는...... 흥이 난 아인슈타인은 바이얼린 연주로 화답했다고 합니다!
아인슈타인 부부는 1922년 10월 8일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배를 타고 수에즈 운하와 인도양
그리고 말래카 해협을 돌아 대만을 지나 북상해서 세토나이카이를 지나 11월 17일
일본 고베에 도착해 일본 전국을 다니며 강연하고는 43일 만인 12월 29일 일본을 떠났습니다.
일본 도착전 배에서 아인슈타인은 노벨상 소식을 들었지만 일본 전국 강연을 하느라 수상식에 참가하지는
못했다는데, 일본은 흥분의 도가니로 달아올랐으며.... 소년들은 꿈을 키웠으니 훗날 일본 최초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교토대 유가와 히데키 등으로 그는 프린스턴으로 찾아가 아인슈타인을 직접 만났다던가요?
이렇게 전통의 도시 교토는 메이지 초기 까지도 오사카와 2위를 놓고 경쟁했지만 이후 교토
인구는 점차 나고야, 요코하마, 고베, 후쿠오카, 삿포로등 신흥 대도시들에 밀려
나가며 현재 8위까지 추락했고 패전 이후 황실전범의 개정에 따라 헤이세이 시대
이후 일왕(천황)의 즉위식이 도쿄에서 열리게 되면서 전전에 비해 위상의 실추를 겪었습니다.
그러고는 우리 차는 후시미(伏見 복견)에 도착하기로 주차장에 넣고는 바로 위쪽에 후시미
이나리 신사로 올라가는데, 붉은 건물이 사람의 시선을 잡아 끄니 여긴
일년 사시사철 전세계에서 온 관광객으로 미어터지는데.... 비수기인 오늘도 예외는 아닙니다.
후시미 이나리 진자(伏見稲荷神社 도하신사) 신사에서 내려오는 참배객과 올라가는 관광객으로 거리는 미어
터지니 복잡하기 그지없는데 문득 떠오르는게 오늘날 일본에는 12만개의 신사가 있는데, 그 중에서 일본인
에게 가장 친숙한 신사가 바로 여우상 과 붉은색 도리이 鳥居(조거) 가 상징인 3만 2천개의 이나리 신사 입니다.
3만여 이나리 신사의 총본산은 바로 여기 교토 후시미 이나리대사 伏見稻荷大社 로 서기 827년에
'정일위 이나리다이묘진 正一位稻荷大明神' 라 하여 신들의 모임에서 자리매겨진
이나리신사의 제신은 우카노미타마노카미 宇迦之御魂神 인데 일체의
"식물" 을 관장하는 식물신으로 식물의 원조인 벼의 생산과 풍요를 수호하는 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나리 는 '벼의 생장' 을 뜻하는 말로 여우는 일본 민간에서 신의 사자 로 간주되었는데
여우와 동일시 되기도 하는 이나리신 은 근세 이후 상공민의 신 으로 널리 받아들여
졌으니그 기본은 도작 농경민의 신 으로서 흔히 일본인의 민족성에 딱 들어맞는 신 입니다.
붉은색 신사 건물이 인상적인 이나리 신사 앞에는 반드시 서 있는 여우 동상 도 우리 시선을 잡아
끄는데...... 이나리 신사는 다른 말로 여우 신사 라고도 불린다는데 전국에 3만개나 된다는
이나리진자 에 처음 오는 사람들은 신사 입구에 늘름하게 앉아 있는 저 물건이 개인지 여우
인지 늑대 인지 헷갈릴테지만 신사가 이나리진자 (稻荷神社) 라면 이나리신의 사자 "여우" 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의 이웃집 토토로 에는 “사츠키와 메이 자매가 시골집으로 아빠와 함께 이사
를 오는데 엄마는 입원중이다. 메이는 어느날 숲속에서 대지의 정령 토토로와 만난다.
토토로는 한밤중에 자매를 찾아와서는 나무를 키워주고 하늘을 날며 세상 구경을 시켜준다.”
“그후 메이는 엄마를 찾아 가겠다고 나가 행방불명이 된다. 그런 동생을 찾는
사츠키 앞에 토토로가 나타나 고양이 버스 를 빌려준다. 이렇게 해서
동생을 찾은 사츠키는 함께 고양이 버스를 타고 그리운 엄마와 만나게 된다.”
여기서 사츠키가 처음 토토로를 만나는 버스정류장 이름이 “이나리신사 앞 稻荷前” 라는
이름의 정류장인데..... 메이 가 무서워하면서 이나리신사 를 엿보는 장면도 나옵니다.
그런데 “이웃의 토토로” 에서 다른 신사가 아닌 이나리신사 가 등장하는 데에는 숨겨진
이유가 있으니 미야자키 감독 에 의하면 예전에 일본 국토는 신도의 8백만 신들이
사는 곳이었다는데.... 현대 일본인들은 신을 느끼는 능력을 상실 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때문에 원령공주 등 미야자키 애니메이션 작품들은 숲에 대한 외경심 을 일깨움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신에 대한 감수성을 다시금 회복 시키고자 하는 의도로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숲에는 흙이 있고 나무가 자라며 샘물 이 흐르니... 태극과 8괘 등 중국 에서 발생한 오행(五行)
사상 에는 물이 나무를 낳고 나무는 불을 낳으며 불은 흙을 낳는다고 말하는데
이 중에 불의 기운은 붉은색 에 해당되어 흔히 대지의 정령을 일깨우는 색깔 로 간주됩니다.
한국과 일본은 문자를 만들지 못했으니.... 중국에서 한자와 함께 들어온 태극과 5행사상
에서는..... 여기 이나리 신사 를 상징하는 붉은색 도리이 는 바로 대지의 정령
토토로 를 일깨우는 데에 필요한 하나의 암시적 소도구 로 설정되어 있는건지도 모릅니다.
교토 후시미 이나리신사 는 3만개 이나리진자 (稲荷神社 도하신사) 의 총 본궁 이라고 하는데.....
이나리(稻荷)산 정상을 향해 천개의 붉은 도리이가 구불구굴 터널을 이룬 길 이 장관을 이룹니다.
장쯔이 가 주연한 영화 “게이샤의 추억“ 이 이곳 후시미 이나리 신사에서 촬영됐으니 아이가 붉은 도리이
사이를 뛰어오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는데 꼭대기 까지 오르는 데는 약 2시간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교토 남부 이나리(稻荷)산은 가을이면 단풍나무 가 늘어선 아름다운 숲길이라고 하는데
711년에 이로코노하카노카미가 이나리산 3개 봉우리에
수호신을 모신데서 유래했다니.... 이후 지난 1,300년간 일본인들의 순례 길 이었다고 합니다.
본전은 내란이 발생해 교토 시내에서 10년간 전투 가 벌아짐에 따라 시내가 절반이나
불타버린 오닌의난 때 소실 되어 1499년에 재건했다고 하며 여우는
이나리 오카미의 사자라 해서 모습을 세웠는데 달리 박코상 이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원래 이나리신은 벼 등 오곡의 풍요를 관장하는 신 이었으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외연이
넓어졌으니 지금은 오곡의 풍요 외에 사업의 번창과 안전의 수호신 이라고도 합니다.
이나리 산을 오르는 길 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낄수 있는 수수한 길이었다지만 자연을 가로
지르며 더욱 인상적인 풍경을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사람의 손으로 만든 "붉은 도리이 길" 입니다.
도리이길 초반부를 지나면 두 길 로 나뉘어 지는데 우측통행 을 하니 오르고 내려오는
사람이 부딪힐 염려는 없으며 붉은 도리이에 기증한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니
저마다 소원 성취를 위해 기부 했을 것인데..... 한번씩 찾아오면 감회가 남다르겠지요?
붉은 주칠을 한 도리이 가 산기슭에서 부터 꼭대기의 후시미 이나리신사 까지 구불구불 이어진다는데 4㎞
에 이르는 길을 걸어 올라가다 보면 고요한 연못과 작은 폭포, 아름다운 묘지 들이 즐비하다고 하네요?
일년 365일 24시간 개방 되어 있어 언제든 마음대로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으며 꼭대기
까지 올라가는데 넉넉잡아 2시간 정도 걸리는데, 정상에 오르면 스펙터클한 교토 시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며 한낮에 보든 네온사인이 휘황한 밤중이든 똑같이 멋지다고 합니다.
이 길은 계절에 따라 저마다 다른 매력을 뽐내니 봄에는 벚꽃 이 피고 여름에는 녹음 이 짙은 숲과 도리이
가 그늘을 만들어주며.... 또 겨울에는 도리이가 눈을 막아주어 안전하게 산을 오를수 있다고 합니다.
이 산길은 여름에는 녹색을 배경으로 선명한 주홍색, 겨울에는 순백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틱한 레드 이니 어느 쪽이든 황홀한 것은 마찬가지 라고 합니다.
내려오다가 울 마눌이 지붕의 처마 아래 풍경 처럼 생긴 물건 옆에 쇠사슬 이
길에 내려와 지면에 닿을듯이 보이는 저게 뭘 하는건지를 묻는데....
모르겠다고 하니 비가 와서 낙숫물이 땅에 바로 떨어지면 땅이 패이니 물이 저 쇠사슬을 타고
돌면서 내려오며 힘이 약해져 그럴일이 없을거라고 말하는데..... 듣고 그런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