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주일의 모든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청년들이 집중하여 말씀을 듣고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님을 알아가게 되길 기도하였습니다.
오후 예배 때는, 건물로서의 성전 강조가 아니라, 성전 된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터전 위에 세워져야 함을 말씀으로 듣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어젯밤 늦게 서울에 도착하여 아이들과 정담을 나누었습니다.
종달새 예진이는 한결같이 기쁨을 노래하며 즐거워합니다.
어린이 성경을 읽고 있다고 할미에게 얼른 자랑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예진이를 십자가 보혈로 덮어주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주님의 보혈을 의지하오니 정결케 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속에 기쁨의 춤을 추게 하옵소서.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2.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18.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19.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 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본문 주해)
12절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발을 씻어주신 뜻을 아느냐고 묻는다.
예수의 발 씻어주심은 그의 죽음을 예시하지만, 제자들은 지금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이어서 예수님은 발 씻어주심의 해석을 첨가하신다.
13~15절 :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의 주이며 선생으로서 너희의 발을 씻어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고 하신다. 그 본을 보이신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고 나서 제자들이 다른 사람을 발 씻어준 장면이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서로 발을 씻어주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예수님이 오신 것은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고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을 대속하기 위한 제물로 주기 위함이라고 하신다. (막10:45)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은 세상에서 높아짐의 길이 아니라, 종으로 섬기는 길이다. 이러한 종으로 섬기는 길을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본을 보여 주신 것이다.
이런 뜻을 제자들은 지금은 모르지만 이후 성령이 임하고 나서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고 예수님이 가신 그 길로 이끌려 가게 되는 것이다.
16~17절 : 제자들은 주님이 받으신 대우보다 더 나은 것을 기대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할 수 없으며, 주님이 낮아지셔서 그들을 섬긴 것처럼 그들도 다른 사람을 그렇게 섬겨야 한다. 이것을 알고 행하면 그들은 복된 자이다.
18~19절 : 가룟 유다도 예수님이 제자로 택하셨지만, 배신하는 자로 택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선택과 유기가 주의 권세인 것이다.
이렇게 배신하는 자를 선택하신 이유는 성경을 이루기 위함이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41:9)
이 시편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다윗이 예언한 것이다.
이 말씀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가룟 유다에게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을 미리 하신 이유는 나중에 유다의 배신이 일어날 때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믿게 하려고 미리 말씀하신 것이다.
‘에고 에이미’ ‘내가 그’라고 하신 말씀을 사용하신다.
20절 :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요3:16) 아들을 영접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다.(5:24) 아들을 영접하는 자는 영생을 얻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1:12)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아들은 영생 얻은 자를 세상에 보내신다(17:17~18)
그러면 예수님이 보내신 자들은 어떤 모습으로 오는가?
그는 형제들의 발 씻음에 자기를 내어주는 종의 모습으로 온다.
이는 단순히 불우이웃돕기의 차원이 아닌 것이다. 우리의 모습에서 발을 씻기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드러나는 자리까지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의 모습을 보면서 누군가 ‘당신을 보니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소’ 하는 소리를 듣는 자로 보냄을 받은 것이다.
그들은 다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죽었다가 다시 사신 주님을 위해 살아간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5:15)
(나의 묵상)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이 본문을 얼마나 오해했는가?
먼저는 이것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표하는 내용이라는 것을 몰랐고, 또 발을 씻어준다는 것이 그저 낮아진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는 의무감 정도로 이해했던 것이다.
사실 주님의 십자가에 연합되지 않으면 ‘낮아짐’이란 그저 겸손을 가장한 ‘자기의’일 뿐이다.
가물가물한 기억이 있다.
과거의 담임 목사님께서 예수님이 못 박히시기 전 목요일에 세족식을 하게 하신 것이다.
누구는 세족식을 하면서 그렇게 울었다는 이야기(나는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왜 울었는지 모른다. 자신의 감정에 사로잡혀서인지, 섬기지 못했던 후회인지 아니면 혹시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해서인지 모른다.)까지 들었어도 내게는 맹숭맹숭한 것이.... 빨리 이 의식이 끝났으면 싶었다.
십자가에 연합되는 은혜 없이 행하는 세족식은 어색하고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이제 주님께서 단순한 세족식 자체를 강조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로 종이 되어 섬기라는 말씀과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섬김을 통해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내가 종으로서 섬김으로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이 무엇일까?
바로 복음과 생명을 전하는 일이다.
나는 이 일을 위해 종으로 살라고 부름받은 자인 것이다.
그래서 늘 나의 주장의지와 자기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성령님께서 부지런히 훈련시키시고 있음을 의식하며 살아간다.
툭하면 본성대로 행하려는 의지로 실수할 때가 많으니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성령께서 나를 붙들고 믿으니 실수와 실패의 연속이지만 낯 두껍게 주님께로 나아간다.
복음으로 고난을 받는 종의 자리.
전에는 무관심하고 꺼려 하는 자리였지만, 이제는 나도 가기를 원하는 자리가 된다.
비록 넘어지고 자빠지기도 하지만, 그 자리가 주님 계시는 기쁨의 자리이기에 나도 그곳으로 가기를 원하게 되었다.
발을 씻어주는 자로 복음을 전하고 생명의 교제를 전파하는 그 일에는 고단함보다는 기쁨이 넘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에, 또 성령께서 그 일을 이루게 하실 것을 믿기에 그곳으로 기꺼이 가는 것이다.
(묵상 기도)
주님,
복음으로 고난을 받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가 되다니 참 믿을 수가 없는 사실입니다.
본성적으로는 불가능한 그 일을 주님께서 이루시고 계심을 알고 있으니 더욱 든든합니다.
그러나 막상 그 자리에 이르면
힘들다고 불평하거나 낙심하는 연약한 자이오니
불쌍히 여기시어 은혜를 주시옵소서.
나의 주장의지와 자기의를 늘 십자가에 못 박는 그 은혜를 기억하게 하시어
주님의 뜻을 이루는 종이 되게 하옵소서.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