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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에는 지난 달에 이어 (욥1:6-12) 말씀을 통하여 <욥기서의 주제>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많은 유익이 있기를 바랍니다. 진 상열 목사 드림.
-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악(惡)의 문제를 생각할 때, 마귀가 하나님의 적인 것처럼 상상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런 생각을 가리켜, [이원론(二元論)]이라고 말합니다.> : 그러나 분명히 알 것은, 이원론은 기독교적 사상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가 어려운 일을 만나면, 곧잘 마귀 때문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반대로 좋은 일을 만나면 하나님이 축복하셨다고 하지요. 이러한 생각 뒤에는 인생의 모든 좋은 일과 나쁜 일은 선한 신과 악한 신에 의해 좌우된다는 이원론적 사상이 있는 것입니다.
- 그런데 <욥기>는 이러한 이원론(二元論)이 기독교적 사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주 명백하게 보여 주는 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본문을 보면 사단은 하나님의 적수가 못 되는 존재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즉 (1:8-12)을 보면, 사단의 활동이 철저하게 하나님에 의해 제한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지요. 즉 사단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는 결코 하나님의 적수가 아니었습니다. 즉 사단은 성도의 적이지 하나님의 적은 아닌 것이지요.
- 특히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이 땅에서 나타나는 모든 사단의 활동들이 하나님이 허용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즉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악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이 말은 결국 기독교가 [일원론(一元論)]을 가르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실상 이원론(二元論)처럼 악에 대한 설명이 쉬운 접근방법도 없습니다. 악한 일만 생기면 그것은 사단이나 나쁜 신이 가져다 준 것이라고 말하면 되기 때문이지요.
- 그러나 이원론의 결정적인 결함은 ‘해답(解答)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단이 이길지 하나님이 이길지, 또는 선신(善神)이 이길지 악신(惡神)이 이길지, 누가 이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우리로 하여금 [운명론(運命論)]에 맡길 수밖에 없도록 만듭니다. 즉 이원론(二元論)은 역사에 대한 방향이 없이, 결국 내일을 향해서 뛰는 인간의 삶을 그 사람의 운명 탓으로 돌리도록 오도(誤導)해 버리는, 즉 이방(異邦)적인 철학인 것입니다.
- 그러면 기독교는 이런 문제에 대해 뭐라고 가르치고 있을까요? 성경은 악도 하나님이 허용하셨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악을 허용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끝내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계시록).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신의 이유 때문에, 그리고 그분 자신의 전지하시고 놀라우신 계획과 섭리 가운데서, 악은 물론 고통과 어둠까지도 허용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허용하셨으므로 그분이 종결을 맺으실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은 하나님 한분으로 귀결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일원론(一元論)적 세계관(世界觀)입니다.
- 따라서 이런 일원론 속에서만 하나님을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알 수 있고, 또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역사가 시작된 것으로 보는 이 기독교적 관점만이 이 세상의 악과 고통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을 제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욥기의 첫머리 부분에서 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2) 욥에 대한 사단의 비방과 고소(1:8-12) : <그러면 욥기의 중요한 주제는 무엇입니까?> - 욥기는 물론 고통의 의미와 이유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층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주님께서 욥기를 우리에게 허락하신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다른 데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1:8-9)을 보십시오. : ① 먼저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욥을 칭찬하십니다. 즉 거짓 없는 욥의 경건한 신앙을 인정하시며 자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사단에게 욥을 칭찬하신 것일까요? 문제는 이런 하나님의 욥을 소개하시는 말씀이 공중 권세 잡은 자로서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단에게 있어 강력한 도전이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욥처럼 하나님이 사단에게 칭찬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요?
- ② 그러자 사단은 이러한 욥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적인 평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즉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리이까?”라고 말합니다(v9). 바로 이 구절 속에서 우리는 이 욥기 전체의 주제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즉 사단은 욥의 경건이 순수한 것이 아니라고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 이러한 이의 제기는 욥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v10)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욥의 주위에 두꺼운 울타리를 두르시고, 그 누구도 누리지 못하는 축복을 내려주셨습니다. 그런 축복을 받는다면 누구라도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겠습니까?” 즉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그가 재산이 많고 팔자가 좋아서, 소위 복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욥의 경건은 물질적인 축복 때문이므로, 그의 신앙은 결코 순전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 ③ 이렇게 사단은 하나님께 욥을 참소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사단은 대담하게 욥의 경건을 시험해 볼 것을 제안(提案)합니다(v11). 이는 “하나님이 그를 다른 인간들처럼 비참한 삶을 살게 하시면 당장에 악한 본성을 드러내 하나님을 향해 달려들 것입니다.”라는 의미였습니다.
- 이처럼 사단은 욥의 신앙동기를 의심하면서, 만일 그가 누리는 복을 거두어 버리면 그는 틀림없이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욥의 본성을 알고 싶으시다면, 즉시 그를 위한 축복과 보호를 거두면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가 이 많은 축복을 누리지 못하면 결코 신앙을 갖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단은 자신의 관점에서 욥의 행동을 예측했습니다.
- ④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단의 의혹에 대면하여 욥을 시험해 보라고 허락하십니다(v12). 그런데 하나님의 이 같은 허용 속에는 욥의 재산뿐 아니라 욥의 자녀들의 생명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자녀들도 부모의 소유물로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가지 단서를 붙이셨습니다. 즉 욥의 재산이나 가족들에게 해를 주어도 좋지만, 그에게는 절대로 네 손을 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 이렇게 욥 그 자신에 관한 한 사단은 아무런 권한도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단이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욥은 이런 일이 하늘에서 진행되는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사단의 고소를 받아들여 욥의 재산을 칠 권한을 허락해 주신 것일까요?>
첫째, 사단의 고소가 근거 없는 비방에 불과하다는 것, 즉 진정한 경건은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임을 입증해 보이시려는 것입니다. 둘째, 사단의 계교를 주권적인 섭리의 도구로 사용하셔서, 욥으로 하여금 더욱 성숙한 신앙의 자리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욥의 영적 성숙과 진보를 위해서 사단의 시험이 사용된 것이었습니다.
☞ <여기서 우리는 욥의 경건의 동기(動機)에 의문을 제시하는 사단의 고소(告訴)를 자신에게 적용(適用)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과연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가?”
- 즉 “왜 우리는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가?” 이것이 욥기의 주제인 것입니다 동시에 욥기를 앞에 둔 우리의 물음이어야 합니다. 고통에 대한 이유를 찾기 위해 욥기를 읽으신 분은 아마 욥기를 다 읽고 나서도 대답을 발견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욥도 자신의 고통에 대한 이유를, 그에 대한 대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욥은 고통과 씨름하면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이것이 욥기의 더 심오한 주제입니다. 사실 사단이 했던 (v9) 말씀은 사단의 하나님께 대한 조롱인 것입니다.
- “우리가 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까? 오늘날 당신은 왜 하나님을 경외하십니까? 축복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오늘날 한국 교회 성도들의 신앙을 왜곡시키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는 소위 <기복신앙>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또 욥은 그래서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런 이유로 하나님을 섬기십니까? 내 자손이 잘 되고, 내가 보다 넓은 집에서 사는 세상적인 이유가 하나님을 섬기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까? 그것이 전부입니까? 이것이 바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던지고 있는 욥기의 질문인 것입니다.
- <동시에 이러한 사단의 의혹은 이 땅의 ‘상식(常識)적인 지혜의 세계(世界)’를 대변(代辯)하는 것입니다.> : 즉 욥기의 저자는 “보상(報償)의 동기(動機)”를 따라서만 신앙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사단의 입을 통해 발설함으로써, 그러한 상식이 ‘사단적’이라고 암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이러한 사단의 의혹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 <그런데 욥기 전체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마지막 장을 보면 욥은 소위 세상적인 축복이 없어도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었습니다(42:1-6).> 그는 돈이 없어도, 자식들이 없어도, 그 모든 재앙과 폭풍 속에서도,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욥기의 주제인 것입니다.
☞ (단3:13-18)의 다니엘의 세 친구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이 바로 그것입니다. : 여러분은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는 사단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그런 신앙, 즉 내 삶의 외부적인 조건이 다 사라진 마당에서도 당신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바라보고, 그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실 수가 있습니까?
- 욥의 경건이 물질적인 축복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단의 비방은 일면 그럴 듯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 물질적 부요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의 자리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쾌락을 좇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마19:24)는 예수님의 말씀도 그와 같은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 <그런데 이러한 사단의 의혹에서 사단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욥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단지 신앙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욥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장 중요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욥기 말미에서 욥을 곤경에서 구해주는 것은, 결국에는 그가 하나님과 가졌던 인격적(人格的)인 교제(交際)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 본질적인 종교가 (자신의 신앙을 사용하기보다는 그 종교로 살아가는 것, 즉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라면, 비본질적인 종교는 (종교를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 경우)인 것입니다. 즉 세상적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피조물인 사람의 본분인 것입니다. 더욱이 인간이 구속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지극히 마땅한 일인 것입니다.
- 이처럼 욥기를 살펴볼수록 인생은 힘들 뿐 아니라 부당하다는 것을 더욱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때로 그분의 존재를 의심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부재는 그분이 과연 우리를 돌보시는지를 궁금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존재하시며, 우리를 항상 돌보십니다.
- (끝으로 우리 모두가 이러한 하나님과 사단의 대화를 통해 살펴보아야 할 네 가지 삶의 귀중한 원리가 있습니다.) : ① 사탄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존재하며 시시때때로 우리를 공격한다. ② 하나님은 때로 아무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건만 시련을 허락하시어 우리로 감당하게 하신다. ③ 때로 하나님의 뜻은 아무리 궁리해도 이해할 수 없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에게 선이 된다. ④ 살다보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지만 영적 성장에 반드시 필요한 일들을 겪게 마련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