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이원록. 경북 예안군 의동면 원동촌(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원촌 마을)출생. 퇴계 이황의 13대손인 아버지 이가호와 어머니 허길 사이의 6형제 중 치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영천군 화북먼 오동리 출신인 안용락의 딸 안일양과 결혼하였다. 이육사의 딸 이옥비 여사의 증언에 의하면, 1934년 육사와 중국 정치군사학교 1기생 동기인 외삼촌 안병철이 만주에서 체포된 뒤, 고문을 못 이겨서 한 자백으로 여러 사람이 체포 되었는데, 그 소식을 전해 듣고 크게 분노한 육사는 장인과 처삼촌에게 두루마리 6장 분량의 편지를 보내어 더러운 피가 섞인 일족(아내)을 더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며 데려 가라고 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 후, 7년 동안이나 본가에 들러도 부모님께 인사만 드리고 아내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잠은 여관에서 잤다고 한다. 1927년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 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삼형제가 함께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다가 의거 당사자인 장진홍 선생이 단독범으로 일본에서 체포됨으로써 겨우 혐의가 풀려서 방면되었다. 그가 본명 대신으로 쓰기 시작한 육사란 이름도 대구형무소 시절의 죄수번호인 264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다. 출옥 후, 1929년 5월부터 중외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1년여 근무한 이육사는 1931년 8월에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전직했다가, 이듬해 3월에 퇴사한 뒤 독립운동의 꿈을 안고 만주 봉천으로 갔디가 거기서 신간회가 해체되면서 다시 중국으로 망명하여 <의열단>에 복귀한 뒤 신규 단원 모집차 만주에 와 있던 석정 윤세주와 운명적으로 조우하게 되었다. 석정 윤세주와 이육사는 유사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대표적인 선비의 고장인 안동과 밀양 출신인 것도 그렇고, 유명한 유림 집안의 후예로서 독립운동가 집안이라는 점도 그러하였다. 1921년 <의열단>의 제1차 국내 투탄의거를 앞두고 발생한 <밀양.진영 폭탄 반입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7년 넘게 복역하면서 일제 간수들에게 경례를 일절 하지 않음으로써 혹독한 시련을 겪었으나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음으로써 대한 남아의 기상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왜놈 간수들도 두손을 들게 만들었던 석정 윤세주! 그가 장장 7년여의 감옥살이릍 마치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소한 뒤 중외일보 밀양지국과 조선일보 밀양지국에서 근무하였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만남은 과히 운명적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의열단>의 제1차 국내 투탄 의거를 앞두고 발생한 1921년의 <밀양.진영 폭탄 반입시건> 으로 윤세주의 이름을 들어서 익히 알고있었던 이육사는 윤세주와 만주에서 조우한 뒤 그의 권고로 <의열단>에 가입하게 되었댜. 그후, 윤세주와 백년지기처럼 의기투합한 이육사는 의열단장 김원봉의 <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교관 제의를 거부한 윤세주와 함께 그 학교의 제1기 학생으로 입교하였다. 거기서 1기 군사훈련을 마친 뒤 1933년 4월에 졸업한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윤세주는 김원봉의 끈질긴 권유로 1935년 9월까지 2, 3기에 걸쳐 125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동안 그 학교에 남아 교관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국 땅에서 정신적인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로 결심한 이육사는 1934년 4월에 귀국하여 '이육사'라는 필명으로 시 <황혼>을 <신조선>에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하였다. 그 후, 그가 1937년에 발표한 <노정기路程記>는 항일 비밀결사 지하활동으로 점철된 육사의 신산한 삶을 가장 집약적으로 그린 대표작으로 꼽힌다. 일제가 한글 작품을 발표하자 1942년 여름밤에 육사는 별을 바라보고 중국에 두고 온 석정 윤세주를 생각하며 한시 한 수를 지어 읊조리기도 하였다. 밀양공립보토학교 재학시절인 1910년의 일제 국경일인 천장절(명치천황 생일) 날 경축식장이 마련된 교정의 일장기를 학교 변소의 똥통에 처박아 버린 일로 교장실로 끌려가 죽도록 얻어맞고 퇴학을 당했던 김원봉과 윤세주는 밀양 관아 밖의 해천골의 앞뒷집 이웃사촌이었다. 김원봉이 태어나던 날 그의 사주를 보고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며 '원봉(元鳳)'이라는 이름을 손수 지어 준 사람도 바로 뒷집 윤세주의 아버지 윤희규였다. <의열단>의 단장이 된 약산(若山) 김원봉이 실천적이고 투쟁적인 혁명가였다면, 그의 오른팔로서 <의열단>의 제2인자가 된 석정(石정) 윤세주는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항일무력투쟁의 전사였다. <의열단>과 1930년대 중반 통일 선전체인 <조선민족혁명당>, 1938년 10월 10일 조선 최초의 자주적인 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의 창설 주역이자 살아 있는 정신은 윤세주였다. <조선의용대>는 중경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보다 무려 2년이나 앞서 창설된 조직이었기 때문에 한국 근현대사에서 그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석정은 훈련을 받을 때나 학습을 할 때나 항상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잊지 않았다. 그의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이론, 예리한 정세분석, 그리고 동료들에 대한 따뜻한 인간애는 당원과 대원들의 귀감과 정신적인 지주가 되기에 충분하였다. 1941년 중국 산시성의 타이항산 북상길에 올랐을 때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정위원으로서 조선 청년들의 지도자였다. 그러나 1942년 일제 관동군 40만 대군의 소탕전에 맞서 싸우던 윤세주는 불행히도 타이항산 전투에서 피탄되어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이육사가 <청포도>에서 '내가 바라던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에서 그 손님은 바로 석정 윤세주 선생일 가능성이 높다고 창원대 사학과의 도진순 교수가 주장하였는데, 그동안 <의열단>의 고향인 밀양 독립운동사를 그린 소생의 대하장편소설 <떠오르는 지평선>의 제2부 4권을 집필하면서 접한 방대한 자료에서도 능히 확인이 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육사의 시 <광야>에서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1930년대 항일 무장투쟁의 백미인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참모장 허형식 장군을 기리키는데, 이분이 바로 이육사의 어머니 허길 여사의 종형제로서 육사에게는 외당숙부가 되는 사람이었다. 육사가 남긴 시 중에는 중국에서 생사고락을 같이 하였던 윤세주에 관한 것들이 적지 않은데, '높은 나무'를 뜻하는 <喬木>이란 작품도 그 중의 하나다. 마른 하늘에 닿을 듯이/ 세월에 우뚝 남아 서서/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아라/ 낡은 거미줄 휘두르고/ 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레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이 아니라/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 속 깊이 거꾸러저/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SS에게 여기서 'SS'는 윤세주라는데 이견이 없다. 1942년 반 소탕전에서 윤세주가 전사하고 한달 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된다. 약산 김원봉의 황포군관학교 동기생이자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장으로서 군사 지휘관이었던 박효삼은 부사령관으로 밀려난다. <조선의용군> 사령관은 중국 공산당 원이자 팔로군 포병 연대장인 무정이 차지하였다. 석정 윤세주의 죽음이 <조선의용대>를 중국 공산당 팔로군에 예속시키는 분기점이 된 것이다. <조선의용군>은 1945년 일제 패망 후 중국 국공내전에 참전한 이후 6.25전쟁 당시 조선인민군의 주력부대를 형성하는데 주축이 된다. 조선인민군 보병부대의 47%를 구성할 정도였으니 연안파 공산주의 계열 <조선의용군>이 없었다면 김일성은 베트남의 호치민이나 중국의 마오저뚱처럼 무력통일을 꿈꿀 수 있었을까. 석정 윤세주가 반 소탕작전에서 전사하지 않았더라면 <조선의용대>가 과연 그렇게 호락호락 중국 공산당 팔로군에 예속될 수 있었을까? 중국 공산당원이 아니었고, 약산 김원봉처럼 민족주의 좌파였던 석정 윤세주와 민족주의 죄파로서 약산의 최측근 군사 지휘관이었던 박효삼이 일제 패망 후 <조선의용군>을 실질적으로 계속 지휘했더리면 한반도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긴 6.25전쟁이 정말 일어날 수 있었을까? <조선의용대>의 영혼인 석정 윤세주의 삶과 죽음 ! 그분의 망각된 존재를 복기할 때,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역사적 의미는 너무나 크다. <조선의용대>의 마지막 분대장인 김학철은 훗날 이렇게 증언하였다. 석정은 끝내 공산당에 가입하지 아니한, 가장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다. 석정 윤세주의 유해는 중국 하북성 한단시 진기로예혁명열사능원에 중국측 열사들과 함께 낭 원 동묘구 3열 17호에 안장되어 있다. 1982년에 독립유공자로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한편, 1937년에 윤곤강, 김광균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을 발간, 그 무렵 유명한 <청포도>를 비롯하여 <교목 >, <절정>, <광야> 등을 발표한 이육사는 1943년에 북경으로 건너갔다가 어머니와 큰형님의 소상을 위해 귀국했는데, 동년 6월에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 이듬해 베이징 주재 일본 총영사관 교도소에서 옥사하였다. 그의 유해는 둘째 동생 이원창과 함께 <의열단>에서 활동했던 이병희가 수습하여 서울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했고, 1960년에 안동으로 이장되었다. 감옥살이만 무려 17번이나 했을 정도로 일생의 전 경력이 독립운동으로 점철된 덕분인지, 이육사는 윤동주와 함께 저항시인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그런데 현재 윤동주는 서훈 3급이고, 이육사는 서훈 4급이라 납득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보훈처에 정정을 요구하였으나 안된다는 말만 있어 왔다고 한다. 윤동주는 문단에 힘깨나 쓰는 분들과 엮일 일이 없었으나, 이육사는 문단에 숨기고 싶은 일이 많은 분들과 엮어져 왔기에 그의 이름이 언급되면 불편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란 설도 있다. 시인이기 이전에 약산 김원봉, 석정 윤세주와 함께 <의열단>의 일원으로서 격렬한 무장 항일투쟁에 참여하였던 전투파 항일 투쟁가 이육사! 석정 윤세주가 투옥된 지 7년 수개월만에 서대문형무소에서 만기 출소한 뒤 밀양에서 신간회 활동, 청년회 활동, 중외일보, 조선일보.기자 활동을 할 때, 대구에서는 그의 손아래 친구인 이육사가 유사한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육사의 수필집 <연인기>에서 목숨보다 소중한 존재로 묘사된 친구가 바로 석정이라고 한다. 국내의 마지막 공작을 앞두고 중국에시 이별할 때 이육사가 소중히 여기던 비취 인장을 준 친구가 바로 윤세주였다. 그래서 이육사는 죽는 순간까지 석정 윤세주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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