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등법원 민사조정위원으로 일한지가 십년이 넘는다.
다행히 내가 맡은 재판에서 조정건은 잘 이루어져서
골치 아픈 건수는 나에게 밀려 온다.
민사조정이란 "가장 나쁜 조정이라도 가장 잘한 판결보다 낫다."는 것이란 전제가 붙는다.
더구나 의료관계 송사가 급증하는 최근 조정 건수가 적지 않으나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는다. 왜냐구요.
송달되어 오는 기록지, 증거자료, 판결문, 더구나 고법이므로 항소이유서까지.
재판서류를 보면 어마어마한 분량이나 조정 수당은 겨우 8만원.
그러니 사명감을 가지지 않으면 하지 못한다.
어떤 사명감? 진실에 입각하여 불쌍한 환자나 억지를 부리는 환자로 부터 의사나 병원의 이익을 대변도 하고.
그러나 재판부는 조정을 최우선으로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전문가의 판단에 의하여,
그리고 조정이 성립되면 재판을 하고 판결문을 쓸 필요도 없고.
소문에 의하면 전직 모대통령은 좌배석일 때 수준미달의 판결문으로 부장한테 야단을 맞고
그만 두었다는 이야기도 있는 걸 보면 이도 중요하다.
나는 주로 의료전담부인 민사 9부나 17부의 건이나 어떡하다 가사 조정까지 맡아서
조정 성공율이 높았던 어느 부는 공로로 전 재판부가 해외를 다녀와
덕분에 나도 판사들에게 점심을 얻어 먹은 적도 있었으니.
지난번 조정때 신분증을 맡기고 판사실에 올라가니까 카드를 대어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초짜가 출입증 대신 방문증을 준 것이다.
내려와서 주의를 주려니까 벌써 나가고 없어서 이번에는 단단히 다짐을 받고 출입증을 받았다.
검찰이나 법원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네들이 "갑"으로 안다.
얼마전 서류를 잘 못보내어 다시 보내라고 재촉을 하며 한말이 "나는 을이 아니예요"
한번은 검찰에서 참고인으로 소환장이 왔다.
이런때는 금방 응하여 검찰에 출두 하면 한없이 기다리게 하니 주의 하실 것.
내가 바쁘니 와서 조사하던지 구인장을 보내라.
소란스러워 고개를 돌려보니까 법정 밖에서 또 한판이 붙었다.
우리나라 사람들 송사 잘하는 걸로는 호가 나있다.
그래서 그 넓은 법원에도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가득하다.
이번은 복잡한 사건의 조정을 맡아 며칠간 끙끙대다가 일단 양측 변호사에게 사건의 본질과 쟁점을 정확히 해주고
한 시간여의 조정실에서 땀을 빼고는 끝내었다.
아무리 변호사나 판사가 의료 사건을 이해하려고 해도
전문적이고 경험이 많은 나같은 조정자에게는 당할 수 없다.
요즈음은 의사, 변호사 두전문직을 겸하는 사람도 있어
조정 시에 먼저 변호사들에게 물어보는 말이 의사 변호사는 아니시냐고.
그렇다하면 이 건은 가벼운 의학지식으로만 판단내리기 어려운 건이라고 말하고 시작을 할 터.
특히 이번 건은 여러 병원에 감정을 보내어도 응하지 않았는
유수한 병원에서 발생한 사건이고 또 복잡하니 쟁점도 적지 않은 건이다.
하여튼 끝내고 시간도 일러 법원 내 가을 풍경을 맛보기로 하고 이 길을 올라간다.
길가의 벤치에는 누군가 앉아 재미없는 책을 보고 있고 한 두사람이 거닐고 있다.
법원도 이리로 옮긴지 오래되어 정원에는 여러 나무들이 단풍을 뽐낸다.
그래도 단풍 중 으뜸은 벗나무,
경주보문호 주위의 벗꽃이 필때도 좋지만 지금 가을에는 벗꽃 단풍도 아름다움이 못지 않다.
또 내가 좋아하는 단풍은 감나무, 두터운 잎 하나에도 여러 색이 들어 있다.
낙엽이 지고 난 뒤의 저 먹음직스러운 감은 어떡하려나.
떨어진 낙엽들이 풀과 자연스레이 뒤섞여 볼만 하다.
웬 생뚱 맞게 저런 것이 풍광을 망치네.
전형적인 관공서 건물 형식이다.
그래도 주차가 전쟁인 이곳에서 조정위원들을 위한 주차장은 마련되어 있으나
재수 없으면 문에서 차가 밀려 들어오는 것이 힘들때가 많다.
강의 한시간하는 것보다 더 말을 많이 했으므로 집에가서 어제 사와 냉장고에 넣어둔 막걸리나 마셔야지.
아직도 새로 산 카메라(Canon G12)를 테스트 중.
첫댓글 남들이 벤취에 앉아서 재미없는 책을 보는지 어떻게 아십니까 ?^^
난, 단풍하면, 단풍나무나 은행나무 정도만 관심있었는데, 벚꽃이나 감나무 단풍도 아름다운가 봅니다.
준비서면 등을 보면, 변호사들이 무슨 씨나리오 작가 같은 생각이 듭니다. 자기가 만들어 놓은 결론을 위하여, 거짓말을 잔뜩 써 놓고, 우기는 거지요...내 편견인지는 몰라도, 변호사들이 진실을 확인하기 위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의뢰인을 위해 일단 거짓말을 해 놓고 보는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판사들도 일하기가 귀찮아서 매너리즘에 빠진 것 같고....
내차는 10년을 타니까 문짝의 일부가 동그랗게 도색이 부풀었습니다.(썩었다고 합디다.)
보고 있는 것이 법전이더라 ㅎㅎ. 계원장의 정확한 지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