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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최근 들어 그리스도교 역사 연구는 서유럽 중심적인 역사관을 탈피하여 아시아 그리스도교 역사 연구가 중요한 흐름으로 대두하고 있다. 이러한 시각을 담은 역사서들은 아시아 그리스도교 역사에 대해 이전보다 더 폭넓고 심화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아시아의 그리스도교 역사가 워낙 방대하다 보니 한 책에 각 지역의 그리스도교 역사를 모두 상세히 담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가운데 몽골의 그리스도교 역사를 다룬 『몽골과 그리스도교』가 출간되어 그 갈증을 조금이나마 풀게 되었다.
🏫 저자 소개
안경덕
경기고, 연세대(경영학), 서울대 신문대학원,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선교학)에서 수학하였다. 산업은행과 대우그룹에서 근무한 뒤, 경영 컨설팅회사를 운영하였다. 2008년 이후 몽골에서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역서로 『실크로드 기독교』(2016), 『부득이』(공역, 2014년 학술원 우수학술도서), 『파사집』(공역, 2018), 『아시아 그리스도교 역사』 1~3(공역, 2021년 학술원 우수학술도서) 등이 있다.
📜 목차
추천사
책을 펴내며
들어가며
Ⅰ 복음의 전달자: 동방교회
01 전승시대
동방교회의 전승
초대교회
메소포타미아의 초대교회
02 교회의 대분열
분열의 씨앗: 삼위일체 교리와 그리스도론
동방교회 분립을 둘러싼 신학 논쟁
1차 대분열
동방교회의 성경: 페시타
도움 자료/몽골문자의 창제
03 셀레우키아-크테시폰 시대 1: 교회의 안정과 성장
사산조 페르시아의 그리스도교 박해
박해 속에서 점화된 동방 선교
교회 조직과 교세 중앙아시아를 넘어 땅끝까지
사산조 페르시아 말기의 동방교회
04 셀레우키아-크테시폰 시대 2: 신학의 정립
교부들과 신학
세계종교들과의 만남
동방교회의 신학적 입장
수도원 제도와 금욕주의
05 바그다드 시대: 이슬람과의 공존
새로운 지배자 무슬림
적응과 안정
이슬람 르네상스
동방교회, 이슬람, 아바스왕조
Ⅱ 복음의 수용자: 대초원의 부족들
06 동방 선교
소그디아나와 7개 강들이 흐르는 땅
티베트
동투르키스탄(신장웨이우얼자치구)
07 몽골인들이 만난 복음
초원길을 따라 퍼진 복음
케레이트족
오이라트족·메르키트족·만주족
옹구트족
나이만족·위구르족·탕구트족
쿠츨루크와 키르기스스탄의 튀르크 부족들
08 그리스도인 왕비들·공주들과 고관들
알라카이 베키와 칭기즈 칸의 공주들
소르각타니 베키와 자매들
도쿠즈 카툰과 일칸의 왕비들
그리스도인 왕자들과 고관들
09 원나라 때의 그리스도교
경교의 부흥
국가의 보호와 관리를 받은 동방교회
교세
가톨릭교회의 선교
동서양을 오간 여행자들
10 일칸국에서의 동방교회
이슬람과의 갈등과 몽골인 총대주교
서유럽과의 군사동맹 추진
시련과 쇠락
11 몽골의 그리스도교 흔적들
몽골의 그리스도교 관련 유물과 유적
그리스도교 왕국 옹구트
Ⅲ 북원시대부터 현대까지
12 몽골과 티베트 불교
몽골제국의 붕괴와 동방교회의 쇠락
오이라트와 다얀 칸 알탄 칸과 몽골의 불교화
후금의 등장과 북원의 멸망 자나바자르의 등장과 강희제
중가르칸국과 청 청의 경제 수탈과 사원봉건경제
도움 자료/티무르 시대 이후의 동방교회
13 19~20세기 초 세계 선교와 몽골
위대한 선교의 세기
개신교회
가톨릭교회
러시아정교회
도움 자료/몽골어 성경 번역
나가며
참고문헌
부록
교회의 분열(1~16세기)
동서를 오간 여행자들(13세기)
몽골의 그리스도교 관련 유물과 흔적
몽골·티베트·중국(13~20세기)
칭기즈 칸 계보
토그릴 칸 계보
일 칸 계보
칭기즈 칸·케레이트 칸의 혼맥도
옹구트 왕가 계보
찾아보기
📖 책 속으로
동방교회 성직자들은 야즈다기르드 1세 치하에서 교회 조직을 재건하면서, 로마제국에서 추방된 서시리아인들(시리아정교회 교인들)과 사산조 페르시아에 살고 있던 동시리아인들(동방교회 교인들) 사이에 있던 위계상의 불필요한 중복도 털어 냈다. 사도들이 세웠다고 주장하는 동방교회는 야즈다기르드 1세가 칙령을 반포한 해인 410년에 첫 주교회의Synod를 열어 독립된 교회로서의 위계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이 회의에서 가톨리코스로 선출된 이삭 1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수장이라는 예우를 받았으며, 동방교회 교인들을 포함한 제국 안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톨리코스의 권위에 순종하게 되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에베소공의회와 칼케돈공의회를 거치는 동안에 제국교회의 분열이 가속화되면서 안디옥학파를 지지하는 많은 성직자들이 동방교회로 합세하였고, 따라서 교세가 질적·양적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 ‘03 셀레우키아-크테시폰 시대 1: 교회의 안정과 성장’ 중에서, 60~61쪽
안디옥 학파의 교부 아프라하트와 에프렘, 네스토리우스의 성경 해석을 따르고 있는 동방교회는, 삼위일체 교리를 바탕으로 그리스도를 완전한 신성(참 하나님)과 완전한 인성(참 사람)이라는 두 본성을 가지신 분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성모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육친이라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어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주장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지 않다. 그러나 성 아우구스투스St. Augustine(354~430)에 와서 정립된 그리스도교의 정통 교리인 원죄original sin 교리를 수용하지 않고 인간의 자유의지free will를 강조하고 있으며, 제국교회와 이슬람에서 말하는 예정설predestination[하나님이 창세 전에 구원받을 자를 미리 선택하였다는 교리로 성 아우구스투스 이후에 발전되었다.]도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은 선과 악 모두를 행할 수 있는 존재이며, 따라서 악이란 본성이 아니라 계율의 한 기능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죄악에서의 구원, 즉 구속救贖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점진적인 계시와 창조의 변모 과정이 된다.
- ‘04 셀레우키아-크테시폰 시대 2: 신학의 정립’ 중에서, 78~79쪽
7개 강이 흐르는 지역은 동방교회의 동아시아 선교의 전초기지였다. 이곳에서 훈련받은 선교사들이 초원길을 따라 티베트·신장·몽골초원으로 복음을 전하러 나섰다. 1007년에는 동방교회선교사들이 몽골초원의 케레이트족Keraits을 만나 칸과 백성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 마리 이븐 술레이만Mari ibn Suleiman과 바르 헤브라에우스Bar Hebraeus에 따르면, 요遼(907~1125)의 국력이 쇠약해진 뒤 초원의 강자로 등장한 케레이트족의 칸은 몽골 중부에서 고비사막에 이르는 지역(현재 울란바타르를 중심으로 한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다. 어느 날 칸이 사냥을 하다가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고 정신이 혼미해졌을 때 성 사르기스Sargis가 환상 속에 나타나 세례를 받으면 살려 주겠다고 하여, 살아난 칸은 자기 캠프에 머물고 있던 동방교회 교인인 상인과 의논하여 메르브 대주교 오디쇼Odisho of Merv에게 세례를 청하였다. 대주교는 사제와 부제를 보내어 케레이트족의 칸과 20만 명의 부족민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몽골 관습에 따른 단식을 인정하였으며, 칸이 제단에 놓인 십자가로 마유주에 성호를 그어 축복한 뒤 참석자들 모두가 그것을 마시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렇게 동방교회는 부족의 의전과 전통을 용인하는 유연성을 보였다. (중략) 튀르크족과 몽골족이 종교에 대해 관용을 보이고, 동방교회 선교사들이 이 두 민족의 토속신앙과 관습에 적응하였기 때문에 튀르크족과 몽골족은 고유한 관습을 지키면서 그리스도교를 수용할 수 있었다. 또한 몽골인들은 전능한 하늘의 신 텡그리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살아왔기에, 유일신인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을 별다른 저항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 ‘07 몽골인들이 만난 복음’ 중에서, 116~118쪽
몽골인들은 아버지에게서 뼈를, 어머니에게서 살과 피를 받는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부계父系를 ‘yas(아버지의 뼈)’, 모계母系를 ‘urug(자궁)’라고 불러 더 넓은 의미의 가족관계를 뜻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데, 칭기즈 칸은 왕가를 ‘황금 자궁Altan Urug’이라고 불렀다. 1206년 쿠릴타이를 열어 카칸이 된 칭기즈 칸은, 건장한 장년들은 군에 편입하여 정복 전쟁에 나서게 하고, 여성들은 후방에서 재능을 살려 전쟁을 돕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모친(태후), 왕비들과 공주들에게 오르도Ordo를 주어 이를 다스리게 하였고, 이 왕녀들 대부분이 그리스도인이었다.
- ‘08 그리스도인 왕비들·공주들과 고관들’ 중에서, 134쪽
원나라 영토 안에는 두 곳의 동방교회 대교구가 있었다. 하나는 탕구트西夏(1038~1227) 대교구로, 대주교좌를 닝샤에 두었으나 곧바로 알말리크에 통합되었다. 다른 하나는 원나라 건국 이전부터 중국 전체를 관장하던 칸발리크 대교구였다. 순례에 나섰던 라반 사우마는 1248년 칸발리크에서 마르 기와르기스Mar Giwargis 대주교에게서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사우마와 함께 순례에 나섰다가 동방교회 총대주교가 된 마르코스Marcos도 1263년 칸발리크 대주교인 마르 네스토리우스Mar Nestorius에게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원나라가 남송을 차지한 뒤에는 칸발리크 대주교가 중국 남부를 함께 관할하였고, 14세기 중엽에는 알말리크까지도 칸발리크 대교구의 관할 지역에 편입되었다. 1292년 마르코 폴로는 취안저우에서 고향 베네치아로 향하는 배를 탔다. 이 국제도시에서 중국인들은 버마·자바Java·수마트라Sumatra·이란·서아시아·유럽에서 온 상인들과 만났으며, 이들 가운데는 동방교회 교인·아르메니아교회 교인·가톨릭교회 교인 등 여러 교파의 신자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리스도인 묘비들이 취안저우에서는 물론이고, 양저우揚州 같은 남부 도시들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제단 모양을 한 묘석들도 있었고, 박공지붕의 석관 뚜껑에다 연꽃 위에 십자가를 조각한 것들도 있다. 새겨진 문자를 보면 한자·시리아문자·튀르크문자·파스파Phagspa문자·몽골문자·위구르문자·라틴문자 등 무척 다양하다. 어떤 동방교회 신자의 비석에는 시리아문자로 삼위일체 신조도 새겨져 있다. 튀르크-몽골계 동방교회 신자들이 사용한 언어는 보통 튀르크어였으나, 바닷길을 통해 들어온 동시리아 출신 상인들은 시리아어나 아랍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취안저우에 있는 그리스도교 신자라고 하면 대부분이 튀르크인과 몽골인 상인들이었을 것이다.
- ‘09 원나라 때의 그리스도교’ 중에서, 147~148쪽
가장 중요한 유적지는 옹구트왕국의 수도였던 올론숨이다. 이 도시는 다얼한무밍안 연합기의 행정 중심인 바이링먀오에서 북쪽으로 50km 떨어진 아이부가이강의 북쪽 강둑에 자리 잡고 있는데, 초원과 언덕, 바위산에 둘러싸여 있다. (중략) 선교사들과 고고학자들은 이곳에서 동방교회 교회당 터·가톨릭 성당 터·도서관 터를 찾아냈다. 성당은 몬테코르비노가 1295년에 건축하였고, 십자가 모양의 설계에 돋을새김을 한 꽃문양이 있는 고딕 양식의 타일로 장식하였다. 이 성당의 보존 상태가 나쁜 것은 30km쯤 떨어진 곳에 불교 사원을 지을 때 이곳의 석물들을 뜯어 갔기 때문이다. 동방교회 십자가가 새겨진 거대한 돌기둥이 흩어져 있어서 교회당 자리가 분명하다. 라반 사우마와 마르코스가 성지순례를 시작하면서 들렀던 바로 그곳으로, 당시에 마르코스의 아버지가 부제副祭로 있었다. 유목지대에서는 올론숨의 교회당 유적 같은 것은 거의 찾아내기 힘든데, 그 이유는 유목민들은 이동식 천막집인 게르를 예배당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이동식 예배 시설은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불교나 이슬람에서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거주 흔적은 타부강 상류에 위치한 울란바이싱Ulan Baishing, 城卜子, 그 인근의 보로바이싱Boro Baishing, 波羅板升, 금나라 시대의 장성을 따라 위치한 무호르소보르간Mukhor Soborghan, 木胡兒索卜干, 자오허召河 북쪽의 데리셍후툭Derriseng Khutug에서도 발견되었다.
- ‘11 몽골의 그리스도교 흔적들’ 중에서, 171~172쪽
1368년 몽골 세력이 중원에서 완전히 쫓겨나면서 중국에서도 동방교회는 보호막을 잃게 되었다. 원나라 때에 기층민 속으로 침투하지 못한 동방교회로서는 당연한 결과였다. 중국에서 발견된 원나라 시대의 그리스도인 묘비들 가운데 한인들의 이름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은 동방교회가 기층민 속에 파고드는 데 실패하였다는 반증이다. 몽골 세력을 내쫓고 중국 대륙을 지배하게 된 한족 왕조 명나라가 외래 종교를 배척하기 시작한 14세기 말에 동방교회는 베이징 일대에서도 자취를 감추었으며, 몽골고원의 몽골인들도 무속신앙으로 되돌아가면서 몽골 땅은 불교가 주류를 이루었다. 쇄국정책을 편 명나라가 실크로드를 닫아걸자, 동방교회의 전통적인 선교 루트도 봉쇄되었다. 명나라가 한꺼번에 동방교회의 흔적을 지워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이것이 동방교회 쇠락의 시작이었다. 200년이 지난 16세기 말에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 땅을 밟았을 때 그들은 동방교회의 희미한 옛 그림자만 볼 수 있었다.
- ‘12 몽골과 티베트 불교’ 중에서, 178~179쪽
🖋 출판사 서평
그리스도교의 동방 선교와 몽골 대초원의 부족들
그리스도교 선교를 포함한 문명 교류의 역사를 보면, 대학에서 연구하는 학자들 못지않게 현장에서 활동하면서 연구에 힘쓴 현장 학자(그리스도교의 경우 선교사 학자)들의 기여도가 높다. 저자도 현장 학자로서 몽골에서 10년 동안 지내며 몽골에 대한 애정과 이해가 깊은데, 이 책은 그의 관심과 노력의 결과물이다. 이 책은 몽골의 그리스도교를 다루면서 그 선교의 중심을 이루는 동방교회를 함께 소개하고 있어 동방교회 역사에서 몽골의 그리스도교가 가지는 중요성을 알리는 동시에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선교적이고 문화 포용적인 동방교회의 존재를 일깨워 주고 있다.
우리에게는 네스토리우스파교회, 경교로 알려진 동방교회는 13~14세기에는 실크로드를 따라 지중해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몽골, 중국까지 퍼져 있었다. 당시 초원의 유목 민족에게 전해진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의 한 분파인 동방교회로, 몽골의 그리스도교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동방교회의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이 책에서는 한때 유라시아 지역에 200개가 넘는 교구들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서 교류에도 크게 기여한 동방교회에 대해 살펴보고, 동방 선교의 중심에 있었던 동방교회의 교세 확장과 이를 위한 선교사들의 활동, 중앙아시아와 몽골제국의 동방교회 교인들의 활약과 쇠락을 서술하고 있다.
몽골 선교의 현시점과 반성
한국교회는 지난 30년 동안 몽골에서 교회 개척·교육 선교·의료 선교·문화 선교에 앞장서면서 두 나라 사이의 인적·물적 교류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동안 수백 명에 달하는 한국인 선교사들이 공식·비공식적으로 몽골에서 활동하였으며, 선교의 모습도 단순한 교회 개척에서 다양한 분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개별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와 개인 중심의 선교 활동이 가져온 문제점도 적지 않다. 선교의 밑바탕인 몽골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이해가 크게 부족하여 적지 않은 오해와 부작용이 많았다. 저자는 이러한 환경에서 몽골의 그리스도교 역사에 관해 읽을 만한 연구서조차 없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한다. 턱없이 부족한 사료는 물론이고 그것들을 소화할 수 있는 언어학적·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학자마저 거의 없는 형편이라는 것이다. 이런 답답함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고 싶은 저자의 간절함이 담긴 이 책은 몽골의 그리스도교 역사에 대한 입문서가 되는 동시에, 몽골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 좋은 교양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