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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9월5일 월요일 [(녹)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수도회] 의도적 합리화의 틀에서 벗어나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1코린 5,1-8
† 복음 루카 6,6-11
◈ 오늘의 묵상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 사람을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율법의 모독자’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자신의
욕망과 이기심으로 주님을 배척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하느님께 손을
내밀고 그분의 뜻과 계획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완고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마음이
부드러워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온유하심과
자비하심에 시선을 고정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당신을 ‘율법의 모독자’로 고발하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지만, 당신께서
율법의 주인이심을 당당하게 피력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규정에 얽매어 좋은 일을 하지 않고 목숨을 구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님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법률은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드러내고 인간의 구원에 봉사하는 것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안에 머물지 않는 사람은 잘린 포도나무 가지처럼
말라 죽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5,6). 말라서 오그라든 포도나무
가지와 오그라든 손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율법의 주인이신
예수님과 결합되지 않는 사람들은 그 영혼이 잘린 가지처럼, 오그라든
손처럼 병들게 됩니다. 그들은 악의와 사악이라는 묵은 누룩이 되어
영적인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옹졸해진
우리 마음을 치유하시도록 맡겨 드려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아닌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
2016년 다해 9월5일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제1독서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십시오.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5,1-8
복음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6-11
감정의 자유에 대한 본질을 말해주는 인디언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마을의 인디언 추장이 부족 사람들에게 본인의 정신 속에 사는
개 두 마리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한 마리는 선하고 용기 있는
흰 개이고, 다른 한 마리는 복수심에 불타고 화가 난 검은 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마리는 늘 맹렬히 싸운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마을의 청년 중에 한 명이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리지 못해서 물었습니다.
“추장님, 어느 개가 이깁니까?”
그러자 추장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계속 밥을 주는 개.”
우리 마음도 그렇지요. 항상 두 개의 정신이 싸우고 있습니다. 즉,
선과 악이 자리를 잡고 싸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이깁니까? 바로 내가 늘 생각하고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 누구도 악한 것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선함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이 선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것들에 대한 지대한 생각과 관심을 두고 있다면 선을 누르고 악으로
기울어질 확률이 커집니다. 왜냐하면 이 안에서 욕심과 이기심이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마음으로는 선을 향해 밥을
주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악을 향해 밥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안식일을
잘못 알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안식일은 하느님을 위한 시간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시간이며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자비가 어떤 것인지 알려 주시고자 예수님께서는
오른손이 마비된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즉,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자비는 안식일이라고 해서 무조건 고통을 감수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 빨리 그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냐며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항상 선을 향하고
계셨기에 율법이라는 틀을 넘어서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과연 어떠한가요? 어떤 형식과 틀을 강조하면서 선보다는
때로는 ‘대를 위해서는 소를 희생시킬 수도 있다는 논리로 악을
선택하는 것에 당위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 모습이
바로 선과 악 중에서 악에게 밥을 주는 것이며,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아닌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문제일까요?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이 더 큰
문제일까요?
열정을 잃은 사람은 노인과 같다(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예수님께서 가르침을 주셨던 회당입니다.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
(정소연,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 중에서)
우리는 과거를 바꿀 수 없고, 우리에 대한 다른 사람의 태도를 바꿀 수
없고, 앞으로 일어날 수많은 일들을 바꿀 수 없습니다.
우리가 유일하게 바꿀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바로 우리의 태도뿐입니다.
다행인 것은 우리가 매일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는 태도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사실입니다.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결정적인 것들을 가지고 있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왜 바꿀 수 없다는 생각으로 포기하고 좌절에 빠지는 것일까요?
다시 한 번 힘내십시오.
어제 시성되신 성녀 마더 데레사이십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의도적 합리화의 틀에서 벗어나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9월5일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루카 6,6-11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루카 6,7)
A Man with a Withered Hand
의도적 합리화의 틀에서 벗어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한 여정을 계속하시면서 적대자들의
반대와 저항은 점점 더 거세어져 갑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습니다. 그분을 고발할 구실을 찾고 있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6,7).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알아차리시고 손이 오그라든 이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하시며(6,7), 하느님의 존엄한 피조물인
인간이야말로 인간의 중심임을 가르치십니다. 그리고는 묻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6,9) 그런 다음 고쳐주셨습니다.
사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은 금지된 노동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생명이 위독한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고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는 것이 꼭 안식일에 고쳐야 할 정도로 위급한
병이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의 정신을 망각한 채 문자에 갇힌
오그라든 마음을 지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관점에서는 결코
허용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서는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해방시켜주셨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오그라들어 경직된 사고의 틀과 규범의 절대화라는 문제 외에도
‘의도적 합리화’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의도적 합리화’란 무의식에 있는 동기와 바램, 두려움이 우리가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을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선택받은 자신들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갇혀
다른 이들이 구원받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니 자기중심적
사고와 배타적 관점에서 다른 이들은 모두 적으로 여겼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오직 자신들만을 율법이나 하느님을
바라보는 관점, 종교제도 등 모든 것의 중심에 두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의식의 동기가 되어 그들에게는 다른 생각이나 신학,
예언자나 메시아는 모두 적이 됩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도 않았고, 그분의 복음선포 행위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의도적 합리화’의 의식과 행동을 버리지 못한 채 복음을
산다고 착각하며 사는 것은 아닌지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내 친구, 우리 가족, 수련 동기, 같은 본당이나 구역, 신심단체 소속,
같은 종교, 학교 동문, 혈연 등의 이유로 팔이 안으로 굽어 남에게
거리를 두거나 비판하고 배척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복음의 사람은 그런 연줄과 친분이 동기가 그 울타리의 사람들을
편들고 다른 이들을 배척하고 비판하며 적대시하는 사고나 행동을
버려야겠지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대로 선을 이루고
목숨을 구하는 일은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으며 인간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묵자(墨子)에 ‘무감어수 감어인(無鑑於水鑑於人)’이란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물에 비추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비춰 보라”는 뜻이지요.
‘의도적 합리화’의 틀에서 벗어나 다른 이들에게 비친 자신의 모습부터
바라보고 타인의 입장을 이해함으로써 방관자가 아닌 사랑의 동반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도 오그라든 의식,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사고와 행동, 관계의
패스트푸드를 버리고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을 열린 마음으로
살아내는 행복한 날이길 소망합니다. 오그라든 의식은 적대감과
분노(6,11)를 일으킬 뿐이니 스스로 자기 영혼을 망가뜨리지
말아야겠지요.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9월5일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손을 뻗어라.”> (루카 6,10)
여러분은 손이 멀쩡하시지요?
예수님께서는 오늘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오그라든 손을 펼칠 수 있게 만들어 주십니다.
손이 오그라들었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도움과 자선을 펼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손이 멀쩡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 수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팔이 자꾸만 안쪽으로 굽어
자기와 자기 사람만 위하고 다른 사람, 특히 가난하고 소외되어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는 사람을
회개시키고 치유시켜 손을 뻗어 내밀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 겁니다.
여러분은 손이 멀쩡하시니 손을 한번 펴 보세요.
예수님께서 "손을 뻗어라!" 하시네요.
어제 시성된 콜카타의 마더 테레사는 예수님의 이 말씀대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줌으로써
우리 모두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오늘 손을 한번 쭈욱 뻗어봅시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게 가 닿을 수 있게 말입니다.
오늘 내가 손을 내밀어 잡아주어야 할 이웃은 누구일까요?
그의 손을 잡아줌으로써 나도 오그라든 손이 아니라
건강한 손을 지닌 "하느님의 몽당연필"이 되어보면 어떨까요?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손을 뻗어라."(루카 6, 10)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9월5일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손을 뻗어라."(루카 6, 10)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치유의 순간은 우리의 마음이 이제 주님께 활짝 열리는 순간입니다.
두려웠던 우리 마음이 주님 사랑으로 손을 뻗게됩니다.
치유자이신 주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주님께 감사하게 될 때 치유는 우리의 길을 다시 걸어가게 합니다.
치유는 다시 사랑하게 하며 다시 감사하게 만듭니다.
치유는 다시 새롭게 탄생되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손을 뻗어 만나야 할 삶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가장 좋은 선물은 이미 주어져있지만 손을 뻗지 못해
놓치고 사는 우리들입니다.
손을 뻗어 찾고 느끼고 만나야 할 주님이 우리 앞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찾고 느끼고 만나는 그만큼이 우리의 삶이 될 것입니다.
삶의 기쁨은 모두에게 열려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활짝 열려 손을 뻗기만 하면 됩니다.
치유는 우리에게 열려있는 하느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웃기는 짬뽕 같은 안식일 규정
2016년 다해 9월5일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 루카 6,6-11
웃기는 짬뽕 같은 안식일 규정
예수님 시대 유다 사회 안에 ‘바리사이’라는 특별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라는 말은 ‘분리되다’라는 의미를 지녔지요.
그들은 죄인들이나 나환우들이나 그릇된 신앙인들과는 분리되고
차별화된 정통 신앙인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원래 바리사이들은 모세오경만을 유일무이한 계시라고 강조하는
사제들에 반대하던 평신도 개혁자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오경뿐만 아니라 예언서들과 시편 등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모든
삶을 통해 하느님께 영광과 제사를 드리려했습니다.
이토록 좋은 의도와는 달리 그들의 신앙생활은 점점 복잡해지고
부담스럽게 되었습니다. 철저하고 빈틈없는 신앙생활을 추구하던
그들이었기에 613개나 되는 율법 조항에 대한 준수뿐만 아니라 구전을
통해 내려오던 실천사항까지 세밀하게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순수한 응답으로 시작되었던 그들의 신앙행위는
점점 반드시 해치워야만 하는 의무사항이자 무거운 짐, 족쇄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자연히 그들의 신앙은 정신보다 제사행위 자체에 치중하게 되었습니다.
내면보다는 겉치레에 더 신경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유달리
강조한 것 규정 가운데 정말 웃기는 규정들이 있었는데, 정결 예식이요,
안식일 규정이었습니다. 외출했다가 귀가했을 때 물이 떨어져서 손이나
발을 못 씻을 수도 있고 씻을 수도 있는데, 씻지 않으면 완전 중죄인
취급을 했습니다.
안식일만 되면 누가 규정을 어기나 눈에 불을 켜고 서로를
바라봤습니다. 안식일에는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어도 요리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 죽어가도 안식일에는 치료행위조차
함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종교의 힘을 통한 영적
학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일종의 종교 중독으로 인한 이상행동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꽤 뚫고 계시던 예수님, 부자연스럽고, 비인간적인
삶의 방식,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행동 양식을 죽어도 참아내지
못하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이 눈에 불을 켜고 바라보고
있는 중인데도 불구하고 법 같지도 않은 법, ‘웃기는 짬뽕’같은 안식일
규정을 사정없이 짓뭉개십니다.
마침 회당 안에 오른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한 명 앉아있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무릎을 탁 치며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 규정을 어기고 그의
병을 고쳐주기만 하면 즉시 고발하고 체포하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습니다. 당시 힘 꽤나 쓰던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여차하면 예수님께서 조기 체포되시고
계획하고 계신 공생활이 어긋나버릴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제가
만일 그 당시 예수님이었다면 어떻게 처신했을까 묵상해봅니다.
살벌한 분위기임을 직감하고 잠시 치유활동을 뒤로 미뤘을 것입니다.
회당에서의 가르침이 끝나고 군중들이 돌아가고 나면 따로 그를 불러서
조용히 치유해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당당하고 의연하십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따가운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환우에게
외치십니다.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예수님의 범법행위 앞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궁시렁궁시렁대기
시작합니다. 얼굴들도 울그락불그락해졌습니다. 눈들은 분노로
가득했습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예수님을 체포라도 할 험악한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 역시
거룩한 분노로 사악한 그들을 향해 크게 외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루카복음 6장 9절)
보란 듯이 안식일 규정을 산산조각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오늘 우리 발밑을 내려다봅니다. 우리 역시 제도나 규정의 틀에
사로잡혀 이웃을 단죄하거나 고통으로 몰고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뒷전이고 일이나 구조에 함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봅니다.
- 살레시오외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2016년 다해 9월5일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복음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 루카 6,6-11
얼마 전에 끝난 ‘닥터스’라는 드라마의 화두는 ‘사과와 용서’였습니다.
비록 의료사고가 있었지만 병원과 의사가 피해자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했으면 용서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병원과 의사는 자존심이
걸려있고, 피해 보상이라는 금전적인 요인이 있기 때문에 진실을
감추고 적당히 합의를 하였습니다. 드라마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때가 있지만 ‘인과응보’는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병원과 의사는 결국
피해자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하였고, 용서를 통한 화해의 꽃이
피었습니다. 의사로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실수를 인정하는 것이 병원과 의사에 대한
신뢰를 더욱 키울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삼성전자의 ‘갤럭시 노트7’에 결함이 발견되었습니다. 삼성전자는
제품의 결함이 있음을 인정하였고, 판매된 제품 모두를 새로운
제품으로 교환해 주기로 했습니다. 소비자가 원하면 전액 환불해
주기로 했습니다. 물론 삼성전자가 쌓아온 기술과 성능에는 오점이
생길 것입니다. 더불어 금전적인 손해는 천문학적일 것입니다.
삼성전자가 자부심을 버리고, 금전적인 손해를 감수했지만
소비자로부터 ‘신뢰’를 얻었다면 미래를 위해서는 좋은 결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진실을 외면하면, 거짓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문제는 더욱
커지고, 결국은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음을 경고하는 말입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과 끊임없이 대립을 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실수와 잘못을 깨끗하게 인정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기존의 권위와 질서에 발이 묶여있기
때문입니다. 율법과 안식일의 문제는 본질이 아닙니다.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욕심이 문제의 본질입니다.
가끔씩 다투는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너 도대체 몇 살이냐?
이 상황에서 나이가 무슨 상관입니까?’ 너 고졸출신이면서 뭘 안다고
그래! 여기서 학력이 왜 나옵니까!‘ 이런 대화 역시 문제의 본질을
벗어나는 대화입니다. 자존심이 상한 사람의 전형적인 태도입니다.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깨끗하게 인정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때로
우리는 권위라는 옷을 내세우는 것은 아닌지, 학력이라는 포장지를
앞세우는 것은 아니지. 직책이라는 힘을 이용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진리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길입니다. 욕심과 욕망을 따라 불나비처럼 거짓과 불의의 불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들도
많은 유혹을 받습니다. 화려한 도시의 불빛 속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길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가치와 질서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권위, 능력, 직책, 힘을 내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진실과 정의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다른 어떤 법과 질서보다 먼저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리는 땅을 딛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깨닫고, 배우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머리는 영원한 곳을 향해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굽은 마음을 펴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9월5일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 루카 6,6-11
굽은 마음을 퍼라.
아침, 저녁으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가을을 느끼게 합니다.
맑고 푸른 하늘은 곡식을 여물게 하는 더없이 좋은 선물입니다.
수확의 때가 되면 수고와 땀의 결실을 맛보게 되는 기쁨이 함께합니다.
우리의 삶의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선을 다하고 때를 기다립니다.
약속된 하느님의 나라를 기억하며 지금 여기서 수고와 땀의 결실을
기뻐합니다. 기쁨은 희망하는 만큼 확인됩니다. 울릉도는 비 피해가
많습니다. 서둘러 복구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시며 당신의
능력을 통해서 오그라든 손을 이전처럼 성하게 하셨습니다(루가6,10).
손을 뻗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 주는 행위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주는 것을 받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손을 뻗어 서로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손을 편다는 것은
본인뿐 아니라 모두가 기뻐해야할 일입니다. 그런 기쁨이라면 더
많이 누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이 그 사람들입니다(루가6,7). 그들은
마음이 오그라들어서 예수님의 활동을 방해하고 마침내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죽일 수 있을 것인지 의논하였습니다. 자신의 뜻이
이루지지 않는다고 골을 부리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손이 오그라든
것은 마음이 오그라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을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놀림감이
되어 조롱거리가 되어도(예레15,10) 뼛속에 가두어둔 주 하느님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예레20,9) 아버지의 뜻을 따라 가실 길을
가셨습니다.
혹시라도 사촌이 땅을 사서 배가 아픈 것은 아닌지? 내가 만들어
놓은 하느님 상 때문에 다른 어느 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아닌지?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 마음을 넣어주며 새 기운을 불어 넣어 주시길
청합니다.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 주시길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안식일은 물리적으로 쉬는 것보다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더불어 향유하는
것이라는 깨우침을 얻길 바랍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일에서든 트집을 잡으려고 합니다. 그는 무엇인가 꼬인
사람입니다. 얽힌 것을 풀면 좋으련만 바른 것도 그릇 것으로 보니
그 사람은 불행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루카7,32). "움직여야할 때 움직이고 멈추어야 할 때 멈추어야 하는
것이 삶이고. 움직여야할 때 움직이지 않고 멈추어야 할 때 멈추지
않는 것이 죽음이다"(이현주).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 있어야 합니다.
사사건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며 못마땅해 하는 사람은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여전히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도 긍정을 찾아내는 삶입니다. 긍정의 주 하느님을
생각하십시오! 행동은 마음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무엇이든 주님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마음자세를 굳건히 하여 참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손을
뻗어 주님의 손을 꼭 잡으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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