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이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은
서울 고등법원 민사부에서 조정위원으로 일한 지도 십 년이 훨씬 넘는다. 지금은 몇 부위원장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주로 두 의료 전담부에서 고등법원에 올라온 항소 건을 조정한다. 나의 경우는 비교적 조정 성공률이 높다. 왜냐하면 재판 기록을 전문가의 입장에서 시간을 들여 꼼꼼히 원피고의 입장을 떠나 공정하게 살펴보기 때문이다. 조정이 성공적으로 끝난 건수가 하나둘이 아니고 소가가 수십억 원짜리 송사도 맡아 해결한 적도 있다. 한편 얼마 되지 않는 수당을 받으면서 조정위원들도 막대한 성공 보수를 챙기는 변호사처럼 대우를 해주었으면 하는 바램도 있다. 물론 나는 이를 재능봉사로 생각은 하고 있으면서도.
상대방의 이야기만 들어주어 조정이 완료된 건이 있었다.
환자는 한창 예쁠 때인 학령 전, 그러니까 대여섯 살 되는 여자 아이였다. 이 애가 백혈병으로 확진을 받고 서울 유수한 대학병원에서 항암요법으로 치료 중이었는데. 환자를 자신의 동생처럼 살갑게 보아주던 여의사가 원래 있었던 미국의 병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 여의사는 백혈병 환자에서 병 자체, 아니면 항암요법 도중 흔히 합병하는 감염으로 인한 고열이나 코피, 잇몸 출혈, 피부 출혈반점 등이 주말이나 공휴일에 발생하면 보호자가 직접 연락을 한다. 그러면 환자를 응급실로 오게 하고는 자신도 곧장 응급실에 가서 환자를 보고 필요하면 입원도 시키는 등, 소위 의사 환자간의 관계 rapport가 확실하게 이루어 진 상태. 그러나 이 환자를 인계받은 남자 선생은 어찌 보면 전형적인 우리나라 의사였다. 환자가 불편해하면 일주일에 몇 번 있지 않는 자기의 외래에서 보고, 환자가 급해서 응급실에 가더라도 인턴이나 당직 의사가 먼저 환자를 처치하였다. 이러다가 환자의 상태가 갑자기 나빠져 입원 치료 중 사망하게 되었다. 이에 환자의 부모가 병원과 주치의를 상대로 업무상 과실에 의한 위자료 청구소송을 내었다. 1심에서 이를 이유 없다고 기각 판결을 내려 고등법원까지 오게 되었다.
나의 전공은 원래 내과 신장학이나 재판부의 간곡한 부탁과 나 역시 혈액 종양학 환자는 대학병원에서 수련 받던 전공의 시절 여러 백혈병 환자를 경험하였고, 우리 대학 내과서 교수 초년 차에 이 분야 전공이 없었던 터라 한동안 보아왔기에 승낙을 하였다. 미리 보내어 온 1심 재판 서류 일체를 자세히 검토한바 병원이나 의료진의 과실은 찾을 수 없었으므로 1심의 판결은 정당하였다고 결론을 지었다.
조정을 하러 들어갔다. 양측의 변호사들을 물리치고 나이가 마흔 전후 환자의 어머니와 단둘이만 있는 조정실에서 먼저 환자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하였다. 어머니는 딸아이의 사진을 나에게 보여주며 백혈병의 발병 초기부터 그동안의 치료 경과 등 세세한 부분을 빠지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나에게 설명을 하였다. 나는 그저 “그렇지요.” 하며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주기만 하여도 한 시간 반이 훌쩍 지나갔다. 이야기를 다 마친 환자의 어머니는 “선생님,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하며 눈물을 훔치며 일어섰다. 이로써 조정은 싱겁게 끝난 셈.
무엇이 문제였을까?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여태까지 아무도, 의사도, 변호사도, 재판부도, 그 어머니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또 하나.
이분은 그야말로 이웃사촌이다. 우리와 출입구만 다른 같은 아파트에서 무려 30여 년간을 같이 살아왔다. 남편은 대학을 나보다 1년 먼저 나왔고, 부인은 처의 이화여대 1년 선배이다. 친구는 먼저 부인끼리였다. 어떻게 알려졌는지 몰라도 나는 술 한 방울 마시지 않는다고 소문이 났다가 같은 애주가란 걸 알고 두어 달에 한 번씩 부부끼리 저녁에 만나 동네에서 맛있는 음식과 술을 일차, 이차까지 마셨다. 술을 거의 못 마시는 처와 달리 부인은 우리와 같이 저녁을 먹을 때 대작도 곧잘 하였다. 만나면 같은 시대를 같이 살아왔기 때문에 이야기가 통하는 점이 많아 더욱 좋았고.
처는 친구와 자주 동네의 이름난 칼국수집에서 싼 점심을 먹고 분위기 있는 집에서 비싼 커피를 마신다고 내가 놀려주곤 하였는데. 그 해 6월 초 대학 산악반 후배들 저녁을 사주는 자리에 처로부터 전화가 왔다.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깜짝 놀라 교통사고냐고 물었는데 그게 아니란다. 몇 년 전 요로결석으로 나에게 와서 치료받아 나은 적이 있었다. 지난 3월 가슴에 통증이 있어 여동생이 아는 의사가 있는 가까운 종합병원에 가서 관상동맥 질환이란 진단 하에 관상동맥 조영술을 비롯한 흉통에 대한 모든 검사를 마쳤으나 원인을 찾지 못하였다 한다.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눈과 피부에 황달이 나타나고 적갈색의 소변을 보고는 부랴부랴 시행 받은 복부 초음파에서 암의 간 전이가 발견되었다. 그 뒤 위장내시경에서 원발성 궤양성 위암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수술도 못 받을 상태였다. 역순으로 진단이 붙은 병은 급작이 악화되어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이다. 처음 불편하였을 때 연락만 하였어도 잘 보살펴드렸을 터인데.
문상을 가고, 연신내에 있는 자그마한 절 49제에 처와 같이 다녀왔으나 밤에 마실 나갈 때 보면 살던 아파트에는 불 꺼진 방만 보였다. 한번 만나 보아야지 하였으나 동네에서 만나기 힘든 채로 지난주 아파트 입구에서 만났다. “다음 주에 식사나 한번 하시지요.” 어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온 말. 조금 일찍 퇴근 한 며칠 후 휴대전화는 모르나 아들이 친구지간이라 간신히 알아 전화 후 저녁 약속을 잡았다.
우리 부부와 만난 그는 그동안 3년간 오피스텔에서 혼자 생활하였고 살던 집으로 돌아온 지 몇 달 안 되었다고 했다. 그새 3년이 흘렀단 말인가? 그곳에서 밥은 해먹지 않고 동네의 모든 음식점을 섭렵하였다며 허탈하게 웃었다. 어색한 자리로 생각을 하였으나 자기의 처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결혼에 성공하고 지내온 날까지 그는 처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런 걸 누구에게 말할 수 있었을까. 두 아들과 며느리들, 친척, 자신의 친구, 처의 다른 친구와는 만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무에게도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오로지 우리 부부에게만 털어놓았다. 술 좋아하던 그도 술이 많이 줄어 소주를 찬물에 섞어 마시며 긴 이야기를 다 마치고는 그제야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첫댓글 수석회 50집에 실린 나의 글입니다.
상대가 하고싶은 말만 들어주어도 문제의 해결의 반은 끝났다는 생각은 맞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상식이 통하는 교육받은 사람의 경우고 세상은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아 무지한 사람이 사회의 가장 커다란 부담이 되는 군의 사람들이라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내가 인간을 구별하는 기준이 공부를 얼마나 했느냐 안 했느냐로 구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이땅에 많은가? 나라가 다 넘어가게 생겼는데도 일은 안 하고 길거리를 누비며 국가를 전복하겠다는 인간들이 과연 배운 인간들인가?
그렇치요. 공부를 얼마나 했느냐 안 했느냐. 도 중요하지만 제대로 하였느냐 아니냐. 가 더 중요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