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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왕 요시야의 나머지 개혁
왕하 23:21-27
21 왕이 뭇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이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매
22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여러 왕의 시대와 유다 여러 왕의 시대에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23 요시야 왕 열여덟째 해에 예루살렘에서 여호와 앞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
24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점쟁이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거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25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26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
2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 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내가 택한 이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에 두리라 한 이 성전을 버리리라 하셨더라
왕하 23:21-27 / 온 백성에게 민족 공동체의 유월절 축제를 열도록 선포하였다. `이제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 축제를 엽시다. 우리가 지키기로 서약한 이 율법책의 규정대로 유월절을 지킵시다.' 22) 옛날 사사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영도하던 때나 이스라엘과 유다 왕들이 다스리던 때에는 유월절을 가정에서만 지켰으나 23) 요시야왕 18년에 이르러서는 온 민족이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며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최초의 유월절 축제를 거행하였다. 24) [요시야도 막을 수 없는 재난] 요시야는 또 가나안 원주민의 생활 풍속에서 전래된 물건과 관습들도 율법책의 규정에 따라서 깨끗이 제거하였다. 그는 유다와 예루살렘 전역에 퍼져 있는 점쟁이들과 죽은 사람의 혼을 불러내다 영매들을 제거하고 몸에 지니고 다니는 가정 수호신 드라빔과 온갖 종류의 우상과 그것에 딸린 더러운 물건들을 모조리 제거하였다. 25) 이렇게 요시야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고 모세의 율법대로 살았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다른 어떤 왕들보다 훌륭하였다. 26) 그러나 그도 유다에 대한 여호와의 분노를 막을 수 없었다. 그토록 므낫세가 저지른 악행이 여호와의 분노를 크게 하였기 때문이다. 27) 주님의 결심은 변함이 없으셨다. `내가 이스라엘 백성을 그 땅에서 쫓아낸 것처럼 유다 백성도 쫓아내겠다. 내가 일찍이 나의 거처로 선택하였던 예루살렘 도성도 버릴 것이며 내가 항상 너희를 만나러 오겠다고 약속하였던 이 성전도 버리겠다'
요시야 왕은 이스라엘이 오랜 세월 동안 지키지 못했던 유월절을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책이 지시하는 대로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요시야 왕이 유월절을 지키다(21-23) 요시야의 유월절은 히스기야가 지킨 유월절을 초월한 감동적인 종교 행사였습니다. 아마도 참석한 인원들과 바친 제물들 양에 있어서 그렇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요시야가 유월절을 성대하게 지킨 것은,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의 신학적 뿌리를 찾고, 주인인 여호와께 돌아가게 하기 위한 또 하나의 열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시야가 지향한 개혁이 어떤 것이었는가는 그가 유월절을 지내는 모습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전에 히스기야도 유월절을 성대하게 지냈습니다. 히스기야의 유월절은 율법에 완전히 준하지 않은, 곧 어느 정도 융통성을 지니고 기념 되었습니다. 반면에 요시야의 유월절은 온전하게 율법에 따라 지켜졌습니다. 요시야에게 가장 중요한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온전히 율법을 지키는 것에서 찾고 있습니다. 비록 여선지자 훌다가 유다에 소망이 없다는 신탁을 주었지만, 요시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일을 통해 주의 백성의 운명을 바꾸고자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길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요시야의 나머지 개혁(24-25) 요시야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땅에서 모든 박수와 점쟁이를 제거했고 우상들과 드라빔(사람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우상으로 집안에 두는 것)같은 모든 혐오스러운 것들도 없앴습니다. 이 우상들 일부는 점을 치기 위해 사용한 물건들이었습니다. 요시야는 우상 숭배를 금지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우상 숭배를 부추길 수 있고 예배에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을 제거해서 다시는 우상숭배하지 못하도록 막으려 노력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유다의 운명(26-27) 요시야가 자신의 생애에 모든 것을 건 개혁을 단행했지만, 하나님의 유다에 대한 계획에는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유다가 오랫동안 주 앞에 범죄 했기 때문에 요시야의 노력이 나라의 운명을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또한 요시야가 죽고 유다가 다시 우상 숭배의 길로 빠지는 것을 볼 때, 요시야의 개혁이 영구적인 결과를 남기지는 못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지자 훌다가 이미 선언한 것처럼 하나님이 유다를 벌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처럼 유다도 버리실 것이며, 심지어 솔로몬 시대 때 자기 이름을 두시겠다고 약속하신 성전까지 버리실 것을 확인하십니다. 유다에는 소망이 없고, 하나님의 오래 참음에도 한계가 있지만, 회개하고 그분의 품에 돌아오는 것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적용: 말씀으로 회복되지 못한다면, 우리의 인생은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날마다 말씀으로 주님을 만나고 계십니까? 개혁은 그 시대를 위한 것입니다. 이후 시대는 그 개혁을 이어갈 때만이 개혁의 유산을 상속할 수 있습니다.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자 축전이라도 보내자 하고 요금을 절약하려고 “요1 4:18”라고만 써서 결혼식장으로 보냈습니다. 불행스럽게 우체국 직원이 1자를 빼고 “요 4:18”로 보냈습니다. 주례가 식장에 도착한 축전을 펴서 “신부의 친구로부터 요한복음 4장 18절이라 축전이 왔습니다.” 하니 모두들 성경을 펴서 읽었습니다. 그리고 시부모와 하객들이 모두 놀랬습니다. 거기엔 이렇게 기록돼 있었습니다. “네게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요한일서 4장 18절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이었습니다.
< 설 교 >
전에도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김정호 목사
사랑이 무엇인지 알아가야 합니다. 사랑은 너를 너답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끝까지, 영원토록 견디는 것입니다. 사랑은 배우는 것입니다. 대화도 배워야 할 기술, 훈련, 능력입니다. 말하는 것이 대화가 아닙니다. 대화도 기술이 필요합니다. 대화는 양방향성이 있습니다. 대화를 깊이 하면 할수록 성장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런 대화를 하지 못합니다. 얼굴을 맞대고 하루에 얼마나 대화 하십니까? 미국 부부는 하루에 평균 8분 정도 한다고 합니다. 어느 샌가 부부는 대화를 잘 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수다를 떠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서먹서먹하지 않습니까?
마틴 루터 당시의 중세 교회는 전적으로 부패하였습니다. 참된 교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교리는 비성경적이었고 지도자들은 도덕적 부패에 빠져있었고 성직자까지도 예사로 매매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다 죽어가는 교회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교회를 살리기 위하여 결단하였습니다. 본문의 요시야 왕이 단행했던 종교 개혁도 루터와 다름없는 것이었습니다. 요시야 왕과 같은 왕이 전에도 후에도 없었다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요시야의 종교 개혁 내용을 살피면서 우리의 삶 가운데서 매일매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칭찬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유월절을 회복하였습니다
본문 23절 “요시야 왕 열여덟째 해에 예루살렘에서 여호와 앞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된 역사적인 사건을 기념하는 최대의 명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는 기적적인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한 유월절을 대대로 지키도록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처럼 큰 명절이 겨우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던 때까지만 지켰고 사사시대 이후 열왕들의 시대까지도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약 700여년간의 공백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 신앙의 공백기였고 우상을 섬겼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요시야 왕은 성전 구석에서 발견된 율법 책을 다 듣고 나서 무엇보다도 먼저 유월절 회복을 서둘러 시행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백성에게 구원의 감격을 되찾아 주는 일에 있어서는 유월절 기념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시야의 개혁 운동은 제 2의 출애굽 사건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마땅히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받게된 우리의 유월절을 먼저 회복시켜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구원을 위한 유월절 양이 되셨습니다. 히스기야 시대에도 유월절은 시행되었으나 율법에서 명하는 유월절 규례와 어긋나는 점이 많았습니다. 율법이 정한 때에 시행되지 않았고 규정된 정결 의식을 행하지 않은 채 유월절 양을 먹었습니다. 요시야 왕은 거국적인 차원에서 예루살렘에서 실시하였고 제사장들의 역할을 활성화시켰습니다.
한 부부가 부부싸움을 하다 남편이 몹시 화가 났습니다. 화가 난 남편은 아내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가 버려!” 아내도 화가 나서 벌떡 일어섰습니다. “나가라고 하면 못 나갈 줄 알아요!” 그런데 아내는 가정선교교육원(HOME)의 ‘결혼과 가정생활 상담세미나’에서 배운 것을 떠올리며 다시 자존심을 내려놓고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남편은 왜 다시 들어오느냐고 소리를 지릅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두고 갔어요!” “그게 뭔데?” “바로 당신이에요!” 남편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그 후 남편은 부부싸움을 하다가도 “우리가 부부싸움을 하면 뭐해? 이혼을 해도 당신이 위자료로 나를 청구할 텐데…” 라며 여유 있게 웃고 맙니다. ‘결혼과 가정’은 너무나 아름답고 신비한 것입니다. 인간에게만 주어진 놀라운 선물이요 축복인데 우리의 죄성과 이기심 때문에 문제와 고통 그리고 상처투성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가정, 완벽한 남편, 완벽한 아내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죄성을 지닌 인간으로 ‘쫓겨나서 사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화목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와 화해가 가능하고 우리에게 약속하신 ‘풍성한 삶’을 맛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가족관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유월절 회복 관계를 깨닫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 모두는 값없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구원의 유월절을 지켜야 합니다. 구원의 감격을 한시라도 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요시야가 되어야 합니다. 유월절을 지키고 온 가족과 성도들로 하여금 유월절을 지키게 해야 합니다.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날마다 유월절 구원의 감격을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모든 우상들을 제거하였습니다
본문 24절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점쟁이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거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요시야 왕은 종교 개혁을 위한 준비 행사를 완벽하게 마치고 나서 곧 개혁 운동에 착수하였습니다. 첫 번째로 단행한 것이 바로 우상들을 모조리 제거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그때까지 하나님의 성전 안에 있던 바알상과 아세라상 그리고 하늘의 일월성신들을 위하여 만든 기명(器皿)들을 끌어내어 불살랐습니다. 이어 그는 우상 숭배의 제사장들을 모조리 폐하였고 각 처에 흩어져 있던 신상들을 전부 기구로 빻아 버렸으며 산당의 잔재들을 모두 없애 버렸습니다. 특히 무엇보다도 시원스러운 일은 그때까지 힌놈의 골짜기에서 자행되던 자녀들을 불살라 바치는 몰록 숭배의 제사 행위를 말끔히 일소시켜 버린 일이었습니다. 그는 태양 숭배의 도구인 말과 수렛돌을 불살랐고 솔로몬의 우상 숭배 잔재까지 모조리 없애버렸습니다.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었습니다.
유복한 환경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으며 자란 슈바이처는 어릴 적부터 좋은 옷을 입히려는 부모님에게 “남들은 이렇게 입지 못하는데, 저만 이렇게 입을 수는 없어요”라고 말하는 동정심 많고 기특한 아이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의사가 없어 고통을 받는 아프리카 이야기는 그냥 넘길 수 없는 가슴 아픈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슈바이처는 남은 생을 그들을 위해 살기로 하고 의과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의사가 된 그는 헬레네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주변에서는 그가 사랑하는 여인 때문에 아프리카행을 포기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슈바이처는 그녀와의 만남을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를 찾아가 결연하게 자기 뜻을 밝혔습니다. “나는 아프리카로 떠날 사람이오.” 많은 고민의 흔적이 남아 있는 슈바이처의 얼굴을 보며 헬레네가 대답했습니다. “제가 간호사가 된다면 당신을 현실적으로 도울 수 있겠지요?” 그 뒤 헬레네는 간호학을 공부하여 간호사가 되었고 슈바이처와 결혼 후 함께 아프리카로 떠나 평생 헌신적인 봉사를 하며 살았습니다. 내 마음을 알아주기보다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것. 상대방을 바꾸기보다 그를 인정하는 것. 어떤 사랑이든 헌신과 희생과 그리고 배려가 함께해야 진정한 빛이 납니다.
우리 마음의 이기적이고 불신앙적인 우상을 제거합시다.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높이고 사랑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어떠한 우상도 용납이 안 됩니다. 과감하게 척결해야 합니다. 때로는 돈, 학문, 직장, 자녀, 사람, 명예... 이런 것들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우상적인 것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도구로 사용하거나 하나님을 잠시 이용하고 버리는 삶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요시야처럼 각종 우상들을 버리고 깨뜨리고 정리하는 성도가 됩시다. 바로 여러분들이 전에도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던 이 시대의 요시야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여호와께로 돌이켰습니다
본문 25절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이스라엘 왕 중에 요시야만큼 온전하게 율법을 준행하고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한 왕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구약 외경서 가운데 집회서 49:4에는 다윗과 히스기야와 요시야를 제외한 모든 유다의 왕들이 범죄하므로 멸망당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시야는 제사장 힐기야가 발견한 율법 책의 가르침을 준행하였습니다. 요시야는 하나님 섬기는 일을 실천하여 보임으로써 백성들에게 삶으로 가르쳤습니다. 말이 아니라 실천이고 삶이었습니다. 여기에 감동과 존경이 있습니다.
개혁은 말이 아닌 삶인 것입니다. 유월절을 회복시키고 우상을 버리는 외형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섬기지 아니하면 개혁은 중간에 머물고 말았을 것입니다. 제도에 신앙이 뒷받침이 되어야 합니다. 지도자가 목숨까지 바치지 아니하면 결코 백성들이 따르지 않습니다. 말과 구호뿐인 개혁이 얼마나 많습니까? 빈 껍질만 남고 용두사미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개혁은 신앙에서 시작되고 신앙으로 마치는 것입니다. 과정도 영적인 힘이 있어야 끝까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 없이는 어떠한 개혁도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본을 보이지 아니하면 완전 실패하게 됩니다.
■ 어느 젊은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사형을 집행하던 날, 형장에 도착한 그 사형수에게 마지막으로 5分의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28년을 살아온 그 사형수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진 최후의 5분은 비록 짧았지만 너무나도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 5분을 어떻게 쓸까? 그 사형수는 고민 끝에 결정을 했습니다. 나를 알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작별 기도를 하는데 2분, 오늘까지 살게 해 준 하나님께 감사하고 곁에 있는 다른 사형수들에게 한 마디씩 작별 인사를 나누는데 2분, 나머지 1분은 눈에 보이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지금 최후의 순간까지 서있게 해준 땅에 감사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삼키면서 가족들과 친구들을 잠깐 생각하며 작별인사와 기도를 하는데 벌써 2분이 지나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돌이켜 보려는 순간 ‘아~! 이제 3분 후면 내 인생도 끝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자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지나가 버린 28년이란 세월을 금쪽처럼 아껴 쓰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되었습니다. ‘아~! 다시 한번 인생을 더 살 수만 있다면...’ 하고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순간 기적적으로 사형집행 중지명령이 내려와 간신히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구사일생으로 풀려 난 그는 그 후, 사형집행 직전에 주어졌던 그 5분간의 시간을 생각하며 평생 시간의 소중함을 간직하고 살았으며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마지막 5분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며 열심히 살았다고 합니다. 그 결과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영원한 만남” 등... 수많은 불후의 명작을 발표하여 톨스토이에 비견되는 세계적 문호로 성장하였다고 합니다. 그 사형수가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였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소중한 날들 하루하루를... 도스토예프스키가 가져보았던 마지막 순간의 5분처럼 소중하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언제 우리를 부르실지 모릅니다. 마지막 5분처럼 산다면 놀라운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요시야처럼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말씀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키게 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반드시 축복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여호와께로 돌이킵시다. 나와 세상에 돌이켰던 모든 것의 방향을 여호와께로 바꿉시다. 요시야처럼 여호와께로 돌이켜 전에도 후에도 없는 이 시대의 요시야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시야처럼 삽시다. 유월절을 회복하고 모든 우상을 제거하고 여호와께로 돌이키어 전에도 후에도 없는 이 시대의 제2의 요시야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진짜 부흥
서 론
2009년 개봉한 국가대표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지금은 국민 배우가 된 하정우씨가 출연했는데요, 그 영화에서 미국으로 입양된 이후 친엄마를 찾기 위해 한국에 왔다가 우여곡절 끝에 한국 최초의 스키점프팀에 합류하는 역으로 등장합니다. 무척 감동을 주는 영화였는데 그 영화에서 감동 코드로 활용된 장치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토마토입니다.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 하정우는 방울토마토를 먹으며 어릴적 엄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립니다. 입양되기 전, 지금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엄마가 해주셨던 설탕 뿌린 토마토가 떠오른 겁니다. 울컥하며 토마토 먹는 연기는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도 고향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저의 모친께서 토마토를 자르고 그 위에 설탕을 뿌려주셨는데, 포크로 찍어서 한입 먹으면 세상 그 어떤 과일보다도 맛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토마토가 과일인줄 알았습니다. 나중에 그게 야채라는 사실을 알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었죠. 최근에 이 영화를 만든 영화사 관계자와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그 토마토는 그 영화를 만든 감독 자신의 경험이 반영된 장면이었다고 합니다. 그 감독에게 엄마의 사랑하면 토마토였고, 토마토하면 엄마였던 것이죠.
내일은 추석입니다. 고향에 있었다면 설탕 토마토 정도가 아니라 어머니가 해주시는 더 풍성한 음식을 나누며 가족의 사랑을 누렸을 겁니다. 비록 몸은 떨어져 있어 더 아쉽지만, 이곳에서도 가족의 가치와 의미를 더 되새기게 되는 명절이 되길 바랍니다.
토마토가 부모님과 관련된 감동코드로 작동하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를 나타내는 매개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린양입니다. 그리고 그 어린양은 이스라엘의 절기와 관련이 됩니다. 바로 유월절입니다. 히브리어로 페싸흐(פסח), 영어로는 Passover라고 합니다. 뜻은 ‘지나갔다, 넘어갔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기 하루전날 밤,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들이 그 땅에 있는 모든 가정의 장자를 죽이십니다. 장자를 죽이므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애굽의 왕과 백성들을 벌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장자를 죽인다는 것은 그 가문을 죽이는 것이고, 결국 그 땅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다 죽이는 것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장자의 죽음을 넘어가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집의 문설주와 기둥에 바르면 칼을 든 천사가 그 집을 Passover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날밤 이스라엘의 각 가정은 어린양을 잡았습니다. 출입문에 피를 발랐고 그렇게 하므로 이스라엘의 모든 가정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출애굽을 하게 됩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구원의 날이었고, 이 구원의 상징물 혹은 매개물이 어린양이었던 것입니다. 홍해를 건너며 구원의 감격을 맛본 것 이상으로 유월절은 그들에게 구원의 살아있는 경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후에 유월절을 매년 지킬 것을 명하셨고, 대대로 지킬 것을 백성들 또한 약속하였습니다. 어찌 지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극적으로 구원을 얻었다면 당연히 망각하지 않고 기억해야겠죠.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21-22절입니다. “왕이 뭇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이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매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여러 왕의 시대와 유다 여러 왕의 시대에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었을까요?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과 같은 절기이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지키라고 직접 율법에 기록할 정도인데 왜 그들은 그리 쉽게 망각하였을까요? 감사한 것은 오늘 말씀에서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다시 지킵니다. 다시 회복, 즉 부흥을 이루게 됩니다. 단지 유월절이 아니라 그들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진짜 부흥에 대해 몇 가지 하나님이 주시는 교훈을 나누겠습니다.
본 론
1. 말씀 회복이 부흥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에서 ‘이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 말씀대로’였다는 것이죠. 어떤 특정 말씀이 있었다는 겁니다. 마태복음7장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기록된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7:24)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이 아니라 마5-7장에서 강조하신 산상보훈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에서 ‘이 언약책’이라는 것은 모세오경을 포함한 모든 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 언약책’은 무엇일까요?
이해를 돕기 위해 왕하22장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3.요시야 왕 열여덟째 해에 왕이 므술람의 손자 아살리야의 아들 서기관 사반을 여호와의 성전에 보내며 이르되 4.너는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올라가서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에 드린 은 곧 문 지킨 자가 수납한 은을 계산하여 5.여호와의 성전을 맡은 감독자의 손에 넘겨 그들이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작업자에게 주어 성전에 부숴진 것을 수리하게 하되 6.곧 목수와 건축자와 미장이에게 주게 하고 또 재목과 다듬은 돌을 사서 그 성전을 수리하게 하라 8.대제사장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힐기야가 그 책을 사반에게 주니 사반이 읽으니라 10.또 서기관 사반이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제사장 힐기야가 내게 책을 주더이다 하고 사반이 왕의 앞에서 읽으매 11.왕이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그의 옷을 찢으니라.”(왕하22:3-6,8,10)
요시야왕은 8세에 왕위에 오릅니다. 그의 아버지 아몬, 할아버지 므낫세는 악한 왕이었습니다. 반면에 요시야는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음에도 무척 선한 왕이었습니다. 왕위에 오른지 18년 되던 해에 나라의 이곳저곳을 살펴보다 하나님의 성전이 허물어져있고 오랫동안 방치되어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동안 백성들이 성전세로 냈던 은이 어떻게 쓰였는지 조사하고 이제라도 다시 그 성전세가 제대로 쓰이도록 제도를 고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성전세가 모였을 때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맡겨서 성전을 수리하게 하였습니다.
힐기야는 신실한 제사장들, 레위인들과 더불어 살뜰히 성전을 살피고 수리하였습니다. 그러다 성전 무너진 틈 사이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율법책들을 발견합니다. 급히 왕에게 율법책을 보냈고 왕 앞에서 율법책의 내용을 낭독하였습니다. 요시야는 왕으로 있었던 18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성전도 다시 회복하려고 했던 것이죠. 그런데 지금 자기 앞에서 낭독되는 율법책의 내용은 처음 듣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책의 여러 사본들 중의 하나이겠거니 하고 듣는데 이게 처음 듣는 내용인 겁니다.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계명을 지켰는데, 지금 이 계명은 들어본 적이 없었고 알지 못했으니 지킨 적도 없는 계명이었습니다. 요시야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지금 자신과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를 통감하고 그 자리에서 옷을 찢으며 회개의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 오랜 세월동안 하나님의 율법책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아둔하였고, 그 어떤 왕도, 제사장들도 심각성을 모르고 여기까지 왔다. 어찌 우리가 망하지 않겠는가, 지금까지 망하지 않은 것은 우리의 죄악과 허물을 눈감아주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구나’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요시야는 왜 유월절 절기를 지킨 것일까요? 그리고 왜 그 전에 왕들은 유월절을 지키지 않은 것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율법책에 가장 핵심되는 내용이 유월절이었다는 겁니다. 즉, 그전의 왕들이 이 율법책에 기록되어있는 유월절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던 겁니다. 이 율법책을 통해 유월절의 존재를 알게 된 요시야는 이제라도 유월절을 제대로 지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되자 부흥하자 결단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다’고 기록할 정도로 유월절을 엄격하게 지킵니다.
성도 여러분! 무엇이 부흥입니까? 어떤 절기를 지키는 것이 부흥이 아닙니다. 말씀이 회복되는 것이 부흥입니다. 왜 말씀입니까? 오직 말씀만이 돌처럼 딱딱한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성경책이 있습니다. 한 번도 열어보지 않은 성경책이 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해어졌으나’ 우리의 어머니들은 성경이 해지도록 읽어서 그 책을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우리는 열어보지 않습니다. 그러니 성경을 보아도 감동이 없고, 그 내용을 모르니 방자히 행합니다. 부흥은 언제 시작됩니까? 다시 성경을 펴는 일에서 시작합니다. Revival 부흥은 다시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가까이 있어서 손만 뻗으면 언제든지 읽을 수 있고 그 말씀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성경이 우리집 책장에 있습니다. 책상 위에 놓여있습니다. 이제 그 성경을 펴시기 바랍니다.
자주 작정기도를 하는 분이 있습니다. 거의 매주 작정기도합니다. 조그만 깨달은, 은혜가 느껴지면 바로 작정기도합니다. 왜 그러시나 했더니 길게 한 1년동안 목표를 가지고 작정기도하면 실패하지만 한 3-4일 작정기도 일주일 작정기도는 쉽게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분은 1년 내내 작정기도한다고 합니다. 작심3일이라는 말이 있죠. 그래서 누군가는 우리가 1년에 작심을 100번만 하면 그 1년을 성공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작심한게 3일 간다면 100번을 하면 300일은 가지 않겠습니까? 주일 52번이니까 대충 1년은 채웁니다. 우스게 소리같지만 정말 지혜롭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성경을 펴는게 쉽지 않죠. 그래서 우리 성경도 작정해서 한 3일 목표로 한 일주일 목표로 읽으면 어떨까요? 한 달 후까지는 모르겠고 일단 이번 일주일만 읽어보자. 다 읽게 되면 감사하고 또 일주일 하면 되지. 중요한 것은 일단 성경을 펴고 자리에 앉아 읽는 것입니다. 그 첫걸음을 시도하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은 능력과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2. 말씀 실천이 부흥입니다.
말씀을 정말 제대로 읽다보면 우리 마음에는 말씀대로 해보고자 하는 선한 씨앗이 심겨집니다. 그래서 아까 보았던 마태복음7장에도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이라고 했고, 행17:11에서는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상고했다는 말을 영어성경에서는 “examined the Scriptures every day to see if what Paul said was true” 말씀이 진짜인지 시험해보았다고 말합니다. 시험하는 것은 자신이 삶으로 실천한 것입니다.
즉, 말씀 실천이 핵심입니다. 말씀대로 해보자는 마음이 들었고, 그것을 행해보더라는 겁니다. 제가 중학교시절 다니던 교회에 부장집사님이 굉장히 신실한 분이었습니다. 이분이 중학생인 우리들에게 하루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냥 되는게 아니다. 이번 주부터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으로 바로 가지 말고 교회 들러서 궁뎅이 의자 찍고 기도하고 가라. 그리고 책상에 앉아 공부하기 전에 말씀 읽어라.” 재미있는 건 그때 중등부 친구들이 학교마치고 집에 가다가 다 교회에 들러 기도하고 갔다는겁니다. 좀 오글거리지만 한 번 해볼까 하고 교회를 갔는데 저만 있는게 아닙니다. 나중에 이게 경쟁이 붙어서 누가 더 일찍 가나 누가 더 오래 있나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공부하기 전에 성경을 폈습니다. 줄을 그으면 더 잘 눈에 들어오는 줄 알고 줄도 형형색색 볼펜과 형광펜으로 그것도 자로 그어가면서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제가 창세기 요셉의 이야기에서 너무나도 가슴 아프고 감동 받아서 울었다는거 아닙니까. 그 재미에 빠져서 공부는 뒷전이고 말씀을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면 공부 망쳤을까요? 성적 떨어졌을까요? 그때 우리 친구들이 말씀에 빠졌던 이유가 있습니다. 말씀을 읽는데 성적이 오르는겁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니 소소하지만 역사가 일어나는겁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 인생의 첫 번째 부흥이 바로 그때였던 것 같습니다. 1985년 중학교2학년의 저는 그렇게 성경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실천했습니다.
요시야왕의 마음에 말씀이 박혔습니다. 그는 옷을 찢는 요식행위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24절입니다.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점쟁이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거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다 제거하였습니다. 진리가 그 속에 박히니 거짓을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실천은 어렵지 않습니다.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읽고 소소한 일에 내 마음과 시간을 기꺼이 내어드리면 우리의 삶에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결 론
실천이라 하면 우리는 응당 다른 사람을 향한 하나님 사랑의 실천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실천해야할 것이 나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죄악을 털어내는 것입니다. 진리의 진정한 능력은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드러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나 자신에 있어서 실천적이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돕는다면 그것은 사랑의 실천이 아니라 가식적 행동이 됩니다.
내가 진정 진실된 삶을 살고 싶다면 주님의 말씀이 내 삶을 지배하도록 나의 어두운 구석을 하나씩 하나씩 몰아내고 무너진 곳은 보수하고 다시 세워나가는 제1순위의 실천을 살아야합니다. 성도 여러분! 사실 우리는 뭘 해야할지 모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한 양심을 주셨고, 지금도 밝은 빛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날마다 상고하기만 한다면 여러분들이 그렇게 바라는 진정한 부흥을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