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냄새를 물씬 풍기는 이야기들(1)
♡ 돈보다 더 중요한 것 ♡
"여보세요. 잠깐만 요."
아침 산책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트럭 운전사가 나를 불렀다.
나는 운전사인 할아버지가 길을 잃어버리셨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곳에는 이정표가 제대로 붙어져 있지 않아서 종종 운전사들이 길을 잃고 헤매곤 했으니까.
할아버지는 십여 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과 무척 흡사했다.
"길을 잃었나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입고 있던 청 색 점퍼 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아마도 이 할아버지는 초행(初行) 길이어서 약도를 그려 왔나 보군.
나는 할아버지가 건네는 빳빳한 종이를 받아 들었다.
그런데 그것은 약도가 아니라 사진이었다.
그 사진에는 어린 남자아이가 해맑게 웃고 있었다.
"할아버지, 이건 사진인데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사진을 드려다 보며 안쓰러운 듯 말했다.
"맞아요. 내 손주죠. 지금 병원 중환자실에 있지요."
나는 "그것 참 안 됐군요" 하면서 그럼 병원비가 부족해 돈을 좀 달래려나 보다 하고 생각하며
지갑을 꺼내려고 했다.
"젊은이, 내가 원하는 건 돈이 아니라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오."
"돈보다 더 중요한 거요? 그게 무엇인데요?"
"나는 지금 이 아이를 위해 기도를 해 달라고 만나는 사람마다 부탁하는 중이라오.
이 아이를 위해 기도를 해 주시겠소?"
나는 기꺼이 할아버지의 요청을 받아드려 그 사진 속의 아이가 빨리 완쾌되길 기도했다.
그 기도는 내가 살아오면서 올린 가장 간절한 기도 중 하나로 기억하고 있다.
♡ 절름발이 친구 ♡
저에게는 절름발이 친구가 한 명 있습니다.
그 걷는 모습이 늘 기우뚱 거리는 게 멀리서 보면 항상 어깨를 흔들며 즐겁게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이는
친구가 한 명 있습니다. 제가 자주 봉사 활동을 다니는 고아원에서 저는 그녀를 처음 만났습니다.
새로 온 자원 활동 가라며, 고아원 원장 님께서 소개해주셨고, 저희는 어설픈 눈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얼굴의 빈 곳 없는 여드름까지 그녀의 첫 인상에 전 한순간 눈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정말 순수한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을 혼자서 만 맑게 볼 수 있는 사람이었고 항상 곁에 있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고, 배려해 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처음과는 달리 저는 그런 그녀가 싫지 않았습니다.
아니, 전 그런 그녀가 점차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전 그녀의 웃는 모습을 너무나 좋아합니다.
봉사 활동하면서 아이들을 향해 흘리는 그녀의 웃음을 볼 때면, 전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를 보는 듯
합니다.
하루는, 고아원에서 한 아이가 그녀를 보고 물었습니다.
누나는 왜 다리를 절뚝거려? 전 그 아이의 말에 크게 당황했습니다.
혹 그 아이의 말에 그녀가 상처를 입을까. 하지만 그녀는 살폿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주더군요...
'누나는 어릴 때 나쁜 짓을 많이 해서, 하늘에서 벌을 준거야.
그러니까 너는 누나처럼 나쁜 짓 하지 말고, 착하게 커야 한다.'
그런 그녀였습니다. 그녀는 비록 몸이 불편하긴 했지만, 그 어떤 정상인들 보다 더 정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안개 꽃을 참 좋아했습니다. 화려하진 않지만, 작고 하얀 안개꽃을 보면 마음이 맑아진다고 합니다.
왜 인지 안개 꽃이 그녀와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루는, 제가 그녀를 집에까지 바래다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집을 향하는 골목길에서, 불량배 두 명이 그녀와 저의 모습을 보고 '저런 병신하고 사귀는 새끼도 있네'
라는 말을 하고는 저희들끼리 '히히덕' 거린 적이 있었습니다. 전 순간 불같은 화가 솟구쳤지만 억지로 끄는
그녀의 손에 이끌려 그냥 그들을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집 앞에서 그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작별 인사를 하고는 집으로 들어갔지만 저는 그 불량배들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 곧장 그 불량배들을 찾아내서 그녀에게 사과할 것을 요구했지만,
그들에게는 씨알도 먹이 질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과 전 싸움에 이르렀고 전 그날 숨 쉴 틈 없이 그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습니다. 전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가 싸움을 못 하는 것에 대해 원망해보았습니다.
그때는 제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녀와 제가 스스럼없이 대할만한 시간이 흐른 어느 날
그녀가 저에게 부탁할 일이 있다며, 어렵게 말을 꺼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녀가 너무나 싫어하는 사람이 그녀에게 결혼을 요구한다며 저에게 하루만 그 사람 앞에서 애인 행사를 해
달라고 부탁 해 왔습니다.
다음날. 전 말쑥한 정장 차림으로 그녀와 함께 그녀에게 결혼을 요구했다는 그 남자를 작은 커피숍에서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저란 존재에 그 남자는 많이 당황해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걸 체념한 사람처럼 아무 말 없이
그 자리를 떠나갔습니다. 그녀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전 아무 말 없이 쓸쓸한 표정을 짓는 그녀를 보며
알 수 있었습니다. 그녀 역시 그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그녀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동네 오빠라고
합니다. 어릴 때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를 못쓰게 된 그녀에게 그는 유일한 친구였다고 합니다. 또래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아왔던 그녀에게 그는 늘 백마 탄 왕자처럼 그녀를 보호해 주었고 그런 그가 얼마 전 그녀에게 청혼을
해 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대학 석사 과정까지 밟고 있는 그에게 더 이상 짐이 될 수는 없다며 저에게 그런
부탁을 했었답니다.
훗날 전 그 남자의 이름이 '성 청심(맑은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왜 안개 꽃(안개
꽃의 꽃말은 '맑은 마음'입니다)을 좋아하는 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전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녀는 외모가 예쁜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정상적인 사람도 아닙니다. 하지만 전 그녀를,
그런 그녀를 오랜 고민 끝에 며칠 후 전 그 남자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전 저를 보고 적잖이 당황해 하는
그에게 이 한마디를 던져 주었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안개 꽃을 좋아한다고."
한순간 그 남자의 얼굴이 환해지는 것이 제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전 그 남자를 뒤로 한 채 걸음을 옮겼습니다. 이제 그녀는 행복해질 겁니다. 그녀에게 그 남자는 정말로
필요한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그 남자 역시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니까요. 저는 제 행동이 얼마나
옳은 일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그녀는 행복해질 테니까요. 하지만, 이 씁쓸한 기분. 밀려오는 답답한 가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갑자기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제 머리를 가득 채워옵니다. 점차 어두워지는 석양
속에서 전 속으로 외쳤습니다. '그녀는 못 생겼다. 그녀는 절름발이다. 나는 그런 그녀를 결코 사랑하지 않았다'
라고...
저에게는 절름발이 친구가 한 명 있습니다. 그 걷는 모습이 늘 기우뚱 거리는 게 멀리서 보면 항상 어깨를 흔들며
즐겁게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이는 친구가 한 명 있습니다. 이제는 한 아이의 엄마가 돼 버린 너무나 소중한 친구가
있습니다.
몇 일 전에 태어난 수민 이와 수민 이 부모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받은 글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