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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죽음을 맞이하게 될 그 유월절이 왔다. 수많은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에게 이방인들이 찾아왔다. 이들은 성전에서 예배드리기 위해 온 그리스 사람들이었다. 유대교를 알고 유대인들의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며, 동시에 예수가 그 유대교 역사 안에서 제시된 메시야라는 사실을 믿었던 자들이라 추정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의 제자 중 하나를 찾아가 “선생님, 우리가 예수를 뵙고 싶습니다.”(요12:21)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찾아간 제자는 빌립이라는 사람이다. 유대 갈릴리 출신이라는데 '빌립'은 히브리식 이름이 아니다. 그의 히브리식 이름은 성경에 발견되지 않는다. 아마 빌립으로만 불리었던 듯 싶다. 마태복음 4:15절의 주해를 보면 갈릴리 거주 유대인들은 B.C 732년경에 앗시리아인들에게 대거 끌려갔고(왕하15:29), 이후 갈릴리 호수 인근과 갈릴리 지방 전역에는 이방인들이 이주해서 정착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저런 정보를 통해 추측하자면 빌립은 유대계 혼혈이었거나 이방인 출신으로서 갈릴리 지역에 토착화된 거주민의 후손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면 유대식 이름없이 헬라이름만 있는 것도 이해가 된다. 그러면 헬라(그리스)인 신자들이 여러 제자 중 굳이 빌립을 찾아가 예수를 만나게 해 달라고 한 것 또한 이해가 된다. 이방인들과 밀접한 혈통적 지리적 관계가 있는 제자 빌립이 등장하고, 그에게 그리스 태생 이방인들이 빌립에게 청하여 예수를 만나고자 하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자연스러운 활동으로 이해된다.
예수는 빌립에게 이 소식을 전해듣고 이렇게 말씀한다. “인자가 영광 받아야 할 때가 왔다!"(요12:23) 이제 하나님께서 시키신 소명을 감당할 날이 도래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언어로 '영광'이라 표현되었지만 그 실체는 아래와 같은 것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히 그 생명을 보존할 것이다."(요12:24~26) 즉 예수가 하나님의 뜻대로 죽는 것이 그가 받을 영광이다. 영광을 부활승천이후 보좌우편에 앉는 것이라 해석한다해도, 그의 죽음은 영광이 주어지려면 필수불가결의 핵심적 사건이다. 죽음을 통과해야만 영광이 있기에 그의 수난이야말로 그에게 맡기신 사명이다.
그가 받을 영광이 그의 죽음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은 이어지는 말로도 증명된다. "지금 내 마음이 몹시 괴로우니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아버지여, 내가 이 시간을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겠느냐? 아니다. 나는 바로 이 일 때문에 이때 왔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요12:27~28)
기독교에서 기복신앙의 썩은 물을 제거한다면, 성경은 특히 신약은 매우 단촐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예수와 같이 밀알처럼 썩어서 주변을 돕고 밝히고 살아나게 하는 일에 일조하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신자의 삶이고 제자의 길이다. 그렇게 성자 예수의 뒤를 따른 이들은 하나님은 예수에게 하셨듯이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할 수 있다(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제자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성부와 성자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22).
부처의 제자들은 가사를 입는다. 가사란 옷의 형태는 풍장의 관습이 있던 그 지역에서, 죽은 사람에게 입히던 일종의 수의를 줏어입은 것에서 유래했다. 제행이 무상하다, 모든 것이 공하다는 부처의 가르침과 품성을 따라한 일이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시체의 옷을 줏어 걸친, 무소유의 행보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시간이 오래되고 그것이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중국의 도인들이 입던 장삼이 추가됐다. 그래서 가사장삼이 스님들의 상징적 옷이 됐다.
예수의 제자들은 거지에 다름없었다. 모두가 소유를 버리고 예수를 따랐고 예수가 승천 후 성령이 그 역할을 대신하자, 이젠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며 그 길을 따랐다. 예수믿고 부자된 사도나 제자가 아무도 없고 신약성경 내내 예수믿은 결과로써 부를 축적한 자가 한명도 안 나온다. 다만 죽은 뒤 천국에서, 아니면 세상 끝 날 새로운 세상에서 위로와 보상이 주어진다고 약속할 뿐이다. 또한 성령께서 신자와 언제나 함께 있겠다고 하실 뿐이다. 그러나 현세 기독교는 가사에 장삼이 추가된 정도와는 비교가 안되는 막대한 부와 명예와 승리가 예수믿는 신앙으로 인해 주어진다고 주장한다. 일부의 주장이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인간들이 이것을 바라고 외치고 믿고 있는 현실이다. 이 정도면 일부라고 하면 안된다. 오히려, 현대에는 일부가 이를 부정하고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살아가야 할 삶은 무엇일까. 잘되고 잘먹고 잘사는 삶이 나도 좋다. 그러나 예수는 베풀고 나누고 희생하고 배신을 감수하고 사랑하고 용서하는 삶을 사셨다. 그러면 내가 살아가야 할 삶은 무엇일까. 그 삶을 닮는 것 아닐까. 삶의 한 점이라도 그 분을 닮기 원한다는 어느 CCM의 가사가 와닿는 오늘이다.
한편, 예수가 예루살렘성에 들어올 때 환호하던 이들은 누구이며, 여전히 예수를 믿지 못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같은 이들이다. 처음엔 그들이 바라고, 알고, 믿었던 메시야가 온 줄 알고 예수가 입성할 때 경배하고 찬송했었다. 예수가 그들의 기대와 다른 말을 할 때 그들의 마음은 차갑게 돌아섰다(요 12:33-34). 그들이 전통적으로 배우고 기대했던 메시야는 영원히 죽지않고 백성과 함께 그 나라를 다스리는 자다(사 9:6-7, 겔 35:15 이하등). 그런데 예수는 자기가 메시야라고 밝히면서 동시에 자신이 죽어야 한다고 공표한다(요12:27-33).
예수가 보여준 표적들과 메세지들은 그가 그리스도임을 증거한다. 그런데 메시야(그리스도)가 죽어야 한다는 말씀은 지금까지 이 무리가 배워왔고 기대했던 것들과는 부합하지 않는 주장이다. 요한복음은 이 상황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하신 하나님의 섭리이자 오래된 예언의 발현이라고 해석해 준다(요12:39-41).
평양감사도 본인 싫으면 그만이고,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고 했다는데, 그런 것을 말하는 건가? 성경에서 인간의 마음을 딱딱하게 굳히고 완악하게 하여 하나님께 쉬이 승복하지 못하게 했던 또 하나의 기록이 떠오른다. 이집트에서 유대민족이 탈출할 당시, 그들을 놓아주지 않으려 했던 파라오(개역성경에선 '바로'왕이라 번역)가 주인공이다. 출애굽기 4장과 7장에는 반복적으로 '하나님이 파라오의 마음을 완악하게 했다, 그의 마음이 완강하다.'는 서술이 나온다.
이에 대한 성경관점은, 하나님의 최종적 의도는 일련의 상황들을 통해 결국 "하나님이 크고 위대하시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내가 내 손을 통해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시매"(출7:5) 하나님이 파라오에게 요구하신 것, 의도하신 것도 동일하다.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니, (파아오)네가 이로 말미암아(열가지 재앙)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출7:17)
즉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이집트와 파라오가 유일무이하고 만유 위에 계신 한 존재로서의 하나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이에 복속되는 것이다. 그러나 파라오는 태양신 라의 후예이자 현신으로서, 즉 세상 가장 위대하고 유일한 신으로서의 자리를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그렇게 보면, 10가지 재앙을 보여주면서 파라오의 무력함을 깨닫게 해준 일은 그를 향한 하나님의 배려이자 회개로 가는 마지막 방안을 제시한 사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임시적으로 그의 마음을 닫히게 만듦으로서, 오히려 더 강력하고 깊고 반박 불가하게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도록 했다고 볼 수도 있겠단 뜻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대적하고 스스로를 왕삼은 이들에게 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갈 놈은 가버려라'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방식으로 사람들을 대해 오신 것일까 생각해 보게된다.
다시 오늘 본문인 요한 복음으로 돌아온다. 사람들의 눈과 귀를 어둡게 하여 깨닫지 못하게 하려 했다는 예언서의 말씀은 이시야 6:10 이하의 인용이다. 그 예언의 마지막 단락은 그들의 멸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의 완악하고 어두워진 마음이 지속됨으로 인해, 마치 파라오 치하의 이집트가 황폐해졌던 것처럼 그들의 터진도 황무하고 황폐하게 될 것이다(사6:11-12). 이시야 본문은 그들의 터전이 싹쓸이에 가깝도록 무너지는 상황으로 몰려가게 되리라 예고했다.
그러나 그렇게 황폐하게 된 상황에서도 하나의 구별되고 예비된 (=거룩한) 씨앗이 있어, 종래에는 그 땅의 새로운 그루터기가 될 것이다(사6:13). 주목할 점은 그들의 완고한 마음 상태로 인한 결과가 삶의 황폐함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뒤에 비로소, 새로운 씨앗이 심겨져 그 땅의 새로운 식생이 시작될 것이다. 그 씨앗이 새로운 식생의 근본이자 근원이 되며, 발판이 되고 근간이 될 것이다. 그러니 그들을 일시적으로 황폐하고 완악한 가운데 두시는 것은, 역시나 '갈 놈은 가버려라'는 식과 전혀 다르다. 오히려 새로운 생명과 땅과 식생을 주시기 위한 밑작업이다. 몇수 혹은 몇십수 앞을 내다보는 바둑기사처럼 하나님의 섭리는 매우 먼 곳까지 닿아 있는 것 같다. 영화 전우치전에서 강동원 배우가 화살맞은 거문고갑을 보며 했던 대사가 떠오른다. "스승님은 여기까지 보신 거구나!"
이사야와 요한복음 두 본문을 이어 생각하면, 그 씨앗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새로운 그루터기가 될 예수로 인해 시작될 새로운 관계의 신앙상태 자체가 황폐한 땅을 새롭게 덮는 생명의 화원이라 부를만 할 것이다. 이는 메시야가 오신 후에는(=새 언약을 체결하시는 그 날에는) 하나님과 사람이 놀랍도록 친밀하고 긴밀하게 되리라는 예레미야의 예언과도 부합하는 상태라고 해석해도 될 듯 하다. 새로운 그루터기가 되신, 새로운 터전이 되신, 새로운 생명의 근원이 되신 예수로 인해 그 나라는 영속하며 그 나라를 통해 하나님이 참되게 통치하시게 된다.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메시야의 왕위가 영원하며 그의 통치가 영속차리라는 예언을 공부하고, "고로, 오실 메시야는 죽지 않는다"는 추론을 만들어내고 이를 사실화, 후에는 진리로서 절대화시킨 이들은 예수가 눈 앞에서 기적을 행하며 "내가 그 사람이다!" 외치셔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 때 하나님은 깨달음을 주지 않으시고 완악한 그대로 두셔서 그들의 영혼이 황폐하여 그들의 실존적 처지의 비참함이 드러나도록 두신다.
그 비참함을 목격한 후에야 새로운 씨앗이 심어질 수 있기 때문 아닐까? 우리의 마음에 말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참되고 의롭습니다"는 성경저자의 고백은 진리이다! 그분의 심판은 우리 영혼에 새로운 생명의 씨앗을 심기 위한 경작이며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한 김매기다. 그러니 심판이란 영생의 말씀, 그분의 명령과 말씀이 우리 안에 '생명'으로 작용하도록 심으시기 위한 예비작업이자 필수작업이다. 뻗대고 돌아서고 욕하고 못 알아듣던 그들, 사실 그 상태조차도 하나님의 섭리, 생명 주시기 위한 계획의 일부였다는 것을 그들을 알았을까. 몰랐겠지. 오늘날도 그러니 말이다.
다시 한번 묻게 된다. 여러 확증적인 표적을 베풀며 사실을 말하시고도 오해를 받으시고, 오해조차 기회로 삼아 양무리의 영혼 속에 영원한 씨앗을 심으려 죽음의 길에 순종하신 예수를 보고있다. 그 예수의 씨앗이 심기워진, 내가 살아가야 할 삶은 무엇일까.
첫댓글 아멘!
황폐한 자리에서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
주의 심판은 참되고 의롭습니다.
가사장삼의 의미가 새롭네!
만물의 찌끼같은
그리스도의 옷을 걸치고 그의 길 가게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