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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3. 묵상글 ( 연중 제12주일. - 두려움의 이동.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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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3. 연중 제12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두려움의 이동
오늘 연중 제12주일의 얘기와 가르침은 우리 인생과 공동체가
한번은 겪게 될 어려움과 그 대처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제자들의 배는 주님을 태우고 호수를 건넙니다.
그런데 돌풍과 풍랑으로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는데
없었으면 좋겠지만 이런 일이 우리 인생에 없을 수 없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한두 번은 무척 당황하고 두려움에 떨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경험했다면 침착할 수 있어야겠지요?
어떻게?
첫째는 인간적인 방식으로 의식적이고 의지적으로 담대해지고 침착해지는 겁니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처럼 정신 차리고,
자신에게는 담대해지자, 침착해지자고 주문을 걸면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까짓 것' 하며 무시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생기면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습관적으로 ‘큰일 났네’라고 합니다.
차분히 생각하면 큰일이 아닌데 큰일이 났다고 한순간 그에겐 큰일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나이를 먹어 이런 경험을 몇 번 하고 나면
이 경험들에서 지혜를 얻어야 하고 그래서 지혜로워진 사람은
작은 일도 큰일로 만들어놓고 쩔쩔매는 어리석은 사람과 달리
담대하게 큰일도 작은 일로 만들고는 넉넉하고 여유롭게 해결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인간적인 방식이라면 우리에게는 신앙적인 방식이 있습니다.
이 또한 정신을 차리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풍랑이 일면
가능한 빨리 시선을 한배를 타신 주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이 말은 풍랑에서 시선을 떼어 주님께 두는 건데
그 반대일 경우 곧 주님에게서 시선을 떼고 풍랑에 시선을 둘 경우
우리는 당황하게 되고 1분도 안 지나서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끼리 호수를 건너는 마태오 복음 얘기는 오늘 마르코 복음과 조금 다릅니다.
여기서 주님은 한배를 타지 않으시고 나중에 제자들 곁으로 오시는데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라듯 주님을 유령인 줄 알고 무서워 떨다가
주님인 줄 알고 나서는 베드로가 용기를 내어 물 위를 걸어 주님께 갑니다.
그런데 어쩌다 눈길이 풍랑으로 가자 다시 두려움이 생기고 물에 빠집니다.
주님에게서 눈을 떼는 순간 바로 두려움에 빠지고 물에 빠지는 것입니다.
성서에 다른 예가 있는데 바로 다윗과 골리앗의 예입니다.
골리앗은 거인이고 이스라엘의 모든 장수가 두려워하던 힘센 장수입니다.
그런데 소년 다윗은 그 골리앗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러 나갑니다.
잘 아시다시피 혼자 나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나가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 골리앗은 다른 장수와 마찬가지로 거인이지만
같이 나가주시는 하느님께 골리앗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골리앗과 싸우는 데 칼도 필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두려워할 것은 원수가 아니라 주님이고
주님께서 나와 그리고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권고 ‘악습을 몰아내는 덕’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자기 집을 지킴에 주님의 두려움이 있는 곳에 원수가 들어갈 곳이 없습니다.”
주님의 두려움 또는 주님께 대한 두려움이 있으면
어떤 원수가 침입해도 다 이겨낼 수 있기에 아무런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원수가 두려울 때 우리가 주님께 달려간다면
그 두려움은 주님을 만나게 하는 두려움이라고.
오늘 제자들은 그래서 풍랑을 두려워하다가 주님을 두려워하게 되는데
복음은 이에 대해 이렇게 묘사합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렇게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저는 이것을 일컬어 ‘두려움의 이동’이라고 말하겠습니다.
풍랑에 대한 두려움에서 주님께 대한 두려움으로의 이동,
작은 두려움에서 큰 두려움으로의 이동.
별것 아닌 두려움에서 참 두려움으로의 이동이라고.
우리의 두려움도 이렇게 이동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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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3. 연중 제12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엘리노어 루스벨트 전 영부인은 이런 명언을 남겼습니다.
“위대한 사람들은 아이디어를, 평범한 사람들은 사건을, 속 좁은 사람들은 사람을 주제로 이야기합니다.”
큰 공감이 가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많은 이가 사람에 대해 말합니다. 그것도 소위 ‘뒷담화’를 통해 말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뒷담화는 아이디어를 일으키는 말도 아니고, 일에 대한 말도 아닌 속 좁은 사람의 말일 뿐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속 좁은 사람이 많은가를 깨닫습니다. 저 역시도 친한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종종 속 좁은 사람이 됩니다. 이런 말을 한다고 제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도 또 사랑받는 것도 아닌데, 습관적으로 속 좁은 사람의 길을 향하곤 합니다.
이제는 아이디어를 주제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에 대해 말할 때도 인정, 칭찬, 사랑을 담아 새로운 아이디어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해지길 원하셨던 예수님이십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속 좁은 모습이 아닌, 위대한 모습을 갖춘 우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주님의 마음을 다시금 새겨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말씀의 실천은 우리의 속 좁음을 사라지게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질 수 있는 우리의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 줍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처럼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배를 저어 가다가 풍랑으로 죽을 지경이 이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맘 편안히 주무시고 계시자,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은 이제까지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놀라운 기적을 직접 보고 체험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만 가지면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사건에, 그리고 자기들의 죽음에만 관심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집니다. 이렇게 제자들을 구해주십니다. 그리고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라며 꾸짖으십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해져야 하는데, 제자들처럼 사건만 또 사람만을 바라보면서 평범하고 속 좁은 사람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춘 사람은 하느님의 일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일을 충실하게 실천하게 됩니다. 망설임이 있을 수도 없고, 또 두려움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일을 하는 기쁨 안에서 지금을 힘차게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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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우리의 유일한 한계는 우리 스스로 마음으로 설정한 것들이다(나폴레온 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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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3. 연중 제12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오늘은 연중 제12 주일입니다. 불볕더위가 밀려오는 듯하더니, 장마가 다그쳐옵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의 삶의 신비를 들여다보게 합니다. 곧 우리네 삶 안에 있기 마련이 ‘고통과 시련의 의미’를 찾도록 이끌어줍니다. 다시 말하면, 고통과 시련을 어떻게 대처하고 그것을 통하여 어디로 나아가야 할 바를 알려줍니다.
사실, 인간은 고해(苦海)라고 말하듯이 인생은 ‘고통의 바다’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때때로, 질병이나 고통이 우리의 삶을 괴롭히고 비참한 상태로 몰아갈 때가 있고, 자연 재해, 물질적 상실, 가정이나 공동체의 분열, 온갖 종류의 근심걱정, 시련과 박해가 있습니다. 또한 의인이나 무죄한 이들이 불합당한 처사를 당해 신음할 때도 있습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억울해지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신앙을 흔드는 거센 풍랑에 휩싸이기도 하고, 믿음이 시험당하기도 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욥의 새 친구와 욥과 엘리후의 변론을 통해서도 그 해답을 찾지 못합니다. 여전히 욥은 ‘하느님께서 계신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왜 침묵하시는지?’ 비참에 떨어져 절규하는 그에게 하느님께서는 답을 들려주십니다.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
... 여기까지는 와도 되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욥 38,811ㄱ)
이 대답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이해의 지평을 넓혀주시고 당신의 신비로운 계획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도록 도와줍니다. 그렇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바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나아가지만, 우리가 나아갈 수 있는 곳은 하느님께서 길을 내주신 곳까지이다.
“너의 도도한 파도는 여기에서 멈춰야 한다.”(욥 38,11ㄴ)
이 말씀에서 인간이 자신의 힘만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가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이는 결국, 인간의 한계와 나약함을 인정하고 온전히 자신을 내맡기며 받아들임으로써 그 참된 해답을 얻게 됨을 말해줍니다.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내맡기는 것’,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곧 기쁨이나 즐거움, 혹은 성공과 승리에서만이 아니라 온갖 아픔과 질병, 고통과 상처, 무능과 실패를 통해서도 신앙의 길을 찾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 순간, 그 바닥을 치는 데까지 나아가서야, 오히려 그 한계와 나약함에서 하느님께 의탁하는 길을 배우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 ‘겸손한 신앙’이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를 이 ‘겸손한 믿음’으로 인도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삶은 그 자체가 고통과 시련이었지만, 바로 그것을 통해 고통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 오히려 구원의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곧 ‘고해의 바다’를 건너는 것은 ‘믿음’입니다.
바다 위에는 “거센 돌풍이 일었고”,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구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마르 4,38) 함께 계시지만 침묵하고 계시고, 현존하고 계시지만, 잠들어 계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깨우는 제자들은 함께 계신 분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아버지를 신뢰하고 계셨습니다. 사실 잠들어 있는 이는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깨어나야 할 이는 예수님이 아니라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은 잠재우고, 제자들은 깨우십니다. 곧 풍랑을 향해서는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르 4,39) 하시고, 제자들에게는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하고 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잠재우시며,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그렇습니다. 뒤끓는 바다를 호령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시편작가는 노래합니다.
“주님은 능하시고 진실에 쌓여 계시오니,
뒤끓는 바다를 호령하시고 솟구치는 물결을 붙잡으시는 분”(시 88,9-10)
동시에, 제자들의 온갖 두려움과 걱정, 불신을 잠재우시는 반면, ‘믿음’을 깨웁니다. 그렇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 4,38)라고 투덜댈 때, 바로 그 때가 우리가 잠들어 있을 때입니다. 아니, 바로 그 때가 불신에 떨어져 있을 때입니다. 바로 여기,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는 이 순간이, 바로 ‘믿음’이 요청되는 순간입니다. ‘믿음’이 어둠을 넘어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하시며, 제자들을 불신의 어둔 잠에서 깨우십니다.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신뢰를 일깨우십니다. 그리고 어둠을 건너, 새로운 생명으로 이끄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분께 대한 믿음과 신뢰가 우리에게 거센 풍랑 속에서도 평화를 줄 것입니다. 이것이 곧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당신께서 함께 계시는 사랑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사랑의 요청을 들어야 할 일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그분의 사랑의 요청을 들려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2코린 5,14).
“다그치다”(συνεχει)라는 말은 ‘빨리 행동하도록 몰아붙이다’, ‘강하게 요구하다’라는 뜻으로 행동하게 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 강력한 힘이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바로 그 사랑으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코린 5,17).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주님!
잠들어 있는 이는 당신이 아니라, 저 자신입니다.
깨어나야 할 이는 당신이 아니라, 저 자신입니다.
당신이 함께 계시건만, 불신으로 제가 두려워합니다.
주님, 풍랑을 맞아 가라않으면서야, 비로소 제가 키잡이가 아님을 봅니다.
풍랑 속에서 잠들어 계셔도 바람과 호수를 복종시키시는 분,
당신이 저의 주님이십니다.
당신은 주무셔도 주님이시오, 깨어 계셔도 주님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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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3. 연중 제12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신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사랑으로 우리를 어려운 길로 인도하실 수도 있으시고, 고통스러운 상처와 가시를 경험하게 할 수도 있으시지만,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는 않으십니다.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 옆에 우리 안에 계실 것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이 시간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은총에 감사할 수 있길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녁이 되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가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모시고 갔습니다. 자기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모시고 간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의 순수한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선장으로 인정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모시려고 할 때 문제가 됩니다.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예수님을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가고,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제자들이 지녀야 할 믿음입니다.
그런데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믿음을 시험받게 되었습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을 접하게 되어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도와주시기는커녕 고물에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똑같은 상황에서 태연하게 주무십니다. 고물은 ‘선미’로 배가 침몰할 때 가장 먼저 가라앉는 부분입니다. 그럼에도 가장 위험한 곳에서 주무시고, 제자들은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며 투덜대고 불평하며 안절부절못합니다. 제자들은 바다를 잠재우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느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그분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두려움과 불안에 떨고 있고,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는 믿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 삶의 여정에서도 이해하지 못할 상황에 접하게 될 때 우리 믿음을 확인받게 됩니다. 돌풍은 우리 마음속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 몰라라’ 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성숙을 일깨워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잠자고 있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신앙의 잠을 자는 것입니다. 아직 스승에 대한 온전한 믿음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잠에서 깨어나야 했습니다. 좋지 않은 순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미 우리 안에 계시지만 배 안에서와 같이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을 ’깨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 속에 계신 예수님을 깨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풍랑 너머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르4,39) 하고 이어서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4,40). 하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오늘 나의 믿음의 현주소는 어디일까요? 오늘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종종 악의 세력이 거센 풍랑처럼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혼란케 합니다. 생각지 않은 우환, 어려움, 시련과 역경, 고통이 엄습할 때 혼자라는 생각에 두려워합니다. 어떤 어려움에 힘들어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곁에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사실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항상 옆에 계십니다. 제자들의 간청에 주님께서 잠에서 깨어 그들을 구해 주셨던 것처럼, 우리의 애원을 들어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히 믿고 간청하며 매달려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예기치 않은 삶의 파도에서 피난처를 찾기 위해 당신께 매달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 저희를 살려주십시오! 하고 애타게 주님을 부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심으로써 바람과 호수를 잠재우셨습니다. 이는 당신이 바로 하느님이심을 드러내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시끄러운 곳에 있지 않고 잠잠하고 조용한 가운데 현존하셨습니다(1열왕19,11-13). 물이 깊을수록 소리가 없듯이 신앙이 성숙한 사람일수록 잠잠하고 조용합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은 소란을 피우고 혼란스럽습니다. 거센 돌풍 안에서도 평정을 유지하는 이야말로 진짜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조용하면 불안해하는 세상입니다. 음악을 크게 틀어야 하고, 사람을 만나도 큰 소리로 떠들고 시끄러운 곳을 찾아요. 공부를 하는 사람도 시끄러운 카페를 찾습니다. 시끄러우니까 목청을 더 높이고 그야말로 소음공해입니다. 그래도 그곳이 좋다고 합니다. 성당에 안에서도 잠잠하고 조용한 가운데 하느님을 만나기 힘들어 잡담하고 왔다 갔다 부산 떨어요. 조용히 오래 머무는 것을 너무 힘들어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조용하고 잠잠함에 머무는 것입니다. 침묵하며 우리의 마음을 주님으로 충만히 채우면서 나를 바라보는 시간이 꼭 필요합니다. 성경을 읽거나 성체조배를 하는 시간을 소홀히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는 대상에게 내 마음을 넘겨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하느님께 나의 모든 것을 넘겨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침묵 속에서 나의 모두를 드리고 있는가? 살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뜻을 내려놓고 주님께 나의 모두를 맞추려면 조용히 침묵 가운데 주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거센 파도에 집중하기보다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혹 어려움이 생기면 문제들에만 집착하지 말고 주님을 깨워 괴로움을 털어놓아야 하겠습니다. 아직도 불안과 두려움에 부산을 떨고 시끄럽다면 거센 돌풍을 잠재우시는 주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불평불만 하면서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투덜대고 있다면 믿음을 성장시켜 달라고 더 간절히 기도합시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는 주님, 제 주변의 시끄러움을 잠재워 주시고 불신에서 오는 슬픔과 좌절의 거센 돌풍을 거두어 주십시오! 저의 믿음은 약하고 여전히 두렵습니다. 그러니 저를 풍랑의 세력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시고, ‘두려워하지 마라’ 고 말씀해 주십시오. 주님을 깨우는 일에 지치지 않게 은총을 주십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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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3. 연중 제12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5월에는 많은 행사가 있었습니다. ‘성모의 밤, 첫 영성체, 청소년 음악회, 구역미사, 성령강림 찬양의 밤, 사제 서품식, 중남부 남성 제17차 꾸르실료, 견진성사, 주일학교 여름 캠프, 포트워스 성당 주일미사’가 있었습니다. 포트워스 성당 신부님이 비자 연장을 위해 1달 동안 한국으로 가셨고, 포트워스 성당 미사를 도와 드려야 했습니다. 행사가 겹친 날도 있었습니다. 첫 영성체와 청소년 음악회가 같은 날 있었고, 꾸르실료와 견진성사도 같은 날 있었습니다. 어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게 지나갔습니다. 여러 행사 중에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제서품식입니다. 한국의 사제서품식이 질서정연하다면 미국의 사제서품식은 자연스러웠습니다. 서품식 중에 교구의 모든 사제들이 새 사제들과 친교의 포옹을 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선배 사제들은 축하의 인사를 건네며 포옹하였고, 새 사제들은 활짝 웃으며 인사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성령강림 찬양의 밤입니다. 짧은 시간에 음악 봉사자들이 연주와 노래를 준비하였고,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을 찾는 것과 같다고 하셨는데, 본당에는 재능을 가진 분들이 있었습니다. ‘라우다떼’ 찬양 팀이 음악피정도 준비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풍랑을 잠재우는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호수를 건널 때입니다. 심한 풍랑에 배가 몹시 흔들렸습니다. 제자들은 그러다가 배가 뒤집어 질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누워서 편안하게 주무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잠 재우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저는 풍랑을 잠재우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면 예전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1998년 26년 전의 일입니다. 동생 수녀님이 백령도 성당에 있었고, 백령도 성당의 신부님이 동창이었습니다. 저는 동생 수녀님도 보고 동창 신부님도 보기 위해 연안부두에서 백령도 가는 배를 탔습니다. ‘임당수’라고 중간 쯤 갔을 때입니다. 선장의 안내 방송이 있었습니다. 풍랑이 심해졌는데 돌아가는 것보다는 그냥 백령도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풍랑이 거세지면서 사람들은 배 멀미를 시작했습니다. 건장한 해병들도 멀미하였고, 저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심한 멀미를 했습니다.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하면서 고생하고 있을 때입니다. 백령도 주민들은 대부분 별 이상 없이 멀쩡하였습니다. 풍랑이 거세지면서 백령도 주민들은 바닥에 누웠습니다. 저도 따라서 바닥에 누워보니 신기하게도 속이 편해졌습니다. ‘불난 곳에 부채질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도 욕심, 시기, 질투, 미움, 욕망의 풍랑이 불곤 합니다. 그럴 때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처럼 누워보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면 풍랑이 사라지고, 평온한 마음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침묵 속에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2024년 5월은 지나갔습니다. 일정표의 31칸이 거의 채워졌습니다. 31칸을 그리스도와 함께 했다면 하느님의 나라에 그 날들이 업그레이드 될 것입니다. 31칸을 나의 욕심과 나의 뜻으로 채웠다면 옛것으로 지나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옛것은 시간이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새것 또한 시간이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시간은 언제나 새것입니다. 나의 욕망과 욕심을 채우는 시간은 언제나 옛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리시고, 똑같이 햇빛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30칸이 비워있는 6월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신학교에서 사제에게 필요한 덕목이 3가지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시대의 표징을 읽고, 식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함께한다는 말처럼 규칙적인 식사와 꾸준한 운동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찾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하는 사제, 공부하는 사제, 건강한 사제는 30칸의 날에 늘 새것을 채울 것입니다. 2024년도 어느덧 절반이 지나갑니다. 지난날들에 옛것을 채웠다면 남은 날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새것을 채우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한 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고 그리하여 결국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우리가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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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3. 연중 제12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약속과 축복에 대해 함께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엘리사벳과 그의 남편 즈카르야에 관한 것입니다. 그들은 경건한 부부로, 하느님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엘리사벳은 아이를 가지지 못하였으며, 그들의 마음은 괴로움과 기다림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대한 원망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하느님을 섬기고 그의 약속을 기다리는 믿음으로 가득 찼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기다림은 결국 하느님의 축복으로 이뤄졌습니다.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나서 그의 아내가 임신하여 아들을 가질 것임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존귀하고 위대한 사람이 되어 많은 이들을 주님 앞으로 부르며 주님의 길을 예비하게 될 것이라고 알렸습니다. 그는 주님보다 앞서 와서 큰 일을 이루며 많은 사람들을 회개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도래를 예고하였습니다. 그의 출생은 하느님의 약속의 이행이었고, 그의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의 도래를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약속이 절대적이며, 그의 축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비록 우리의 기다림이 어렵고 고통스러울지라도, 하느님의 뜻은 언제나 최선이며, 그의 시간은 완벽하게 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엘리사벳과 즈카르야 부부처럼 하느님을 믿고 기다리며, 약속에 희망을 두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이 우리 기다림에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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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일기
모든 사람은 육아일기를 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우리 안에 작고 여린 아이를 키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는 바로 ‘나’입니다.
몸이 컸다고 해서 다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높은 지위에 올랐다고 해서 어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나의 내면 아이가 성장해야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 아이 같은 어른을 만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이 같은 어른은 동심을 지닌 어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 시절의 아픔이나 결핍으로 인해 아직 내면의 나를 성장시키지 못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아픔과 결핍이 없었다면 좋겠지만 만약 그런 것이 내 안에도 존재한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작은 나에게 정성을 들이고 보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내 안에 내가 어른이 될 때 진정으로 나는 홀로 설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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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3. 연중 제12주일. 키엣 대주교님.
시련과 믿음
바다 한가운데서 거센 풍랑을 만난 배는 금방이라도 침몰할 정도로 흔들리고, 몸을 가누기조차 힘든 제자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떨면서도 바로 옆에 계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없었습니다. 아니, 이런 상황에서도 모르는 척 편히 주무시고 계시는 스승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의식하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하고 멀어져 갈 때 시련을 주십니다. 마치 몰래 숨어버린 엄마를 간절히 찾는 어린 자녀를 보며 자녀의 사랑을 확인하듯 주님께서도 그러하십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련이 닥치면 그제서야 자신이 형편없이 나약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시련이 닥쳐야만 주님을 찾고, 그 분의 존재를 깨닫는 어리석은 우리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시는 걸 보며 베드로는 자신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몇 발자국 걷지 못하고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거센 파도에 익숙한 뱃사람들임에도 거센 풍랑이 일자 두려웠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기적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시련이 닥치자 주님을 믿지 못하고 자신들의 무력함에 두려워했습니다.
사람들은 시련이 닥칠 때 비로소 나약한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그제서야 세상 모든 일이 내 능력밖의 일이고 나를 도와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주님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어떠한 시련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거친 풍랑을 견디지 못한 제자들이 스승님께 말씀드리자 예수님께서는 거센 파도를 금새 잠재워 주셨고, 파도가 잔잔해 지자 그들의 믿음은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사랑과 권위를 목격한 제자들은 더 이상 시련에 굴복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시련을 겪은 사람일수록 내공이 쌓이고 강해집니다. 주님께서 시련을 주시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며 더 진실된 믿음을 갖기를 바라시는 것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시련이 닥칠 때 두려움에 떨지 말고 믿음으로 주님께 온전히 의탁해야 합니다. 믿음은 시련을 극복할 힘이 되고 시련을 극복함으로써 믿음은 더욱 더 단단해 집니다.
시련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시련을 통한 경험들은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귀한 재산입니다. 우리의 생에서 맞이하는 시련과 도전들이 주님을 더 깊이 사랑하고 주님께 온전히 의지할 수 있는 믿음의 기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살면서 어떤 시련을 겪었습니까?
2. 주님께서 그 어려움을 주신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3. 시련에 닥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분은 누구입니까? 누구에게 의지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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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3. 연중 제12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더불어(Together) 믿음의 여정, 믿음의 전사,
“변화, 사랑, 중심”
“광풍을 순풍으로 가라앉히사,
바다의 물결이 잠잠해지니,
잔잔해져 좋아라 날뛰는 그들을
희망의 포구로 이끄셨도다.”(시편107,29-30)
오늘 화답송 시편이 복음과 일치합니다. 몇가지 묵상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어제 중국에 여행을 다녀온 봄비 자매가 정성 가득 담긴 선물을 들고 인사차 다녀갔고 밤에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새삼 건강이나 젊음은 나이에 있는게 아니라 순수한 열정에 있음을 깨닫게 하는 분입니다.
“불암산 바위같이 떡 버티고 계시는 아버지 신부님, 아버지라 부를 수 있어서 봄비는 영광이옵니다. 주님 안에 늘 건강하셔서 오래오래 강론 쓰셔야 해요.”
믿음의 여정에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참 좋은 선물, 도반같은 분입니다.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은 제 정주와 믿음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새삼 스럽게 떠오른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보다”라는 자작 애송시입니다.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 보다
아무리 세월 흘러도
늘 거기 그 자리
늘 푸르른 산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 보다
세월도 비켜가나 보다
늘 봐도 늘 새롭고 좋은 산이다” <2006.6. >
믿음의 여정중인 평생 믿음의 전사, 평생 믿음의 학인이 믿는 이들의 신원입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평생 믿음의 학인인 우리들에게 참 좋은 가르침이 됩니다.
“사람들은 노력에 한계를 두고서는 재능에서 한계를 느꼈다고 한다.”<다산>
평생 믿음의 학인으로서 다산의 불퇴전의 의지를 엿보게 합니다.
“선생님의 도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힘이 부칩니다.” 공자가 대답했다. “너는 지금 미리 선을 긋고 물러나 있다.”<논어>
평생 학인으로서 시공을 초월하여 다산과 막상막하의 도반인 공자입니다. 이렇듯 믿음이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깨달음을 얻고 믿음의 여정에 도움이 됩니다.
꼭 십년전 2014년, 산티아고 여정후 참 많이 삶의 여정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믿음의 여정을 하루로 압축하여 일일일생, 일년으로 압축하여 일년사계, 어느 시점에 와 있는지 점검하며 하루하루 날마다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려고 노력합니다. 오늘은 연중 제12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믿음이 여정중 세 측면에 걸쳐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한계입니다.
한계가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말이지만 참 많은 깨우침을 주는 말입니다. 믿음의 여정에도 한계를 깨달아 한계의 훈련은 필수입니다. 자기의 한계를, 영역을 넘지 않는 것이며 서로 거리를 존중하며 서로의 영역을 존중함이 지혜이자 사랑입니다. 무한한 탐욕에 경계를 정해 한계의 훈련에 힘써야 합니다. 참된 자유도 제 분수를 분명히 인식하는 한계의 훈련의 열매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께서 천지창조시 하신 우선적이 일도 카오스 혼돈에 세계에 코스모스 한계를 정하는 일이었습니다. 안식일에 이르기까지 일주간의 천지창조 프로그램이 각 영역마다 한계를 정하는 일이었고, 그리하여 조화로운 아름다운 세계가 된 것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욥기의 저자도 이런 하느님의 지혜에 정통한 분임이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폭풍 속에서 욥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 내가 그 위에다 경계를 긋고, 빗장과 대문을 세우며, 여기까지는 와도 되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 너의 도도한 파도 여기에서 멈춰야 한다.” 할 때의 말이다.”
한계의 지혜, 한계의 사랑, 한계의 생명, 한계의 훈련입니다. 무절제한 탐욕에 한계를 정하여 한계내에 충실함이 지구를 살리는 일이요 평화로운 상생 조화의 길입니다. 이래서 지옥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베네딕도의 정주 서원 역시 바로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제몫을 다하며 살아내기 위한 한계의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둘째, 사랑입니다.
믿음의 여정은 사랑의 여정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늘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한계내의 삶에도 늘 새로울 수 있음은 그리스도의 사랑 덕분입니다. 참으로 깊이의 내적여정에 참 좋은 사랑의 도반이 그리스도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이 심금을 울립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이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돌아가셨다가 되살아 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늘 우리 모두 새로운 존재로 살게 합니다. 믿음이 여정이 늘 새로울 수있음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늘 우리를 다그치기 때문입니다. 저절로 나오는 사랑의 고백입니다.
“저에게는 그리스도 당신이 생의 전부입니다.
당신은 저의 생명, 저의 사랑,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우리가 하는 사랑의 일들은 모두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가 하시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품 안에서 살아가는 인생은, 믿음의 여정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이 깨달음에서 모든 성인이 일치합니다. 수십년전 세수하다 대야 바닥에 투명히 드러난, “Life is Beautifual!(인생은 아름다워라!)이란 말마디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지금은 타계한, 언젠가 꽃을 들고 온 자매에게 준 다음 선물시(膳物詩)는 생각할 때 마다 늘 유쾌해집니다. 꽃보다 아름다운 영혼이요 인생입니다.
“꽃이
꽃을 가져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셋째, 중심입니다.
오늘 “풍랑을 가라앉히시다” 주제의 복음을 묵상하던중 반갑게 떠오른 말마디가 중심입니다. 내 삶의 살아 있는 중심이, 내 공동체 살아 있는 중심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임을 깨닫게 하는 복음입니다. 오늘 호수 한복판 거센 돌풍에 시련중인 제자들의 배는 바로 인생항해여정중의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주목할 바 혼자 믿음의 여정이 아니라 제자들과 더불어(Together) 믿음의 여정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거센 돌풍 한가운데 예수님은 태평무사한 모습으로 고물에서 배개를 베고 주무시니 말 그대로 믿음의 대가이자 달인이십니다. 제자들의 반응은 역시 믿음 부족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어지는 제자들의 부르짖음과 예수님의 답변에 고요해지는 주변 환경이 참 통쾌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예수님께서 깨어 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명령하시니, 바람은 멎고 고요해집니다. 밖의 풍랑은 물론 마음 호수의 풍랑도 멎고 고요해졌을 것입니다. 주변이 혼란스럽고 마음의 풍랑이 심할 때 조용히 멈추어 주님의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하시는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어지는 주고 받는 말씀도 평생 화두가 됩니다.
“왜 겁을 먹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그대로 주님과 우리와의 문답같습니다. 조금도 부끄러워할 것 없습니다. 타고난 믿음은 없습니다. 이런 시행착오를 통해 주님의 믿음도 보고 배웁니다. 믿음의 여정은 그대로 배움의 여정이 됩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이 믿음의 체험이 믿음의 여정중에 결정적 도움의 체험이 됐을 것입니다. 삶의 중심이신 주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도 한층 깊어졌을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인생 항해 여정에 늘 삶의 중심에, 공동체의 중심에 살아 계신, 영원한 스승이자 주님이자 도반이신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우정이 얼마나 결정적이요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믿음의 여정에 결정적 좋은 도움을 주십니다.
“주님께 감사하라, 그 자비하심을
중생에게 베푸신 그 기적들을.”(시편107,3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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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3. 연중 제12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길벗이 있으니>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길을
걷다가
가파른
험한 길
와락
덮쳐올 때
이내
주눅 들어
가쁜 숨
뱉기에 앞서
바로 옆을
둘러보는 거야
잠시
잊고 있던
길벗이 늘
거기 있어
길게
숨 고르고
함께
또 한걸음
늘 그렇게
주저하지 않고
내딛을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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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3. 연중 제12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던 중에 거센 돌풍 앞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믿음을 설파 하십니다. 사람은 엄청나고 예외적인 두려운 현상 앞에서 자연히 자신을 초월히는 존재가 눈앞에 있다고 느끼며, 그 앞에 자신의 미소함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참된 믿음은 하느님께 신뢰하면서 마음 속의 모든 두려움을 없애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때는 저녁을 얘기하고 있는데 저녁 때는 유대의 제의에서 중요한 시각이요 주요 사건이 이어지는 때입니다. 가르침을 마치신 예수께서는 지치고 피곤한 처지였을 텐데, 느닷없이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고 이르십니다. 폭이 12-13km 밖에 안 되는 갈릴래아 호수이지만, 호수 맞은편 동쪽은 전혀 다른 세계, 그리스인 등 이방인들이 주로 사는 지역입니다. 유대인들로서는 건너가 상종하고 싶지 않은 낯선 땅입니다.
건너가는 도중에 갑자기 돌풍이 일어 거센 파도가 몰아쳐서 배에 물이 가득 찹니다. 오랫동안 배는 신앙인의 공동체, 교회를 상징한다고 여겨왔습니다. 어둠이 짙어가는 저물녁의 폭풍우란 골란고원 같은 산악지대와 평원에 둘러싸인 갈릴래아 호수는 지형들간의 기압 차이로 종종 돌풍이 생기곤 했습니다. 호수 주변에 사는 어부 출신으로 이런 돌풍에 익숙했을 제자들도 겁에 질립니다. 이런 위험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배 안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는데 이것은 피곤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붙드시고 보호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뢰를 나타냅니다. 이 위기 속에서 예수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보여주십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께님서 겁에 질린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음을 말씀하시는 내용을 통해 전체 이야기의 비중이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춤으로서 우리들에게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도록 초대합니다. 맨 끝에 나오는 제자들의 두려움과 ”도대체 이분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우리들 또한 두 가지 질문을 성찰케 합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나는 그분을 믿는가?
제자들을 위협하고 흔드는 혼란과 박해의 땅으로 건너가서 이방인 선교를 하라고 예수께님서는 촉구하십니다.. 인류학의 견지에서도, 바다를 건너는 것은 다른 세계로 가는 통과의례적인 일로 불확실하고 위험한 상태를 뜻합니다. 새로운 삶으로 건너가려면 이러한 풍랑의 위기를 겪어야 하고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님을 믿고 나아가야 한다고 격려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거룩한 잠을 주무시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분은 우리들의 인내심과 참을성을 지켜보고 계시고, 다른 이의 고통과 아픔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만의 안일만을 찾는 이들에게 참회와 회개를 바라고 계십니다. 또한 두려움에 떠는 이들에게 믿음과 희망으로 잘 건너가자고 격려하시며 당신께서 사랑으로 함께 하신다는 확고한 믿음을 바라십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참으로 믿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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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성합을 모독하다가 갑자기 죽음을 당하다
이탈리아 -1793년
그러나 그가 성합에다 포도주를 가득 채우려고 큰 포도주 통에 그것을 담그자마자 갑자기 그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쓰러져 죽었다.
언젠가 신앙심이 없는 술주정뱅이 왕 발타자르에게 하느님께서 벌로써 심판하시겠다는 것을 벽에 글씨를 쓰게 하신 손을 통하여 알리셨듯이 하느님의 손은 축성된 전례용 성합을 경멸적으로 오용했기 때문에 하느님을 모독한 사람을 내리치셨던 것이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축성된 성당의 내부와 제구의 신성함이 존중되도록 바라신다는 명백한 표시로서 그 죽은 군인의 뻣뻣해진 손 안에 모독당한 성합을 꼭 움켜쥐게 하셔서 당황하고 있던 힘센 동료 군인들 중 어느 누구도 그의 손으로부터 성합을 빼앗을 수가 없게 하셨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성당의 신부님을 불러야만 했다. 아무런 어려움없이 죽은 군인의 손에서 성합을 빼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 본당의 사제뿐이었다.
이 사건은 다른 모든 군인들에게 두렵고도 매우 귀중한 교훈이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드물게 이러한 갑작스러운 벌을 내리신다.
원래 이러한 벌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은혜이다. 왜냐하면 벌을 받은 이 개전의 빛이 없는 죄인으로서는 이러한 벌로 인해 더 이상 무거운 죄를 짓게 되는 기회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광경을 지켜 보았던 다른 군인들은 이 일로 인해 자신들의 죄를 통회하고 회개하게 되었다.
성당 안에서의 우리의 모든 행동은 마땅히 깊은 경외심, 확고한 믿음, 그리고 순수한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어야 한다.(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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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3. 연중 제12주일.
■ 의연히 주님 곁에만 머문다면 / 연중 제12주일 나해(마르 4,35-41)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3&id=2098288&menu=4770
박윤식 [big-llight] 2024-06-22 ㅣNo.1735
수출하는 횟감에는 ‘광어’가 한몫을 한다나. 그런데 물통에 넣어 먼 곳까지 가면 꼭 죽어 있는 놈이 생긴단다. 살아 있어도 멀미 탓에 빌빌거리는 놈도 쾌나 될게다. 그래서 천적인 뱀장어를 함께 넣어 봤다. 그랬더니 죽은 놈도, 빌빌거리는 놈도 없었단다. 먹성 좋은 뱀장어가 광어를 잡아먹으려 들자 도망치기 바빴던 것이다. 이러니 거센 파도도 광어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뱀장어는 광어 몇 마리는 죽였겠지만, 대부분은 싱싱한 채 밥상에 올랐으리라. 인생에도 천적이 있다. 예기치 못한 만남, 상상도 못 했던 게 천적으로 등장하기도. 이는 그저 평범한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리려는 걸게다. 그래서 돌출로 시련이 있는 게 어쩜 정상적인 삶이리라.
그러니 천적은 어쩜 선물인 셈이다. 예수님은 천적 같은 호수의 그 바람에도 마냥 주무셨다. 거센 돌풍마저 잠재우시는 그분에게는, 호수의 바람은 아무것도 아닐 게다. 그러나 예사 바람이 아니기에, 출신이 어부라면 직감으로 위험의 낌새를 안다. 스승님께서는 주무시기만 하고 이대로라면 뒤집어질 게 분명하기에 순간 그들은 외친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잠잠해져라.”하시니 주위가 고요해졌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그들에게는 빠지면 다 죽는다는 오로지 그 생각뿐인지라, 단지 인간적 계산만 했던 거다. 예수님께서는 세속적인 그 포기가 그렇게 힘드냐며 질책이다.
알고 보면 제자들도 보통이 아니다. 그들은 하늘의 힘을 보았고 기적의 그 자리에 동참도 했다. 그런데 풍랑을 만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그만 공포에 질렸다. 주님의 현존을 놓쳐 버린 때가 바로 두려움과 고독이 엄습하는 때이다. 그분을 잊어버릴 때 영혼은 불안한 가운데 공허감에 빠진다. 허나 제자들은 곧바로 주님을 찾을 줄 알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스승님, 저희가 모두 다 죽게 되었는데도 잠이 오시기나 합니까?” 우리 인생의 기반을 이루는 것도 하느님에 대한 이 믿음이다. 우리 삶에도 맑은 날만 있는 것이 아니라 폭풍우가 칠 때가 곧잘 있다.
그러나 믿음의 그 기반이 다시 흔들리지 않을 때, 우리는 다시 중심을 잡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게다. 예수님께서는 그 거센 돌풍 속에서도 배 안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셨다. 세상의 폭풍우가 두려운 게 아닌, 당신과 함께 있어도 믿음을 갖지 못하는 제자들의 약한 믿음이 더 문제라는 것을 천적 돌풍으로 가르치시고자. 그리고 결국 우리 인생의 폭풍우를 잠재울 운명의 주재자는 세상의 그 무엇도 될 수가 없고, 오로지 주님뿐이라는 사실을 깨우치고자 말이다.
풍랑을 만난 제자들이 세상에서 수없이 만나는 풍파들 앞에 선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죄의식과 두려움에서 자유롭지 않기에.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는 질책에 주님께 용서를 빌고 다시 일어설 용기를 낼 수 있는 이가, 바로 참된 신앙인임을 잊지를 말자. 살다보면 심각한 두려움과 공포는, 오직 믿음으로써만 이겨 낼 게다.
그러기에 영원한 삶에 대한 믿음이 있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삶의 종착이 아닌 새로운 삶의 시작일수도.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을 주심으로써,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에서 벗어나도록 해 주셨다. 결국 우리는 인생의 폭풍우를 잠재울 운명의 주재자는 세상의 그 무엇이 될 수가 없고, 오로지 주님뿐이라는 사실을 믿는 신앙인이다. 삶의 거대한 풍랑이 우리의 목숨을 위협하여도 의연하게 주님 곁에만 머무를 수 있는 신앙생활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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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커서 무엇이 되고 싶니? / 따뜻한 하루[407]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4&id=2098287&menu=4770
박윤식 [big-llight] 2024-06-22 ㅣNo.173578
2차 대전 때 굶주림과 두려움에 떨면서 힘든 유년 시절을 보낸 한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어머니와 단둘이 성장한 아이는 전쟁 중이라 먹을 게 없어 풀과 물로 배를 채워야 했습니다.
그때 한 구호단체의 도움으로 식량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구호품에 의지해 생명 유지를 했습니다.
그로부터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구호품으로 어려운 시절을 극복한 소녀는,
훗날 세계적인 배우가 된 오드리 헵번이었습니다.
그녀가 과거 에티오피아의 아주 궁핍한 한 난민촌을 찾아 돕고 있을 때였습니다.
거기서 한 굶주린 아이에게 "너는 커서 무엇이 되려니?"하고 물었습니다.
아이는 그녀에게 이렇게 "살아 있는 거요."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배고픔에 대해 혹독함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기에,
이후 그녀의 삶은 굶주리는 아이들 돕는 일에 발 벗고 나섰습니다.
그녀는 그때 절망의 늪에서 자신을 구해준 것은 많은 사람의 사랑이었답니다.
그러기에 이제 자신이 힘없이 죽어가는 한 생명을 살리려 희망의 꽃을 피울 차례랍니다.
우리는 가끔 자신의 정당함을 드러내고자,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는 지금 누구의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하느냐?” 하고 되묻습니다.
이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9-37)에 나오는 중요한 예수님의 질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나의 필요'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 모든 노력과 희생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여전히 따뜻하기만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나를 먼저 생각하고 여유 있을 때에 행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지금 우리 주위에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분이 많이 계심을 늘 기억합시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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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3. 연중 제12주일. 예수고난회 박태원 신부님의 살아있는 매일의 지혜
예수고난회 박태원 신부님의 [6월 23일] 살아있는 매일의 지혜(예수님의 열린 옆구리)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1&id=2098312&menu=4770
이기승 [bona24] 10:19 ㅣNo.173599
- 예수님의 열린 옆구리 -
예수님의 가장 부드러운 면에 대해 말하고 싶은데,
그 안에는 모든 힘과 달콤함,
모든 위로,
그리고 한마디로
모든 좋은 것이 거기 있습니다.
유혹의 가장 거센 폭풍우 후에
영혼이 보통 더 많이 하느님과 합일되고,
더 평화롭고
그리고 하느님과 더불어
더 깊은 사랑 속에 있게 됨에 놀라지 마십시오.
이것이
하느님께서 역사하시는 방법입니다.
+++++++++++++
[기도]
사랑하는 예수님,
제가 들어오도록 초대하시는 것처럼
당신의 옆구리가
십자가 위에서 열렸음을 압니다.
당신이 요구하시는 대로
기꺼이 들어가고자 합니다.
제 사랑의 여정 중에
제게 필요한 모든 힘을
그곳에서 발견하리라는 믿음을 주소서.
‘살아있는 매일의 지혜’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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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고난회 박태원 신부님의 살아있는 매일의 지혜(예수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가기)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13&id=2098262&menu=4770
이기승 [bona24] 2024-06-22 ㅣNo.173567
- 예수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가기 -
예수님의 지극히 순수한 마음인 지성소에
계속 머무십시오.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분을 사랑하십시오.
성체성사 중 그분에게 행해진
만행에 대한 생생한 슬픔이
여러분을 꿰뚫게 하십시오.
여러분 자신의 겸손, 애정, 감사,
찬양으로 갚으십시오.
++++++++++++
[기도]
오,
예수님,
저는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는
당신을 결코 충분히 사랑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성심에서
힘을 끌어내게 가르쳐 주십시오.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듯이
성체성사가 사랑의 잔치가 아니라
그저 일상적으로 여겨질 때
당신에 대한 연민으로 저를 채워 주십시오.
제 사랑으로 하여금
당신께 위안을 드리게 하소서.
‘살아있는 매일의 지혜’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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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3. 연중 제12주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찾는 데에는 언제나 불확실함이 있으며, 만일 너무나 확실하게 말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느님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매사에 하느님을 찾고 발견하려는 일에는 여전히 불확실성의 영역이 남아 있습니다. 그분은 거기에 계셔야 합니다.
누군가가 하느님을 확실히 만났다고 말하면서도 불확실성의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는다면,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모든 질문에 답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지 않는다는 표지입니다”(『나의 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안토니오 스파다로와의 대담).
인간은 하느님의 신비를 완전히 알 수 없기에, 너무 쉽게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분의 뜻을 알고자 노력할 뿐이고, 그 노력으로 숨겨진 의미를 아주 조금씩 깨달을 수 있을 뿐입니다.
세상의 모순과 고통, 예기하지 못한 사고, 소중한 이와 헤어짐 등 어떻게 이 모든 것을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듯한 이유를 붙일 수야 있겠지만, 사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인지 자신의 생각인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유한한 인간은 믿음을 가지고 겸손하게 그분의 뜻을 찾는 여정을 걸어갈 뿐입니다.
제1독서의 욥은 하느님의 뜻을 찾아 모험에 나섰습니다.
그의 눈으로는 무고한 의인의 고통, 아무 이유를 찾을 수 없는 불행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는 그저 하느님을 만나 자신의 고통을 토로하고, 이 고통의 이유와 의미를 묻고자 합니다.
이에 대하여 결국 하느님께서 응답하십니다.
하느님의 답변은 인간의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분의 크심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그분의 크심은 우리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고통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인간 사고의 틀 안에 가두기보다,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그분의 크심을 인정하고, 불확실성 안에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이 우리 신앙인의 올바른 태도일 것입니다.
그럴 때 알 수 없는 고통의 신비를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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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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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3. 연중 제12주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제자들이 외칩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제자들을 덮칩니다.
자칫 잘못하면 생명을 잃어버릴 것 같아
두렵습니다.
더 두려운 것은
그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손을 쓸 시간도 없이
벌써 배에 물이 거의 가득 찼습니다.
엄청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데
스승님은 옆에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서
예수님을 깨운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상황이 마무리되고 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예수님에 대한 믿음보다는 원망 때문에
깨운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태평하게 잠만 주무시는 것 같아
원망스럽습니다.
이유가 어떻게 되었든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웁니다.
잠에서 깨어나신 예수님께서는
바람을 꾸짖으십니다.
곧 바람과 호수가 예수님께 복종합니다.
그 모습을 본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물론 풍랑을 두려워하는 것과
똑같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제자들은 다시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오늘 제자들의 상황은
우리의 삶과 비슷합니다.
뜻하지 않은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어려움은 점점 커집니다.
그 상황이 쉽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 상황에 나 혼자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주무시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기도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느님께 청하면서
우리의 믿음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아니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믿음이 아니라 다른 이유에서 청할 수도 있습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가 들어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하느님께 청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비록 원망일지라도
하느님께 꾸준히 기도한다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꾸준함은
우리를 놀라움으로 이끌 것입니다.
주무시는 듯한 하느님
나의 어려움에는 관심이 없으신 분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부족한 믿음에도
꾸준히 하느님께 청하며
그 청한 것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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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3. 연중 제12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께서 언제나 동행하신다는 강한 의식 속에 살아갈 때 언제나 우리는 강건합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선택하신 열두 사도들 역시 처음부터 위대한 사도가 아니었다는 것, 오늘 우리들처럼 한없이 부족했고, 틈만 나면 흔들리며 우왕좌왕했다는 것이 많이 웃기기도 하면서
큰 위안거리로 다가옵니다.
크게 흔들리고 우왕좌왕하는 제자들의 적나라한 모습이 오늘 복음에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마르코 복음 4장 37~38절)
갑자기 불어 닥친 역풍과 높은 파도 앞에 좌충우돌하면서 희극적인 상황을 연출하는 사도단의 결핍되고 불완전한 모습과 자연현상마저 좌지우지하시는 전지전능하시고 완전한 하느님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되고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의 특별한 이 에피소드는 우리 인간의 현실은 얼마나 어둡고 나약한지, 얼마나 허망하며 절망적인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늘 우리 한 가운데 현존하신다는 강한 의식 속에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또 얼마나 밝고 화사해지는지? 또 얼마나 영원하며 희망적인지를 알게 합니다.
주님의 능력보다 우리 자신의 능력만 신뢰할 때, 주님 없이 인간끼리 뭔가 하려고 할 때는 언제나
혼돈과 무질서, 절규와 아우성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식 속에 살아갈 때, 즉시 다가오는 것이 잔잔한 평화와 치유, 충만한 구원입니다.
그 어떤 풍파와 시련이 거듭된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동행하신다는 강한 의식 속에 살아갈 때 언제나 우리는 강건합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으며 희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이 아래로만 향할 때, 세상만 바라볼 때, 나 자신만 바라볼 때, 즉시 두려움 투성이의 나약한 존재로 전락합니다.
갑작스럽게 맞이한 큰 풍랑 앞에 허둥대는 제자들의 모습이 참으로 코믹합니다.
그러나 당사자들인 제자들 입장에서는 심각했겠지요.
생명의 위협 앞에 제자들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그간 받아온 특별 제자교육도, 예수님을 향한 신뢰도, 위신도,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다급했던지 주무시던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며 외칩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참으로 아이러니한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느님, 생명의 주관자이신 예수님, 참 삶의 길잡이이신 스승님과 한 배에 타고 있었던 제자들이었지만, 살짝 들이 닥친 위기 상황 앞에 갈팡질팡하며 심하게 흔들립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에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잘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내 등 뒤에서, 내 오른편에서, 내 왼편에서 나를 꽉 붙잡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의 손길 안에 푹 잠겨있으면서도 하느님이 어디 계시냐며 부르짖습니다.
하느님의 충만한 위로와 사랑을 시시각각으로 전달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목말라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인생의 풍랑 앞에 설 때 마다, 하느님의 침묵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들 때 마다, 예수님께서 너무 멀리 계신 것처럼 여겨질 때 마다, 예수님께서 주무시고 계신다는 마음이 들 때 마다,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그분은 늘 우리와 함께 동고동락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험난한 인생길에 항상 동행하는 분이십니다.
잠시라도 우리와 떨어지면 불안해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발걸음을 지켜보시며 우리를 드넓고 푸른 초원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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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3. 연중 제12주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왜 그리 겁이 많으냐?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바다가 배경이 되고 있고, 그 바다는 하느님만이 다스릴 수 있으며, 인간의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대상이며, 오직 하느님만이 소용돌이치는 바다를 다스릴 수 있는 분이심을 드러낸다. 이제 하느님 앞에 인간은 자기 자신의 한계를 느끼며, 주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사랑과 권능을 알아야 한다. 물질만능주의와 과학의 발달은 하느님을 제쳐놓고 그분을 무용지물로 만들면서 모든 것을 자신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현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 앞에 얼마나 무능력한가? 인간은 광대무변하고 찬란히 빛나는 삼라만상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알게 된다.
복음에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티베리아 호수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이었던 사도들이 호수의 일시적인 현상을 "죽음"의 위험으로 보고 있는 것도 이상하지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사도들이 갖게 되는 놀라움과 두려움은 어떤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이 기적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을 통해서 선포하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권능과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제시하기 위해서이다. 실제로 예수님의 기적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 나라의 표지들이다. 또한 마르코는 예수님 자신의 신비를 발견하고 베드로 사도와 같이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라고 고백하도록 천천히 이끌어 간다.
여기서 분명한 사실은 예수께서 우주만물에 대한 권위 자체를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광풍을 잠재우시는 분이시지만, 외적으로 드러나는 예수의 모습은 자연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분의 모습과는 달리 온종일 군중들을 가르치신 뒤 너무 지친 나머지 파도 소리나 제자들의 아우성에도 아랑곳없이 마치 죽은 사람처럼 깊은 잠에 떨어진 분, 그래서 억지로 깨웠어야 했던 분, 그러나 잠깐 사이에 모든 것을 다스리신 분이시다. 이런 나약성과 잇달아 드러나는 권위 있는 행동이 대조적으로 드러나고 있으며, 사도들은 감명을 받아 스승이 가지고 있는 '신비'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정말 그분은 나약한 존재이면서도 주님과 같은 권위로써 다만 손짓 하나만으로도 바다의 물결을 잠재우실 수 있는 분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점을 항상 우리는 갖게 된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은 바로 사도들이 마지막 순간에만 배 안에 함께 타고 계신 예수님을 기억한다는 사실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오직 위험한 순간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행위와 행동에 항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하느님께서는 신앙인의 마음에 항상 현존하시게 될 것이며, 신앙인은 하느님을 항상 자신을 사랑하시고 도와주시는 분으로 발견하고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주무시고 계신 것 같이 보이지만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신 분이기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초대교회는 이미 박해를 겪고 있었고, 신앙의 시련을 겪고 있었다. 이때 교회의 믿음을 더 강화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신앙이 낡고 지쳐 빠진 것이라 해도 그리스도를 세속적인 표준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바오로는 두 가지를 가르친다. 첫째는 신앙의 올바른 차원을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신앙으로써 그리스도의 신비를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을 위한 사람이었으며, 모든 이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바치신 분이시라는 것이다. 둘째는 이 때문에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주님의 모습을 본받아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큰 희생을 바친다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랑의 채찍질을 가하면서 살아가야 함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꿈꾸고 바라고 있는 그 "새로운 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손이 닿는 가까운 곳에 있다. 우리는 그 새로운 것을 드러내 보일 수 있고 또한 드러내 보여야 한다. 그것은 더는 아무도 단순히 세속적인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게 되고(2코린 5,16 참조), 성령의 빛과 능력을 통해 판단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이 약속을 굳게 믿고 우리는 그분의 가르침을 온 마음 다해 따르며 실천하도록 하여야 한다. 지금, 이 순간부터 다시 복음의 말씀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그분을 체험하며, 하느님께 언제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으로 우리는 조금씩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삶을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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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3. 연중 제12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그리스도와 동행하면 벌어지는 일
오늘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겠지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입니다.
이건 예수님의 말씀이고 명령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평생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는 일을 해 왔습니다.
너무 쉽게 본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거센 폭풍이 닥치자 겁을 먹습니다. 그제야 겸손해져서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라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람과 파도를 가라앉히시고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 “내가 가자고 했지, 너희가 가려고 한 것이니?”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내 일인데 왜 너희 일처럼 걱정하고 두려워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수 저쪽으로 가자고 하신 말씀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동행하면 이러한 일을 계속 겪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일을 통해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기를 바라십니다.
오늘 독서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코린 5,17)라고 하는 말씀과 같습니다.
저도 『하.사.시.』를 읽고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라는 말을 들은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상황은 제자들과 같았습니다.
나의 일이 되지 않았을 때는 사제가 되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사제가 되기 전에는 어떤 사제도 존경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하면 더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내가 되려다 보니 걱정과 두려움이 일었습니다.
풍랑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 내 힘으로는 안 되는 거였구나!’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내 안의 주님을 깨웁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도와주십니다.
결혼하고 싶은 마음에 대해서는 매일매일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성체를 통해서는 내가 하느님의 모든 것을 받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사제가 되어 느끼는 것은 내가 사제가 되는 과정에서 주님께서 일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내가 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주님의 뜻을 따를 때는 주님께서 “내 일인데 네가 왜 걱정하니? 그렇게도 믿음이 없니?”라고 말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한 번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일어납니다.
한 번에 새로운 사람이 되는 일은 없습니다. 유학하러 갈 때도 그랬고 교구청이나 본당에 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시키는 일은 그 이전에는 쉽게 보이지만, 막상 하려면 어렵습니다.
이런 과정이 자주 반복될수록 이젠 갈등하는 시간이 줄어듭니다.
그만큼 조금씩 겸손해지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게 됩니다.
점점 예수님의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는 말씀이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주님을 만나고 체험하고 싶거든 이 원리를 역이용하면 됩니다.
먼저 나에게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찾고 그 길을 선택해서 갑니다.
그러며 주님께서 맡겨주셨으니 책임을 지라는 식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나서주십니다.
이때 내 안에 그저 주무시는 주님이 아닌 능력자로서의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로라 윌킨슨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올림픽 다이빙 10m 플랫폼 여자부에서 미국에 36년 만에 금메달을 안겨준 주인공입니다.
그녀는 올림픽 출전 3개월 전에 오른쪽 발뼈 부상으로 7주간 병원에 누워있어야만 했습니다. 코치는 올림픽 출전 불가를 선언했지만, 그녀는 시드니 올림픽에 출전하였습니다.
중국이 16년 동안 강세가 이어지는 여자 다이빙 종목이었습니다.
총 5차전에서 2차까지 5위였습니다.
선두와 60점 이상 차이가 났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미소를 잃지 않았습니다.
3차전에 최고 점수를 얻어 순식간에 선두와 격차를 줄인 대반전이 일어났습니다.
드디어 카메라는 그녀에게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다이빙대에서 서서 도약 직전까지 계속 무언가 중얼거렸습니다.
그녀가 중얼거린 것은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4,13)”였습니다.
금메달이 확정된 순간 대역전의 비결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그녀는 울먹이며 “저에게 능력 주시는 분이 이 일을 하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하.사.시.』 7권 228장에서 예수님은 “착한 소원은 하느님께서 일으켜 주시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런 소원들을 일으키시는 것은 그 소원들이 실현되기를 원하신다는 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라고 하시며 당신을 드러내려 하십니다.
도전하지 않는 자에게 참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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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3. 연중 제12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생활은 끝까지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르 4,35-41)”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바람과 호수까지’ 지배하시는 분”, 즉 “예수님은 ‘만물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라는 제자들의 말은,
제자들이 그때까지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잘 모르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제자가 되긴 했는데, 예수님의 권능과 권한이 어느 정도인지는 몰랐다는 뜻입니다.
그때는 그랬는데,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예수님의 권능과 권한을 체험할 때마다 계속 놀라게 되고, 점점 더 예수님을 잘 알게 되고, 더 깊이 믿게 됩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부활, 승천 뒤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이 완성됩니다.>
따라서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라는 예수님 말씀은, “아직도 나를 모르고 있느냐?”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제는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야 하지 않느냐?”>
마르코복음만 놓고 보면, 이 일이 있기 전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는 것을 보았고(마르 1,25-26),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마르 1,34).
예수님께서 고쳐 주신 병자들 가운데에는, 그 당시에는 사람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고, 하느님의 힘으로만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나병 환자’도 있었고(마르 1,41-42), 중풍 병자도 있었고(마르 2,11-12), 장애자도 있었습니다(마르 3,5).
<제자들 입장에서 생각하면, 말씀만으로 바람과 호수를 복종하게 만드는 일은, 그들에게는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과는 완전히 성격이 다른 기적, 또는 차원이 다른 기적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큰 두려움’에(‘큰 경외심’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2) “처음부터 ‘거센 돌풍’과 ‘파도’가 생기지 않게 하실 수는 없었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하실 수 있었겠지만, 일상적인 자연 현상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주님의 뜻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질문은, “처음부터 박해가(고난과 시련이) 일어나지 않게 하실 수는 없는가?” 라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초대 교회 때부터 신자들은 계속 그런 질문을 했거나, 그런 의문을 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박해자들도, 그 자신들은 모르고 있지만, 하느님의 자녀들이고, 구원사업의 대상자들이고, 잠재적인 예비신자들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의 자유의지와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시는 분이고, 정말로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인간의 역사에 직접 개입하시지는 않습니다.
<예외적으로 직접 개입하시는 경우도 있긴 합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때에 나타날 준비가 되어 있는 구원을 얻도록,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5-7).”
이 말은, 누구나 무조건, 반드시 고난과 시련을 겪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고, 고난과 시련을 겪더라도,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더욱 강하게 ‘단련’되고, 더욱 순수하게 ‘정화’된다는 것이 베드로 사도의 설명입니다.
고난과 시련 자체를 주님의 뜻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 일들을 통해서 단련되고 정화되어서,
구원의 완성에 도달하는 것은 분명히 주님의 뜻입니다.
3)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인생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눈앞에 닥친 고난과 시련이 너무 힘들어서 그것을 없애 달라고(막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나 무턱대고 없애 달라고 간청하는 기도보다,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청하는 기도가 더 좋은 기도입니다.
어떻든 인생은 지나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작은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갈 때, 거센 돌풍과
파도를 만나서 정말로 힘들게 갈 수도 있고,
호수가 아주 잔잔해서 편안하게 갈 수도 있습니다.
너무 힘들다고 노 젓는 것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반대로 호수가 아주 잔잔하고 경치도 좋아서 노 젓는 것을 멈추고 경치 구경만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든지 간에 목적지를 앞에 두고 중간에 멈추는 것은 모두 어리석은 일이고, 믿음이 부족한 모습입니다.
<신앙생활은 끝까지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어떤 이유든지 간에 중간에 멈추는 것은 처음부터 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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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3. 연중 제12주일.
진리 안에서 믿음을 지켜내는 삶
<2024.6.23> 아침을 여는 묵상(행 24:24~25:12절)
❝진리 안에서 믿음을 지켜내는 삶❞
❚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선한 인도하심을 받아 그 길이 좁아 보이더라도 오직 한길만을 걸어야 합니다.
✔ 진리 안에서 믿음을 지켜내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 이중적인 신앙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24~27절).
며칠 후 벨릭스는 그의 유대인 아내 드루실라와 함께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에 대해 강론하였습니다. 바울의 강론을 듣게 된 벨릭스는 두려워했습니다. 말씀이 양심을 찔렀기 때문일 것입니다. 동시에 그는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고는 바울을 자주 불렀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구금함으로써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희망으로 바울을 2년간이나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벨릭스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구원을 얻기에 가장 좋은 기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기회를 거부하고 말았습니다. 바울에게서 분명 의와 절제에 대한 설교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재물에 대한 탐욕을 자제하지 못하였습니다. 자신의 영혼을 위해 설교하는 사명자에게 돈이나 구하는 벨릭스는 너무나 세속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유대인들을 의식하여 철저하게 이중적인 마음을 가졌습니다. 겉으로는 참으로 열심이 있는 신앙인처럼 보이지만, 그의 속내는 세상적인 탐욕과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늘 자제하며 근신해야 하겠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중적인 신앙을 잘 분별하여 진리 안에서 믿음을 잘 지켜내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불합리한 음모에 대처할 수 있어야 합니다(25:1~5절).
베스도가 부임한 지 삼 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자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했습니다. 즉, 합법적으로 바울을 죽일 수 있도록 다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에 관한 재판을 예루살렘에서 다시 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길에 매복을 하고 있다가 바울을 죽이려는 음모였습니다. 이에 베스도는 그들 중에서 몇 사람이 자신과 함께 가이사랴로 가서 정말로 바울이 잘못된 행동을 했다면 그곳에서 그를 고발하라고 대답했습니다.
율법을 신봉한다는 종교 지도자들이 살해 음모를 꾸미는 것만 보아도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완악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단은 믿는 자들의 생명을 노리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음모들을 통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 근신하여야 합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불합리한 음모에 지혜롭게 잘 대처하여 진리 안에서 믿음을 지켜내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당당하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6~12절).
베스도가 가이사랴에 내려와 바울을 재판석으로 불러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바울을 고발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증거를 대지 못했습니다(6~7절). 바울은 자신을 공격하는 유대인들에게 분명하게 변호했습니다. 자신은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범죄한 일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신앙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문제가 없는 양심을 가졌기에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바울은 자신이 로마 시민으로서 가이사 앞에서 심문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불의를 행한 일이 없음을 거듭 강조하면서 만약 죽을 죄를 지었다면 죽기를 사양하지 않겠지만, 그들의 고발이 사실이 아니라면 아무도 자신을 내어 줄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베스도는 이 문제를 두고 배심원들과 상의한 뒤에 “그대가 황제에게 상소했으니, 황제에게 가게 될 것이오”(12절,쉬운성경)라고 선포했습니다. 이러한 베스도의 결정은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로마로 가서 증인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바울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이익과 안위를 위해 변호한 것이 아니라 오직 진리와 말씀을 위해 자신을 변호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자유함과 담대함을 갖고서 진리를 명확하게 그리고 흔들림 없이 증거하였습니다. 결국 악한 자들의 음모와 어리석은 변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 가운데 바울이 자신이 가야 할 길로 인도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암흑과 같은 세상에서는 진리 안에 있는 사람의 길이 더딘 걸음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광명의 길을 향해 가는 길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비록 그 길이 좁아 보이더라도 다른 곳을 바라보지 말고 당당하게 복음을 증거하며 오직 한길만을 걷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거듭난 성도답게 죄인된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날마다 자신을 쳐서 복종하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암흑과 같은 세상속에서 진리 안에 있는 삶이 비록 더딘 걸음처럼 보이더라도 오직 믿음 안에서 한길만 걸어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행 24:24~25:12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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