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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4. 묵상글 (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 세례자 요한을 그리며.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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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4.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세례자 요한을 그리며>
꺼져가는 생명의 끝자락 힘겹게 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늙은 부모의
마지막 희망의 불꽃이었던 요한!
그러나 당신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버지의 이름조차 가지지 못하고
부모와 갈라서야 했던 외톨이였습니다.
뭇사람의 존경 받는 가문의 영광도
주님 섬기는 사제의 안정적인 지위도
당신의 몫은 아니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늦둥이 외아들
하지만 따스한 부모의 품이 아니라
거친 광야가 당신의 보금자리였습니다.
여린 살갗 보드라운 천으로 감싸는 것은
당신에게는 생각할 수 없는 사치요,
단지 성긴 낙타털옷만이
당신을 거칠게 보듬을 수 있었습니다.
부드러운 빵과 맛난 살코기
몸과 마음을 유혹하는 달콤한 포도주는
결코 당신과 어울릴 수 없는 호사 일뿐
메뚜기와 들꿀에 당신은 생명을 맡겼습니다.
제 생각을 펼치지도
제 목소리를 내지도 않으며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그분의 길을 곧게 내기 위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이기에
당신은 있으면서도 없어야 했습니다.
두려움 없이 주저함 없이
탐욕을 채우려 혈안이 된 이들에게
위선과 가식을 옷 입은 이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당신은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준엄한 질책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생애 첫 순간부터 평탄치 않은
비범한 당신의 삶의 여정에 이끌려
수많은 이들이 당신께 찾아와
살기 위해서 머리를 숙이며
오시기로 한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당신께 투사하였습니다.
그러나
메시아의 자리를 탐하라는 사탄의 유혹은
당신께는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었고
살기 위해 당신을 찾은
무수한 이들을 참으로 살리기 위해서
당신은 스스로를 죽이고 죽였습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마침내 동생의 아내를 탐한 부정한 압제자의
썩은 냄새 진동하는 흥겨운 술판의
싸구려 노리개가 되어 목이 잘리는 순간까지
당신은 한없이 작아짐으로써
정의의 주님을 드러내었습니다.
당신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주님을 품음으로써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당신은 사라졌지만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 닮은 많은 이들을 통해서
오늘도 찬란히 부활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탄생과 삶과 죽음을 기억하는 오늘,
당신의 추하고 속된 세상과의 단절을 본받아
주님과 온전히 하나 되기를,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운 당신의 비움을 본받아
주님으로 온 삶을 채울 수 있기를,
헛된 명예를 내던져버린 당신의 낮춤을 본받아
주님을 온 누리 모든 이에게 들어 높이기를,
부정과 불의에 맞섰던 당신의 정의로움을 본받아
주님의 정의를 온 몸으로 당당히 선포하기를
겸손한 마음으로 다짐하며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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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4.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진짜 헛수고는?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헛수고.
저는 헛수고를 정말 싫어합니다.
물론 저만 그런 것이 아닐 겁니다.
제가 자주 듣는 얘기 중의 하나가 포르치운쿨라 행진과
전에 산청 성심원에서 했던 포르치운쿨라 축제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인상이 많이 남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 얘기를 하면서 그것이 없어진 것이 아쉽다고,
지금 새로 프란치스칸이 된 분들에겐 그런 체험이 없어서 안 됐다고 합니다.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수천 명이 모여서 그런 축제를 할 수 있었던 것이,
그리고 그것이 많은 사람에게 좋은 기억과 감명으로 남았다는 것이 한편
저의 보람으로 남지만 그것이 없어진 것은 다른 한편 헛수고로 남습니다.
그래도 이런 것은 하나의 일이랄까 행사일 뿐이고,
전국적인 축제는 없어져도 어쨌거나 여기저기서 축제를 지내니
이 프란치스칸 운동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고 헛수고로 끝난 것은 아닙니다.
제가 더 헛수고로 느끼는 것은 사람 농사입니다.
수도원 안팎에서 인재를 양성하려고 한 저의 노력이 열매 맺지 못하거나
그런 노력이, 비록 일부에게서지만, 인정받지 못하거나
오히려 비난받을 경우, 무척 마음이 아프고 헛수고 느낌이 들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헛수고 느낌은 정말 제가 세속적이라는 표시이고,
그런 면에서 이런 헛수고 체험은 많을수록 좋을지도 모릅니다.
분명하지요.
이런 헛수고 느낌은 저의 노력과 수고가 세속적으로 인정받고
보상받고 싶은 욕망과 욕심이 아직도 있다는 표시가 아닙니까?
그러니 오늘 이사야가 얘기하는 헛수고 느낌은 제게 필요하고,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세례자 요한이나 다른 성인들과 비교하면
헛수고 체험을 오히려 더 많이 하고 더 크게 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그의 수도회 개혁 노력이 반대와 박해로 보상받고,
성 프란치스코도 자기가 시작한 운동이 제자들에게서 반대를 받았지요.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세례자 요한은 어땠습니까?
자기의 제자들은 다 자기를 떠나 주님의 제자가 되고
자기의 목숨은 한낱 계집의 앙심 때문에 날아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제 생각에 성인과 범인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범인은 이 헛수고가 헛수고 체험으로만 남지만
성인은 이 헛수고 체험이 하느님의 보상 체험으로 넘어갑니다.
그렇습니다.
보상이 없는 수고가 헛수고입니다.
그런데 진짜 헛수고는
이 세상에서의 수고가 헛수고 체험으로만 남고,
그 이상의 하느님 보상 체험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헛수고 안에서 발생하는 하느님과 하느님 체험이 없다면 진정 가련합니다.
어쨌거나 우리의 노력이 하느님에게서 보상받지 않고,
세상에서 보상받으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지
세례자 요한이라는 거울을 통해 성찰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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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4.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심리학자들이 쥐를 대상으로 실험했습니다. 서로 다른 환경의 기다란 두 통에 쥐를 각각 한 마리씩 넣었습니다. 한 통은 깜깜했고, 다른 통은 뚜껑에 바늘구멍을 뚫어 빛 한 줄기가 들도록 했습니다. 빛이 전혀 통하지 않는 통의 쥐는 세 시간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빛 한 줄기만 비치는 통 안의 쥐는 무려 서른 시간을 견뎠습니다.
이 실험의 결과는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많은 깨달음을 줍니다.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둠만이 가득한 곳에서 살맛이 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안 좋은 상황에서도 희망을 안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의 어둠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빛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 덕분에 희망을 충분히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빛이 되라고 하십니다. 나의 인생을 비칠 빛만 찾지 말고, 스스로 빛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 빛으로 다른 이가 희망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희망에 우리 역시 또 다른 빛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금 현실이 힘들어도 내일은 조금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를 품어야 합니다. 빛이신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라고 불리는 또 다른 빛도 있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빛이기에 가능합니다.
오늘은 오실 주님을 준비한 요한 세례자의 탄생 대축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으로 이웃과 친척 모두 기뻐합니다. 단순히 나이 많은 엘리사벳이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발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요한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느님께서는 자애로우시다.’라고 하지요. 그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지금 갓난아기인 요한 세례자에게, 그리고 요한의 명명식 때 아버지 즈카르야에게 내려서 불신으로 말하지 못했던 그가 혀가 풀려 말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즈카르야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했던 것은 하느님 찬미라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깨달았기에 찬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자비를 깨달은 사람은 모두 기쁨 속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 줄기 빛이신 하느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 역시 나의 이웃에게 한 줄기 빛이 되어야 합니다. 나만 받아야 할 빛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받아야 살 수 있는 빛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또 그 희망을 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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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먼저 핀 꽃은 먼저 진다. 남보다 먼저 공을 세우려고 조급히 서두를 이유가 없다(채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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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4.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주님의 손길이 요한을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루카 1,66)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입니다. 탄생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신비롭습니다. 참으로, 세상에서 탄생이야기만큼 놀랍고 경이로운 이야기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는 그 누구도 이 세상에 스스로 태어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세상에 태어날 수 없다는 이 사실은 선물로 받은 생명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아무렇게나 될 대로 막살라고 주어진 생명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생명에는 살아야 할 생명의 질서가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경이로움을,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오묘하게 지어주신 이 몸, 당신을 찬송하나이다.”(시 139,4)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도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어,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이사 49,1-2).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이사 49,5)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저 세상에 그냥 무의미하게 던져진 존재가 아닙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세상 안에 과업(소명)을 지고 던져진(기투성의) 존재입니다.” 곧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의 구원과 사랑을 이루어야 하는 과업(소명)을 짊어진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구세주의 탄생에 앞서, 요한의 탄생을 전해줍니다. 이 탄생 이야기 역시 그의 신원과 사명을 밝혀줍니다.
엘리사벳은 자녀를 낳을 수 없었던 불임의 여인으로 이미 늙었는데도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이웃들과 친척들도 그녀의 해산 소식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습니다.”(루카 1,58). 사실, 그들은 늙은 엘리사벳의 아기 잉태와 더불어 벙어리가 되어버린 즈카리아를 통해, 감추어진 무언가가 실현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드레째 되는 날, 아기는 할례를 받고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 명하게 되는 순간, 즈카리아의 묶였던 혀가 풀렸습니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루카 1,65). 그들은 하느님의 관여(개입)와 현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루카 1,66), 아기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수행할 사명이 무엇일지 궁금해 하였습니다.
<제2독서>에서, 그의 사명을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자를 보내주시기 전에,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사도 13,23-24)하는 것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이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주어진 것임을 밝혀줍니다. 만약,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분리해 버린다면, 요한의 탄생 의미는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원과 사명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원과 사명도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구원과 사랑을 “마음에 새기며”, 소명을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손길이 요한을 보살피고 계셨던 것”(루카 1,66)처럼, 우리에게도 역시 주님의 손길이 보살피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자신을 묻고, 자신의 신원과 소명을 찬미하며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루카 1,66)
주님,
당신이 베푸신 자비를 봅니다.
감추어진 무언가가 제게 실현되고 있음을 봅니다.
저의 가린 눈을 열고, 당신의 관여와 현존을 볼 수 있게 하소서.
당신의 손길이 오늘도 저를 보살피고 계시오니,
당신 신비 안에 저 자신을 묻습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구원과 사랑을 소명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그것이 제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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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4.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그분은 커지셔야 합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주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신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요한은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 억압받는 이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도구 역할을 하심으로써 그들을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요한은 주님을 가리켜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요한3,30).고 하였고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루카3,16). 하시며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높이고 앞세웠습니다. 자신에 대해 침묵하고 주님의 영광을 말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처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자녀는 자녀대로 그리고 윗사람은 윗사람대로 아랫사람은 아랫사람대로 자기주장이 커가는 세상입니다. 물론 자기 소신을 표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소신을 내세운다기보다는 살지도 못하면서 자기 소리만 키우고 기대하며 강요함으로써 서로의 관계를 힘들게 하는 세상입니다. 내가 더 크고, 더 앞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누군가를 흔들어 떨어뜨려야 내가 올라가는 것처럼 생각하는 세상이 아닌가 합니다. 여당 대표로 나서는 사람들의 주장이 꼭 그렇습니다.
이러한 세상에 요한처럼 철저히 자신의 역할을 알고 행동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요한은 오직 주님을 증언하고 주님을 앞세우는데, 일생을 바쳤습니다. 많은 사람이 요한을 존경하고 따랐지만 결코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사람들이 주님을 향하도록 인도했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는 말씀이 살아있었습니다. 우리도 철저히 주님을 가슴에 담고 그분을 위해 산다면 우리의 주변은 참으로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상대방이 커질 기회를 제공할 때마다 요한의 삶을 통해 하느님 안에 머물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요한이라는 이름은 아버지 즈카르야가 성전에서 천사로부터 전해 받은 이름이었습니다. 친척들은 아기에게 조상의 이름을 물려주려고 했지만, 아기의 부모는 하느님께서 주신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젊은 날에 아기를 낳지 못하는 돌계집(石女)이라고 손가락질받던 엘리사벳은 자기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손길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즈카르야도 잠시 벙어리가 되는 아픔을 통해, 깊은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니 다른 이름을 선택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기는 하느님께서 주셨고 성장하여 하느님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은총을 받았으며 더군다나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 은혜에 감사하고 나를 구원하시는 주님을 증언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 내가 만나는 사람을 더 크게, 그리고 우선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기쁨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의 섬김을 통하여 하느님은 찬미 받으소서.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말
이제부터 쓸데없는 말은 절대 안 할 거야.
말이 많아서 도움 되는 일은 별로 없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얘,
내가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자세하게 한번 들어 볼래?(이규경) ***
우리는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말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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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4.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세례자 요한과 다른 성인의 축일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혹시 아시는지요? 그렇습니다. 다른 성인들은 세상을 떠난 날을 축일로 지냅니다. 이 세상에서 많은 공덕을 쌓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가경자, 복자, 성인’의 순서를 거쳐야 합니다. 증인이 있어야 하고, 성인의 전구를 통해서 ‘표징’이 드러나야 합니다. 한국은 그런 과정을 거쳐서 103위의 성인과 124위의 복자를 신앙의 증거자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다른 성인과는 달리 태어난 날을 ‘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태어난 날을 축일로 지내는 분은 성모님과 세례자 요한입니다. 이는 태어난 날을 축일로 지내는 예수님과 같습니다.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세례자 요한도 성령의 이끄심에 의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도 성령에 의해서 마리아에게 주어졌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이름도 성령의 이끄심에 의해서 엘리사벳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세례자 요한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요한이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에게 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율법과 계명에 따라서 속죄의 예식을 거치고, 제물을 바쳐야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데, 요한은 세례를 받으면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시에는 상상하기 힘든 획기적인 죄의 사함을 받는 예식이었습니다.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오직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갔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과 역할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겸손하였고, 달릴 길을 충실히 달린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욱 작아져야 합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습니다. 나는 오셔야 할 그분이 아닙니다. 나는 그분의 길을 준비하는 광야의 목소리 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겸손하였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길을 충실하게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크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을 지내면서 세례자 요한의 겸손함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충실함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갈 수 있는 용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부러워하면 지는 거라고 합니다. 남의 떡을 부러워하기 보다는 나에게 주어지는 사명에 충실하면 좋겠습니다.
‘나 중심의 생각을 상대방 중심의 생각’으로 바꿀 수만 있다면 우리는 세상을 좀 더 아름답고, 풍요롭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세례자 요한은 철저하게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축일도 그런 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축일은 여름이 긴 하지에 가깝습니다. 하지가 지나면 여름은 점차 짧아집니다. 예수님의 축일은 겨울이 가장 긴 동지에 가깝습니다. 동지가 지나면 낮은 점점 길어집니다. ‘성소 후원회’ 임원 연수 때입니다. 강사 신부님은 제가 예전에 본당 신부님으로 모시던 분입니다. 저는 신부님을 소개해 드리면서 ‘제가 신부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제가 그런 말을 할 줄 알고 ‘끈 없는 신발을 신고 왔다.’라고 하셨습니다. 제 말을 유쾌한 유머로 받아 주시는 신부님은 역시 저보다는 한 차원 높으신 분이셨습니다.
슬픈 눈으로 바라보면 세상은 한없이 슬플 수 있습니다. 구약을 마치고, 신약을 시작하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도 그렇습니다.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이들 중에는 가장 위대하다는 말을 들었던 세례자 요한은 ‘살로메’의 춤 값으로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이들 중에 가장 위대한 세례자 요한을 기억하고 있으며, 사랑과 공경을 드리고 있습니다. 예전에 휴대폰 광고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 할 때면 잠시 꺼 놓으셔도 좋습니다.’ 늘 켜져 있어야 하는 휴대폰도 소중한 사람과 있을 때면 꺼도 좋다는 광고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그렇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하느님의 더욱 큰 영광을 위해서라면 지금 좀 서운해도 참을 수 있습니다. 지금 좀 속이 상해도 웃을 수 있습니다. 자존심이 무너질 때라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수많은 성인 성녀들은 바로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하셨고, 재물보다는 가난함을 택하셨고, 모욕과 멸시를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예언자 되어, 주님에 앞서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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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4.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요한 세례자는 성경에서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남을 예고하고 그의 길을 준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요한은 사마리아와 유대인들에게 회개와 죄의 사함을 선포하며 하느님의 나라를 준비하라고 전했습니다.
그의 강렬한 메시지는 사람들을 깨우치고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게 했습니다. 요한은 "너희가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라는 경고를 전하며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고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세례를 통해 사람들이 죄를 회개하고 하느님과의 화해를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세례는 새로운 시작의 상징이었고, 그로부터 나온 사람들은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요한의 강론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임박을 예고하고 그의 도래를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예언은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이어졌습니다.
요한 세례자는 우리에게 하느님과의 화해와 회개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인물로 기억되며, 그의 강렬한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큰 도전과 깨달음을 안겨줍니다. 그의 축일을 기념함으로써 우리도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하느님의 나라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열어가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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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명이 지키는 성당
일본 성지순례 중 유황온천으로 유명한 ‘운젠’이라는 동네를 순례했습니다.
지금은 온천으로 유명한 동네지만
예전 박해 시대 때는 펄펄 끓는 유활 물을 처형 도구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곳 근처의 작은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그때 안내해 주시는 분이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이곳에 남아 있는 교우분은 모두 3명입니다.
모두 돌아가셨고 3명이 남아 이 성당을 지키고 있습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신앙의 가치는 많이 낮아지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안타까운 현실이고 또 그 3분에게는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무언가를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묵묵히 지켜내는 것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임을 느꼈던 여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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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4.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하나?
“섭리의 삶, 겸손의 삶, 감사의 삶”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예수님말고 이렇게 탄생 대축일을 지내는 성인은 요한 세례자뿐입니다. 새삼 성 요한 세례자가 우리 교회에 얼마나 독보적 존재인지 깨닫게 됩니다. 오늘 입당송과 화답송 후렴도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 성 요한 세례자 요한임을 알려줍니다.
“하느님이 보내신 사람이 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그는 빛을 증언하러 왔다.”<입당송>
“오묘하게 지어 주신 이 몸, 당신을 찬송하나이다.”<화답송 후렴;시편139,14ㄱ)
이어지는 시편 내용도 은혜롭습니다.
“주여, 당신은 나를 샅샅이 보고 계시나이다.
앉거나 서거나 매양 나를 아옵시고,
멀리서도 내 생각을 꿰뚫으시나이다.”(시편139,1-2)
24절까지 이어지는 시편139장은 참 깊고 좋은 묵상자료가 됩니다. 성인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결코 우연적 존재가 아님을 봅니다. 하느님 탐구와 나의 탐구는 함께 갑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인간이 무엇인지 아무리 물어도 하느님 없이는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필생 평생공부가 하느님 공부임과 동시에 참나를 아는 공부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여정을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이라고도 합니다. 하닮의 여정에 오늘 옛 어른이 좋은 가르침을 주십니다.
“느긋한 걸음이 가장 멀리 가니 먼 길을 앞당길 수 유일한 길은 지치지 않는 것이다.”<다산>
“주저하는 준마보다 꾸준히 가는 둔마가 낫다.”<사기>
죽어서만 순교가 아니라 살아서도 순교적 삶을 사는 우리들입니다. 삶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장거리 마라톤입니다. 한결같이, 끊임없이 지치지 않고 가는 우보천리(牛步千里; 우직한 소의 걸음으로 천리를 간다는 뜻, 한결같은 노력의 자세를 뜻함), 호시우행(虎視牛行;호랑이의 시선으로 멀리보고 소처럼 우직하게 걷는다는 뜻)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저는 소띠요 우직하게 날마다 '참으로 살기 위하여' 소처럼 몸으로 강론을 씁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오늘 성 요한 세례자 대축일을 맞이하여 저절로 떠오르는 질문입니다. 짐승들처럼 생각없는, 무의미한 반복의 일상을 살 수는 없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을 따라, 주님을 섬기며, 은총의 도움에 힘입어 참나를 실현해가야 합니다. 이런면에서 우리 가톨릭교회의 성인들은 참 좋은 삶의 좌표가 됩니다.
성인이 되라 불림 받아 성화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성인 축일 때마다 기억하고 기념할 뿐 아니라 우리 또한 성인이 되려는 각오를 새로이 해야 합니다. 성 요한 세례자가 우리 성화의 여정에 참 좋은 본보기가 됩니다.
첫째, 섭리의 삶입니다.
성인뿐 아니라 우리 하나하나가 하느님께 불림받은 귀한 존재들입니다. 하느님의 선물들이요 하느님 섭리안에 그 고유의 사명을 지니고 있으니 이런 의식은 정체성의 형성에 결정적입니다. 우리는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기에 생각없이 함부로 막 살 수는 없습니다. 아마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도 다음 이사야 말씀에서 자신의 신원을 거듭 확인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이스라엘 대신, 내 이름을 넣으면 그대로 우리의 신원이 됩니다.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우리의 영예로운 성소라는 것입니다. 계속 이어지는 말씀도 우리에겐 새로운 힘이 됩니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네가 나의 종이 되어,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세례자 요한, 예수님뿐 아니라 우리 모두 각자 고유의 제자리에서 주님의 종으로,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주님의 빛으로 살라고 불림받은 귀한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든든한 배경이,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시는 주님은 우리 삶의 존재이유가 되는 분입니다. 이런 주님만이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이런 주님과의 깊은 관계를 위해 평생 기도와 말씀 공부의 수행은 필수입니다.
둘째, 겸손의 삶입니다.
가장 쉬운 것이 남판단하는 일이요, 가장 힘든 것이 자기를 아는 것입니다. 자기를 모르는 무지에서 벗어나는 일이 평생과제입니다. 자기를 아는 것이 겸손이자 지혜입니다. 바로 주님께 돌아오는 평생 회개를 통해 참 나를 아는 겸손에 이르게 됩니다. 회개와 겸손은 함께 갑니다. 바로 이런 겸손의 모범이 세례자 요한이요 오늘 사도행전에서 바오로 사도가 잘 증언합니다.
“요한은 사명을 다 마칠 무렵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형제 여러분,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 파견되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세례자 요한입니다. 겸손의 아름다움, 겸손의 매력, 겸손의 향기, 겸손의 진실, 겸손의 사랑, 겸손의 용기, 겸손의 지혜입니다. 겸손은 우리 인품의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간 존재의 향기는 바로 겸손의 향기,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우리에게 파견되신 구원의 말씀, 예수님을 닮을수록 겸손과 온유입니다. 예수님이 있어 세례자 요한이듯 예수님 있어 우리들임을 깨닫습니다.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 세례자 요한의 자랑이듯, 세례자 요한, 예수님의 자랑이어라. 예수님, 우리의 자랑이듯, 우리는 예수님의 자랑이어라.”
새삼 우리 삶의 여정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 겸손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성덕의 잣대가 겸손입니다.
셋째, 감사의 삶입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관계 속의 더불어의 존재들입니다. 고립단절이 지옥입니다. 관계는 존재라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하느님과 인간의 혼신의 노력을 다한 합작품의 결과가 세례자 요한의 탄생입니다. 엘리사벳 단독행위가 아닙니다. 복음 서두가 저절로 감사의 마음이 들게 합니다.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함께 기뻐하였다.”
오늘날의 비극이자 불행은 이런 함께 기뻐할, 참 좋은 인정을 지닌 마을 사람들이, 친척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을의 자리에 고립단절의 아파트 숲이 들어서니 더불어의 삶은 날로 악화되고 온갖 질병도 늘어갑니다. 세례자 요한의 작명과정에 연루되는 사람들도 한둘이 아닙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것인가?”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아기는 자라면서 굳세어졌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작명은 마을 사람들 모두의 경사이자 기쁨이었고, 즈카르야 엘리사벳 부부는 물론 후에 이런 상황을 전해 들었을 세례자 요한 마음 깊이 각인된 하느님께 감사였을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세례자 요한의 생애가 답을 줍니다.
1.섭리의 삶입니다.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의 자녀, 빛의 자녀로서 사명을 다하는 섭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2.겸손의 삶입니다.
늘 주님앞에서 주님과 함께 주님을 따르며, 주님과 이웃을 섬기며 사는 겸손의 삶입니다.
3.감사의 삶입니다.
모두가 은총이요 감사입니다. 이렇게 관계 속에 더불어 살 수 있음에 하느님께, 이웃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 사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 섭리에 충실하며 매사 겸손하고 감사하며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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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4.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예수고난회 김준수의 신부님.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1,80)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크게 기념하고 대축일로 지내는 까닭이란 아마도 그분의 탄생 자체가 그리스도교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아침기도 찬미가에서는 “한 개의 화관으로 장식된 성인, 또 다른 성인들은 두 개의 화관` 요한은 더욱 많은 꽃이 꽂혀진 세 개의 화관으로 장식되도다.”라고 칭송합니다. 여기서 세 개의 화관이란 눈처럼 깨끗하게 죄 없으신 동정의 화관, 사막의 개척자이며 크신 예언자의 화관 그리고 훌륭히 믿음 지킨 순교의 화관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자 요한을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마11,9)이며,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11,11)하고 인정하셨습니다. 이런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관해서 오늘 복음의 핵심은 10개월째 벙어리로 살아온 아기 아버지 즈카르야가 서판에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1,63)라는 표현에 담겨 있습니다. 이 구절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1,61)란 사람들의 의문에 대한 대답이며 우리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실로 ‘요한’이라는 이름은 ‘하느님이 불쌍히 여기신다.’란 뜻으로 아기와 그 아기의 사명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분명히 드러내 보이는 표지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주셨다.” (이49,1ㄷ)하고 성서에 언급하듯이 하느님 뜻으로 말미암아 그 이름을 요한이라고 함으로써 바야흐로 은총과 자비의 때가 시작됨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분위기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앞서 알리는 전주곡과 같습니다.
주님의 손길로 보살핌을 받고 성장한 요한은 예수님을 두고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하며”(요3,30),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루3,16)라고 하느님의 시선에서 자신의 위치(=이것이 곧 겸손이다.)를 알고 사신 분이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1,36)라고 소개하며 자기 제자들이 그분을 따라가도록 인도합니다. 그는 이처럼 기꺼이 제자들이 참된 길을 걸어가도록 빗겨 섰던 겸손한 분이셨습니다. “나는 그분이 아니다”(사13,25)라는 고백은 예언적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새겨들어야 할 고백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몰려왔지만, 자신이 메시아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가도록 빗겨 서신 분이십니다. 우리 모두 분명 “그분이 아닙니다.”라고 말하지만, 때론 내가 그분인 듯 타인의 가는 길을 가로막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요한은 태어날 때부터 그를 본 사람들이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1,65)라고 생각한 것처럼 오래전에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한 대로 그는 광야에서 “하느님 나라가 곧 도래하리라.”라고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말씀이신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확성기였습니다. 만일 그가 하느님의 소리가 아닌 자기 말을 했다면 그의 소리는 생명이 없는 헛소리였거나 잡소리로 끝나버렸을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탄식처럼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49,4)하고 토로한 것과 다름없는 빈 깡통, 빈 껍질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과 관계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깊이 자각했고 자신의 소명을 충실히 실행했기에 생명을 닮은 소리가 되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다가올 새 세상을 맞이하고 준비시켰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겸손한 마음처럼 우리 역시 자신 삶의 자리에서 진리를 선포하고 행동으로 실천할 때 우리는 쓸모 있는 하느님의 심부름꾼이 될 것입니다. 세상의 온갖 유혹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답게 사는 길이 바로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참된 예언자의 모습일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그렇게 살았던 근본적인 원동력은 바로 하느님, 예수님과 관계 안에서 자신의 위치와 자신의 사명을 깨닫기 위해서 오래도록 고독과 침묵 가운데 머물러 있었기에 그의 입술에 진리가 쏟아져 나왔음을 잊지 맙시다.
어느 시인이 세례자 요한에 관해서 이런 글을 남겼다고 하는데 저자의 이름을 잘 모르겠네요. “내가 커지면 주님이 오실 자리가 없어지고, 내가 아우성치면 주님의 작은 음성 들을 수 없으니, 작아져 비로소 향기로 남은 그 사람처럼 나도 자꾸 낮아져, 거친 들판에 작은 들꽃으로 피어 있고 싶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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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4.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 커지셔야 할 분과 작아져야 할 이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2&id=2098332&menu=4770
박윤식 [big-llight] 2024-06-23 ㅣNo.173608
성탄절 6개월 전 오늘은 구세주 예수님의 고난의 길을 준비하고자 하느님이 파견한 세례자 성 요한 탄생일이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신다.’라는 뜻이란다.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하느님이 보내신 이었는데,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빛을 세상에 증언하러 왔다. 그 의미대로 그는 수많은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주님께 인도한다. 그리고 ‘작은 이’로만 기구한 삶을 산 그는, 헤로디아 딸 춤 값으로 목숨을 잃었다. 고작 은전 30냥에 팔리신 예수님 다음으로, 가장 값싼 죽음을 당한 이가 되었다.
요한은 신원을 묻자 당당하게 답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 말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 참조). 그러면서 그는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신 분이신데, 나는 그분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가 않다.’(요한 1,26-27 참조)라고 자신을 낮춘다.
그는 주님의 길을 닦고 준비하는 그분의 종이었다. 세례자 요한의 설교를 듣는 이들이 그를 훌륭한 예언자로 여길 때, 자기는 종말에 나타나기로 한 엘리야가 아니고, 메시아는 더더욱 아니란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요?” 라고 따질 때, 그는 단지 “이사야의 말대로 ‘주님의 길을 곧게 하라.’ 라며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란다. 그의 위대함은 그가 “나는 그분이 아니다.” 라고 분명하게 밝힌 데에 있다. 이렇게 그는 탄생부터 구세주께서 오심을 알리는, 준비된 분이시다.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주님과 다른 형제자매들에게 자신을 낮출 줄 안다. 오랜 시간 동안 숱한 유혹을 다 견디어 냈기에. 그래서 그는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총 속에 머무를 줄 안다. 그러한 이에게는 그 삶에서 ‘믿음의 향기’가 담뿍 날 것이다. 요한은 한평생 그 믿음의 향기를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며 살았다. 오직 미리 와 주님의 길만을 마련하는 이로 여기면서 말이다.
그리고 한없는 우리 죄를 용서하신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그 믿음의 향기를 주셨다는 사실을 늘 고백하며 사셨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를 당연히 메시아로 착각하였지만, 그는 언제 어디서나 그분 앞에 머리 숙여 신발 끈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치 않은 지극히 낮은 자였다. 이렇게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었기에, 그는 정녕 위대하였다. 이처럼 세례자 요한은 주님 오심을 준비하면서 사람들 환호를 받았지만, 철저하게 자신의 사명과 위치를 자각하며 스스로를 낮추었다.
그에게는 이런 삶이 성인의 위대함을 돋보이게 했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남아 있는 세례자 요한의 모범을 따라, 그가 한 평생 예수님 영광 드러냄의 도구임을 늘 명심하면서 그분을 세상에 알려야겠다. 그러기에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욱 작아져야 한다는 그의 이 겸허한 신앙의 고백을 묵상하면서, 겸손과 배려의 삶을 실천해야 할게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오늘 우리도 하느님 앞에서 이웃의 작은이 신발 끈 매어주는 그 낮은 자세의 사랑으로, 하느님 영광을 드러내고 그분을 증언하는 삶을 의당 살아가야 하리라. 주님보다 앞서 와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베풀면서 그분 길을 준비하면서, 끝내 피 흘린 성 세례자 요한을 본받으며 살기로 다짐해보자. 우리도 하느님 앞에서는 물론 다른 이들 앞에서도 작아져, 하느님의 그 크신 영광을 드러내며 증언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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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4.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루카 1,57-58).
요한과 예수의 대비점
늙은 엘리사벳은 마지막 예언자를 낳았고, 젊은 처녀 마리아는 천사들의 주님을 낳았습니다. 아론의 자손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이사 40,3 참조)를 낳았고, 다윗의 자손은 땅의 힘센 하느님을 낳았습니다. 아이 못 낳는 여자는 죄를 탕감하는 사람을 낳았지만, 동정녀는 죄를 없애시는 분(요한 1,29 참조)을 낳았습니다. 엘리사벳은 회개를 통하여 사람들을 화해시키는 사람을 낳았고, 마리아는 더러운 땅을 정화하시는 분을 낳았습니다. 늙은 여인은 선조 야곱의 집안에 등불을 밝혔고, 요한이 바로 그 등불입니다(요한 5,35 참조). 젊은 여인은 “의로움의 태양’(말라 3,20)을 만방에 밝혔습니다.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아기의 출생을 알린 까닭은, 살해당하는 이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분을 선포하고, 미움받은 이가 시샘받으신 분을 선포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로 세례를 베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마태 3,11 참조)을 선포하고, 어두워지지 않는 빛이 의로움의 태양을 선포하며, 성령으로 충만한 이가 성령을 주시는 분을 선포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나팔 소리로 사람들을 부르는 사제가 마지막 날 나팔소리와 함께 오실 분을 선포하고, 목소리가 말씀에 관하여 선포하고, 비둘기를 본 사람이 그 머리 위에서 비둘기가 쉬는 분에 관하여 천둥번개처럼 선포하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시리아인 에프렘-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7 사람은 위대하다
주님의 성령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다(지혜 1,7)
이러한 하느님 체험이야말로 “단순한 앓”이다. 그것은 “영혼이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신적 존재를 직접 알 수 있을 만큼 순수한 앓이다. 신적 존재가 흘러들면서 영혼은 천사들과 똑같이 신적 본성을 받고, 즐거워한다.”
우리의 신적 근원들은 마침내 여기서 만난다.
내가 직접적으로 하느님을 알고자 한다면, 나는 단순히 하느님이 되어야 할 것이고, 하느님도 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은 단순히 내가 되어야 할 것이고, 나도 하느님이 되어, 이 “그분”과 이 “나”가 하나의 “존재”를 공유할 만큼 하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 “그분”과 이 “나”는 이 “존재” 속에서 우리의 일을 영원히 하게 될 것입니다. 이 “그분” 과 이 “나”, 곧 하느님과 영혼은 열매를 많이 맺고, 우리는 영원히 하나의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190)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로마 2,1-11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
그러므로 아,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여, 그대가 누구든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남을 심판하면서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있으니, 남을 심판하는 바로 그것으로 자신을 단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짓을 저지르는 자들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심판이 진리에 따른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아, 그러한 짓을 저지르는 자들을 심판하면서도 스스로 같은 짓을 하는 사람이여, 그대는 하느님의 심판을 모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그 큰 호의와 관용과 인내를 업신여기는 것입니까? 그분의 호의가 그대를 회개로 이끌려 한다는 것을 모릅니까?
그대는 회개할 줄 모르는 완고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의로운 재판이 이루어지는 진노와 계시의 날에 그대에게 쏟아질 진노를 쌓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꾸준히 선행을 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나 이기심에 사로잡혀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진노와 격분이 쏟아집니다.
먼저 유다인이 그리고 그리스인까지,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환난과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선을 행하는 모든 이에게는 영광과 명예와 평화가 내릴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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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4.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교회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기념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겸손은 우리에게 특별한 본보기가 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인물이었지만(마태 11,11 참조),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마르 1,7 참조).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 사람임을 잊지 않았습니다(마르 1,3 참조).
예수님께서 세례 받기를 청하시자, 자신이 감히 할 수 없는 일임을 알면서도 그분 뜻에 순종하며 세례를 베풀었습니다(마태 3,14-15 참조).
그분께서는 커지셔야 하고, 자기는 작아져야 함을 아는 겸손한 사람이었고(요한 3,30 참조), 마침내 자신의 말처럼 작아져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마태 14,3-12 참조).
진정한 겸손은 나약하고 불리한 처지에 놓여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적으로 나약하고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참된 겸손을 알지 못합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 주님을 등에 업고 자기를 내세웁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맡은 봉사 직무가 곧 자신의 권위가 되고, 하느님 말씀에 대한 지식과 교회 생활에 대한 경험들로 자신을 위한 봉사를 하게 됩니다.
그 반면 참된 겸손은 내적으로 강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덕입니다.
하느님께 의탁하면서 얻게 되는 내적인 힘은 자유롭게 자신을 낮출 수 있습니다.
주님께 의탁함을 힘으로 삼은 겸손한 사람은 주님께 첫자리를 내드리고 자신은 그 뒤에 설 줄 압니다.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다른 이를 위하여 드러나지 않는 봉사를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겸손을 보여 준 세례자 요한의 전구를 통하여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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