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도자/옥한흠 지음
1부 세상을 제압하는 전도자
1장 하늘을 겨냥하는 삶
하늘을 두려워함이 없는 시대
어떤 목사님이 차를 타고 가는데 앞에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젊은이가 있더란다. 바싹 다가가서 보니, 오토바이에 부착된 스티커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었다. “죄의식 따위는 깔아뭉개버려라”죄의식이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을 때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죄의식도 사라지기 마련이다.죄의식을 버리라, 이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라는 말과 같은데, 이러한 외침이 만연하는 시대가 왔다.
교회가 세상 뒷북치다가 역사적으로 교회는 흥할 때도 있었고, 망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교회가 망할 때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교회가 세상을 따라 조화를 이뤄보려는 시도를 하다가 망했다. 교회는 교회로서 살아남아야 한다. 세상의 유행과 가치관과는 결합할 수 없는 독특한 것이기 때문이다.
천상천하 유신국독존
이것이 하나님 나라다. 예수님이 관심과 주제는 하나님 나라 밖에 없다.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나라 외에는 없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하나님나라 백성이라고 하면서, 1년 365일 동안 한 사람도 전도하지 못하고서 하나님 나를 대망하고 있다고, 그 나라에 관심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럴수 없다. 우리는 늘 이런 기도를 드려야 한다.
“주님, 누구에게 전도할까요? 누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할까요?”
주님이 교회에 주신 세 가지 선물
첫째로 예수의 이름을 주셨다.
인도 선교사로 선교 사역에 큰 발자취를 남긴 스탠리 존스는 인도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평생을 바친 분이다. 그가 89세에 뇌일혈로 반신불수가 되었다. 그는 치료를 받으면서 자기 병실에 들어오는 모든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스탠리야 걸어라’ 라고 말하도록 부탁했다. 그 후로 치료하러 들어오는 의사들마다 스탠리야 걸어라고 소리쳐 주었고 그는 즉시 아멘! 하고 응답을 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6개월만에 병상을 박차고 일어나 다시 인도로 선교를 떠났다.
예수 이름의 권능인 것이다.
둘째로 성령의 권능을 주셨다.
셋째로 하나님 나라의 꿈과 환상을 주셨다.
하늘을 겨냥하면 땅은 덤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문학가인 영국 캠브리지 대학의 C.S.루이스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을 겨냥하라, 그러면 땅은 덤으로 얻게 될 것이다. 땅을 겨냥하라, 그리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어디에 줄을 섰는가?
하나님은 세상나라에 대해서 이렇게 선언하신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계 18:2)
그렇지만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이렇게 선언하신다.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로다” (계22:3~5)
2장 무관심이 가장 무서운 적이다
이런 질문 한번 해보셨습니까?
어느 날 한 율법사가 사악한 의도를 가지고서 예수님의 약점을 찾으려고 예수께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10:25)
비록 순수하지 못한 동기에서 나온 질문이지만, 질문 자체는 대단히 탁월한 것이었다. 이것은 우리가 그 무엇보다도 시급하게 알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이런 질문을 해보지 못한 자는 캄캄한 흑암에 사는 것과 다름없다.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는 자는 모두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은 자이기 때문이다.
백 점 짜리 대답
율법사는 정확한 답을 뽑아내 백점짜리 답을 내놓았다.
그것이 27절에 나온다.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나는 바담 풍 하지만 너는 바람풍 하라
그런데 그 율법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하는 사람이다. 주님은 이 율법사에게 너무도 무서운 말씀을 하신다.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 도다”
교회 안에도 가끔 이런 사람을 볼 수 있다. 말씀대로 살기도 벅찬 세상에 말장난을 하는 사람들..
당신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는가?
이웃에 대해 말하면서 예수님은 레위인과 제사장이 강도 만난 자를 지나치신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아무도 그 이야기에 다른 말을 못할 정도로 찔림이 있었다. 그 말이 단순한 비유가 아닌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자비를 베푼 자
이야기를 마친 후 예수님은 이렇게 물으셨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이에 대한 주님의 명령은 이것이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당신의 자화상은?
여기에 중요한 것이 있다.
첫째, 내 이웃이 누구인가 하는 것보다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는가가 더 중요하다. 둘째,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행동의 문제이다. 셋째, 사랑을 실천하려면 민족 간의 감정이나 개인의 감정을 초월해야 한다. 넷째, 그가 사랑을 실천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비록 사람은 보지 않더라도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신다.
다섯째, 우리가 좋은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할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얼마든지 있다. 여섯째, 사랑하려면 말부터 앞세우지 말고 순종해야 한다.
가장 무서운 악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볼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악이 무엇인 줄 아는가?
바로 무관심이다. 마태복음 9장 13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긍휼히 여기는 선한 마음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교훈에서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적용해볼 수 있다. 첫째,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을 보고 무관심하면 안 된다. 둘째, 영적으로 강도 만나 죽어 가는 우리의 이웃을 보고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
비정한 예배자
예배 시간에 종종 마음이 아파올 때가 있다. 나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예배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우리 집안에 아직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 내 이웃 가운데 예수를 모르는 사람이 있는데 나 혼자 손들고 찬양을 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정녕 받으실 만한 것인가?
갑작스런 심판
세상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살다가 갑자기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면 그들이 가게 될 곳은 뻔하다. 강도 만난 사람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무관심하면 안 된다. 명령을 실천해야 한다.
3장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
하나님의 마음이 가 있는 곳
몇 년 전 괌에서 일어난 여객기 사고를 아는가? 그 사고로 우리는 장래가 매우 촉망되던 정치인 한 분을 잃었다. 신기하 의원이란 분이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에 그의 노모는 50일 만에 결국 슬픔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 분에게는 아들딸도 많았고 손자 손녀도 많았는데, 어머니의 마음에는 먼저 간 아들밖에 없었고 그에게 가장 큰 기쁨이라면 죽은 아들이 살아 돌아오는 일 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교회 밖에 그 마음을 더 두고 계신 것을 알 수 있다. 그 노모가 잘난 아들 딸들이 많았지만 죽은 자식을 더 마음에 두었던 것처럼 하나님도 아직 어둠과 죽음의 길에 있는 다른 자녀들에게 더 마음을 쓰시는 것이다. 우리는 그 마음을 알아야 한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
영적으로 병들어 죽어 있고, 자기들끼리 패를 가르고 싸워서 교회 안에 냉기가 도는 삭막한 교회들이 가끔 있다. 그런 교회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인 전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믿지 않는 사람을 주님 앞으로 인도할 생각을 하지 않으니 교회는 죽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 교회가 잘 되겠는가?
하나님의 가장 큰 기쁨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것은 양은 찾는 일이다.
개인주의의 신앙을 넘어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여기서 ‘이 사람’은 예수님이다. 하나님이시면서 그분은 죄인과 함께 앉아 먹고 기뻐하셨다. 복음의 진수는 이것이다. 하나님이 죄인과 한자리에 앉으신 것, 하나님이 죄인과 함께 교제하는 것. 오늘 우리가 누릴 복도 이것이다. 죄인이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그 분 앞에서 먹고 마시며 은혜를 누리는 것이다.
이상하지만 이기주의 근성이 많은 사람일수록 예수를 잘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런 사람일수록 천국이 있다면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마음으로 예수를 믿다보니 자기는 구원받기 원하면서도 다른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달갑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을 흡족하게 하는 일
이기주의적인 신앙을 지양하고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일에 한번 힘써보기를 바란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기뻐하시며 우리의 기도를 더욱 귀담아 들으시기 때문이다.
4장 예수님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신기루를 쫓는 어리석음
우리는 역사를 통해 경험적으로 배운 진리가 있다. 바로 정치 지도자에게 기대를 하면 그 만큼 실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믿어주고 다시 속고 하면서 또 뻔한 기대를 가져본다. 아직도 세상나라에 소망을 두는 사람은 이렇게 신기루를 쫓는 사람처럼 어리석기만 한 것이다.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우리의 현실이 이러한데 역사의 주인이신 만군의 여호와는 말씀하신다.
바로 이사야서 41장 1절 말씀이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하나님이 택한 자가 누구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여호와께서는 바로 그를 주목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공의의 나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택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42장 1절 끝부분에 나와있다. 그것은 바로 공의를 베풀기 위하심인 것이다.
한 나라의 공의는 공의로운 법 집행에서부터 시작된다. 법이 공의로운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은 안심하고 살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공의가 바로 서기는 불가능하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나라 하나님의 나라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
예수 그리스도가 공의로 영원토록 다스릴 나라는 이사야서 11장에 잘 나타나 있다. 특히 6절부터 9절까지 말씀이 가장 놀라운 묘사이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거기에는 남을 해치는 일도 없고, 성처 입는 법도 없고, 억울한 일도 없다. 이와 같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나라가 바로 공의로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
이렇게 더 좋은 나라를 알면서 왜 들어가지 않는가?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는 그 나라에 함께 들어가자고 왜 말하지 못하는가? 안 믿으니까 못하는게 아닌가? 자기가 정말 믿는다면 왜 말을 못하는가?
전도자의 태도
첫째, 온유하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둘째, 불쌍히 여기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셋째, 포기하지 말라.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이 예스이다. 노우가 아니다. 전도할 때 낙담하거나 포기하면 안된다.
약함으로 강함을 이긴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약함이 강함이요, 부드러움이 강직함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죽음의 덫에 걸려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2부 비전을 가진 전도자
5장 디사이플 메이킹
제자 훈련에 눈을 뜨다
지금부터 약 30년 전, 모든 교회의 문제들은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이었다. 선교 단체와 교회를 비교하면서 나는 그 차이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제자 훈련이었다.
출판과 세미나 사역 출범
그리하여 제자훈련을 시작하고 책도 썼는데, 그 책이 바로 <평신도를 깨운다>는 책이었다. 놀랍게도 이 책은 불티나게 팔리면서 제자 훈련의 필요성을 깨닫게 해주는 큰 계기가 되었다.
성경 원리에 가장 근접한 목회
교계에서 존경받는 목사님 한 분이 사석에서 이런 고백을 하시는 것을 들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큰 집회를 인도하시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왔는데, 이제보니 남는 것이 별로 없더라고 하시면서 적어도 제자를 만드는 사역이야말로 진정한 열매가 남는 것 같다는 말씀이셨다.
"제자 삼으라"는 주님의 명령에는 절대 권위가 깃들어 있다. 이 엄중한 명령에서 벗어난다면 주님의 칭찬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가르쳐 지키게 하는 자리
제자를 만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세가지가 있다.
먼저, 가야한다.
다음으로, 세례를 주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가르쳐야 한다.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대단히 강력한 말씀이다. 실제 생활을 변화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제자 훈련이다.
목회자들이 제자 훈련을 소홀히 한 이유
첫째, 일주일에 한 두 번 설교를 듣는 것으로 배우고 순종하는 크리스찬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둘째, 목회자들의 시간 투자에 구조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시간을 투자하지 않고 어떻게 예수의 제자가 만들어 지겠는가?
한국 교회의 위기
97년과 98년에 한국 갤럽에서 조사한 자료를 보면 지난 몇 년 동안 약 370만 명이 종교간 이동을 했다고 한다. 특기할 것은 그 중 개신교에서 타종교로 개종한 비율이 무려 58.4%나 된다는 것이며, 더 기가 막힌 건 한 때 종교를 가졌다가 현재 종교가 없는 사람이 1,094만 명인데 그 가운데 기독교인이었던 사람이 73%나 된다는 사실이다.
제자 훈련만이 타개책이다
제자 훈련을 3년 정도 했더니 교회를 보는 사람들의 시각이 달라졌다는 말이 들린다. 이렇게 체질이 바뀌는 교회는 제자 훈련을 통해서 시작된다.
제자의 자세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데까지 성장하기 위하여 배우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둘째, 모든 족속을 가슴에 품어야 한다.
6장 파워 전도
유일 불멸의 힘
교회의 힘은 무엇인가? 예수 믿는 사람의 힘은 무엇인가?
그것은 성령의 능력이다. 한 때 세계를 주름 잡던 무하마드 알리를 잘 알 것이다. 그는 현재 파킨스씨 병에 걸려 투병 중에 있었다. 지난 번 애틀란타 올림픽 때 성화 점화를 위해 단상에 올라섰는데, 점화를 제대로 못할 정도로 손을 덜덜 떨었다. 그가 누구인가? 전성기 시절, 세계에서 가장 주먹이 세다는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떨리는 손으로 겨우 점화할 수 있을 정도로 약한 자가 되었다. 그는 기자 회견에서 이런 말을 했다.
“사람보다 하나님이 더 강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제가 이 병에 걸렸습니다.”
원판 필름
성령의 능력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그 원류를 찾아가야 한다.
바로 오순절 다락방에서 일어난 성령 강림 사건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도 있다. 바로 잘못된 환상을 가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도 이런 불같은 성령이 내린다는 환상을 가져서 머리가 뜨거워지고 방언을 말하고 가슴이 후끈하는 체험이 없으면 성령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오늘날은 교회에 성령을 주셨고, 그분은 들락날락 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 안에 예수를 믿음으로 내주하는 분임을 믿어야 할 것이다.
성령의 선물을 구하라
그러므로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성령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선물을 달라는 것이다. 성령의 선물은 무엇인가?
바로 능력이다. 힘이다. 은사이며 치유하심이다. 또한 우리를 높이 들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시는 역사이다.
성령 충만은 찬양 충만이다
성령을 받은 예루살렘 성도들에게는 어떤 특징이 있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성령이 오시자 제일 먼저 입을 열게 하셨고 그들이 11절 하반에는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다’는 ‘찬양하다’는 뜻이다.
‘전도하다’와는 뉘앙스가 다른 것이다.
마귀를 쫓는 최고의 수단
‘주여, 내 입을 벌려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옵소서.’ 하고 부르짖으라.
성령이 우리 안에 터지게 하는 그 찬양은 세상에서 승리하며 살게 하는 능력이 있다. 마귀를 이길 힘이 찬양을 통해 흘러나오는 것이다.
증거 하는 교회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또, 복음을 전한다. 나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이 있는가? 그렇다면 나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다.
말씀에 헌신함
성령 받은 예루살렘 교회의 세 번째 특징은 말씀 배우기를 힘쓰는 것이었다. ‘전혀 힘쓰니라’는 ‘프로스카르테룬테스’ 라는 헬라어로 아주 긴 단어인데, 끈기 있게 계속 노력한다는 뜻이다. 성령이 함께 하시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있다. 배우고 또 배우기를 원한다.
이상하게도 성령을 강조하는 교회일수록 끝이 좋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는 바로 말씀을 등한히 했기 때문이다.
잘못된 은사들
성령 집회를 많이 했던 교회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의 사업이나 장래에 대해 예언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왜곡된 경우다. 배우는 것만 능사로 아는 사람만큼 무서운 사람은 없다. 배운 말씀을 지킬 때까지 배우는 사람이 되라.
세상에서 승리하기까지
성령 받은 교회와 성령받은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가?
첫째, 찬양이 충만하다.
둘째, 복음 전하기를 기뻐한다.
셋째, 말씀 배우기에 힘쓴다.
넷째, 성도끼리 교제하기에 힘쓴다.
다섯째, 떡을 떼는 일에 힘쓴다.
여섯째, 기도하기를 힘쓴다.
일곱째, 표적과 기사가 일어난다.
여덟째, 헌금에 인색하지 않다.
아홉째, 세상 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준다.
열째, 삶 자체가 활짝 열린 전도의 문이 된다.
7장 가장 부가가치가 높은 사업
예수님의 최고 관심사
주님의 관심사는 하나님 나라에 고정되어 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용하신 비유는 사복음서를 통털어 약 47가지가 나오는데, 그 비유의 대부분이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주인과 종
예수님이 주인과 종의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님은 주인이시고 우리 모두는 그 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달란트를 받은 종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달란트라는 것이 어느 정도 가치를 가진 것인지는 쉽게 계산할 수 있다.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이며 1데나리온은 일꾼의 하루 품삯으로 약 3만원에서 5만원 정도이다. 그렇게 치면 3만원씩만 잡아도 다섯 달란트는 9억원이란 돈이 된다. 한 달란트는 1억 8천만원 정도가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런 달란트를 받은 자들이다.
목사만 달란트를 받았는가?
달란트는 직분이나 직책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액수를 가지고 평신도와 목사를 가리는 것이 아니며 우리 모두는 고유한 달란트를 받았다.
달란트의 독특성과 다양성
이런 다양성과 차별성이 나타나는 이유는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로 인한 것이다. 그 분은 꽃도 다양하게 만드시는 분이다. 그러면 정확하게 무엇이 달란트인가?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것은 다 달란트이다. 하나님은 사람마다 독특하고 다양한 최고의 달란트를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가진 것이 있고 못 가진 것이 있기에 서로 연합하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목적인 셈이다. 내가 받은 달란트가 무엇인지 헤아려 보라.
주인의 칭찬
달란트 사용에 대한 보고를 듣는 주인을 보며 우리는 대단히 귀중한 원리를 발견한다. 이는 우리 삶의 질을 결정하는데 매우 귀중한 것으로써 달란트를 얼마나 받았던지 그것을 가지고 충성하기만 하면 주님의 칭찬과 상급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달란트의 양이나 이윤의 양이 아니라 얼마나 충성했느냐 라는 것이다.
주인의 노여움
하나님의 법칙은 철저히 자신의 행위대로 검증받는다. 하나님은 공평과 정의로 우리의 삶의 무게를 달아보시며 그것에 따라 상급을 정하신다.
따라서 우리가 게으르면 우리는 악하다 말씀듣게 되고 악하면 게으르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한 가지 작은 것에도 충성되지 못하면 그 사람에게 있는 것까지 빼앗아 버리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법칙이다.
교회 안에 있는 두 부류의 종
충성된 사람의 자세는 다르다. 자신의 달란트가 어디에 쓰여야 할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시간을 쪼개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자신을 쓰려고 노력하고, 돈도 쪼개어 주님이 원하시는 일에 더 많이 드리며, 젊음과 재능이 다하기 전에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기웃거리는 사람으로 변한다. 이 사람이 바로 충성된 사람인 것이다.
벤처 신앙
주님을 위해 산다는 것은 모험이다. 벤처 사업가를 보았는가? 돈을 투자하고서 밤낮으로 얼마나 신경쓰며 사는지 모른다. 하나님께 대해 불만이나 피해의식이 있는 사람은 결코 모험을 하지 못한다.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도, 핍박을 받아도, 손해를 보아도, 변함없이 충성하는 것, 생명을 가지고 헌신하는 것, 이것이 바로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의 정신이다.
잭 웰치보다 더 무서운 평가자
만약 주님이 오늘 당장이라도 재림하셔서 나와 계산해보자고 하시면 어떤 결과가 나올 것 같은가? 냉정하게 평가해 보라.
얼마 전 모 신문에 실린 미국 제너럴 일렉트릭 사(GE)의 회장인 잭 웰치의 문어발식 경영 철학에 대해 읽고 깊이 생각되는 바가 있었다.
GE는 1999년 포천지에 미국 500대 기업 중에서 순이익 2위에 꼽힌 회사로 그 거대 우량 기업의 비결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잭 웰치의 경영철학이 이렇게 소개되었다.
“양손에 비료와 물을 들고 꽃을 가꾸되 열심히 물을 주고 비료를 주어서 아름다운 정원이 되면 좋지만 만약 아무리 해도 아름다운 정원이 안 되면 가차없이 잘라버린다.”
쉽게 말해 정원을 잘 가꿔 성공하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으면 미련없이 갈아 엎어버린다는 것이다. 얼마나 냉정한가?
그는 어느 꽃이 제대로 될 것인지 알기 위해서 8만 5천명에 가까운 그 회사의 관리직과 전문직 사원의 명단을 놓고 평가하는데 매일 하루의 반 이상의 시간을 보내며 평가하여 1등급부터 5등급까지 나누어 관리하는데 철저하게 그 보상과 책임을 분명히 한다고 한다.
우리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재림주로 오실 때는 그보다 더 철저하게 달아보실 것을 알고 적당한 생활을 버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늦기 전에
교회 안에도 구원에서 탈락할 위험에 있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 혹시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닐까?라는 가책이 든다면 그 음성에 마음을 열고 관심사와 인생의 목적을 바꾸어 재림 주께서 결산하실 날에 부끄럽지 않은 삶으로 변화되어야겠다.
최고의 부가가치 사업
하나님께 유익이 되는 최고의 부가가치 사업은 선교이다. 전도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미친 사람들
이런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세상이 보기에 미친 것처럼 살아간다.
우리나라에 처음 복음을 들고 왔던 토마스 선교사나 아펜젤러 선교사, 그리고 허드슨 테일러 같은 사람들은 모두가 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살았지만 그들에게는 하나님 나라라는 비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신은 무슨 희생을 하는가?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는 어느 때는 시간도 내야하고, 돈도 써야 한다. 자존심도 접어두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만큼 가치있는 일이 없다.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라, 성공한 환경을 이용하라, 젊음과 아름다움도 이용하라, 모든 것을 동원하여 한 사람을 위해 투자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길이고,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는 보람된 길이다.
태신자를 정해 기도하고 전력하라.
주님 앞에서 망신
우리 앞집에 모 제약회사 간부가 사는데, 천주교 교패를 붙여 놓고 복음 전파를 강력히 거부한다하여 늘 은근히 불안하다. 그 사람이 죽어 주님 앞에서 너 어디 살았냐고 물으면 옥 목사 앞집에 살았다 할텐데, 그런데도 전도하지 않은 나는 얼마나 망신일까 싶어서 그럴때가 많다. 사실 나도 아직까지 정식으로 그 남편을 전도해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영광의 상급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리라고 생각한다.
어디 살았냐고 물으시는 주님 앞에 OO교회가 있는 OO동네 살았는데도 한번도 전도를 받아보지 못했다고 대답한다면 우리 모두 얼마나 큰 망신인가 말이다.
8장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월드 와이드 웹
절망 속에서 싹트는 꿈
뉴스 시간에 잠깐 나온 이야기다. 여름 동안 여고생들이 봉사 활동을 하고서 그 활동기록을 학교에 제출하는데, 이것은 성적에도 반영되고 대입에도 영향을 준다. 보도 내용은 학교에 보고서를 제출한 15명 가운데 10명이 허위 보고를 했다는 것인데, 선생님의 왜 거짓말을 했냐는 질문에 학생들의 입에서 기막힌 답이 나왔다.
“엄마가 봉사기관에 가서 도장 찍어다 만들어 줬어요.”라는 것이었다.
무책임한 부모와 정부기관 거짓된 세상이 싫어 한국을 떠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은 세상에 대해 절망할수록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이 있음을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절망하였기에 꿈을 가진 대표적 인물이 마틴루터 킹 목사이다. 킹 목사의 절망 가운데 외친 꿈은 모든 사람의 가슴을 저미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 날이 오면
이사야도 절망 가운데 꿈을 본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준 꿈은 썩어들어가던 앙상한 그루터기에 싹이나고 그 싹이 가지가 되며 그 가지에서 잎이 나는 것이엇다.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것을 보며 이사야에게 하나님이 이 꿈의 비밀을 일러주신다.
“네가 이것을 보느냐? 이 가지는 바로 다윗의 후손인 메시야, 곧 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니라”
완전한 통치자, 완전한 나라
완전한 자가 다스리는 나라는 완전한 나라가 된다.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선과 악을 정확하게 구별하여 선은 선대로, 악은 악대로 다스리는 지혜와 능력이다. 이것이 공의인 것이다. 그러나 공의는 성실과 함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완벽한 통치 가운데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나라가 임한다.
아무리 독사 같은 자라도 어린아이처럼 순해진다. 모든 저주가 사라지고 해가 없는 아름다운 나라가 임하는 것, 이것이 청년 이사야의 꿈이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입으로 “주여, 주여”하는 믿음이 아니다.
첫째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요 나의 하나님이란 사실을 믿는 ‘고백적 지식’이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으며 만유의 주가 되신다는 것을 믿는 ‘교리적 지식’이다. 셋째는 성령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며 나는 그분과 동행하고 있다는 것을 믿는 ‘경험적 지식’이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 은혜에 너무 감격하여 주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순종하며 일평생 헌신하겠다는 결의를 보이는 ‘실천적 지식’이다. 이것을 통해 사람의 심령이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 나라가 나타난다.
하나님을 멸시하면
러시아가 낳은 문호 솔제니친을 알 것이다. 1920년대에 그가 어린아이였을 때 러시아에서 끔찍한 공산 혁명이 진행되었다. 매일 학살이 진행되고 재난이 시작되었다. 그 때 어린 솔제니친이 어른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었다. 너무나도 인상 깊었기에 그는 어른이 된 후에도 강연하면서 그 이야기를 하곤 했다. 왜 반세기 동안 6천만 명이 넘는 인명을 앗아갔던 이 참담하고 악마같은 공산주의가 일어났는가? 대답은 간단했다.
어른들의 말처럼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멸시하는 사회가 얼마나 지옥같은 곳인가 증거하는 일이다.
부패하지 않는 나라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성도들은 잘못할 수 있어도 예수님은 실수가 없으시며 절대 변치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절대로 부패하지 않는다.
이 사회의 소망은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 밖에 없으며 우리 모두가 교회에 소망을 두어야 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신지식의 월드 와이드 웹 구축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온 땅에 충만해지기 위해서는 성도가 꼭 할 일이 있다. 전도와 선교인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교회만이 감당해야 할 사명이다. 우리 사회가 예수를 잘 아는 것 같아도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예수 믿으라고 하면 깜짝 놀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 나라의 임재 비전
이 세상은 어린 중학생의 눈으로 보아도 절망스런 곳이다. 하물며 이 세상이 매력적으로 보이고 좋기만 하다면 그는 영적 맹인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을 품고 예수를 증거하는 복음을 들고 나가기에 힘쓰자.
3부 불타는 열정의 전도자
9장 지피기지 백전백승
당당한 죄수
과거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한 후 천황 숭배를 거부한 많은 성도와 목사님들을 잡아가 옥고를 치루게 한 일이 있다. 그들 가운데 순교한 분도 많은데 그분들은 하나 같이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없었다.
재판장 같은 죄수
오늘 사도 행전에서 이같은 바울을 만나게 된다.
죄수임에도 당당한 그는 누가 재판장인지 모를 정도로 법정 분위기를 완전히 압도하고 있다. 왕과 총독의 권세마저 바울의 권위 앞에 초라해지는 것을 보게 된다.
전도 대상자의 유형
우리는 여기서 먼저 재판석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유형을 볼 필요가 있다.
왜냐면 심문하고 있는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 그리고 버니게 라는 여자가 바로 우리가 전도할 때 만나게 되는 세가지 유형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베스도 : 오해와 편견의 소유자
베스도는 유대 현직 총독으로 로마 황제의 대리자이며 식민지의 통치권을 가진 막강한 권력자이다. 그런 그는 바울이 예수님이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음을 전하자 크게 소리를 지른다. 그에게 돌았다고 소리치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행동에서 그의 성향을 볼 수 있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을 보고 다짜고짜 “미쳤다”고 하는 사람들은 기독교나 교회에 대해 오해가 많은 사람이다. 편견을 가진 이들이다. 그들은 기독교인을 괴롭히고 궁지에 몰아붙이며 재미있어 한다. 우리 주변에는 사소한 것들로 오해와 편견을 가진채 기독교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그립바왕 : 관심은 가지나 거부하는 자
그는 이 재판의 주심으로 유대 율법과 전통에 밝은 자다. 그는 겉으로는 상당히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이는 듯하나 거부하는 자로 전도하다보면 이런 사람들을 많이 만나보게 된다. 때가 되면 믿을테니 너무 권하지 말라는 사람들의 유형이다.
버니게 : 무반응과 냉소주의
버니게는 아그립바 왕의 누이로 20대 초반의 미모를 소유한데다 권력과 호사스런 생활에 길들어진 그녀에게 바울의 말이 들릴리 없었다. 전도하는 사람들 중에도 자신만만하여 세상에 무서울 것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서 전도자를 보며 속으로 멀쩡한 인간이 왜 저럴까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여기 속한다.
사람 가리지 말라
이렇게 도전적인 자든, 아예 반응을 거부하는 자든 우리는 바울처럼 가리지 말고 전도해야 한다. 전도할 때 차별하면 안된다. 그들 모두는 똑같은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가장 큰 축복 중의 축복
전도를 통해서 자유함을 얻는 일이 일어난다. 영생을 소유하는 그리스도의 후사가 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복음 증거자의 무장
당당한 사도 바울은 3가지로 무장된 사람이었다.
첫째, 구원의 감격과 확신이다.
그에게 넘쳐흐르는 구원의 감격은 당신들 모두 나와 같기를 원한다고 담대히 고백하게 하는 힘이 되었다.
둘째, 자부심이다.
그의 말에는 나를 본받으라는 자신감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내가 비록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지만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진 예수 그리스도가 내게 생명 살리는 복음을 맡기셨다는 자부심이 그를 왕의 영화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위풍당당하게 했던 것이다.
셋째, 연민의 마음이다.
바울에게는 애타는 연민이 있었다. 그렇기에 예수 믿기를 그렇게 간절히 호소했던 것이다. 그들이 당할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를 생각하기에 그 영혼을 향한 안타까움이 있는 것이다.
깡패의 협박은 무서워하면서도
최근 어떤 분이 이사를 오셨는데, 호화로운 맨션에 살다가 매일 집 문에 협박 쪽지가 들어오자 두려워서 이사를 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봉변을 당할까봐 이사를 온 이 집을 보며 우리가 심판을 두려워한다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심판을 모르기 때문에 깡패의 협박은 무서워해도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10장 전도자의 완전군장
두려워하는 자
오늘 에스겔서의 주인공인 에스겔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두려워 선뜻 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오늘날 우리도 전도하라는 부르심을 받고도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내가 먼저 먹어야 할 말씀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먼저 에스겔에게 말씀을 먹도록 하셨다. 환상 중에 에스겔이 그 두루마리를 먹으니 그것이 다 뱃속으로 들어갔고 입에는 꿀처럼 달았다. 하나님은 왜 두루마리를 먹으라고 했을까? 그 이유는 말씀을 전하려면 먼저 내가 말씀을 먹어 소화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기 내면화이다.
심판의 말씀이 왜 꿀송이 같을까?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전하라고 주신 말씀은 듣기 좋은 얘기가 아니라 재앙의 말씀이었다. 그런데도 왜 에스겔의 입에는 꿀처럼 달았을까?
하나님의 인자와 은혜를 사모하면 심판과 저주의 말씀도 꿀처럼 은혜가 되기 때문이다. 그 분은 엎드리는 자에게 심판을 거두시고 긍휼과 자비로 위로하시고 은총을 베푸신다. 그러므로 겉으로 보기 써도 먹고 은혜를 받으면 달게 되어 있다. 우리도 먼저 자녀 삼으시는 주의 말씀을 먹어야 한다.
갈증을 품은 사람
나는 나를 위해 몸을 버리신 예수를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워지는 사람인가? 죄 용서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마다 알수 없는 힘이 솟구치는가?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은 사람이다. 그 단맛을 아는 사람이다.
말이 통하는 동족에게로
하나님은 에스겔을 자신의 동족에게로 보내셨다.
우리는 모든 족속에게 예수를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일차적으로 이웃과 동족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명령받았다.
얼굴에 깔아주시는 철판
하나님께서는 또 에스겔에게 담대한 마음을 갖도록 해주셨다.
에스겔서 3장 7절이다. 그 분은 에스겔이 전하는 말을 듣지 않을 이스라엘 족속에 대해 알고, 에스겔을 준비시키신다. 바로 8절,9절 말씀이다.
“내가 네 얼굴을 굳게 하였고 네 이마를 굳게 하되 화강석보다 굳은 금강석으로 하였으니 두려워 말고 그들의 얼굴을 무서워말라”고 하신다.
우리도 에스겔처럼 강심장과 철판 얼굴을 가진 담대한 전도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귀에 안 들어오는 말씀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전하라고 한 말씀은 예루살렘이 함락되면 앞으로 70년동안 바벨론에서 살아야 한다. 그리고 70년 후가 되면 그때는 내가 고국으로 너희를 돌려보내리라는 것이다. 그 후에 너희 마음이 온전하면 내가 유대를 다시 재건하리라는 것인데, 그들은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말씀을 주셨고, 복음을 전해야 했다. 예수의 소식이 우리에게는 기쁘지만 세상사람들에게는 미련하고 기분나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는 우리 힘으로는 안된다.
하나님의 성령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성령의 권능은 담대함으로 직결되며 이 권능이 없으면 소심해서 감히 주를 전하지 못한다.
예수 전사들의 수칙
얼마 전 감동적인 소식 한 가지를 들었다. 바로 북한에서 중국으로 넘어온 사람들 가운데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예수 전사들의 수칙이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천대받게 되어 있다. 그것이 긍지요 기쁨이다. 우리는 고난당하게 되어있으니 각오해야 한다.”
성령에 사로잡히면 이렇게 된다.
외쳐야 물들지 않는다.
소돔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을 앞두기까지 심지어 유황불이 떨어지는 그 아침까지 성문에 서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 어떤 노인이 있다고 한다. 어느 날 한 사람이 그 노인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아무리 당신이 외쳐도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는데, 어째서 날마다 외칩니까?”
그러자 노인이 대답했다.
“나는 그들이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도록 계속 외치는 것이오.”
가만히 있으면 나도 악해진다. 외쳐야 닮지 않는 것이다.
잠잠한 교회는 망한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가? 입을 열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아직 복음의 문을 닫지 않았는데, 나는 입을 닫아두지는 않았는가?
11장 희생 없는 전도 없다
전도, 죽은 자를 살리는 일
희생 없는 전도는 없다. 생명을 구하는 일에는 대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죄를 위해 예수께서 희생을 치르셨고 우리는 이것을 전한다. 사람들 보기에 미련한 짓으로 보여 손가락질을 받으나 이 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임을 믿어야 한다.
성삼위 하나님의 희생
이 세상에 전도만큼 귀한 것이 없다. 우리 역시 누군가가 나를 위해 베푼 희생 없이 어떻게 전도되었겠는가?
빚진 자의 의식을 안고
한국 교회를 한 번 생각해 보라. 27세의 나이에 선교의 비전을 품고 영국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한반도 조선에 성경을 전한 사람.
그는 대동강에서 관군의 칼에 맞아 죽었는데, 그 때에도 자신을 찌른 사람에게 성경을 주며 읽어보란 말을 잊지 않았고, 그가 그 말씀을 읽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이렇게 한국 교회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 빚진자의 의식을 잃어버리면 안된다. 하나님도 희생하셨는데 어떻게 희생없이 전도자가 되겠는가?
복음의 확산력
예수의 부활 소식과 성령을 접함으로 예루살렘의 백성들이 하루에 3천 명, 5천 명씩 회개하고 돌아오게 되었다. 온 도성이 구원을 얻은 것이다.
그러자 무서운 핍박이 시작되었다. 하루아침에 피난을 가야했던 것이다.
안디옥에서 일어난 기적
핍박을 피해 도망온 사람들이 복음을 들고 안디옥으로 들어왔다.
그들이 주를 전하자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했다고 말씀은 기록하고 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능력 있는 전도
이렇게 해서 그 도시에 교회가 생겨났다. 이 경이로운 짧은 부흥의 기록은 핍박을 피해 희생을 치른 복음 전도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성령이 역사하는 전도현장에는 반드시 생명을 거는 희생이 있다.
가슴 뭉클한 헌신의 사례들
친하지도 않은 사람을 위해 각별한 애정과 관심으로 기도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러한 수고 없이 어떻게 생명이 살아나겠는가?
우리 사랑의 교회 신문에는 신동 아파트 순장들이 지난 5월부터 그 지역 사람들을 위해 여리고성 기도를 시작했다는 소식이 있었고, 잠실 우성 다락방 어느 순장님은 3월부터 매주 월요일마다 순원들과 두 시간씩 그 지역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한다. 남이 싫어하는 동네 반장일도 전도를 위해 선뜻 맡는 사람들이 있기에 전도가 가능한 것이다.
가책을 받아야 한다.
카터 대통령의 글을 본 적이 있다. 제목이 “why not the best?"였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는가 라는 말이다. 그는 수십년 전 자기 교회 전도 집회에 10년동안 참가했으며 해마다 전도 집회가 있는데 매연 14가정씩 책임지고 전해 10년동안 140가정을 전도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그가 1966년에 주지사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는데 당시 선거 운동 때문에 3개월동안 30만명의 사람과 악수한 것이 생각나 마음에 가책이 되었다고 한다. 하나님을 위해서는 10년 동안 겨우 140가정에 복음을 전하더니 나를 위해서는 3개월동안 30만명을 만나는구나 생각이 들어 보통 부끄럽지 않더라는 것이다.
우리도 이 정도의 가책을 받고 사는가?
희생이 아닌 특권으로
지금까지 전도에는 희생이 따른다고 말했지만, 사실 이것을 무슨 대단한 희생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주님의 희생에 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나의 구원을 위해 내가 빚진 것이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상급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생각할 때 그것은 결코 희생이 아니며 영광스런 특권이 되는 것이다.
감동 받으면 장기도 내놓는데
지난 달 사랑의 교회 성도들이 장기 기증을 약속했는데, 한꺼번에 5,268명이나 되어서 매스컴에도 보도가 되었다. 어디서 이런 힘이 나오는가?
하나는 내가 희생해서 다른 사람이 산다니 가치있는 일이다라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 때 설교하신 목사님의 말씀에 감동했기 때문이었다. 육신의 생명에 비하면 영혼을 살리는 것은 얼마나 더 중한가?
사람에게 감동 받아 장기도 내놓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동되면 무엇을 아까와하겠는가?
쓰임 받은 소수의 제자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자기 전부를 불태울 수 있는 열정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만이 하나님의 음성을 사람들의 영혼에 전해줄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눈뜨게 할 수 있는 것이다.
12장 성경이 되고 성경을 전하라
성경으로 깨어난 한민족의 역사
우리나라는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성경이 먼저 번역되었다.
명실공히 하나님 말씀이 신구약 합본이 되어 들어온 것이 1938년으로, 솔직히 한국에 지금까지 기독교가 안 들어왔다면 경제 수준이 어느정도겠는가? 기껏해야 태국이나 미얀마 정도가 아니겠는가?
우상숭배에 하릴 없이 담배나 두들기던 민족이 하나님 말씀에 눈뜸으로 그 인생이 달라진 것이다.
순종할 책임, 증인될 책임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 각 개인에게 온 편지이다. 이런 정성스런 편지를 매일 읽고 묵상할 책임이 우리에게는 있다. 또한 이것을 전할 책임이 우리에게는 늘 있다.
성경 번역에 생명을 바치는 이들
지구상에는 아직도 성경을 갖지 못한 종족이 있고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언어학자들이 있다. 소수 부족과 함께 살아가면서 성경 번역을 하는 이들은 지구상에 약 2천명 정도가 흩어져있다. 사랑의 교회에서 파송된 정제순 선교사는 파푸아뉴기니 메께오 부족에게 11년만에 신약을 번역해 하나님께 드렸고 앞으로 구약을 위해서 15년 정도의 헌신을 더 해야 한다고 한다. 이런 성경을 언제든지 읽고 가질 수 있으면서 전하지 않는 우리는 부끄러움을 가져야 한다.
4부 황홀한 기쁨을 가진 전도자
13장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기쁨
저주받기로 낙인찍힌 죄인들
세리, 창녀, 죄인은 유대에서 멸시받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구원받지 못하도록 낙인찍힌 자들로 여겨졌고 아무도 이들과 상종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을 다르게 보셨고 그것을 나타내고자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다.
인간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
돌아온 불효자와 큰아들의 분노가 있는 탕자의 비유를 보며 사실 우리 인간으로서는 탕자가 돌아온 것에 대해 정말 잔치까지 하며 기뻐할까 싶을 정도로 우리는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흉악범이 예수 믿는 경우
약 5년전 제프리 다머라는 사람이 미국의 텔레비전에서 방송되어 관심을 끈 일이 있었다. 그는 열 일곱 명의 여자를 욕보이고 살해한 뒤 시체를 토막내어 냉장고에 넣은 사람으로 아주 흉악범이었다. 그런데 그가 사형언도를 받고 복역하다가 하루는 동료 죄수들의 싸움에 어이없게 맞아 죽게된 것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사람이 감옥에서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아 날마다 성경을 읽으며 살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세상 사람들과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가 너무 편하게 죽었다고 분개했고 어떻게 그런 자가 구원을 받는지 위선이라는 반응으로 나타났다. 이 논쟁 후 아나운서는 마지막에 이런 말로 코멘트를 마쳤다.
“오늘 저녁 편안한 마음으로 텔레비전 앞을 떠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겁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가? 흉악범이 회개하는데 왜 사람들 마음이 불편한가? 우리는 바로 탕자의 비유의 큰 아들 같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비친 교회의 이미지
교회 역시 마찬가지다. 탕자가 돌아왔다고 춤추는 모습이 아니라, 분노하는 모습을 보이기 쉬운 것이다. 탕자가 교회에 돌아오면 사람들은 속으로 분노를 품고 멸시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니다.
기독교 복음의 본질
이것은 기독교 복음의 본질을 말해주고 있다. 예수님은 누가 누구보다 더 악하다는 이유로 그들을 구원에서 제외시키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히틀러에게 핍박당하여 망명 다니던 많은 사람 중에 칼 바르트라고 하는 유명한 신학자가 있었다. 그가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중에 한 신학생이 와서 지금이라도 히틀러를 만난다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물었다. 질문을 받은 칼 바르트는 엄숙하고 진지하게 말했다.
“히틀러 총통,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가 말하는 핵심이 무엇인가? 그것은 비록 히틀러일지라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며,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인 것이다.
전도 대상, 차별하지 말자.
만약에 저런 것이 구원을 받아? 할 정도로 미워하는 마음이 있어 한 번도 전도하지 않고 젖혀 둔 사람이 있다면 회개하고 하나님 사랑을 담아야 한다. 하나님이 슬퍼하시기 때문이다.
14장 복음과 성령의 능력으로 하는 전도
희한한 일
동남아를 비롯해 중국 등지에서 돈을 벌러 한국에 온 사람 중에 전도를 받아 고국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작별을 하며 이렇게 말한다.
“집사님, 저는 돈 벌러 한국에 왔다가 예수를 만났습니다. 이제 모슬렘 부모, 형제, 동족을 전도하러 돌아갑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생명을 바쳐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도해주십시오.”
몇 마디 말이지만 그 말로 전도를 받아 이처럼 변화되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은 무용지물
바울은 고린도전서2장에서 전도하는데 있어 두가지 무용지물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이며 둘째는 자신감이다.
달변이라고 해서 전도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전도에는 자신감도 필요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는 3절에 자신이 그들 가운데 거할 때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고 하나님께 맡기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이다. 내가 이 사람들을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은 아무 도움이 못 된다는 것이다.
복음 자체가 능력
그렇다면 바울이 말한 전도할 때 꼭 필요한 두가지는 무엇인가?
하나는 복음이다. 아무 논리적 설득 없이 그냥 사실을 전하는 것이다. 모든 능력은 복음 자체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설교를 읽기만 한 조나단 에드워즈
미국 교회가 자랑하는 신학자요, 철학자이며 프린스턴 대학의 초대 총장인 조나단 에드워즈는 주일 강단에서 설교할 때마다 고개를 원고에 숙이고 읽기만 했다고 한다. 평생 이 방법으로 설교를 했는데 그는 자신이 성령에게 거스르는 말을 하는 것을 허락하고 싶지 않아 철저히 원고에 의존한 설교를 했다. 그런데도 그의 설교를 통해 가슴을 치고 데굴데굴 구르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으며 통회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
두 번째 전도에 꼭 필요한 것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다.
바울은 자신의 말과 전도함이 지혜의 말에 있지 않고 오직 성령의 능력에 있었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이제껏 전도를 받아도 별로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는데 어떤 집사님의 권함을 받고는 마음이 뜨거워져 교회로 나왔노라고 고백한 일도 있다. 이것은 성령의 능력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미련함의 역설
그러므로 전도할 때는 제일 미련해 보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세상 물정 전혀 모르는 할머니가 전도지 가지고 다니며 얼마나 전도할 것 같은가? 지하철에서 전도지 나눠주는 것으로 얼마나 교회에 나올 것 같은가? 그러나 놀라운 일은 이렇게 우습게 보는 전도에서 일어난다.
커뮤니케이션과 컨프런테이션
전도는 커뮤니케이션(의사소통)이 아니다. 전도는 컨프런테이션(대결)이다.
전도는 영적 전쟁인 것이다.
전도는 영적 전쟁이다.
그러므로 기도가 무엇인가? 바로 이 영적 전쟁에서 우리 주변에 이웃들이 눈을 가려놓고 마음을 혼미케 하는 악령의 역사를 쫓아 달라는, 눈을 열어 달라는 간구가 기도이다. 성령과 악령 중에 누가 강한가?
중범죄 교도소 안에 서 계시던 예수
최근에 읽은 책에서 이런 이야기가 있다.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교도소인 아프리카 잠비아 교도소에 중범죄인만 따로 수감하는 야생동물 우리 같은 곳이 있다고 한다. 그 곳은 뜨거운 태양아래 변기 조차 없는데다 사방 5미터 정도의 좁은 곳에 매일 23시간씩 120명이 갇혀 있다고 한다.
그런데 한 무명의 전도자가 이곳에서 예수를 전했고 그중 80여명이 예수를 믿고 변화되었다. 놀란 론 박사와 찰스 콜슨 박사가 그 감옥을 방문했는데, 놀랍게도 80명이 우르르 일어나 그 감옥에서 4부로 찬양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들은 흥분하고 말았다. 지옥 같은 환경에도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하는 것이다.
15장 세상이 알지 못하는 행복체험
행복의 바위
예수 믿는 분들이 가끔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듣곤 한다.
“예수 믿는 재미없이 무슨 맛으로 세상을 삽니까?”
예수를 진짜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이런 고백이 있다.
실종된 행복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회를 다니면서도 이 행복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어느 편에 속해 있는가? 정말 행복한가? 만일 아니라면 그것은 비정상이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한 답은 요한 일서 2장 15절에 나와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치 말라”는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동시에 세상을 사랑하니 행복이 없는 것이다.
최고의 사랑, 최고의 요구
하나니은 우리에게 최고의 사랑을 주셨다. 요한일서 3장 1절 말씀을 보라.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기에 최고의 요구를 하신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하나만 택하라
세상에 마음을 주고 사랑을 주기 시작하면 우리 생각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그래도 여전히 남아있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 사랑은 떠나버린다.
하나님은 그렇게 불순한 마음에 거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세가지 미끼
첫째 미끼 : 육신의 정욕
이것은 소유욕을 의미한다. 가지면 가질수록 점점 더 갖고 싶은 것이 바로 소유욕이란 것이다. 이 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끝이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원하는 대로 다 얻고 산 솔로몬도 전도서에서 말한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둘째미끼 : 안목의 정욕
이것은 오감을 통해 즐기려는 욕구이다. 눈은 보아도 만족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않는다는 전도서 말씀처럼 이 역시 끝이 없다.
셋째미끼 : 이생의 자랑
이것은 과시욕이다. 명성, 부, 지혜 등 이른바 무대 기질이라는 것이 인간에게는 있다. 그러나 이것도 끝이 없다.
세속화의 위험
이렇게 소유욕이나 과시욕, 쾌락욕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금방 마음이 쏠린다. 예수를 믿고 사랑하겠노라고 결심하고서도 조금만 마음을 놓으면 세상을 닮아가고 세상에 동화된다.
하나님의 불안
신명기 8장 12절을 보자.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안 믿어도 잘산다?
우리는 이제 풍족한 삶을 누리기에 안 믿어도 잘 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 잠언 기자의 기도를 우리도 드려야 한다.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옵소서. 혹 내가 배풀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잠깐 있다 지나가는 것
서양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돈은 분뇨와 퇴비 같아서 그것을 쌓아두면 악취가 나지만 흩어 버리면 땅을 비옥하게 한다.”
이제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자. 돈을 열심히 벌되 사랑하지는 말자.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되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는 말자.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한 것이지 하나님 대신 사랑해야 할 것은 아니다.
16장 신랑을 위한 신부수업
소망은 교회 밖에 없다.
얼마 전 한 장로님이 꿈을 꾸셨는데, 꿈에 불국사에 갔더니 십자가가 세워져있고, 지리산에 갔더니 화엄사라는 절에도 십자가가 있길래 놀랐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하는 말이 한국의 소망은 교회 밖에 없다라고 했다.
윌리엄 버클레이가 40년을 교회에서 봉사하고 한 말도 이것이었다.
“나는 교회를 믿는다.”
세상에 믿을 것은 교회밖에는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꿈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유일한 꿈이다. 신부를 사랑하는 신랑은 그 마음에 꿈이 있다. ‘내가 저 여자랑 결혼하면 이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게 해주어야지.’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자기의 사랑하는 신부인 교회에 대한 꿈을 갖고 계신다.
신부수업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한 우리 모두가 바로 그 신부이다.
신부가 되기 위해 우리도 신랑을 기쁘게 할 것들을 준비해야 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예배
먼저 예배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는 과연 삶의 모든 우선 순위를 예배에 두고 있는가 생각해보자.
둘째/ 교제
교회를 일컬어 성도의 공동체라고 한다. 우리 몸에도 많은 세포가 있는데 유독 암세포는 혼자 노는 세포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가 세력을 확장해 악성 종양을 만들어 몸을 파괴시키는 것이다.
셋째/ 전도
장차 결혼할 날을 앞당기는 일이 바로 전도이다.
넷째/ 봉사
다섯째/ 배움
더 중요한 오른 손
그러려면 우리는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언제 전도하고 배우고 교제하며 예배드리고 봉사하나? 교회에서 아주 살아야겠구나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는 손이 둘이다.
왼손만으로 사는 사람도 장애자고 오른 손만으로 사는 사람도 장애자다.
마찬가지로 이 다섯 가지가 중요하듯 먹고 마시고 일하고 즐기며 쉬는 것도 중요하다. 이 다섯 가지가 병행되어야 건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먹고 마시는 다섯 가지만 하면 우리는 겉사람만 강건하게 하는 것이고 예배드리고 전도하는 다섯가지만 하면 우리는 속사람만 강건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겉과 속을 다 경건히 하는 것이 중요하나 속을 먼저 우선시 하면 겉은 갖추어지게 된다.
아름다운 신부가 되도록 교회 생활과 멋진 삶을 잘 이끌어가기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