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63
2월11일[연중 제6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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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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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eBTi1KEfyIY
[서울대교구 김평만 유스티노 신부님 집전(가톨릭중앙의료원 영성구현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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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가 고통을 잘 참아 견딜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게 됩니다!>
오늘 세계 병자의 날인 동시에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그러나 주일과 겹치는 관계로 전례 우선순위에 밀 오늘은 기념없음으로 표시됩니다. 돌아보니 저도 이런저런 병고에 참 많이 시달렸습니다. 특히 30여 년 전에는 상태가 심각해 고민이 참 많았습니다. 은혜롭게도 그때 마침 루르드에 갈 일이 생겼습니다. 원래 제가 갈 상황이 아니었는데 갑자기 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루르드에 딱 도착했는데, 당시 1월 초순이었는데, 아직도 그 따뜻하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기억에 생생합니다. 동굴 제대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루르드의 성녀 베르나테트의 생가를 방문하고, 사흘 내내, 묵주기도와 함께 루르드를 산책하였습니다.
루르드에 머무는 동안 한 가지 따뜻한 느낌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동안 이 세상에 나 혼자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성모님께서 평생토록, 사시사철, 시시각각으로 제 인생 여정에 동반하고 계셨음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드니 병고로 인해 제 내면에 고착화되어 있던 근심 걱정과 불안한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무엇보다도 성모님께서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저를 꼭 안아주신다는 느낌이 참 행복했습니다. 성모님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했습니다.
“잘 왔다. 내 아들아! 그간 얼마나 고생 많았느냐? 아무 걱정하지 말거라. 내 아들 예수님께서 잘 알아서 해주실 것이다.”
오늘 세계 병자의 날입니다. 병자들의 위로요 안식처인 성모님께서 병고로 고통받고 있는 이웃들을 따뜻하게 안아주시고, 극복 가능한 질병은 치유시켜주시기를 청해야겠습니다. 병자들이 자신에게 다가온 병고를 통해 주님의 고통과 수난에 더 깊이 참여하며, 더 영적으로 변화되길 더불어 청해야겠습니다.
또한 우리가 지니고 있는 병고에 대한 오해과 편견도 바로 잡아야겠습니다. 과거에는 병에 대한 오해가 참 많았습니다. 유다 문화 안에서도 나병은 천형으로 여겼습니다. 무엇인가 크게 잘못했기에 그 벌로 인한 병이라는 것입니다.
안그래도 병고와 맞서느라 죽을 지경인데, 당시 환자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의 손가락질까지 받았으니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오늘 우리 안에서 병고에 대한 오해나 편견이 남아 있습니다. 누군가 시한부 판정을 받게 되면, 조용히 기도해 드리고, 투병을 위한 도움을 드리기보다는 다들 뒤에서 수군거립니다. 그렇게 절친하게 지냈던 관계인데도, 병문안 한번 가지 않습니다.
“그 소식 들었어? 누구누구가 말기암이래? 그렇게 퍼마시더니, 그때부터 내가 알아 봤어. 아직도 갈 길이 구만리인데, 처자식들은 어짠댜?”
병이라는 것은 결코 죄에 대한 벌이 아닙니다. 무조건 적대시하고 원망해서도 안됩니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까칠한 손님 같은 존재입니다. 잘 다스리고 보살피며 극복해 나가야 할 대상입니다.
병고를 통해 우리는 우리 각자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게 됩니다. 병고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에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병고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나약하고 허물어지기 쉬운 존재임을 알게 되고, 영원한 보루이신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됩니다.
많은 환자들께서 품는 의문이 한 가지 있습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투병 생활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투병하느라 돈이란 돈은 다 까먹고, 주변 사람들 힘들게 하고...
절대로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고통을 잘 참아 견딜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꺼이 우리의 병과 맞설 때, 우리가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갈 때 우리는 예수님처럼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세계 병자의 날을 맞아 모든 환자 여러분들, 여러분의 삶에 분명히 가치와 의미가 있음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뿐만아니라 환자 여러분도 병실 안에서, 병과 함께 훌륭한 사도직에 참여할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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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ZPiumrfzmg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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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 때문에 지옥문도 열렸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 환자는 믿음으로 치유를 받습니다. 무슨 믿음일까요? 주님은 자비로우시고 능력자시라는 믿음입니다. 거기다가 하나의 믿음이 더 있습니다. 바로 자신이 그런 은총을 청할 ‘자격’이 있다는 믿음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께 강아지 취급을 당하면서도 강아지도 주인 자녀들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는다며 자신이 은총을 청할 자격이 있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고려하여 그녀의 믿음을 칭찬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치유된 나병 환자는 처신을 잘못합니다.
예수님께서 함구령을 내리셨음에도 이야기를 널리 퍼뜨리고 다니십니다. 나병 환자를 치유해주셨다는 소문은 많은 나병 환자들을 불러 모으게 될 것이고 또한 예수님도 부정하게 되셨을 것이기에 비난의 대상도 되실 수 있으십니다.
어쨌든 이러한 불순종은 예수님께서 더는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게 만듭니다. 이 말은 치유를 입은 나병 환자가 오히려 그 받은 은총으로 예수님과 멀어지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은총은 언제나 은총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는 지옥에 이르는 문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거부할 때 지옥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는 저승에 선인과 악인이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은총의 피를 흘리신 후 그곳에 남아 있는 이들은 지옥을 살게 됩니다. 천국도 그렇지만 지옥의 문도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 때문에 열립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죽을죄를 뉘우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죽는 것은 곧 영원히 하느님과 헤어져 있겠다고 우리 자신이 자유로이 선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옥’이라는 말은 이처럼 하느님과 또 복된 이들과 이루는 친교를 결정적으로 ‘스스로 거부한’ 상태를 일컫는다.”(1033항)
지옥이란 구원의 은총을 스스로 거부한 이들이 가는 곳입니다. 이스카리옷 유다처럼 천국의 은총을 맛보았으면서도 스스로 거부한 이들은 지옥을 체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19살에 177억 복권에 당첨된 마이크 캐롤이란 영국 사람이 있습니다. 이전 그의 인생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부모의 이혼과 새 아버지의 폭력으로 모든 면에서 비뚤어지는 아이로 성장하였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자존감이 아닌 열등감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열등감은 자격이 없다는 스스로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돈을 얻게 되니 자기 열등감을 그것으로 올리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방탕한 생활로 4년 만에 다 탕진하고 청소부와 공장 노동자를 하며 간신히 살아갑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그런 삶을 살기는 했지만, 훨씬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돈의 맛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미 받은 모든 것들이 은총입니다. 그 은총에 합당하게 응답하지 못할 때 더 큰 은총은 오히려 더 큰 고통의 원인이 됩니다.
신화에 따르면, 포세이돈은 크레타의 미노스 왕에게 크고 흰 황소를 주었는데, 그 황소는 다시 신에게 제물로 바쳐져야 했습니다. 미노스 왕은 그 황소를 이용해 왕이 되었음에도 신에게 다른 황소를 바쳤습니다. 분노한 포세이돈은 그 황소가 왕비와 사랑에 빠지게 만들이 사람을 잡아먹는 미노타우로스가 태어나게 하였습니다. 미노스는 어쩔 수 없이 미노타우로스를 미로에 가두고 산 사람을 계속 제물로 바쳐야 하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지옥을 살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총이 저주가 되지 않게 하려면 그것들에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이미 은총을 받았습니다. 이미 에덴동산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은총에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땅의 소출의 십분의 일은 감사히 주님께 바쳐야 했지만, 바치지 않아 생명나무를 먹지 못하고 쫓겨납니다. 생명나무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아브라함은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멜키체덱에게 바칩니다. 멜키체덱은 아브라함에게 축복해 주기 위해 빵과 포도주를 가져 나왔습니다. 이것이 미사의 상징입니다. 미사는 은총 중의 은총인 생명나무, 곧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미 받은 은총으로 우리 자격이나 높이려 십분의 일도 봉헌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성체성사가 오히려 지옥으로 가는 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축복으로 받은 외아들 이사악까지 감사히 바치려고 했음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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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금부터 4년 전입니다. 2020년 2월입니다. 대한민국에 코로나 환자가 급격하게 늘었습니다. 그동안 방역당국에서 철저하게 관리를 해서 대한민국은 코로나 청정지역이었습니다. 원인은 방역당국이 정한 안전수칙을 어기고 집회를 가졌던 모 종교집단에 있었습니다. 코로나에 감염된 신도들이 가족들과 친구들을 만나면서 코로나가 전국적으로 번져나갔습니다. 방역당국은 원인을 찾았고, 종교집단도 모이지 않으면서 코로나는 진정세로 돌아섰습니다. 가톨릭을 비롯한 다른 종교는 정부의 방역대책에 적극 협조하였습니다. 박해시대에도 계속되었던 미사가 중단되었습니다. 거리두기와 마스크 쓰기에 적극 동참하였고, 대한민국은 3T(Trace, Test, Treatment), 추적, 검사, 치료라는 방법으로 코로나 확산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해 3월 27일 사순 제4주일 금요일 저녁, 교황님은 코로나19 대유행의 시기에 특별 기도를 주례했습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홀로,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께 자신을 의탁하도록 인류를 초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교황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로, 그 어떤 것도, 그 누구도, 구원자이신 주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낼 수 없도록, 우리가 치유되고 그분의 품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두려워 떨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대한민국의 소방대원과 간호사, 의사들은 모두 한 마음이 되어서 코로나 환자들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전국의 소방대원들은 코로나 환자가 급증하였던 대구로 내려가서 환자들을 이송하였습니다. 소방대원들의 차량이 대구로 향하는 모습에 가슴이 울컥했습니다. 자발적으로 환자들을 돕기 위해서 대구로 향했던 간호사들의 충혈 된 눈, 지친 얼굴, 바닥에 앉아 빵을 먹는 모습은 감동이었습니다. 코로나 방역의 최전선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던 의사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다 본인도 코로나에 감염되어 쓰러지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대한민국의 코로나는 이렇게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아픈 사람과 함께 하려고 했던 분들의 땀과 눈물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중국과 베트남에서 돌아온 교민들이 있었습니다. 용인과 아산의 주민들은 ‘우리는 교민들을 환영합니다.’라는 현수막을 걸었습니다. 멀리 타국에서 온 교민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쉼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저는 뉴욕에 있었습니다. 의료 선진국이라는 뉴욕도 코로나의 확산을 막지 못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안타깝게도 사망하였습니다. 돌아가신 분들의 장례를 치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제게 안부 전화를 할 정도였습니다. 우리는 코로나의 터널을 지나왔지만 생각해보면 우리의 나약함을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부정한 사람은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3,000년 전인 구약의 시대에 감염병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없었을 것입니다. 방역의 차원에서 격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두려움’입니다. 병에 걸린 사람이 곁에 있으면 같이 병에 걸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죄인과 함께 있으면 죄에 물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월감’입니다. 우월감이 개인과 집단에서 발생하면 ‘따돌림’으로 드러납니다. 사회와 국가적인 차원에서 발생하면 ‘민족차별’로 드러납니다. 노예제도, 식민지 건설, 유태인에 대한 차별이 있었습니다. 두려움은 낯선 이웃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우월감은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부정한 사람을 두려워해서 멀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부정한 사람을 따뜻하게 맞이해서 사랑으로 돌보라고 하십니다. 부정한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부정한 사람도 치유될 수 있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함께 지낼 수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 나는 이스라엘의 아픈 사람을 위해서 왔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움 때문에 선행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우월감으로 약하고, 병든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제2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나처럼 하십시오. 나는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내가 아니라 그들에게 유익한 것을 찾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오늘은 세계 병자의 날입니다. 우리들 또한 따뜻한 마음으로 주변에 아픈 이들과 함께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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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40-45: 그는 나병 증세가 사라지면서 깨끗이 나았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나병환자를 치유해 주시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다. 실제로 나병은 육체를 기형적으로 바꾸고 잠재적으로 전염성을 갖기 때문에 무서운 공포를 주는 병이다. 유다인들에게 있어서도 나병은 가장 고통스럽고 혐오감을 주는 병이었다. 레위기에도 나오지만, 나병에 걸리게 되면 다른 사람들과 철저히 격리되어 아무에게도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레위 13,45-46). 떠돌아다니는 시체에 불과했다. 그들은 하느님과 인간들에게 저주받은 자들로 여겨졌다. 이 나병환자의 간청을 듣고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께서 버림받은 인간에 대해 가지신 연민과 느끼신 고통의 의미를 알 수 있다.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41절)라는 말씀의 연민은 바로 뱃속까지 자극하는 고통의 의미이다. 그 고통은 그 나병환자가 현실적으로 당하는 불의한 사회적 상황 때문에 더 컸을지도 모른다.
예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 나병환자에 대시며(41절) 법을 어기는 행동을 하시지만 나병환자는 깨끗이 낫게 된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41절)는 말씀은 그를 온통 죽음으로부터의 부활과 같은 치유의 기적을 이룬다. 이 죽음으로부터의 부활과 같은 체험 때문에 나병환자는 예수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 체험을 널리 선전하여 퍼뜨리고 있다.(45절)
예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그에게 일어난 일을 말하지 말라고 하시면서도 한편으로는 사제들에게 가서 보이고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44절) 레위기의 규정대로 나병으로부터 깨끗해진 데 대한 감사의 예물을 바치라고 명하신다. 이것은 우선 우리가 항상 하느님의 은총 앞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감사의 표현은 말로써 뿐 아니라, 행동으로도 표현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먼저 감사의 표현을 하여야 하겠고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것으로 참된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될 수 있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아마 이 병은 기적적으로 회복이 되었어도 다시 사회에 복귀하기까지는 또 다른 검증과정을 통해 고통을 당하게 된다. 그러기에 그 기억은 예수님께 오래도록 남아있을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이 나환자를 통하여 장차 당신에게 닥칠 야훼의 고통받는 종, 즉, 나병환자처럼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고 천대받아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피해갈 만큼(이사 53,3-4)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모될 운명을 예견한 것이다. 당신이 행하시는 사랑과 정의에는 관심이 없고 불결과 깨끗함을 가리는 논쟁에만 힘을 소비하며,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끌어갈 구실을 마련하려고 하여 당신이 베푸시는 사랑의 행위를 왜곡하려는 사람들에 대해 느끼는 내적인 아픔의 표현이라 하겠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떤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병을 고쳐주기 위해서 손을 갖다 대는 것으로 충분하다. 더 이상의 다른 행위가 필요치 않다. 그러나 그 기적이 완전한 것이 될 수 있으려면, 인간 사이의 혹은 민족 사이의 갈등과 경계가 모두 극복되어 한 형제가 되어야 한다. 이 때문에 예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또 예수께 그 기적 후에 많은 사람이 떼를 지어 몰려가지만, 그분은 백성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또 한 번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 된다. 지금의 모든 가르침은 오로지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서 충만하게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그 때문에 그때까지는 모든 것이 비밀에 싸여있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메시아의 비밀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예수님의 선교 사명이 자칫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아니즘으로 왜곡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자칫 현세적인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것일 때, 그것은 참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다. 이러한 기복적인 신앙을 벗어버리고 진정으로 나 자신과 사회의 변화를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그래서 우리의 자제와 희생이 요구된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나처럼 하십시오. 나는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내가 아니라 그들에게 유익한 것을 찾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1코린 10,31-11,1). 이것을 나병환자의 치유에 적용해 볼 때, 우리는 예수께서 하신 것처럼, 평범한 생활 테두리를 넘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생길 때에도 기꺼이 수락하면서 우리의 사랑의 행위를 펴나가기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의 도움을 간절히 청했던 나환자에게 손을 대시어 치유해 주신 예수님과 같이 그리고 모든 삶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초대하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우리가 살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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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이스라엘에서 나병에 걸린 사람은 부정한 사람으로 여겨져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레위 13장 참조) 그래서 그들은 “부정한 사람이오.” 하고 외쳐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다가오지 못하게 하여야 하였습니다. 그렇게 나병 환자들은 예루살렘과 다른 성곽 도시에 들어가지 못하고, 따로 떨어진 곳에서 살아야 하였습니다. 그들은 사회 공동체에서 배제되었고, 이러한 배제는 그들의 마음에 큰 상처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몸뿐만이 아니라 마음도 아픈 이들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를 깨끗하게 하여 주십니다. 주님의 자비는 나병 환자의 몸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까지도 어루만져 주십니다.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제에게 치유 사실을 인정받고, 다시 공동체로 돌아가라는(레위 14,2-32 참조)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이제는 더 이상 너를 배척하는 자들이 없으니 공동체로 돌아가도 된다.’는 뜻으로 나병 환자의 마음에 난 상처를 낫게 하는 따뜻한 위로로 들립니다. 몸의 병은 마음과 깊이 연결되어 있고, 오랜 병고로 고통받은 이들은 마음도 함께 약해져 있기에 병자들의 마음도 치유되도록 함께 기도하여야 합니다.
거동이 불편한 병자와 장애인들이 루르드 성모 발현 성지를 순례하도록 함께하여 주는 단체(UNITALSI)가 있습니다. 이들은 지붕을 떼고 중풍 병자를 내려 준 사람들의 마음으로(마르 2,4 참조) 병자들의 루르드 순례에 함께하는 이들입니다. 이 단체에서 활동하는 이들은 순례를 통하여 병자들의 내면이 치유되는 수많은 체험을 합니다. 병자들은 순례 가운데 자신과 함께하며 도움을 주는 사람들을 통해서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깨닫고, 공동체의 사랑을 느끼면서 마음의 상처가 낫는 기적을 체험한다고 합니다.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이 주님의 사랑과 공동체의 사랑 안에서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치유되도록 주님의 자비를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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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박경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주교좌 기도 사제)]
<예수님께서 가없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마르14)>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치유하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나병 환자를, 제1독서에서 들은 레위기 말씀이 전하듯이, '부정한 사람'(또 는 '죄인)으로 여겼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공동체에서 격리되어야 했습니다. 신체적 고통에 더해진 공동체에서의 배제와 '부정한 사람'이라는 사회적 인식은 병자를 더욱 고통스럽게 하였을 것입니다. 심지어 스스로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기까지 해 이는 그들이 더욱 극심한 절망에 빠지는 이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질병으로 인해 절망의 심연에 놓인 한 사람이 용기를 내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죽음과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 살기 위해 찾아온 사람을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으로 보셨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사람들이 부정한 사람이라 여기며 피하는 이를 예수님께서는 가엾게 바라보십니다. 질병으로 일그러진 그의 몰골이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는 그를 부정한 존재로 바라보게 하는 이유가 되지만, 예수님께는 그의 아픔과 갈망을 보는 계기가 되고 있음을 복음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의 일그러진 얼굴만 보며 피하지만, 예수님은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보시고 그에게 다가가서 손을 대심으로써 그를 낫게 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직접 병자에게 손을 '대셨다'고 전합니다. 손을 내밀어 환자에게 대는 행위는 상대의 신체적 고통과 절망을 함께 느끼고 위로하며 있는 그대로 사람을 받아들이는 공감을 드러냅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은 죄인이자 공동체의 안녕을 위협하는 부정한 존재 취급을 받으며 소외와 차별을 겪어야 했던 사람, 그 아픔 때 문에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불행에 놓인 사람을 향한 하느님의 특별한 자비와 위로를 보여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와 잘못으로 상처 입은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며, 위로하시고 용서하심으로써 낫게 하신다는 것을 오늘 복음은 일깨웁니다. 그러한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희망하며 주님께로 나아가도록 우리의 의지를 북돋아 줍니다. 이처럼 아픔과 고통 너머에 있는 갈망과 사람을 보고 자비의 손을 내미시며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도 있는 그대로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이 되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깨달음에서 비롯되는 자신에 대한 사랑은 더 나아가 이웃의 아픔과 고통 안에 자리하고 있는 '사람'을 볼 수 있도록 우리의 눈을 열어주며 그에게 자비의 손길을 내밀도록 이끌어줍니다. 이러한 형제애가 우리를 치유하고 회복시키며,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사회의 건강을 유지시킨다는 것을 기억하며, 형제애로 가득차는 은총을 구하는 우리가 되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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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고을》 빛의 소리
[광주대교구 조영선 베드로 신부님]
<치유받으려는 용기>
오늘 복음은우리에게 죽음과도 같은 절망 속에서도 간절한 믿음으로 예수님께 다가갔던 나병환자의 치유 이야기를 통해 당신께 다가온 사람을 온전히 치유해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영적치유의 과정을 보여줍니다. 복음 속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는 이의 태도와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을 통해 온전한 치유의 과정이 어떠한 것인지 한 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치유의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치유를 청하고자 예수님께 다가온 나병환자의 용기와 믿음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접촉이 철저히 차단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당시로서는 자신의 목숨을 거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이 나병환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주님께 나아갔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깁니다. 그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서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라고 말합니다. 무릎을 꿇는 행위는 부족한 자기 자신에 대한 인정과 더불어 겸손한 자세로 예수님께 경의와 존중을 표현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나병환자는 자신이 바라는 대로 주님께서 이루어 주시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는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의탁하고 있는 것이죠. 이는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기 위한 중요한 자세입니다. 결국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나병환자의 이 믿음이 버림받은 자신의 인생을 살리는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주님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무릎을 끓어 청하는 나병환자의 모습은 예수님의 마음에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불러일으켰고 예수님은 주검과도 같은 그에게 손을 내밀어 그를 만지시고 치유해 주십니다.
오늘 나병환자는 죽음을 무릅쓰고 예수님께자기 병을 가지고 나아감으로써 치유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용기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 곁으로 다가오기를 바라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부족함이나 잘못에 대해 늘 측은한 마음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 1,41) 이것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소외나 차별 없이 누구나 다 함께 어울리며 살기를 바라시는 자비로운 주님입니다. 그런 예수님께 용기 있게 나아갑시다. 우리의 모든 상처와 아픔을 알고 계시는 그분께서 우리를 치유해 주시고 힘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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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주보》 주일의 말씀
[대구대교구 신성원 세례자 요한 신부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언어는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공감하는 것 중에 하 나는 "아픈 것=싫은 것"입니다. 아픈 것을 즐겨 하거나 좋아하는 사람은 좀처럼 찾기 힘들고, 많은 사람 들이 아픈 것을 피하려고 여러 대안을 찾습니다. 오늘날 몸이 아픈 것이 싫어서 병원을 찾듯이 과거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했을 때는 그분을 찾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싫은 것을 회피하기 위해서 예수를 찾은 사람들의 태도는 다양했습니다. 누구는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 했고(마르 1,30), 다른 누구는 예수님께서 병을 낫게 하시고자 하시면 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고백( 마르 1,40)하기도 하였습니다. 반면 이와는 다른 태도로 일관하던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증거나 표징으로 치유를 요구하였습니 다.(마르 8,11) 이 두 태도를 지닌 사람들 중 치유받은 이들은 전자였습니다. 전자는 아픈 것이 싫었고 그래서 아픈 것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면서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후자는 예수가 싫었고 시험하기 위해서 예수와 마주합니다. 그 대표적인 모습들 중 하나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치유를 통해서 복음의 정신을 드러내고자 하신 질문에 드러납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마르 3,4) 이 질문을 듣고 바리사 이들은 예수를 없애고 싶은 마음을 품게 됩니다. 이 마음은 바로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표현할 때 많이 등장하는 "완고한 마음"으로 통합니다.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를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갖지 마라.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처럼, 반항하던 때처럼, 거기에서 너희 조상들은 내가 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떠보며 시험하였다.”(히브 3,7-9)
우리들이 아픔을 겪을 때 우리는 어떠한 태도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지 스스로 되돌아보는 것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의 덕을 깊이 단련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태도의 중심에서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며 우리 중심에 삼는 태도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중심에 있기에 우리에게 닥친 아픈 것, 싫은 것과 함께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라는 고백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반면 내가 드러나는 것이 중심이 되면 이런 고백은 어렵게 됩니다. 이때는 내 생각과 조건을 중심으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시험하고 판단하게 됩니다.
싫고 아픈 것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 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을 계기와 마주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시고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싫고 아픈 것 속에서도 우리의 영혼과 삶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이 기도는 우리를 아픔에서 벗어나게 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기쁨으로 이끌 것입니다.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나뿐만 아니라 우리 이웃을 생각합니다. 우리 주변에 너무나 아파서 힘들어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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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주보》 말씀의 향기
[대전교구 권세진 알베르토(미리내성모성심 수녀회 성사담당)]
<하느님의 사랑, 인간 구원의 힘>
나병 환자의 치유 기적을 전하는 오늘 복음은 사람이 어떻게 하느 님을 만날 수 있고 하느님께서는 어떤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시는지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온갖 종류의 피부병을 모두 나병이라 부르는데, 유다인들은 각종 피부병에 걸린 사람들을 모두 부정한 자로 규정하였고, 성곽이 있는 도시 안에는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나병 환자는 가족을 포함한 인간관계뿐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마저도 단절된 채 살아가야만 하는 비참한 처지에 놓인 사람이었습니다.
이 나병 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와 무릎을 꿇고 간절히 도움을 청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있습니다."(마르 1,40) 그의 외침은 예 수님이야말로 자기를 치유해 주실 수 있는 하느님의 권 능을 지니신 분이라는 신앙고백이며, 무릎 꿇은 자세는 오직 하느님만이 이 비참한 죽음의 상황에서 구해 주실 수 있기에 하느님께 자신을 전적으로 내어 맡긴 겸손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그에게 연민을 느끼신 예수님께서 율법의 금지 규정을 넘어 그를 어루만지시고 치유해 주십니다. 예수 님의 치유 기적을 이끈 내적인 동기가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라는 표현에 나옵니다. 예수님의 이 '가엾은 마음'을 라틴어로는 '미세리꼬르디아'(misericordia)라고 표현하는데, 심장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연민을 뜻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신 강생 육화의 신비는 물론 십자가 수난의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인간에 대한 한없는 연민으로 표현되는 사랑에 있다는 점을 드러냅니다. 사람의 아픔을 심장이 쪼개질 정도로 함께 아파하시며 연민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기막히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연민과 사랑이 성자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자리에서 피조물의 세계 안으로 내려와 사람이 되셨으며, 십자가 위에서 희생양이 되어 처절하게 돌아가신 이유이자 힘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그저 일회적인 감정의 차원에서 끝나지 않고 사람을 근원에서부터 회복하여 주는 '구원과 생명의 힘'이 있습니다. 이것이 "내가 하고자 하니 깨 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마르 1,42)라는 구절에 담겨 있는 의미입니다. 나병 환자의 치유를 통해 드러난 예수님의 구원은 단지 신체적 차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느님 백성의 무리에 돌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신앙적, 공동체적 차원의 경지에까지 그 효과가 미치고 있습니다. 사제에게 가서 몸을 보여 주고, 율법 규정에 따른 예물을 바치라고 하신 예수님의 당부는 이 점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놀라운 치유 기적을 체험한 나병 환자는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르 1,44)라는 예수님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널리 전합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더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왜 메시아 비밀을 함구하길 원하셨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며, 그런데도 구세주 예수님의 출현이라는 '복된 소식'은 널리 전해질 수밖에 없었음을 또한 알게 해 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방에서 예수님께로 모여듭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이렇듯 좋으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지상 순례의 여정을 걸으며 우리가 마주하고 체험하는 갖가지 한계와 죄악, 비참함 을 예수님은 심장이 쪼개질 정도로 함께 아파하시며 다시 힘을 내어 순례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치유해 주십니다. 과연 우리의 신앙 여정을 이끄는 참된 힘은 주님이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며 자신에 대한 존중을 넘어 병자와 가난한 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을 돌보는 '사랑하는 사람'이 되도록, 구세주 예수님을 전하는 '복음의 사람'이 되도록 만듭니다. 그 사랑에 집중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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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주보》 말씀 담기
[수원교구 김영복 리카르도 신부님(분당성요한성당 제1보좌)]
<불협화음도 화음이다>
불협화음도 쓰이기 나름입니다. 어울리기 힘든 음들도 연주자의 손에 따라 하나로 뭉쳐질 때 음악은 더 풍성하게 변합니다. 우리 인생에도 불협화음과 같은 사건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힘들어도 그 순간을 내 삶에 녹여내는 이들은 삶을 더욱 맛깔스럽게 살아갑니다.
복음 속 나병 환자를 바라봅시다.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말은 인생의 불협화음을 화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당장 자신의 병을 고쳐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이 병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예수님께 겸손히 문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과 같은 마음보다 주님께서 최대한 빨리해 주시길' 바랄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인생 모든 순간 모난 곳이 없길 바라고 작은 시련도 받아들이기보다는 하느님을 원망하는 쪽을 선택할 때가 많습니다. 곧 '겸손'이란, 단순히
자신을 낮추는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 마음을 여는 행위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그 과정은 매우 어려율 것입니다. 복음 속 나병 환자가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뇌와 고통이 있었겠습니까. 저는 읍의 친구들처럼 아픈 이들에게 빨리 그 고통을 받아들이고 깊이 기도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모든 과정 안에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과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나병으로 고통받았던 그 사람이 주님께 다가가 '하고자 하시면
이라는 말은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인생의 불협화음 속에서 혼자 괴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누군가 인생의 불협화음 속에서 혼자 괴로워하고 있다면, 기꺼이 다가가는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으신 예수님과 예수님을 본받아 타인을 위해 기쁘게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 우리 모두 삶의 불협화음을 조화롭게 녹여낼 수 있기를 희망하고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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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제주》 말씀
[제주교구 김석순 마태오 신부님(김기량성당)]
<"간절함이라는 인효성">
성사는 은총을 받는 거룩한 표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각 성사를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은총을 내려주십니다. 이러한 성사의 효과는 사효성과 인효성이 있습니다. 사효성은 성사 자체적으로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사의 근원, 기원인 원성사요, 성사의 집전자이시기에 성사 그 자체적으로 주어지는 사효성만으로도 우리에게 충만한 은총을 내려주십니다. 그러나, 인효성은 성사 자체적인 효과가 아니라. 성사에 임하는 사람의 마음 자세. 지향에 따른 은총입니다. 성사의 은총을 받아 누리려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크고 풍성하게 다가오는 은총입니다. 사효성은 변함이 없습니다. 언제나 똑같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인효성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교회는 성사의 은총을 받아 누리려는 노력을 잘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사람도 마음이 더딘 사람과 예민한 사람이 있을 수 있듯이. 이 인효성도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미사나 성사에 임할 때, 마음에 큰 감동과 기쁨이 넘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별 느낌 없이 그저 그렇게 성사에 임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감동과 기쁨이 크면 인효성이 크고, 감동과 기쁨이 없으면 인효성이 적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인효성이 받으려는 이의 마음 자세와 지향에 따라달라질 수 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에 감동과 기쁨 여부에 따라 인효성이 크고 작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인효성에 대해 혼란이 있을 수 있기에, 교회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성사의 은총을 받아 누리려는 마음과 지향만 있다면 인효성은 충분하다."라고 인효성의 최소한의 규정을 정해 놓았습니다. 사효성, 인효성, 지향, 의도.. 참 어렵습니다. 이른 쉬운 말로 설명할 수 없을까 고민하다가, "간절함"이라는 단어가 생각났습니다. 이 "간절함"이 인효성에 대한 충분하고 온전한 설명은 못 된다 하더라도, 성사의 은총을 받아 누리려는 지향, 의도를 '간절함'으로 표현하면 좀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성사의 은총은 받아 누리려는 간절함이 크면 클수록 그 만큼의 은총을 얻어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과 나병환자의 대화 속에서도 사효성과 인효성에 대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찾아가 무릎을 끓고 이렇게 청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곧, 나병환자는 낳으려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은총을 내려주시면 자신이 낳을 것이라는 믿음, 지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은총을 내려주시려는 마음뿐만 아니라, 은총을 베풀어 도와주려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고 말씀하시며 나병환자를 치유해 주십니다. 이렇게 "하고자 하시면." "내가 하고자 하니.."라는 말씀 속에서 은총을 받아 누리려는 마음과 은총을 베풀어주시려는 마음인 인효성, 곧 간절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원성사로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성사의 기원, 근원이 되시는 분이시기에 사효성과 인효성이 변함이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 은총이 충만하실 뿐만 아니라, 그 은총을 내려주시려는 마음, 지향도 충만하신 분이시고, 실제 그렇계 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 때문에, 성사의 은총이 충만하게 내려지지 않는다면, 이는 예수님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내려지는 은총을 우리가 온전하게 받아 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효성은 성사 자체적으로 내려지는 은총이기에 우리가 어떻게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인효성은 은총을 받아 누리려는 간절한 마음 자세. 지향이기에 우리가 잘 준비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노력해야 합니다. 미사성제나 다른 성사를 통해 베풀어지는 은총을 아무 의식 없이 대하지 말고,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인 미사요, 성사라는 마음자세로 임하면 어떨까요? 그 만큼 우리의 간절함이 클 것이요, 그 간절함이 큰 만큼, 받아 누리는 은총 또한 총만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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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주보》 말씀 중심의 삶
[청주교구 박영봉 마태오 신부님(봉방동성당)]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 1,41)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오늘은 연중 제6주일입니다.
오늘 봉독된 제1독서, 레위기에서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누구든지 살갗에 악성 피부병이 나타나면, 부정한 사람이므로,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풀고, '부정한 사람이오.' 하고 외쳐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며,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고 하시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2월 11일은 영육간에 아픈 사람들과 그들을 치료하는 의료진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세계 병자의 날입니다. 이날은 성모님께서 프랑스 루르드에 1858년 2월 11일에 14살이었던 벨라뎃다에게 나타나신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회개하라. 특히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으며, "아픈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시며, 루르드의 물을 주셨습니다. 이 물을 통해 칠천 건에 달하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저는 큰 수술을 해야 했을 때, 많이 힘들어 했지만, 교우님들이 기도를 많이 해 주셨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길 수 있었을 때, 예수님께서 깨끗하게 치유해 주시어 다시 건강을 되찾을 수 있어서 하느님께, 기도해 주신 모든 분에게, 그리고 의료진 모든 분에게 감사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루르드에 발현하신 성모님의 말씀에 따라 죄인들의 회개와 아픈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예수님의 도움으로 깨끗하게 되어 죄 없이 살 수 있는 은총을 청하면서 오늘 열심히 살아가도록 합시다. 아멘.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마르 1,4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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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주보》 말씀의 향기
[춘천교구 이동수 요한세례자 신부님(양덕원성당 주임)]
<하고자하시면>
새해, 주님 복 많이 받으셔서 은충의 한 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날에도 나병은 천형(天刑)의 병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좋은 약이 개발된 현재에는 그나마 덜한 편이지만 그래도 병을 않으면서 얼굴이나 손이나 발이 뭉그러지거나 함몰된 흔적이 남아 있고, 유전은 안 되지만 전염은 되는 병이라 모두가 조심하는 병입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도 나병은 하늘에서 내려진 일종의 형벌로써 저주받은 모습이요. 죽음으로 이끄는 병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병 환자는 공공장소나 사람들의 모임에 나타날 수 없을 뿐더러 사람들과 만나고 접촉할 수도 없었습니다. 훅시라도 나병 환자가 접근해 오면, 사람들은 "불결. 불결" 하고 외치면서 접촉을 피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는 예외적인 상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일반인들에게 접근할 수 없는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다가와서 무릎을 끊고 자신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는 것입니다. 나병 환자가 취한 이 행동은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온전히 의탁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만 원하시면 불치병이요 천벌인 나병까지도 고쳐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병 환자의 이 한마디는 예수님의 신적 능력에 대한 고백이며 예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와 믿음의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없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피부가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나병 같은 불치병도 치유할 수 있는 신적 능력이 예수님께 있음을 몸소 보여주심으로써 당신이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십니다. 나병 환자는 예수님의 관심과 사랑으로 나병을 치유 받았고, 저주에서 축복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삶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리분, 하느님이 몸소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어려움과 간청을 외면하지 못하시는 분입니다. 당신께서 원하시면 우리의 간청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때가 되면 들어주시며. 언제나 하느님의 자비로 당신께 의탁하기를 원하십니다. 자비성화의 문구처럼 "예수님. 저는 당신께 의탁합니다."라고 고백하며 예수님께 의탁의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봅니다. 여러분 모두 설 명절 연휴를 주님 안에서 푹 쉬며 기쁨과 의탁의 한 주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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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는 원한다.>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마르 1,40-45)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내가 하고자 하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나는 원한다.”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원하는 것을 나보다 먼저 원하시는 분이고, 나보다 더 간절하게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청하기도 전에 먼저 그것을 나에게 주기를 원하시는 분이고, 그것을 내가 잘 받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7-8)
여기서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라는 말씀은,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고, 그것을 너희에게 주신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예수님과 아버지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요한 10,30)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먼저 알고 계시고 그것을 주신다면, 그렇다면 기도는 왜 하는가? 기도는 달라고 떼쓰는 일이 아니라, 주시는 것을 잘 받기 위해서 준비하는 일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라는 약속도 하셨습니다.(요한 14,13) 이 약속도 당신이 원하셔서 먼저 하신 약속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 세상에 오신 일부터가 당신이 원하셔서 하신 일이고, 인간들을 구원하려고 애를 쓰시는 일도 당신이 원하셔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에 대한 신앙입니다.>
만일에 아버지께서 가라고 하셔서 인간 세상에 오신 것이라면, 그래서 만일에 ‘육화강생’에 대해서 예수님의 마음이 내키지 않으셨던 부분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 그러면 우리의 신앙과 교리는 근본부터 흔들리게 됩니다. “나는 원한다.”라는 말씀은, 인간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말씀이고, 그 사랑은 완전하고 영원한 사랑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섬기면서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은 바로 그 사랑을 믿기 때문입니다.
어떤 병자가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면서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말을 한 것은, 그가 예수님의 사랑을 모르고 있었거나, 아니면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는 예수님의 권능은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병이든지 고쳐 줄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고 믿고는 있는데, 병을 고쳐 달라는 간청을 예수님이 들어 주실지 어떨지에 대한 확신은 없는 상태입니다.
사실 우리도 그런 태도로, 또는 그런 마음으로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분’이라고 믿긴 하는데, “기도가 이루어질까? 과연 주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 주실까?”라는 의문을 품은 채로 기도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의심’이 아니라 그냥 ‘의문’입니다. 의심한다면 기도 자체를 안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런 의문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거나, 기도한 대로 되지 않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24) ‘아직’ 받지 못했는데도 ‘이미’ 받은 줄로 믿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믿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여기서 ‘무엇이든지’는 “하느님 뜻에 합당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입니다.
이기적인 욕심으로 바치는 기도는 하느님 뜻에 합당한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사심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바치는 기도라고 해도 하느님 뜻이 무엇인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모르니까 더 믿어야 하고, 더 간절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우리 생각을 초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말장난이 아니라 신앙인의 기본자세입니다. <복음 말씀의 이야기에서 그 병자가 예수님의 ‘엄한 명령’을 어긴 것은 그의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치유의 은총을 받은 것이 너무 기뻐서 그랬겠지만, 그래도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 명령이 이해가 되지 않고 납득이 되지 않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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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이스라엘에서 나병에 걸린 사람은 부정한 사람으로 여겨져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레위 13장 참조). 그래서 그들은 “부정한 사람이오.” 하고 외쳐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다가오지 못하게 하여야 하였습니다.
그렇게 나병 환자들은 예루살렘과 다른 성곽 도시에 들어가지 못하고, 따로 떨어진 곳에서 살아야 하였습니다. 그들은 사회 공동체에서 배제되었고, 이러한 배제는 그들의 마음에 큰 상처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몸뿐만이 아니라 마음도 아픈 이들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를 깨끗하게 하여 주십니다. 주님의 자비는 나병 환자의 몸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까지도 어루만져 주십니다.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제에게 치유 사실을 인정받고, 다시 공동체로 돌아가라는(레위 14,2-32 참조)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이제는 더 이상 너를 배척하는 자들이 없으니 공동체로 돌아가도 된다.’는 뜻으로 나병 환자의 마음에 난 상처를 낫게 하는 따뜻한 위로로 들립니다.
몸의 병은 마음과 깊이 연결되어 있고, 오랜 병고로 고통받은 이들은 마음도 함께 약해져 있기에 병자들의 마음도 치유되도록 함께 기도하여야 합니다.
거동이 불편한 병자와 장애인들이 루르드 성모 발현 성지를 순례하도록 함께하여 주는 단체(UNITALSI)가 있습니다. 이들은 지붕을 떼고 중풍 병자를 내려 준 사람들의 마음으로(마르 2,4 참조) 병자들의 루르드 순례에 함께하는 이들입니다.
이 단체에서 활동하는 이들은 순례를 통하여 병자들의 내면이 치유되는 수많은 체험을 합니다. 병자들은 순례 가운데 자신과 함께하며 도움을 주는 사람들을 통해서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깨닫고, 공동체의 사랑을 느끼면서 마음의 상처가 낫는 기적을 체험한다고 합니다.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이 주님의 사랑과 공동체의 사랑 안에서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치유되도록 주님의 자비를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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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이정훈 클레멘스 신부님]
부정한 사람이요! 그러나... 살아가면서 많이 듣는 말이 소외, 배제, 따돌림, 차별, 무관심 등등 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러한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어떻게 해법을 찾아야 하는지 오늘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하느님의 말씀들은 이러한 상황에 놓여있는 사람들과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조금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선 복음 선포의 소명을 가진 사람의 품성은 가엾은 마음을 간직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현실의 질서 안에서 나의 가르침이 필요한 이에게 제대로 사랑의 계명을 알리고,그가 공동체 안에 잘 정착할 수 있게 이끌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연극의 1막, 2막, 3막으로 나눈다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1막까지는 참으로 두 사람의 호흡이 잘 맞아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2막에서는 어그러졌고, 3막에서는 선의를 베푼 예수님께서 곤란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복음 선포자의 운명이 그렇다면 그것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오늘도 복음 선포의 소명을 가진 이들은 가엾은 마음을 가슴에 품고 어떠한 상황이 벌어져도 그 길을 묵묵히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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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김준성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직접 찾아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합니다. 역사가인 요세푸스 플라비우스(37-100)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신 갈릴래아 주변에는 수천 명이 모여 사는 마을이 200여 개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런 기록을 바탕으로 추측해 보면 예수님은 다양하고 많은 사람을 만나셨을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 가운데 오늘은 이름 모를 나병 환자를 만나십니다. 무릎을 꿇고 간절한 마음으로 믿음을 고백하는 나병 환자를 예수님은 마음을 다해 치유하십니다. 아무도 만나 주지 않고 상종하지 않았던 나병 환자에게 손을 내밀고, 손을 대시며 치유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와 함께하는 모습은 당시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매우 소외된 이웃, 나병 환자에게 다가서는 행위에는 예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가장 소외된 한 사람을 마음으로부터 구원하겠다는 주님의 의지를 알게 됩니다.
주님의 마음은 한 사람의 육체적인 구원뿐 아니라 영혼의 구원까지도 향하고 계셨습니다. 나병과 함께 지녔던 소외 받은 이의 외로움, 절망의 마음까지도 생각하셨습니다. 복음 선포가 소외된 그 누군가에게 기쁜 소식인 이유는, 주님의 마음과 기다리는 이의 마음이 진심으로 만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증거가 되게 하여라.” 하신 주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온 마음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과 같이, 우리도 마음으로부터 이웃을 대하고 세상을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말과 행위의 복음 선포를 넘어서 마음을 담아 기쁜 소식을 전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한 주간, 각자의 삶에서 가장 아파하는 한 사람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그때에, 우리는 복음의‘증거’, 그리스도의 ‘증거’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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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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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1989년 조지아 대학교의 에이브러햄 테서가 이끄는 사회심리학 연구팀은 11세에서 14세 청소년이 있는 가족들에게 텔레비전 채널 선택이나 숙제하는 시간 등과 관련된 모든 의견대립을 기록하게 했습니다. 조사 결과, 부모와 의견대립이 많은 청소년이 더 행복하고, 사회적으로 잘 적응하며, 학교생활을 더 잘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조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부모가 자녀와의 의견대립에 대해 열린 관점으로 대화를 풀어갈 때 가능했습니다.
종종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며 어떤 간섭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부모는 아이가 사춘기를 심하게 겪는다면서 전혀 대화하지 않고 그냥 기도만 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친한 친구와 의견 차이로 인해서 심하게 싸웠고 역시 기도만 하면서 이 친구와 예전 관계로 다시 돌아가길 바란다고 하십니다. 과연 기적처럼 그런 일이 생길까요? 가장 필요한 것은 서로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열린 관점입니다
미국의 어느 소도시에 있는 은행에 강도가 들어왔습니다. 권총을 든 강도는 창구 여직원에게 총을 겨누며, “천만 원 내놔!”라고 고함을 지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보통은 천만 원을 내주거나, 아니면 몰래 비상벨을 눌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직원은 강도를 바라보며, “천만 원은 왜요?”라고 이야기를 건넨 것입니다. 그 말에서 강도는 따뜻함을 느꼈습니다. 강도는 총을 내려놓고 지금 자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이야기했고, 직원은 은행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주었다고 합니다.
“천만 원 내놔!”라는 말에서 대화의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까?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말이지만, 이 말에서도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강도하고도 이렇게 대화가 되는데, 왜 다른 사람과 대화가 되지 않겠습니까? 사람과의 대화가 가능해야 주님과도 대화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병은 무서운 병으로, 공동체는 나병에 걸린 사람을 멀리하고 부정한 사람으로 여깁니다. 공동체에서 벗어나 혼자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 곁에 갈 수 없기에 치료받을 수 있는 길도 없습니다. 이렇다고 해서 주님께서 이 나병 환자를 내쳤을까요? 아닙니다. 당신께 다가오는 사람을 절대 내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가온 사람의 자세가 중요했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행동하고 말했습니다.
바로 무릎을 꿇는 겸손한 자세만이 주님과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그를 낫게 하셔서 다시 공동체 안에서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혹시 이런 겸손한 모습보다는 맡긴 것을 찾는 사람처럼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라며 주님께 명령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자기를 내려놓는 겸손, 그래야 주님과도 또 사람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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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리는>
마르코 1,40-45 (나병 환자를 고치시다)
그때에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면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 1,41)
뭇사람들은
깨끗하지 못한 이를
멀리서 바라보지만
우리 님께서는
깨끗하지 못한 이를
가까이에서 돌보신다네
우리 님 닮은 우리는
우리 님 닮아야할 우리는
뭇사람들은
깨끗하지 못한 이에게
손가락질하지만
우리 님께서는
깨끗하지 못한 이에게
손을 내밀어 대신다네
우리 님 닮은 우리는
우리 님 닮아야할 우리는
뭇사람들은
깨끗하지 못한 이와
다름을 즐기지만
우리 님께서는
깨끗하지 못한 이가
당신을 닮게 하신다네
우리 님 닮은 우리는
우리 님 닮아야할 우리는
뭇사람들 앞에서
깨끗하지 못한 이는
깨끗하지 못한 채 있지만
우리 님 앞에서
깨끗하지 못한 이는
깨끗하게 된다네
우리 님 닮은 우리는
우리 님 닮아야할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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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는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길 희망하며 병자의 날을 맞이하여 갖가지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이들에게 치유의 손길이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질병으로 다가온 고통을 이긴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주님께 믿음을 고백해도 아픔은 지속하기 때문에 진정 그분이 함께하시는 것인지 의문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믿는 이들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도합니다. ‘주님, 하고자 하시면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으니, 고통을 거두어 주시고 당신이 몸소 함께하고 계심을 느끼게 해 주십시오. 고통이 계속된다면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지켜주시고 오히려 그 아픔을 통해 당신의 수난 고통을 체험하는 시간으로 인도해 주십시오.’ 믿음은 시련을 이겨내는 힘이라는 깨우침을 주소서.
유다인들에게 나병은 하늘에서 내린 형벌로 저주받은 모습이요(레위13,34), 죽음으로 향하는 상태(욥기18,13)였습니다. 환자 자신의 죄나 부모의 죄로 말미암은 벌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병자나 장애인은 그 자체로 죄인으로 간주 되었습니다. 육체적으로 괴로움을 겪고, 종교적으로도 죄인으로 괴로움을 겪어야 했으며 사회적으로도 소외되었습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은 공공장소나 사람들의 모임에 나타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 없었으며 `혹시라도 누군가가 다가오면 자신이 ‘불결한 사람’ 이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법으로 규정하였습니다.(레위13,45-46)
법은 접근을 막을 뿐 나병을 치유하기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의 몸에 대시며 고쳐주십니다. 나병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넘어 환자에게 치유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적 고통, 종교적 단죄, 사회적 소외에서 해방시켜 줍니다. 예수님은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육체와 영혼을 치유해 주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1,40) 하며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더는 다른 길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리는 간절한 심정으로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이상의 것이라도 할 마음의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사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항복의 자세입니다. ‘저의 목숨은 당신께 달렸으니, 저를 살리든지 죽이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그저 저는 당신의 처분만을 기다립니다. 저는 더는 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애원하는 자세요, ‘한 말씀만 하십시오. 당신은 저의 주인이고 저를 고쳐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고 저의 희망이십니다.’하는 순종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나병환자가 무릎을 꿇은 것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간절함에 예수님은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기 때문에 더욱 다가와야 하고 또 그 어떤 것도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과 자비로 감싸주시고 치유해 주시는 분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사람들은 분리하고 소외시키지만, 주님의 품은 차별이 없으십니다. 우리는 누구나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품에 지체함 없이 안길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육체적 질병뿐 아니라 정신적, 영적인 나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애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는 자세는 우리가 주님께 나올 때 취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임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앓고 있는 병에서 치유되려면 먼저 무릎을 꿇는 자세부터 배워야 합니다.
성 바오로회 故유광수 신부님은 무릎 꿇지 못하는 원인을 다섯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1) 자신이 믿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2) 지금 자신이 어떤 병이 들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주고자 하는 선물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4) 교만함 때문이다. 교만한 자세란 목덜미가 뻣뻣한 자세이다. 몸이 굳어 있는 사람이고,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다.
5) 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 앞에 무릎 꿇는 기쁨의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릎을 꿇으면 비로소 사랑받는 나 자신을 보게 되고, 사랑해야 할 이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행동하게 됩니다. 오늘이 그날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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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
-갈망과 찾음, 만남과 치유, 선포와 영광-
오늘은 연중 제6주일이자 제32차 세계 병자의 날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2년부터 해마다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인 이 발현 첫날을 ‘세계 병자의 날’로 지내도록 하였습니다. 교황님은 시의적절하게도 2월에는 ‘생의 말기에 있는 병자들과 그 가족들이 의료적 측면에서도 인간적 측면에서도 언제나 필요한 보살핌과 동반을 받도록 기도하자“고 기도지향을 알렸습니다.
교황님의 “사람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창세2,18참조)란 말씀을 중심으로 한 이번 담화내용도 참 자상하고 우리를 각성케 합니다. 시대의 현자(賢者)요 예언자(豫言者)인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담화문 후반부를 길다 싶지만 그대로 인용합니다.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대부분 알게 모르게 죄인이자 병자인 우리에게 교황님의 지혜로운 말씀은 잔잔한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일시적이든 만성적이든 질병을 앓고 있는 분들에게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친밀감과 온유함에 대한 여러분의 갈망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이를 숨기지 말고, 여러분이 다른 이들의 짐이 된다는 생각도 전혀 하지 마십시오. 병자들의 상태는 우리 모두에게, 정신없이 바쁜 삶의 속도에서 한걸음 물러나 자기자신을 재발견하라고 촉구합니다.
급변하는 이 시기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특히 예수님의 연민 가득한 눈길을 닮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고통받고 외로운 이들, 소외되고 버림받았을 이들을 돌봅시다.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기도 안에서, 특히 성찬례 안에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서로를 향한 사랑으로 고독과 고립의 상처를 치유합시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개인주의, 무관심, 버리는 문화에 맞서 싸우고 온유와 연민의 문화를 증진하는데에 힘을 모으게 되는 것입니다.
병든 이들, 취약한 이들, 가난한 이들은 교회의 중심에 있습니다. 우리의 인간적 관심과 사목적 염려의 중심에도 그들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절대로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병자의 치유이신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전구해 주시고, 우리가 친밀감과 형제애의 장인이 되게 도와 주시도록 성모님께 우리 자신을 맡겨 드립시다."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2024년 1월10일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겸손하게도 가장 끝자리에 작은 글씨로 “프란치스코”라 씁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연민과 형제애가 교황님을 통해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추호도 두려워하거나 불안해 할 것도, 당황하거나 걱정할 것도 없습니다. 아주 현실적이 되어 우리의 병고로 인해 불편한 상황을 모두 배움의 계기로 삼아 하루하루 날마다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것입니다.
“밑바닥에서부터 배워야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그것이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다” 오늘 다산의 말씀도, “천명(天命)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고, 예(禮)를 알지 못하면 바르게 설 수 없고, 말(言)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 수 없다”는 오늘 공자의 말씀도 우리에게는 참 좋은 격려가 됩니다. 천명과 예를 알기위해 성경과 전례로 돌아가고, 사람을 알기 위해 공동체 형제들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니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보다 더 좋은 평생 배움의 공부시간은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우리 모두의 가능성이자 우리의 현실적 모습을 상징합니다. 나병의 고립단절된 절망의 처지가 구약의 제1독서에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병고보다 더 아프고 더 치명적인 것이 아마도 관계 단절로 인한 마음의 상처와 아픔 그리고 혼자라는 고독과 외로움일 것입니다.
‘악성 피부병에 걸린 병자는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푼다. 그리도 콧 수염을 가리고 “부정한 사람이요.”, “부정한 사람이요.” 하고 외친다. 병이 남아 있는 한 그는 부정하다. 그는 부정한 사람이므로,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
바로 이런 고립단절의 혼자라는 절망적 상황이 지옥입니다. 나병이 상징하는바, 오늘날 이런저런 사연으로 고립단절된 처지에 있는 모든 이들입니다. 나병환자도 엄연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버림받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든 이들도 모두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존엄한 품위의 사람입니다. 병자든 노인이든 다 존중받고 사랑받고 배려받고 싶은 마음은 본능이며 마음 깊이에서는 치유의 구원의 갈망이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 나병환자가 그 모범입니다. 나병에 좌절한 것이 아니라 나병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갈망의 사람, 나병환자는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았고 만나 치유를 받습니다. 나병환자의 간청의 기도에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셔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시니 그대로 구원의 삼박자 원리-“연민의 마음, 따뜻한 스킨쉽, 권능의 말씀”-가 계시됩니다.
도대체 우리 예수님이 아니곤 그 누구가 이 치유의 구원의 중심 역할을 할 수 있을런지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똑같은 주님께서 시공을 초월하여 이 거룩한 미사성찬전례중 영적 나병환자인 우리에게 치유의 구원을 선사하십니다. 오늘 이 거룩한 미사중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나병환자의 믿음에 주님은 말씀으로 응답하시자 나병은 가시고 깨끗하게 치유되니 말그대로 치유의 구원입니다. 인기의 중심에 서기를 원치 않으시는 겸손한 주님은 치유받은 나병환자에게 함구할 것을 명하시고, 공성이불거(功成而弗居), 노자의 말씀대로 공을 이루면 집착하여 머물지 않고 홀연히 떠나 외딴곳의 아버지 품에 안깁니다.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고 새삼 온인류, 온세상의 중심이신 치유의 구원자, 생명과 빛의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치유의 구원을 받으니 나병환자의 운명은 완전히 바뀝니다. 예전의 고립단절의 지옥같은 상황에서의 혼자가 아닙니다. 세상의 구원자 예수님을 만나 치유 구원 받고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니’ 이제부터 복음 선포자가 되어 지상에서 천국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지상에서 천국의 삶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수도원 정문 입구의 거대한 바위판에 새겨진 “모든 일에 하느님께 영광”(성규57,9)이란 말씀도 생각납니다. 치유받은 나병환자에 남은 삶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요, 복음 선포도 그 일환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에게 치유의 구원을 베풀주시고, 바오로 사도를 통해 당신 속내를 밝히십니다. 우리 모두에 대한 주님의 소원이 다음 말씀에 담겨있습니다.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하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나처럼 하십시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1코린 10,31-11,1 참조)
우리가 살아내야 할 삶은 단 하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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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세 번째 주인공들>
오늘 복음은 나병 환자가 주님께 와서 치유를 청해 치유 받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오늘 얘기의 주인공은 나병 환자와 주님 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나병 환자를 보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 환자는 대단한 사람이고,오늘 얘기의 주인공이 되기에 충분한 사람입니다.
우선 그의 신앙 고백이 우리의 모범입니다. 그는 주님 능력에 대한 믿음이 확고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백은 주님 능력에 대한 믿음만 고백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주님께서 깨끗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일 뿐 아니라
하시고자 하는 의향도 있으신 분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그런 선의가 없으신 분, 사랑이 없으신 분이라고 믿었다면 주님께 나왔겠습니까? 애초에 주님께 나아오지 않았겠지요.
오늘 독서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나병 환자가 사람들 가운데 나타날 수 없었습니다.
“악성 피부병에 걸린 병자는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푼다. 그리고 콧수염을 가리고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 하고 외친다. 그는 부정한 사람이므로,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
이렇게 격리된 삶을 살아야 하고 그것을 어기고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면 사람들은 돌을 던져 죽일 수도 있었던 그런 사회 상황에서 그는 마치 겁이 없는 사람인 양 주님 앞에 나아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사람들 앞에 나아온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나아온 것입니다.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직진한 겁니다.
베드로 사도가 물 위를 걸을 때 주님만 보고 걸었을 때는 두려움이 없었고, 물에 빠지지도 않았던 것과 같습니다.
사실 오늘 나병 환자에게는 병의 치유보다 두려움의 치유가 더 중요하고 값진 것이었을 겁니다. 육신의 치유보다 마음과 정신의 치유가 더 값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도 제가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여러분은 육신의 병, 마음의 병, 정신병, 영혼의 병 곧 마귀 병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또는 선택의 순서를 정하라면 무엇을 선택하고 어떤 순서로 선택하시겠습니까?
육신의 병을 선택할 것이고, 그 다음이 마음의 병이요, 정신병과 마귀 병이 그다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나병 환자가 이렇게 겁이 없이 나아올 수 있게 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께 대한 그의 믿음이지만 그의 믿음은 주님께서 주신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말에 믿음직한 사람이니 믿음이 가는 사람이니 믿음을 주는 사람이니 하는 말이 있는데 주님이야말로 믿음을 주는 분이십니다.
병자에 대한 구약의 그 차별과 격리와 단절의 법과 관습을 타파하시는 구별과 차별이 없는 주님의 사랑 곧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비와 빛을 주신다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주님의 파격적 가르침과 실천이 믿음을 주신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세 번째 주인공이 있습니다. 그들은 숨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주님과 같이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나병 환자가 주님께 나아올 때 막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나병 환자를 피하거나 불평하지 않았고 아마 환대했을 겁니다.
오늘 병자의 날인데 우리도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람들이라면 병자들이 주님께 나아오는 것을 막지 않을 뿐 아니라 복음에서 많이 볼 수 있듯 병자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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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1,41b)
<나의 나병!>
오늘 복음(마르1,40-45)은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제1독서인 레위기의 말씀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나병과 같은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은 부정한 사람으로 여겨져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아갈 수 없었던 '소외병 환자'입니다. 하지만 가엾은 마음이신 예수님께서는 그런 나병 환자를 고쳐주십니다.
나병(한센병)은 몸의 지체가 문드러지는 문둥병입니다. 특히 눈과 코와 입과 두 손과 두 발과 같은 말초신경계에 두드러진 증세가 나타나는 병입니다.
육체의 나병과 예수님의 치유기적을 바라보면서 이런 질문을 던져봅니다.
나도 나병 환자는 아닐까? 마음이 문드러진 그런 나병환자, 그래서 종종 헛소리를 하고, 헛것을 보고 듣고, 헛된 행동을 하는 나병 환자는 아닐까?
'2월11일'인 오늘은 '세계 병자의 날'입니다. '2월11일'은 1858년 프랑스 루르드에서 원죄 없으신 동정 마리아께서 가난한 시골 소녀였던 베르나데트(벨라뎃다)에게 첫 발현하신 날입니다.
이후 여러 차례 발현하셨는데,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2년부터 해마다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인 2월11일을 '세계 병자의 날'로 제정하셨습니다.
많은 병자들과 병자들을 위해 희생 봉사하는 천사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그리고 '2024년 제32차 세계 병자의 날 교황 담화'를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제2독서(1코린10,31-11,1)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유다인에게도 그리스인에게도 하느님의 교회에도 방해를 놓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10,31-32)
주님의 도우심이신 성령의 힘이 더해져서 병자들이 치유되고, 나의 나병도 치유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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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icweFY_Lbg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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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 1, 41)
하느님의 영광은
아픈 우리를
통하여
드러납니다.
치유는
하느님 사랑을
만나는
가장 특별한
일입니다.
치유하여
주실 때를
놓치지 않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정확히
아십니다.
우리를 위한
가장 좋은 일을
아픔이 있는
치유가 필요한
우리에게서
시작하십니다.
우리의 불행을
치유하시는
기쁜 일을
주님께서 직접
시작하십니다.
우리자신을
더럽히고
우리자신을
찌르는 것은
우리자신입니다.
하느님이
없으시면
깨끗함도
죄의 용서도
병을 낫게 하는
치유도 진정한
사랑의 빛이
될 수 없습니다.
묶인 매듭이
풀리듯
우리의 삶도
풀립니다.
죄에 갇혀 있던
우리를 깨끗이
풀어주십니다.
다시 깨끗하게
하시어
다시 존엄함의
옷을
우리에게 입혀
주십니다.
우리의 아픔을
깨끗이
치유하여
주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우리의 죄까지
당신의
깨끗하신
사랑으로
지워주십니다.
하느님
사랑과 함께
아픈 이들의
빠른 쾌유와
깨끗한 치유를
위해 기도드립니다.
하느님께
하시는
모든 일들이
우리를 위한
구원임을
믿습니다.
이 구원이
아픈 이들을 위한
보살핌이라는 것을
압니다.
보살핌을 실천하는
은총의 주일이며
세계 병자의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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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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