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파일 특집 5 - 매일 부처님 오신 날
'부처님 오신 날'
부처님이 오신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아기붓다가 태어난 것일까요? 아니면 부처님이 완전한 성불을 이루신 그 날일까요? 이 해석에 따라 초파일 날짜를 새롭게 지정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더불어 우리에게 주어지는 삶의 지침 역시 새롭게 해석되어야 합니다.
이를 분석하기 위해 정의와 의의 두 가지를 기준으로 삼아보겠습니다. 첫째 정의를 기준으로 보겠습니다. 부처님이 오셨다는 것을 엄밀히 정의하면, 싯달타 태자가 태어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태어난 아기 붓다는 사실 붓다라는 명칭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붓다라는 명칭은 오직 완전한 일체지가 완성된 이후에 어울립니다. 그렇기에 정의를 기준으로 본다면 아기붓다의 생일이 아니라 수행자 싯달타가 성불을 완성한 날인 성도재일이 부처님 오신날에 가깝습니다.
둘째 의의를 기준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성불에는 과정이 있습니다. 석존은 이미 영원에 가까운 세월 전 이미 성불하셨습니다. 중생에게 모범적인 성불의 길에 대한 롤모델을 제시하기 위해 연극 한편을 준비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석존의 '3아승지겁+10대겁+팔상성도'의 롤모델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초파일 특집 연재 글 중 세 번째 시리즈에서 자세하게 설명했으니 생략하겠습니다.
의의를 기준으로 볼 때 이미 부처님은 오래전부터 부처님입니다. 다만 기억상실증에 걸린 부처님이죠. 더불어 3아승지겁을 넘어서는 보살행을 완전히 완성한 후 화룡정점의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인간 삶을 받았습니다. 업생이 아닌 원생으로 태어나셨기에 분명히 이렇게 천명하셨습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화택 아당안지"
그렇다면 이런 아기붓다를 부처님이라고 부를 수 없을까요? 정말 격에 안 맞는 명칭입니까? 의견이 어떠신가요? 단어의 정의가 아닌 붓다의 보살행을 염두에 둔 의의를 기준으로 본다면 얼마든지 아기부처님 태어나신 생일날도 부처님 오신 날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적어도 제 의견은 그러합니다.
지금까지는 부처님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를 우리들에게 적용해볼까요? 당신은 지금 붓다라고 불릴 자격이 있습니까? 하지만 한국 불교에서는 공공연 하게 이런 문장을 활용합니다.
"당신은 부처님입니다!"
보현보살의 말씀이고, 상불경보살의 수행법입니다. 이 말을 믿는 것이 <대승기신론>을 배우는 이유입니다. 이 믿음이 곧 대승을 배우는 시작입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나와 중생이 모두 부처님이라는 진실을 믿지 못한다면 대승 불교 즉, 보살행은 시작조차 불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갓 태어난 싯달타 태자는 자신이 붓다라는 진실을 여전히 모릅니다. 하지만 붓다로 불릴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가 성불했다는 결과를 알고 있기에 믿는 것이라면, 아직 진실로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중생 모두는 이미 성불을 품고 있습니다. 다만 석가모니 부처님과 똑같이 기억상실증에 걸렸을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중생을 이렇게 부르는 것을 즐깁니다.
"기억상실증 걸린 부처님"
이 존재의 본성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보리심 수행은 가능합니다. 이것이 곧 스스로를 바라보는 마인드셋을 형성합니다. 사실상 성불의 길을 걷는 것은 없는 것을 창조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잊고 있던 것을 회복하는 과정입니다. 그저 기억을 되찾기 위해 조금의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노력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다만 이 수행의 과정이 기억을 잃고 중생으로 살아오면서 습관화 된 탐진치와 결이 너무나도 달라서 낯섭니다. 낯서니까 어렵게 느껴집니다. 말 그대로 주관적으로 어렵게 느껴지는 것일 뿐입니다.
3아승지겁 + 10대겁이라고 표현하지만, 결국 그 과정은 '지금 이 순간'일 뿐입니다. 10년간 생존하기 위한 과정을 10년 동안의 호흡이라고 생각해보겠습니다.
'그 많은 호흡을 어떻게 하나?'
이렇게 착각하고 부담스럽게 느껴지시나요? 하지만 우리는 호흡에 익숙하기에 잘 알고 있습니다. 진실은 그저 지금 이 순간 한 번의 호흡이 연속되는 것일 뿐, 하나도 어렵지 않습니다. 서울에서 부산을 걸어갈 때도 그 먼 거리를 어떻게 걷냐고 착각하면 어렵게 느껴지지만, 결국 해야 할 것은 똑같은 할 걸음 뿐입니다. 한 순간에 백 걸음 천 걸음을 경험하는 방법은 어차피 없습니다.
보리심을 완성하는 과정도 똑같습니다. 3아승지겁의 부담에 짓눌린다면 결국 포기하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의 마음 하나만 신경쓰면 됩니다. 얼빠진 채 살아갈 것인지, 깨어있는 삶을 살아갈 것인지를 지금 결정하는 것입니다. 불안함에 떨며 인생을 낭비할 것인지, 최선을 다해 안심할 것인지를 결단하는 것입니다. 중생들과 화내고 다투며 살아갈지, 중생을 자비롭게 사랑할지를 용기 내 선택하면 됩니다. 나중에 할 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이 마음의 선택을 하는 것이 바로 보리심으로 나아가는 한 걸음입니다.
불자들에게 부처님 오신 날은 1년에 하루입니다. 하지만 보살 수행자에게 부처님 오신 날은 1년에 365일입니다. 매일이 부처님 오신 날이 되어야 합니다. 매일 매 순간 잊지 않고 보리심을 새롭게 지어나간다면 이것이 석존을 찬탄하는 것이고, 석존을 따라 발보리심 하는 것이며, 성불의 길을 걷는 것이고, 수기를 받는 것이며, 정토를 장엄하는 것이고, 중생을 구하는 것입니다. 보살이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뿐입니다. 자각이 있는 순간, 보리심을 일으키고 보호할 것, 이것이 보살이 매일 매일 하는 연등 공양입니다.
이 단순한 원칙을 실천하는 것이 어려울까요? 아닙니다! 낯선 것 뿐입니다. 낯설기에 잊기 쉽습니다. 그래서 보살 수행자가에 세 가지 조건은 목숨만큼 중요합니다. 선스승과 선도반 그리고 선도량입니다. 스승과 도반은 이 성불의 길을 함께 걷는 진정한 동반자입니다. 내가 불안할 때 선호념하여 안심을 주고, 내가 게으를 때 선부촉하여 경책을 합니다. 불안에 주저 앉지 않도록, 게으름으로 후퇴하지 않도록 함으로써 기억하게 해줍니다. 보리심 하나만 지키면 된다는 원칙을 말입니다.
선도량은 이런 도반들이 모여 있는 장소입니다. 그거 아세요? 공간에도 에너지가 묻는다는 사실을. 지기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귀한 보리심을 지니고 있는 도반들이 정기적으로 모일 수 있는 이런 장소는 매우 귀합니다. 요즘에는 오프라인 뿐 아니라 온라인 공간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미래에는 온라인 공간을 뛰어넘은 메타버스라는 가상현실 세계가 열리게 될 것인데, 선도량이란 이 모든 공간을 포함합니다. 그곳에서 보리심을 잊지 않고 억념하는 것입니다.
"붓다의 마음을 세상에 전하다!"
붓다스쿨은 선스승과 선도반 그리고 선도량이 함께 모여 있는 정토를 추구합니다. 공통의 서원이 붓다의 마음인 보리심을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보살의 수행은 단순하지만 낯설고 잊기 쉽습니다. 그렇기에 붓다스쿨 온라인 학교에서는 9년간의 커리큘럼을 통해 매일 매일 조금씩 보리심을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장치를 마련했습니다. 보리심은 잊지 않고 지속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보리심 수행은 열정적으로 불타오르는 것보다는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물들어가는 태도가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이 붓다스쿨이 진정한 선도량이 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근기의 학생들이 모여서 하나의 목적인 보리심의 길을 함께 걸어야 합니다. 수 많은 학생들이 보리심이 보살장엄이 되어 붓다스쿨의 도량을 아름답게 가꾸어 갈 것입니다. 1년 뒤, 10년 뒤의 붓다스쿨이 어떤 극락으로 변화할지 기대되지 않나요?
공지 리마인드
하나, 붓다스쿨 하안거 입학 안내
https://cafe.daum.net/everyday1bean/TqU/1389?svc=cafeapi
사띠수업 공개 커리큘럼 신청하기 : https://www.buddhaschool.co.kr/apply/sati
어른수업 공개 커리큘럼 신청하기 : https://www.buddhaschool.co.kr/apply/adult
붓다스쿨 온라인 학교 정식 입학 신청 : https://forms.gle/UMZuNmY5S87JkQBw5
첫댓글 고맙습니다 스님
밝게 깨어있기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부처님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