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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충남 연기 전의에서 부모 형님 한분 누님세분 여동생한분의
5째로 태여 났고 대전 한밭중 대전공고 충남대1년 중태다 논 팔아야 학교가는데 집 안 생각을 하면 도저히 엄두가 안 난다 물론 공부는 중위권이였다
수학 과학 물리는 잘 하나 영어 국어 국사는 잘못했다
중학교 때부터 대전 중 한밭 중 세 명이 대전 성남동 선화동에서 자취생활을 했다 돌려가면서 밥 당번을 했다 내가 당번이면 니는 책임감이 투철하여 새벽에 일어나 밥을 하고 도시락을 싸주었지만 영주라는 친구가 당번 이 되면 늦게 일어나 밥이 없다 물론 도시락도 못 쌋지요 그러면 아침도 굶고 점심도 굶고 만다 정신도 없다 6-7 시간을 마치고 집에 오면 탈진이되였다 밥 이라고 해도 반찬은 고추장 간장이 전 부다 한 참 클 나이에3일에 하루는 금식하며 살았으니 키가 자라지 못하고 말았다 흔한 풀방 하나 못 사먹고 겨우 목숨만 붙어살다 대학에 가니 책이 모두 영어로 되였으니 공부할 수가 없었다
지금 내가 젊은 이에게 영어공부 많이 해야 된다고 강조하고 싶다 다른 친구는 달걀 며루치 고기반찬이든 도시락을 먹었으니 체력도 크고 공부도 잘했다 잘 먹어야 모든게 해결된다고 생각 한다 그때 하도 굶어 창자가 오그러 들어 자금도 조금 밖에 못 먹는다 자랄 때 굶어 살았으니 평생 150센치의 키로 살 수밖에 없다 외모가 작으니 늘 소외감 스트레스로 사람 많은 장소에 가기 싫고 사람만나기가 싫어진 성격이 되어 버렸다
외모는 성격까지 변하게 만들었다 외톨이로 혼자 있는게 편했으니 대인관계가 없어 젔다
다른 친구는 연애도 잘하고 친구도 많은데 나는 늘 혼자 지넸다 전의교회를 다니면서 조금 낳아진 편이다
내 나이23살 처24살 때 반 중매 로 전의 감리 교회에서 식을 올렸다 처갓집은 1950.6.25때 방앗간을 불태우고 가난하게 살고 우리집은 논20마지기 밭3천평 농사를 짓는 집이였다 처갓집식구모두 키가 크니 자손을 생각하여 결혼을 했다 직장도 없이 결혼하니 자연 농사일을 형님 방앗간 일을 도우며 몇 달을 지냈는데 형님은 작은 처를 얻어 따로살고 큰 형수와 같이 살으니 가정불화가 자연 나기 시작하여 처가 친정에 가서 안 산다고 오지를 않아 나는 머리를 싹 깍고 이제 모든 것을 잊어야 되겠다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내를 건사할 수 없는 사람은 결혼을 하지 말어야 된다고 생각이든다
돈 못 벌고 장가가면 부모님 형제 모두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 되니 나 하나 믿고 시집온 부인이 무순 재미로 살겠나 결국 돈 이다 그때 내가 공무원이나 취직해서 직장에 다녔으면 상황은 달라젓지 안았을까 생각이 듬니다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지만 돈 없으면 모두가 떠나가 버린다는 것을 늘 지금 내 생활 신조로 삼고 살고 있다
그다음 돈 한 푼 없지만 집을 나가 자립해 가출하여 살아야 되겠다 싶어 조치원 복숭아를 박스에 담아 대전 역 앞청과 시장에 팔았지만 경험없이너무 익은 것을 가지고와 모두 물러 본전도 못 찾았디 그다음 서울 성북동 누님댁 지금도 있는 비탈진 집에서2-3일을 머물고 일 할곳을 찾으나 할 일을 못 핮고 도로 전의 산정말 집에 오니 나가 살지 왜 왔느냐고 집안 식구가 모두야단이다 심지여 여 동생은 처의 머리채를 잡고 동 댕이를 처 보다 못해 내가 대들어 여 동생을 손을 대게되였다 그다음 얼마가 흘러 여동생이 조치원 언니네 집에 간다고 재숙 모 형수가 옷 해서 입고 가더니 얼굴에 종기가 나서 천안 병원에서 못 고치고 결국 죽었다 이것을 내가 죽였다고한다 그 후 어머니 속아리 30년 된 병이 악화 되여 돌아가셨다 모두 내 탓으로 돌아오게 되였다
결혼하고 임신 중 그해11.24일 논산 훈련소에 입소하여 마치고 부산 운전학교졸업 휴가로 동촌에 오니 인숙 큰딸을 3일전에 낳았 다고 했다
전반부대8사단 보충 연대에 배속3연대 3대대 인사과에 보직을 받고 한곳에서3년을 마치고 제대를 했다
제대후 전의 동촌마을에 방 하나처가 집에서 얻어주어 방앗간 에서 일하며 몇 년이 흘렀다 희망이 없어 형님 저 서울 로 이가 가겠다고 하니 성만 아버지 마사오 사촌 형이 방앗간 안방에 들어오라고 하더니 성만 아버지가 빰을 때려 뒷 문 으로 도망치니 따라와 쇄 파이프가 손에 잡혀 뒤도 안보고 던게 이가 3개 나가 형이 물어 주었 다고 후일 들었다
서울에 올 때 조치원 사는 누님게 이야기하고 차비 얻어 가지고 성북동에 하루 밤 자고 청량리 누님댁에 가난한 누님은 굶다 시피하고 살았다
일 자리를 찾아 국수 공장에 취직하여 두집을 전전하고 약 일녕후 다시 전의로 새벽에 도착 성만 아버지 잘 못 했어요 빌고 재숙이네 들려 동촌 처거집에서 인숙엄마를 만나니 내가없는 사이에 처거집에서 영재 둘째가태여 났다
방앗간 일을 거들어주었지만 일전도 주지 않아 산정말 아버지 집에서 쌀을 가지러가니 아버지가 작대기로 허리를 치기 까지 했다
돈50만원 쌀5 말 집 은 청령리 하꼬방 철도부지 솜틀기계가 내 밥통이 였다 동사무소 취로 사업4-5일이면 밀가루 한포 배급받고 석유 배급타서 석유 등잔 불 키고 일 키로 되는 공동 수도 물 기러다가 먹으며 살았다 여름에는 냉차장사 마늘을 청량리 시장에서 두 접사 3개씩묵어 채소전 옆에서 팔기도 했다 집을 철거한다는 친구의 이야기 듣고 집을 팔고 처 재 해수가 사는 외대근처로 옮기였다 여기저기 살 곳을 찾아 다녔으나 금호동 와보니 사람이 많아 무어라도 할 수 있겠다 생각이 들어 마음먹고 지금 농협자리에 월세로 얻어 방앗간 솜틀기게 국수기계로 밀가루 배급을 받아 끈을 잡았다
천막을 금호1가 금호극장뒤에 치고 살았지만 3일 만에 원 땅주인이 나가라고 하여 이사 한 적도 있다
그 후 삼표 연탄 대리점에 일좀 하게해주세요 사정하니 당신은 하루도 못한다고 퇴자 맞았다 다음날 다시 가서 먹을게 없으니 나 혼자 조금이라도 좋으니 하는만큼 품 삸을 주세요 하니 그러면 해보라고 허락받고 추운겨울 고무장갑살 돈도 없어 맨손으로 배달을 했지만 밥을 먹을 수 있는게 너무 기뻣다
3년을 보내고 작은 돈이 모여저 월세 점포를얻어 국수가계와 연탄 가계를 하게 되였다 점 점 단골이 늘어 하루에 2000장 이상 팔렸다 사람을 3명두고 불탄 장사 무력가게 철물점 까지 하며 돈 되는 거라면 무었이든 했다
10년 되는해 10번을 이사하고 집을 장만하게 되였다 하늘이 새로 열리는 상 싶었다 집을 사고 매일 그집을 돌았다 어떻게 해야될까 담을 헐고 남대문 시장에서 천막을 사서 치고 천막 가계를 꾸렸다
낮에는 연탄장사 밤에는 국수 만들기 잠은 4-5시간 이상 자본 적이없다
죽기 살기로 작은 몸 힘없는 몸이지만 정신력은 나를 철인을 만들었다
신은 중2학년 쓰레기통에서 주서서 신고 옷은 고물장사가 주어 헌옷만 입고19년을 버티 였다 속옷만 사서 입고 친척 관 혼 상제에도 참석을 못 했다 너무 일 이 많아 가게를 닫을 수 없어서 이다
장인 회갑 때 밀가루 한 포만 보낸게 너무 가슴 아프다 고향에서 웃음꺼리가 안 되려면 돈 벌어 잘사는 길이 복수의 길이라고 생각하여 돈 벌어 한 일 이 고향 에50개의 박스에 설탕 밀가루 수건 볼팬 공책을 돌렸다 매년 경노 잔치에 몇 번 참석했고 동네 도로 포장공사 협조 농악 천막을 기증했다
내가 고향에 가면 논밭에서 일 하다가도 나와 인사를 하니 너무 기쁘다
에 하루는 금식하며 살았으니 키가 자라지 못하고 말았다 흔한 풀방 하나 못 사먹고 겨우 목숨만 붙어살다 대학에 가니 책이 모두 영어로 되였으니 공부할 수가 없었다지금 내가 젊은 이에게 영어공부 많이 해야 된다고 강조하고 싶다 다른 친구는 달걀 며루치 고기반찬이든 도시락을 먹었으니 체력도 크고 공부도 잘했다 잘 먹어야 모든게 해결된다고 생각 한다 그때 하도 굶어 창자가 오그러 들어 자금도 조금 밖에 못 먹는다 자랄 때 굶어 살았으니 평생 150센치의 키로 살 수밖에 없다 외모가 작으니 늘 소외감 스트레스로 사람 많은 장소에 가기 싫고 사람만나기가 싫어진 성격이 되어 버렸다
외모는 성격까지 변하게 만들었다 외톨이로 혼자 있는게 편했으니 대인관계가 없어 젔다
다른 친구는 연애도 잘 하고 친구도 많은데 나는 늘 혼자 지넸다 전의 감리교회를 다니면서 조금 낳아진 편이다
내 나이23살 처24살 때 반 중매 로 전의 감리 교회에서 식을 올렸다 처갓집은 1950.6.25때 방앗간을 불태우고 가난하게 살고 우리집은 논20마지기 밭3천평 농사를 짓는 집이 였다 처갓집 식구 모두 키가 크니 자손을 생각하여 결혼을 했다 직장도 없이 결혼하니 자연 농사일을 형님 방앗간 일을 도우며 몇 년을 지냈는데 형님은 작은 처를 얻어 따로살고 큰 형수와 같이 살으니 가정불화가 자연 나기 시작하여 처가 친정에 가서 안 산다고 오지를 않아 나는 머리를 싹 깍고 이제 모든 것을 잊어야 되겠다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내를 건사할 수 없는 사람은 결혼을 하지 말어야 된다고 생각이든다
돈 못 벌고 장가가면 부모님 형제 모두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 되니 나 하나 믿고 시집온 부인이 무순 재미로 살겠나 결국 돈 이다 그때 내가 공무원이나 취직해서 직장에 다녔으면 상황은 달라젓지 안았을까 생각이 듬니다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지만 돈 없으면 모두가 떠나가 버린다는 것을 늘 지금 내 생활 신조로 삼고 살고 있다
그다음 돈 한 푼 없지만 집을 나가 자립해 가출하여 살아야 되겠다 싶어 조치원 복숭아 가수원에서 사가지고 대전 역 앞청과 시장에 팔았지만 경험없이 너무 익은 것을 가저와 모두 물러 본전도 못 찾았디 그다음 서울 성북동 누님댁 지금도 있는 비탈진 집에서2-3일을 머물고 일 할곳을 찾으나 할 일을 못 핮고 도로 전의 산정말 집에 오니 나가 살지 왜 왔느냐고 집안 식구가 모두 야단이다 심지여 여 동생은 처의 머리채를 잡고 동 댕이를 처 보다 못해 내가 대들어 여 동생을 손을 대게 되였다 그다음 얼마가 흘러 여동생이 조치원 언니네 집에 간다고 재숙 모 형수가 옷 해서 입고 가더니 얼굴에 종기가 나서 천안 병원에서 못 고치고 결국 죽었다 이것을 내가 죽였다고한다 그 후 어머니 속아리 30년 된 병이 악화 되여 돌아가셨다 모두 내 탓으로 돌아오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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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후 전의 동촌마을에 방 하나를 처가 집에서 얻어주어 형님 방앗간 에서 일하며 몇 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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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을 연탄배달을 하여 번 작은 돈이 모여저 월세 점포를얻어 국수가계와 연탄 가계를 하게 되였다 점 점 단골이 늘어 하루에 2000장 이상 팔렸다 사람을 3명두고 불탄 장사 무력가게 철물점 까지 하며 돈 되는 거라면 무었이든 했다
10년 되는해 10번을 이사를 전 전하고 집을 장만하게 되였다 하늘이 새로 열리는 상 싶었다 집을 사고 매일 그집을 돌았다 어떻게 해야될까 담을 헐고 남대문 시장에서 천막을 사서 치고 천막 가계를 꾸렸다
낮에는 연탄장사 밤에는 국수를 만들기 잠은 4-5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다
죽기 살기로 작은 몸 힘없는 몸이지만 정신력으로 버티였다 나를 철인을 만들었다
신발은 중2학년 쓰레기통에 버린것을 주서서 신고 옷은 고물장사가 주어 헌옷만 입고19년을 버티 였다 속옷만 사서 입고 친척 관 혼 상제에도 참석을 못 했다 너무 일 이 많아 가게를 닫을 수 없어서 이다
장인 회갑 때 밀가루 한 포만 보낸게 너무 가슴 아프다 고향에서 웃음꺼리가 안 되려면 돈 벌어 잘사는 길이 복수의 길이라고 생각하여 돈 벌어 한 일 이 고향 에50개의 박스에 설탕 밀가루 수건 볼팬 공책을 돌렸다 매년 경노 잔치에 몇 번 참석했고 동네 도로 포장공사 협조 농악 천막을 기증했다
내가 고향에 가면 논밭에서 일 하다가도 나와 인사를 하니 너무 기쁘다 대통령이된 기분이다
모든게 내 탓이요 부모님 이 왜 이렇게 햇을까? 그때는 원망도 많이 했다 지금 생각하니 내 앞 가리를 못했기때문이다 결국 내 탓이다 유기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