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에 대하여 바타이유가 정말 못마땅해한 점은 무엇이었을까? 보들레르에 대한 사르트르의 이해가 한참 잘못되어서일까, 아니면 보들레르를 손안에 꽉 쥐고 해석하는 듯한 사르트르의 그 너무 당당하고 자신만만한 태도에 화가 난 것일까?
이 글을 읽고 나서 내가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우습게도 그런 것이었다. 일부분은 인정하는 듯하다가 결국엔 하나도 인정하지 않고 사르트르의 근본 전제까지 반박하곤 하는 바타이유의 야유적인 화술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한편, 사르트르의 논문을 따지는 바타이유의 어조에 이처럼 모종의 정서적 반감이 깃들어 있는 것은 시를 대하는 이 두 사람의 시선이 근본적으로 다른 데에서 오는 당연한 결과인 듯도 싶다.
이를테면 바타이유는 사르트르가 지나치게 수미일관한 논리로 보들레르를 해석하는 자체가 우선 있을 수 없다고 보는 것 같다. 바타이유가 보기에 시는 애초부터 논리적 인식만으로 따라잡기에는 불가능한 영역인데 사르트르가 그 내밀한 모순의 세계를 자신이 설정한 논리틀로 완벽히 알 수 있는 것처럼, 혹은 알아 낸 것처럼 말하고 있으니 바타이유로서는 불만인 것이다. 이처럼 보들레르의 시 세계를 해석해 들어가는 사르트르의 근본 시각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므로 해서 바타이유의 어조에 일종의 정서적 반발이라고 할 만한 불신의 빛깔이 스며들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면 과연, 사르트르와 바타이유는 각각 보들레르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그 점은 사실 완전히 이해하기는 힘들었다고 고백해야겠다. 우선 보들레르 자체에 나의 이해가 부족한 탓이 있겠고, 무엇보다 이 논박의 대상인 사르트르의 <보들레르론>을 읽지 못한 이유가 클 것이다. 사르트르의 <보들레르론> 전체를 보지 못한 상태에서 바타이유가 인용해 놓은 몇 대목과 그에 대한 반론적 서술만을 대하게 되니 사르트르의 논리는 물론 바타이유도 무엇을 반박하고 무슨 주장을 하고 있는지 그리 선명히 와 닿지는 않았다.
얕은 이해로나마 두 사람의 차이를 살펴보면, 앞서 말했듯 사르트르가 비교적 일관되고 단정적인 주장으로 자기 논리를 전개하는 반면 바타이유는 탐사라도 하듯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다. 흥미로운 건, 사르트르가 특별히 공격적으로 보들레르를 폄하하고 있는 건 아닌데도 바타이유가 사르트르에 맞서 보들레르를 옹호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사르트르로서는 공격적 표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바타이유에게는 공격이고 폄하로 여겨진다는 이야긴데, 아마도 이러한 인식 차이야말로 보들레르를 놓고 다투는(?) 두 사람간에 가장 메우기 힘든 간격일 것이다.
그 인식 차이 중의 핵심 하나는 보들레르가 자기 시의 길을 스스로 선택했느냐 아니냐의 문제이다. 사르트르는 "자유가 현기증 나는 것이기 위해서는 무한한 오류의 길을...선택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악에 밀착하는 보들레르의 시 세계는 스스로의 선택이었다고 해석한다. 이는 보들레르의 내면 도덕성에 대한 사르트르의 판단이다. 곧, 보들레르가 악에 밀착하면서 스스로를 비참과 수치에 던져 넣는 것은 아이가 자유를 유지하기 위하여 어른의 세계를 거부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어른의 세계를 고발하는 방편으로서의 유년 애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보들레르는 '판관들의 도덕률을 인정'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스스로 자유로운 악이 되어 그 악의 절망 속에서 사실은 '선을 찬양'하고 그리워한다는 이야기다.
사르트르의 이러한 견해에 대하여 바타이유는 무어라 반박하는가. 보들레르는 결코 스스로 자기 운명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스스로 선택했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먼저 "그 선택이 어떤 종류의 선택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그 선택은 도덕적 목적을 지닌 '의지적 선택'이 아니라, 세상과의 대결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창조하는 '저주받은 운명'들의 필연적 행보일 뿐이라는 이야기다. 바타이유가 보들레르의 태도를 "만족한다는 것에 대한 공포, 만족한다는 것에서 필연적으로 얻어지게 마련인 구속에 대한 거부"라고 표현했을 때, 이는 '저주받은 운명'의 어쩔 수 없는 필연을 말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 운명이 성취하는 진정한 창조와 존재성에 대한 강조이다. 한마디로, 보들레르의 시 세계에 도덕적 의미 따위는 없으며, 그 도덕적 가치를 넘어서는 심원한 존재론적 열망이 있다는 게 바타이유의 주장이다.
적어도 시와 시인의, 그 자신도 채 알지 못하는 운명적인 의미의 문제에서라면 바타이유가 아무래도 사르트르보다는 좀더 깊은 것을 보고 있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바타이유는 시인의 모순된 행위 속에서 완성되는 시의 성취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보들레르에 대한 바타이유의 찬미는 그래서 사르트르의 분석보다 시적으로 정당하다.
다만, 사르트르가 보들레르의 실패한 삶에서 인간 일반의 실존적 고뇌를 읽어내며 보들레르 개인에게 얼마간 인간적 연민(철학적 연민?)을 보내고 있다면, 바타이유에게는 한 사회인으로서 보들레르가 겪었을지도 모를 내면 갈등을 짚어 보려고 하는 그런 인간적 관심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그것은 물론 바타이유의 흠은 아니다. 바타이유는 보들레르를 오직 시인으로만 바라보고자 한다. 그런 바타이유에게 실존주의 철학자의 시선을 추가 주문하는 건 아마도 쓸데없는 짓이리라.
첫댓글 [사르트르는 "자유가 현기증 나는 것이기 위해서는 무한한 오류의 길을...선택해야 한다]를 다시 섭렵하고 내내 깊어 내 사유로야 가랭이가 찟어 지지마는 그래도 귀한 글 정독하고...글 값으로는 정중한 인사를 두고 갑니다..
제가 오히려...정중히 인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