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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15일(토)
* 시작 기도
주님...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라 하셨습니다(창 12장).
그 언약이 이방인인 로마 백부장 고넬료 집안 사람들에게도 이어졌으며(행 11장) 오늘에까지 왔습니다.
주님의 언약은 신실하여 결코 중단되지 않음을 믿습니다.
오늘이라는 새 날을 주셨으니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옵소서.
나의 의를 드러내려 하는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이렇게 나는 죽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주님께 그런 필요를 구할 때 주님은 그것을 넘어 정말 중요한 생명의 가치를 주시는 줄 믿습니다.
이를 위하여 땅에 속한 것들을 초연히 여기며 초월할 수 있는 진정한 믿음도 허락하십니다.
하여 지금 현재에 머물지 않고 주님의 십자가와 무덤에 함께 연합하여 동참할 수 있는 은혜를 주옵소서.
무엇보다 진정한 복음을 통하여 생명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요 12:37-50
제목 :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37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38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39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40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41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43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44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4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4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50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
* 나의 묵상
예수님은 유월절에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온 헬라인 몇 명과 제자들과 함께 담론을 하신다.
한 알의 밀이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신다.
이는 당신의 십자가 죽음이 많은 영혼들을 살리며 영생을 줄 것을 말씀하신다.
그와 동일하게 이 땅에 사는 사람도 자기의 목숨(푸쉬케)를 사랑하면 목숨을 잃을 것이나 목숨을 미워하면 영생(조에)를 얻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런 사람은 ‘나 있는 곳’ 곧 아버지 집에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인데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귀하게 여기실 것이다.
또한 십자가를 지심에 대한 인간적인 고뇌를 토로하시나 자기의 뜻이 아닌 오직 아버지의 원대로 하여 달라고 하시며 자신이 바로 이 때를 위하여 왔음을 말씀하신다.
이제 그 때가 왔기에 예수님 자신은 땅에서 들리지만 모든 사람을 당신이 지신 그 십자가로 이끄실 것이다.
그것은 곧 주를 믿는 자들은 그 십자가를 통하여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게 될 것을 천명하신 것이다.
무엇보다 이를 통하여 이 세상의 신 곧 마귀는 쫓겨나게 될 것이다.
이런 말씀과 함께 많은 표적을 행하셨음에도 거기에 있는 무리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은 이미 예언된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사야 53장과 이사야 6장의 말씀을 인용해서 그것을 확증하신다.
(사 53: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사 6:10)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이사야 53장은 오실 예수님의 메시야적 행위로서의 십자가 사건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그 어느 누구도 믿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그들을 구원할 여호와의 팔 곧 여호와의 구원의 능력이 그들에게 나타났음에도 그들은 믿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왜 그들은 믿지 않았는가?
그것이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모습 속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이들은 메시야로 오시는 예수님이 정치적 메시야로서 그들을 식민지로 삼고 있는 로마를 물리치는 개선장군으로 백마를 타고 올 것을 믿었다.
그런데 그들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오기 때문에 그를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말씀은 이사야 53:2-4절에서 잘 묘사하고 있다.
(사 53:2-4)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자기들을 구원하려면 적어도 백마 탄 왕으로 나타나야 할 예수가 구원은커녕 죽으러 왔다고 하니까 그들은 순간적으로 꼭지가 돌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돌변하여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대고 만다.
성경은 많은 경우 역설적이다.
우리의 이성과 생각을 뒤집는 역설을 일컫는다.
사람의 생각은 이 세상 곧 만물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상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세상을 초월하여 항상 만물 위를 바라보고 그 나라를 사는 영생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인간의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심으로 그들이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다.
이런 심판을 통하여 그들의 완악한 심령 곧 살이 쪄서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그 심령을 깨트리고자 하시는 것이다.
본문 40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고 그러신단다.
사실 주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주님께 온전히 고침을 받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들이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고 한다는 말씀은 도대체 무슨 말씀인가?
여기서 그들이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주님께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들에게 영생이 주어지는 온전한 고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그저 표적과 기적을 보고 겉으로만 믿는 수준의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런 이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자기들의 임금 삼으려는 모습이나,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는 사건, 그리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사건을 통해서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었지만 그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는 믿음, 아주 얄팍한 믿음에 지나지 않아서 잠시 외부의 시련이나 환난이 오면 금세 넘어지고 마는 믿음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자세하게 설명하신다.
이 씨 뿌리는 비유에서도 동일하게 이사야 6장의 말씀을 인용하신다.
(마 13:14-15)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이 심판의 말씀을 듣고 깜짝 놀라 반문을 한다.
그러면 언제까지 그들의 마음이 이렇게 강퍅하게 되어야 하느냐고 말이다.
(사 6:11a)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그 때 하나님의 대답은 이렇다.
(사 6:11b)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이와 같이 주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되 완전히 황폐하여질 때까지, 그래서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어서 오직 하나님만을 찾게 되는 그 때까지 심판하신다.
그 심판은 그들을 죽게 하기 위한 심판이 아니라 그들의 몸은 고통스럽고 힘들지라도 그들의 영혼이 살아나는 영생을 얻게 하는 심판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 곧 무덤이 아니고서는 사람은 얼마나 그 심령이 완악한지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다.
물에 빠진 사람이 붙잡을 지푸라기라도 있으면 그것을 붙잡지 결코 주님을 찾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 정도로 사람의 마음은 완악하다.
여기서 완악하다는 말은 헬라어 ‘파퀴노’로서 마음이 살찌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조금만 육신의 살이 쪄도 견디지 못하고 그것을 빼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이는데, 정작 영혼이 살찌는 것은 전혀 깨닫지 못한다.
육신의 밥은 며칠만 굶으면 견디지 못한다.
왜냐하면 배가 고픈 것을 느끼고 그것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3일만 굶으면 남의 집 담을 넘는다는 말이 그것이다.
그런데 육신의 배가 고픈 것은 그렇게 금방 느끼고 아는데, 정작 중요한 영혼의 배가 고픈 것은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영혼의 양식은 말씀인데, 그 말씀은 안 먹는다고 해서 배가 고프지 않기 때문이다.
배가 고프기는커녕 안 먹으면 안 먹을수록 오히려 더 심령에 살이 찐다.
이 또한 역설적이다.
심령은 가난해져야 할 대상이다.
그런데 영혼의 양식인 말씀을 먹지 않을수록 살이 쪄서 영혼이 배고픈 것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고난이라는 심판, 무덤의 심판을 통해서 살이 찐 그 심령이 살이 빠지도록, 가난해지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런 심판을 통해서만 그 영혼이 온전히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런데 사람들은 그 심령이 완악하고 살이 쪄서 생명을 주는 영혼의 양식을 먹지 않는다.
무엇보다 주님이 주시는 구원과 영생에 관심이 없다.
그렇게 해서 결국 영생에서 멀어지는 자들이 너무나 많다.
이렇게 극심한 고난을 통해서 그들의 심령이 바뀌고 진정으로 돌이켜 주님께 돌아와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심령이 살찐 상태를 좋아하고 즐기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다.
그래서 주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다.
이를 가리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 6:13) 그 중에 1/10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주를 찾고 영생을 얻는 이들이 심지어 1/10도 안 될 것이며 그것도 그루터기만 남게 될 것을 천명하신다.
예수님께서도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눅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이는 인자가 올 때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의 마지막 때에 이 세상에서 과연 이런 믿는 자를 볼 수 있겠느냐는 말씀이다.
그만큼 믿는 자 그리고 구원을 얻어 영생을 누리는 자가 적을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표면적으로만 믿는 이들이 오늘 본문에도 여전히 등장한다.
(42-43)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이런 자들에게 바로 하나님의 무덤의 심판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영광보다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더 사랑하는 자들로 바뀌어야 한다.
예수님은 유월절에 모인 유대인들에게 큰 소리로 외쳐(cry out) 말씀하신다.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또한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 곧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나는 나를 믿는 자로 하여금 어둠에 다니거나 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빛으로 이 세상에 왔다.
사람들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려고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를 믿지 않고 내 말을 받지 않는 자들을 심판할 이가 있는데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들을 심판 할 것이다.
내가 한 말은 결코 내 생각과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명령이다.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명령은 다름 아니라 영생이다.
따라서 나는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말씀 그대로 증거할 뿐이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애타는 심정을 헤아려 본다.
어떻게 해서라도 구원의 대열 곧 그루터기 안에 들어가도록 하기 위하여 무덤의 심판을 단행하시는 그 처절한 심정을 읽을 수 있다.
나는 예전에 그런 주님의 심정을 헤아리기는커녕 오히려 심령에 살이 찐 상태를 즐기는 자에 속하였었다.
그렇다고 예수를 안 믿는 것은 아니었으나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서도 나의 심령이 살이 쪘다는 사실은 알지 못하였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를 믿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는 관리들과 다름없었다.
내가 바로 출교를 당할까봐서 몸을 움츠리는 자였고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한 자였다.
솔직히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어리석고 우매한 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그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기 위해서 사람들을 높이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것이 사람을 섬기는 것이라는 미명하에 말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마음을 아시고 나를 버리지 않기 위해서 무덤의 심판을 단행하셨다.
그 심판을 통해서 나에게 복음이 이르렀고 그 복음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 곧 하나님의 뜻이요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우리 주님의 뜻인 영생(조에)를 얻어 누리는 자가 되었다.
내가 담대하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지금은 늘 영혼의 양식을 먹고 그 양식으로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 들어가 아버지와 아들을 알기 때문이다.
이사야 선지자도 주님의 영광을 미리 보고 주님을 가리켜 그 고난의 심판을 예언했던 것처럼 오늘 나 또한 아버지 품에 계시는 아들에게 주신 그 영광을 보면서 오늘 하루를 시작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는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였고 주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기보다 그 십자가를 부끄럽게 여기던 자였습니다.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그들에게 잘 보이고자 그들을 열심히 섬겼던 나는 사람의 칭찬과 인정을 먹고 사는 자였습니다.
그런 나를 주님께서는 무덤의 심판을 통하여 그 어둠의 동굴 안에서 이끌어 내셨나이다.
그리고 이제 다시는 그 어둠의 동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으며 날마다 주님이 주시는 일용할 양식인 말씀을 먹어 예수로 부요케 하십니다.
영혼의 양식을 먹으면 먹을수록 심령은 가난하여지나 예수로 부요한 자가 되기에 나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나이다.
입술로만 노래하는 자가 되지 말게 하시고 나의 삶으로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한다는 고백이 터져나오게 하소서.
이 땅에 수많은 사람들이 땅에서 자라는 나무가 커지고 가지도 많아지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은 그 나무의 크기가 아니라 그것을 바치고 있는 그루터기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주를 믿는 이들이 참 영생을 누리는 이 땅의 그루터기가 되게 하옵소서.
무덤의 심판을 통하여 그루터기로 남는 것이 진정한 복이요 영생임을 알게 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 땅에서 현재로 환난을 당하는 주의 사랑하는 자녀들 또한 그 환난을 통하여 주님의 나라 곧 영생을 현재로 누리는 은혜가 있게 하옵소서.
생명의 그루터기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