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한글의 우수성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 한글은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창제하여 1446년에 반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주시경 선생 등의 한글학자들이 1910년대 초부터 이것을 ‘한글’이라고 불렀습니다. 24개의 자·모음만으로 약 1만 1000개 이상의 문자와 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한글은 디지털 문자로도 가장 적합합니다. 한편 중국어나 일어는 한자 변환과 같은 여러 작업이 필요해서 한글에 비해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그런데 이런 설명은 한글이 지금도 사용하는 살아 있는 언어이기에 관심을 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제가 신라 때부터 최근인 1956년까지 긴 세월 동안 사용되다가 지금은 사라진 이두문자에 대해 말한다면, 소수의 전공자 외엔 별 흥미를 끌지 못할 것입니다.
구약 성경 이야기도 이와 유사합니다. 어떤 이는 우리가 왜 남의 나라인 이스라엘의 역사를 알아야 하느냐고 항변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구약을 읽을 때는 그것이 현재 우리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꼭 따져보아야 합니다. 관련해서 어거스틴은 “구약에 신약이 감춰져 있고, 신약에 구약이 밝혀진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구약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겪은 일들은 “우리의 본보기”(examples)라고 했습니다(고전 10:6). 따라서 아침에 묵상한 아래 말씀도 소위 ‘이두문자’ 식이 아니라 ‘한글’처럼 이해하고 누려야 했습니다.
그때에 아말렉이 와서 르비딤에 있는 이스라엘과 싸웠다 …
여호와께서 대대로 아말렉과 싸우실 것이다(출 17:8, 16).
성경에서의 아말렉과의 전쟁은 매우 인상적인 장면과 말들을 낳았습니다. 한 예로 주일학교 학생들의 그리기 교재로도 쓰이는, 모세가 부축을 받아 팔을 들고 기도하는 장면이나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유명한 말은 바로 이 아멜렉과의 전쟁을 배경으로 합니다. 그렇다면 ‘호전적’이고, 출애굽 후에 이스라엘 백성의 첫 싸움 상대이고, 이스라엘 백성을 끊임없이 괴롭히며 피곤한 틈을 타서 뒤처진 사람부터 쳤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 여호와께서 대대로 싸우시겠다고 하신 이 아말렉의 신약에서의 실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여러 자료들을 찾아본 결과, 아말렉과 관련된 역사적인 사실들을 소개한 내용들은 많은데, 그 영적인 의미를 밝힌 기록은 얼마 안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말렉’이 신약의 ‘육체’를 예표한다는 해석이 절대다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월터 윌슨이 편찬한 <성경 예표사전>은 ‘아말렉’이라는 항목에서, 아말렉은 에서의 손자인데, 에서는 육체의 예표이고, “아말렉 또한 육체의 예표로서 하나님의 경륜에서 조금도 입지가 없다”라고 말합니다(Amalek is also a type of the flesh which has no place in the economy of God)(A Dictionary of Bible Types, Walter L. Wilson, Baker Books, 1999, P. 11). 미국의 갈보리 채플 담임인 척 스미스 목사 역시 ‘육체와의 싸움’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아말렉이 육체의 예표라고 말합니다. 플리머스 형제회의 대니얼 스나돈도 ‘아말렉과의 전쟁’이라는 위 본문 관련 글에서 ‘구약의 아말렉은 육체의 예표이고, 이스라엘의 가까운 친척’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육체도 두 방면이 있습니다. 즉 육체가 타락한 사람 전체를 가리키거나(롬 3:20,
갈 2:16, 5:19) 혹은 타락한 사람의 몸만 가리키는 경우입니다(롬 7:18). 참고로 회복역 성경은 위 본문 각주에서 “아말렉은 타락한 옛사람의 총체인 육체의 예표”라고 말합니다(8절, 각주1).
만일 이런 해석이 맞다면, 수천 년 전에 활동했던 이스라엘의 원수 아말렉이 오늘날의 이스라엘인 우리 코앞에, 아니 우리 존재의 일부가 되어 함께 붙어살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 육체의 목표는 우리가 가나안 땅의 실재이신 그리스도를 취하여 누리지 못하게 막는 것입니다. 묵상이 이 대목에 이르자, 육체(아말렉)와의 전쟁에 직면하여 사는 한 사람으로서 성경의 교훈에서 배운 다음 몇 가지가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첫째, 아말렉은 이스라엘 백성의 만나와 생수 사건 직후에 갑자기 쳐들어왔습니다(출 17장). 따라서 주님과의 좋은 누림을 가진 후에 슬며시 기어들어 오는 느슨함과 방종을 경계하기 원합니다.
둘째, 사울은 아말렉에 속한 모든 것을 죽이라는 명령에 불순종하여 큰 화를 당했습니다(삼상 15장). 즉 ‘타고난 생명의 좋은 방면들’도 십자가를 거치지 않았으면 하나님의 눈에는 그저 ‘아말렉’일 뿐입니다.
셋째, 바울처럼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롬 9:1, 행 23:1, 딤후 1:3). 한때는 귀신 쫓고, 병 고치고, 소위 마귀를 대적하는 전쟁에서 유명세를 타던 이들이 인생 말년에 금전 혹은 부도덕한 일로 실족하는 경우를 볼 때, 이것은 그들이 양심의 경고를 계속 무시한 결과임을 깊이 느낍니다.
넷째, 음부의 문들은 (건축된) 교회만이 이길 수 있습니다(마 16:18). 다수의 형제들과 동역했던 사도 바울처럼, 단독을 떠나 최소한 한 명 이상의 몸 안의 지체들과 긴밀히 동역하는 교회 생활을 할 수 있기 원합니다.
첫댓글 아멘입니다.
그러나 그냥 육체라기보다는 바울이 말한 <죄의 몸>인 육체라고 생각합니다.
즉, 생물학적인 육체가 아니라 성령을 거역하는 성품으로써의 육체라는 것이지요.
공감하면서 평상시 느끼고 있었던 것을 덧 붙여 봅니다
아말렉의 뜻은 "내가 왕이다"는 뜻으로 < 육신의 대표적 속성> 이라 할 것 입니다
때문에 우리 믿는 사람들 자신이 왕으로 왕이 되어 왕의 눈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려면
우리의 생명이 다하여 흙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모세와 같이 기도로 아각과 싸워 여호와 닛시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오늘도 믿음의 기도의 손을 들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일어났었던 ㄱ사건은 시 공간을 떠나 반드시 오늘 현재에도 일어나고 잇다는 사실 입니다
때문에 우리도 모세처럼 두손을 십자가에 못박고 내리지 않으면 하나님을 왕되게 영광스럽게 할 것 이고
올린 두손이 고통스럽고 아프다고 내리면 자신이 왕이 되어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다가 죽을 것 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기 위하여 대대로 싸우실 것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대대로 하나님께서 싸우게 될 적이 바로 내가 왕이 되어 내 생각으로 살고 있는 아말렉이라는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