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스 전투와 아르메니아인 학살사건
1914년 7월부터 시작된 1차대전은 연말이 되면서, 전쟁범위가 전유럽으로 확대되는 양상을 보였다. 특히 터키의 참전은 전체적으로 점점 고립되어 가던 독일 오스트리아 동맹국측에 숨통을 터 주었다. 반면 프랑스 영국 러시아가 주측이 된 연합군 측에서는 전쟁의 범위가 아시아지역으로까지 확산되어, 전력 분산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런데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의 서진을 막기위해 대부분의 전력을 서부전선에 투입하였기 때문에,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국경을 접하고 있던 러시아의 역할의 더욱 크게 요구되었다.
이에 러시아는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있는 카프카스 지역으로 10만에 이르는 병력을 이동시키고, 터키역시 이에 맞서 9만의 병력을 이동시켰다.
현재 그루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등의 국가가 있는 곳이 이 지역에 해당하며, 해발 5642m의 엘부루스 산을 포함한 카프카스 산맥일대를 누가 먼저 선점하느냐에 전쟁의 승패가 갈렸다.
카프카스 전투는 1914년이 저물어 가는 12월 29일부터 1915년 1월 2일까지 4일동안 전개되었지만, 터키군은 이 전투에서 7만7천명이나 되는 사상자를 내며 참패하였다. 여기에 비해 러시아군은 3만 5천명 정도의 절반정도밖에 안되는 완벽한 승리였다.
아르메니아인 학살 사건
그런데 터키는 전쟁의 패배가 정권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기위해, 엉뚱한 곳으로 여론의 화살을 돌렸다. 바로 터키의 옛 이름인 오스만 투르크 제국내 거주하고 있던 아르메니아인이 타켓이 되고 만 것이다.
아르메니아인 학살사건은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당시만 해도 러시아제국과 오스만 제국 접경지대에 살고 있던 소수민족으로 취급하여 국제적인 관심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아르메니아인 사회는 동부에 거주하던 농촌 사회와, 이스탄불 등의 도시에 거주하던 상업 사회등 양대세력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특별히 상업세력은 무역이나 금융업으로 성공하고 부유한 상인층을 형성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중앙행정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적지 않았을 정도로 오스만 제국과 공존하는 공동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 1877년 러시아의 남하로 인해 벌어진 오스만 제국과의 전투에서, 러시아는 오스만 북부국경 일부와 아르메니아인 거주지역 일부를 점령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리고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의 분열을 유도하기 위해 아르메니아인의 독립을 지원하였고, 여기에 민족주의 운동과 결부되어 오스만 제국내의 독립운동은 과격양상으로 번지게 되었다.
또한 아르메니아인이 러시아제국과 결탁하였다는 의혹까지 제기되어 1894년에는, 대규모 오스만 제국내 무슬림들과 아르메니아인들은 충돌을 빚게 되었다. 여기에 터키는 1894년과 1896년 2차에 걸쳐, 아르메니아인만을 집중탄압한 끝에 무려 2만명이나 되는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따라서 1차대전당시 또다시 러시아제국에 패하자, 이번에도 아르메니아인이 모든 원망이 타켓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터키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가지고 있던 아르메니아인 역시 러시아군으로 참가하거나, 오스만 제국에 대한 게릴라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치유할수 없는 상처 - 1차 대전 중 일어난 대 학살
무엇보다 대규모 학살은 제1차 세계대전중에 일어난 아르메니아인 강제 이주와, 거기에 따라 수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목숨을 잃은 사건이었다.
2차 아르메니아 사건은 이 카프카스전투가 끝난 직후인 1915년에서부터 1916년까지 2년에 걸쳐 청년 투르크당으로 알려진 통일파에 의해 주도 되었다. 대전중 정권을 교체한 청년투르크당은, 아르메니아인에 대해 제국주의 시절보다 더욱 과격한 태도로 대하였다.
그들은 아르메니아인의 주거지인 오스만 제국령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강제 이주시켰는데 그 과정에서 수십만에 이르는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흔히 아르메니아학살 사건이라고 하면, 1915년부터 벌어졌던 2차 학살을 지칭한다.
그러나 터키정부에서는 이 학살 사건을 공식부인하고 있다. 아르메니아인이 오스만 제국령내에서 분리독립운동을 하였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자가 본의아니게 발생한 것으로 전적으로 터키의 책임라고 할수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터키정부는 군대에 의한 조직적 학살은 없었다는 입장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물론 당시 카프카스 지역은 러시아와 터키측의 주요전선으로, 전쟁과정에서 본의아니게 희생당한 측면도 상당수 있다. 또한 터키당국은 러시아측 참전요원이나 스파이들을 색출하여 사살한 것 정도는 인정하고 있지만, 터키측의 집계만도 희생당한 사람은 20만명에 이른다.
이처럼 잔혹한 학살이 시작된 것은 1915년 4월 24일이며, 아르메니아에선 아직도 이날은 기념일로 하여 국제사회에 추모제를 연다고 한다.
그리고 그 대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아르메니아인들은 유렵 연합이나 미국으로 이주했고, 이로써 오스만 제국령 동부 아나톨리아에 있던 아르메니아인 공동체는 완전히 소멸했다.
19세기 말 오스만 제국령 아나톨리아 동부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 인구는 약 150만 명이라고 추산되고 있다, 20년 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의 인구도 자연 증가와 유출에 의한 감소에 따라 거의 같은 수였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들 중 러시아로 이주하였거나, 이슬람등으로 개종하여 학살을 피한자를 뺀다고 하여도, 약 80만 명에서 100만 명 정도의 희생자가 발생하였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다수의 의견이다.
그러나 희생자를 20만명으로 보던 50만명으로 보던, 아니면 100만 이상으로 보던 그날의 상처는 여전히 남아있다. 더구나 학살에 참여하였던 사람들중 전범으로 인정되거나 처리된 경우도 없다.
그것이 설령 스파이나 러시아측 참전요원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혹은 전쟁과 강제이주 과정에서 발생한 희생자라 하더라도 피할 수 없었다는 주장은 변명에 불과해 보인다. 만약 같은 이유로 자국의 국민이 그같은 희생을 당하였다면 쉽사리 잊고 용서할 수 있겠는가?
때로 전쟁은 인류의 보편 합당한 도덕성조차도 잃어버리게 하고만다.[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