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64
2월12일[연중 제6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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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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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TT-yyZZCzOE
[수원교구 박우성 암브로시오 신부님 집전(안성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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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낄끼빠빠, 낄 데 끼고 빠질 때 잘 빠집시다!>
우르르 몰려다니던 젊은 시절, 다들 없이 살던 때였습니다. 식사나 술을 한잔 하고 나면, 서로의 얇은 지갑 상황을 고려해서, 십시일반 거두어 함께 내곤 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결정적으로 중요한 계산하는 순간, 귀신처럼 사라지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디 아픈가? 무슨 사고라도 났나? 하고 걱정들이 많았는데, 상습범이 되고 나니 나중에는 공공의 적이 되었습니다. 낄 때 껴야 하는데, 꼭 빠지는 전문이었기 때문입니다.
또다시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살아온 나날을 뒤돌아보니 끔찍할 정도로 햇수가 차곡차곡 쌓였습니다. 병원이나 면사무소나 우체국에 가면, 아버님이라는 소리가 이제 낯설지 않습니다. 저희 가문 안에서도 부모님 떠나시고, 형이 떠나고 나니, 이제 저는 가계도 최상위 자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며 몇 가지 결심을 세우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이른바 낄끼빠빠입니다. 나이와 위치에 걸맞게 낄 데 끼고 빠질 때 빠지자는 것입니다. 반드시 끼어야 하는 순간은 어떤 때이며, 반드시 빠져야 할 순간은 어떤 때인지 늘 헤아려 가며 처신을 잘하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게 될 때 노년의 삶은 추하고 비루해지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요즘 얼마나 자주 그런 모습을 목격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른바 낄빠빠낄입니다. 끼어야 할 때는 빠집니다. 그러나 빠져야 할 때 반드시 끼어서 손가락질 받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대자연의 순환 논리를 자주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노년기는 육적인 삶에서 영적인 삶으로 건너가는 시기입니다. 시들고 쇠락하고 소멸되는 것을 자연스럽게 수용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결국 내려놓는 시기요, 사라지고 죽어가는 시기, 그러나 반대로 불멸의 희망을 지니는 시기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처신이 참으로 각별하게 다가옵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시비를 걸었습니다. 논쟁을 벌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해보려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자신의 전지전능하심과 능력의 손길을 절대 허투루 사용하는 분이 절대 아니십니다. 내가 이런 사람이야 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려고 기적을 행하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바리사이들의 미성숙하고 유치한 태도에 마음 깊이 탄식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 말씀을 뒤로 하고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을 버리두신 채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른바 빠져야 할 때 잘 빠지신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엉뚱하고 몰상식한 바리사이들의 언행 앞에 크게 분노하며, 단 한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논쟁을 거듭했을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언성이 높아지고, 소리 소리 지르게 되고, 나중에는 서로 멱살을 잡고 주먹다짐까지 하게 될 것입니다.
논쟁할 가치조차 없는 바리사이들과의 대화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확신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뒤로 한 채 신속히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떠나신 것입니다. 이른바 생활 속 거리두기, 관계 안에 완충 지대를 만드신 것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우신 예수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 삶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낄끼빠빠를 잘 하고 있습니까? 아무것도 아닌 일, 아닌 주제로 목숨걸고, 피 튀기며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그로 인해 그 좋던 관계 다 산산조각나고 있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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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AW8aNDYCI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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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믿으려는 의지만큼 자기를 드러낸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이 말은 하느님은 사랑이 아니시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증거를 보여달라는 말은 상처요 모욕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 본성상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눈빛부터 표징입니다. 문제는 사랑해보지 않으면 사랑을 알아볼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나의 사랑이 증가할수록 하느님 사랑을 볼 줄 알게 됩니다. 사랑에는 표징이 있는 게 아니라 수준만 있을 뿐입니다. 그 하는 사람의 수준과 받는 사람의 수준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완전하십니다. 사랑하려는 마음이 있으면 목동들처럼 천사를 보게 되고 동방박사들처럼 별을 보게 됩니다. 완전한 표징은 그다음에 인식 수준이 높아지면 볼 수 있게 됩니다. 바리사이들이 착한 뜻만 가졌다면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착한 뜻이란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자신도 사랑으로 나아가려는 마음입니다. 다른 길을 가는 사람은 믿지 못하는 핑계를 증거가 없기 때문이라고 둘러댑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을 인식할 사랑이 그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건축학 개론’(2012)에서 남자 주인공 승민은 자격지심이 있습니다. 자신과 호감을 느끼는 서연이 돈 많고 잘생긴 자기 과 선배를 좋아하고 그 선배에 비하면 자기는 개구리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이 자격지심의 상징은 그가 입고 있는 가짜 “GEUSS”(진짜: GUESS) 티셔츠입니다. 과 선배와 서연은 승민의 티셔츠를 보며 농담하고 웃습니다.
여기서부터 승민이는 여자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를 찾기 바쁩니다. 사실은 사랑하는 표징을 보여달라고 청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괜찮았다가 자기가 자격이 안 됨을 알고는 사랑한다면서 헤어질 준비에 착수합니다. 결국 서연과 과 선배와의 작은 신체접촉을 보고 오해하여 먼저 헤어지자고 말합니다. 그렇게 서연은 이유도 모르게 이별 통보를 받습니다.
15년 뒤 이혼녀가 된 서연은 결혼 준비 중인 승민의 건축사 사무실로 찾아옵니다. 자기 집을 지어주겠다던 승민의 약속이 떠올라서였습니다. 승민은 이미 결혼할 상대에게 서연이 “썅년”이었다고 말해놓은 터였습니다.
그런데 누가 더 나쁜 사람일까요? 사랑해 본 사람은 압니다. 사랑은 눈빛까지 믿겠다는 의지적 결단입니다. 사랑이 부족할수록 그 두려움에 믿지 못할 거리를 찾습니다. 스스로 자격이 없다고 여기며 믿지 못할 표징들을 찾는 마음을 가진 승민처럼 말입니다.
사랑할 자격은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요? 사랑해보면 그저 믿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만이 표징을 알아보게 됩니다.
사랑의 표징을 알아보지 못할 수 없습니다. 동방박사처럼 믿는 만큼 하느님은 더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사랑의 본성이 그렇습니다.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다 내어주는 사랑은 없습니다. 자신이 가진 사랑의 수준에 따라 순차적으로 내어줍니다. 그러니 사랑이신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표징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자격 없는 존재로
머물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에서 느껴지는 사랑의 표징보다 의심 거리를 먼저 찾습니다.
사랑할 자격은 사랑하려는 마음으로 얻어집니다. 그래서 구약에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준 것입니다. 사랑하겠다는 결단이 내려졌다면 이제 믿는 것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점점 더 보여주십니다. 사랑은 믿기로 결단한 그 사람의 의지만큼 자신을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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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영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A smooth sea never made a skilled mariner.’ 잔잔한 바다에서는 좋은 뱃사공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비슷한 말로 ‘고진감래(苦盡甘來)’가 있습니다. 고생 끝에 즐거움이 온다는 뜻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우리도 비슷하게 ‘인내는 쓰지만 결과는 달다.’고 말하곤 합니다. 성서는 고생 끝에 즐거움을 맞이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 시작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정든 고향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갖은 고생을 하였지만 늦은 나이에 귀한 아들을 얻었습니다. 모세는 80이 넘은 나이에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홍해 바다를 건넜습니다. 광야에서 40년을 보낸 이스라엘 백성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욥은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재물, 가족, 건강까지 잃었습니다. 욥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주셨을 때 감사했다면, 하느님께서 나쁜 것을 주실지라도 감사드립니다.” 아브라함, 모세, 욥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이 시련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참된 행복을 선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우리의 신앙에는 두 개의 축이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의 성탄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부활입니다. 주님의 성탄을 축하하면서 시메온은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마리아는 시메온 예언자의 말을 가슴에 깊이 담았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십자가와 죽음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 죽음이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240년이 된 한국교회도 의로움 때문에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100년 넘게 박해를 받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하였습니다. 그 박해와 시련을 견디어 냈기에 우리는 103위 성인을 공경할 수 있고, 124위의 복자를 모실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표징은 무엇일까요?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표징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혈연입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학연입니다.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재물과 권력입니다. 구유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은 그들이 원하는 표징을 보여줄 수 없었습니다. 나자렛에서 자란 예수님은 그들이 바라는 표징을 보여줄 수 없었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과 함께 하시던 예수님은 그들이 바라는 권력과 재물을 보여 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려는 표징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오신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려는 표징은 원수까지도 받아들이는 ‘용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려는 표징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려는 표징은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한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와 신앙인들이 보여 주려는 표징은 무엇일까요? 화려한 건물과, 체계적인 조직, 법과 교리를 통해 드러나는 권위는 예수님께서 바라시던 표징은 아닙니다. 우리는 ‘겸손, 용서, 희생, 사랑’의 표징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러한 표징이 우리를 하느님의 나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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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8,11-13: 기적을 요구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
빵의 기적이 있고 난 뒤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의 속을 떠보려고 한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12절) 예수님의 이 거절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마음의 회개와 더불어 사람들이 하느님께로 이르는 영적이고 내적인 변화의 기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세적인 물리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행위로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있는 로마를 정복하여 자신들이 타민족을 지배할 수 있는 현세적인 지상 왕국을 만들어내는 징표를 보이라는 것이다. 파라오 시대에는 원수에게서 해방되어야 했기에 그런 표징들이 일어나야 했지만(탈출 3-15장 참조), 하느님이신 그분께 다른 표징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뜻은 그것과는 다른 것으로 인간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방법으로 세상의 구원을 향하여 가시고 계시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어리석음의 상징으로 보이는 십자가를 통해서였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과연 어떠한 기적을 하느님께 청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현세적인 부귀영화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사는가? 아니면 나 자신의 내적인 회개와 쇄신을 통해 하느님께서 부르시고 열어놓으신 구원의 길을 찾고자 하는지? 즉 나 자신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해 보자. 가장 큰 기적이란 바로 나 자신의 변화라는 것이다. 내가 변할 때 세상도 바뀔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어디서나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분에게 항상 감사와 찬미를 드릴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삶이 없으면, 실천이 따르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일상생활을 통해 그분을 발견할 수 있는 나 자신이 되며, 하느님의 말씀을 살아가며,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언제나 하느님 안에 살아가는 자 되도록, 그렇게 변화되는 기적을 늘 청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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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체코의 신학자 토마시 할리크는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에서 신앙인과 무신론자의 가장 큰 차이가 ‘인내’임을 통찰합니다. 신앙인이나 무신론자나 똑같이 하느님의 부재를 느낍니다. 세상의 수많은 부조리와 모순에도 침묵하시는 하느님을 설명하려고 무신론자들은 “신은 없다.”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것은 명확한 답을 바로 얻고 싶은 무신론자들의 성급함에서 나온 결론입니다. 그러나 같은 상황에서도 신앙인들은 다른 방식으로 대응합니다. 바로 ‘인내’로 견뎌 내는 것입니다. 하느님 신비의 오묘함과 우리 삶의 모호함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인내로 기다립니다.
모든 것이 명백한 곳에서는 신앙이 요구되지 않습니다. 신앙은 모호하고 불분명한 곳에서 요구됩니다. 침묵하시는 하느님, 차갑고 어두운 밤, 불확실한 삶 안에서 신앙이 드러납니다. 그 신앙은 확실성과 평안함을 주는 것이 아니라 신비와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하는 믿음과 희망은 바로 불분명한 순간에 드러나는 우리의 인내입니다.
제1독서에서 야고보는 삶의 시련에 어떻게 대처하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 시련을 잘 받아들이면, 그 안에서 인내가 생겨날 것입니다. 인내와 함께 우리의 믿음은 더 깊어지고 단단해집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을 단단하게 하여 주는 이 시련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복음의 바리사이들도 인내심 없는 자들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들도 눈으로 바로 확인할 수 있는 표징을 바랍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눈으로 확인하고 비로소 이해하려는 그들의 모습은, 무신론자들과는 다르지만, 인내심 없이 명확함을 바라는 성급한 모습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바리사이들에게 표징을 주지 않으시고 인내와 진정한 믿음을 가르치십니다. ‘그 뜻이 무엇인지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생각하시는’ 성모님의 인내를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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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안 믿겠다고 고집 부리는 사람을 믿게 만드는 표징은 없다.>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마르 8,11-13)
이 이야기는 루카복음에 있는 다음 이야기에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마귀가 나가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군중이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기도 하였다."(루카 11,14-16)
여기서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라는 말과 ‘시험하려고’ 라는 말은, 시비를 걸었다는 뜻입니다. ‘하늘에서 오는 표징’이라는 말은, 하느님만이 일으키실 수 있는 어떤 특별한 기적을 뜻하는 말입니다. 아마도 탈출기에 나오는 기적들과 같은 일을 뜻할 것입니다. 앞의 6장에는 빵 다섯 개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가 있고, 8장에는 빵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리사이들도 그 기적을 체험했거나, 직접 체험한 사람들로부터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 눈에는 ‘예수님의 빵의 기적’은 대단히 놀라운 기적이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인데, 바리사이들의 눈에는 그 정도의 일은 ‘하늘에서 오는 표징’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물 위를 걸으시는 일’이라면 바리사이들도 “그것은 하늘에서 오는 표징이다.”라고, 즉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고 인정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일은(마르 6,45-52) 사도들만 목격했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한 것은, ‘예수님을 믿고 싶어서’가 아니라, ‘믿기 싫어서’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권능’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신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싫어서,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서 쫓아낸다.”라고 말하거나, ‘하느님의 권능’으로 쫓아냈다는 것을 ‘표징’으로 증명하라고 요구한 것인데, 진짜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라고 요구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그런 요구를 한 것은 ‘인내심’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믿으려는 마음이 아예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만일에 바리사이들이 요구한 대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어떤 놀라운 표징을 보여 주셨다면, 그들은 그것을 ‘속임수’ 라고 생각하면서 다른 요구를 더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에도 그런 요구를 한 자들이 있었는데(마르 15,31-32), 그 말은 실제로는 비아냥거린 말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한 일도, 어느 정도는 비아냥거린 일이었을 것입니다. <안 믿겠다고 고집부리는 사람을 믿게 만드는 것은 기적이나 표징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뭔가를 계기로 크게 깨닫고 회개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안 믿는 자들만 바리사이들 같은 요구를 한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의 경우에도 비슷한 요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마태 14,28) 이 말은 바리사이들이 표징을 요구할 때 한 말과 비슷합니다. ‘주님이시거든’은 ‘당신이 정말로 주님이시라면’이고, 이 말에는 주님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 일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에게도 바리사이들처럼 주님께 뭔가를 증명해 보라고 요구하고 싶은 충동이 생길 수도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빠지는 함정 같은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의 태도에 대해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합니다. “구원받아야 할 처지에 있는 인간이 어찌 감히 구원하시는 주님께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라고 요구할 수 있는가?” 세속에서는 신원을 증명하라는 요구는, ‘갑’의 위치에 있는 자들이 ‘을’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는 일입니다. 인간은 하느님께, 또 메시아께 감히 그런 요구를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또 메시아께서 당신 자신의 신원을 증명하신 다음에 인간들이 믿게 된 것은 아닙니다. 처음부터 신앙인들은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실 때 ‘그냥’ 단순하게 믿고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넓게 생각해서, 신앙과 과학의 관계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의심하고, 분석하고, 비판하고, 검증하는 일은 과학에서는 당연하게 여기는 일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과학이 발전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주어진 계시 진리를 ‘그냥’ 단순하게 믿고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과학처럼 의심하고, 분석하고, 비판하고, 검증한다면, 계시 진리에서 점점 더 멀어지다가 결국 무신론자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신앙은 과학이 아닙니다. 사도신경의 내용에서 확실한 물증으로 증명할 수 있는 일이 몇 가지나 될까? 없습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도신경의 내용은 전부 다 진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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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시련은 누구에게나 어떠한 형태로든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예상하지 못한 질병의 고통으로, 누군가에게는 불의의 사고로 자녀를 잃은 비통함으로 다가옵니다.
어떤 이에게는 오랜 기간 공들인 수고와 노력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 허탈함으로, 어떤 이에게는 헌신적으로 일하던 직장에서 갑자기 쫓겨나게 된 상실감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이런 시련이 왜 하필 나에게 다가온 것인지, 내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한 것인지 하느님께 따져 보기도 하지만, 그분께서는 침묵 속에서 우리를 방관하고 계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마치 십자가 위에서 절규하시던 예수님에게 아무런 응답이 없으셨던 하느님처럼 말입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코 15,34)
그런데 오늘 제1독서는 이러한 시련을 두고 우리의 믿음이 ‘시험’에 놓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들을 단련시키시는 과정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그 자녀들 가운데 으뜸이신 예수님께서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모진 시련을 겪으셨습니다.
승리자의 위풍당당함이 아닌 패배자의 무력한 모습을 선택하신 메시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참으로 끝까지 인내하셨습니다.
그 거룩한 인내는 마침내 부활이라는 완전한 결실로 이어지고, 온 인류는 구원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혹독한 수난에도 끝까지 인내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하는 우리 신앙인들은 각자에게 다가온 시련에 좌절하기보다 오히려 그에 맞서 강한 믿음으로 인내하는 사람들입니다.
당신 제자들이 얼마나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는지 잘 아시는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위로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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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 일곱 개의 빵으로 사천 명을 배 불리신 그 자리에 바리사이들이 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광야와 같은 그곳에서 군중이 굶주림에서 벗어나는 장면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광야에 있을 때 만나로 굶주림을 채우던 것을 연상시킵니다.
그럼에도 바리사이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신다는 사실이 보이지 않습니다. 누가 보아도 하늘에서 온 표징이었음에도 그것을 보고도, 그것에 관해서 듣고도 표징이라 여기지 않으니 참으로 이상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 삶 속에서도 이런 일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는지 난 잘 모르겠다.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으면 좋겠다.’ ‘내 배우자가 가족들을 아끼는지 잘 모르겠다.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으면 좋겠다.’
이렇듯 우리도 살아가면서 가족들과 주위에 있는 이들에게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지 표현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정녕 내 부모가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보지 못하였습니까? 나의 배우자가 가족을 아끼고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표징이 정말 없었습니까?
어쩌면 우리도 바리사이들처럼,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 채 편견과 선입견의 틀 속에 갇힌 것은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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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8,12~13)
제가 세상 살아오면서 깨닫는 것은, 모든 생명은 기적이고, 우리 각자가 바로 하느님 사랑의 기적이라고 느껴집니다. 기적이란 아주 특별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삶에서 평범하지 않은 말과 행동이 함께 인생의 길을 걷는 사람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것을 수없이 많이 보고 들으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께 하늘에서 오는 무슨 표징을 요구하지도 않을뿐더러 제게는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표현처럼 기도 가운데서 환시도 저는 바라지도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이미 기적과도 같이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을 매일 살고 있는데 무슨 특별한 기적이나 표징이 필요하겠습니까? 삶이 기적이고. 기적 같은 삶을 거룩하게 아름답게 하는 사랑이 기적이고 용서가 기적이며 기도가 기적이기에, 제가 하는 모든 것이 다 기적과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자, 예수님께서 탄식하시며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8,12)라고 말씀하신 후,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8,13) 는 표현이 마음을 흔듭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버려두고 건너편으로’ 가셨다는 표현에 예수님의 심정이, 마음 상태가 잘 드러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한 마디로 믿음이 없고, 영적인 것보다 육적인 것, 영원한 것보다 사라질 것에만 관심을 두는 그들을 내버리고 떠나가셨다는 뜻이겠지요. 얼마나 마음이 답답하시고 힘드셨으면, 평소의 예수님답지 않게 그들을 매몰차게 먼저 버려둔 채 그 자리를 떠나신 것입니다. 복음은 한 마디로 배를 타고 다시 건너편으로 가셨다, 라고 이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편에서 건너편으로 떠나신 것은 결국 대화의 중단이며 단절이고, 불통의 상징적인 거리감을 표현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기대일지 모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하도 누가 누구를 버리고 떠나간 소식, 대화의 자리에서 의견 절충이 되지 않아 자리를 박차고 버려둔 채 떠났다는 소식 등을 자주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바리사이들과 논쟁하시다가 대화가 되지 않아서, 상대방을 설득하지 못하고 당신 먼저 그들을 버려둔 채 떠났다는 게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왜 그들을 버려두시고 떠나신 것일까요? 주님께서 우리를 버려두고 떠나가시지는 않겠지만, 어린 시절 제가 가장 무섭고 떨린 엄마의 표현은 ‘엄마 말 잘 듣지 않으면 엄마 꽉 죽어버릴 거야 혹은 도망갈 거야!, 라는 표현이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존재인 엄마나 혹 그 어떤 사람이 저를 버리고 떠나간다는 것은 정말이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엄청난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을 버려두신 채 건너편으로 가셨다, 는 표현은 제 어린 시절의 아픔을 건드려 제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만일 “주님께서 저를 버리신다면 어찌하나!” 하는 불길한 생각마저 일어납니다.
주님은 아주 그들을 버리신 게 아니라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읽으시고 잠시 자리를 떠나 숨 쉴 여유를 갖기 위한 지혜로운 처신이었다고 봅니다. 상대방이 자기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듯이, 예수님 또한 쉼 없이 그들의 마음을 문을 열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님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잠시 훗날을 기약하면서 떠나가신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했듯이,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마르6,11) 는 말씀의 실천이라고 보입니다. 늘 당신을 찾는 군중들을 남겨 두고 다른 곳으로 선뜻 떠나가셨듯이 그렇게 집착하거나 미련을 두지 않고 떠날 때를 알고 떠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오늘의 에피소드를 통해서,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버려짐을 받지 않기 위해 어떻게 처신하고 응답해야 하는지를 잘 배울 수 있었으면 싶네요. 전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이 바로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이라고 믿기에 주님으로부터 버려짐을 받지 않기 위해 주님을 꼭 붙들고 놓아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이 저를 버려두고 가시지 못하도록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고 싶지 않고 주님만을 꼭 붙들고 살렵니다.
인터넷에 「버려두고 가는 인생」이란 아름다운 글이 있더군요. 이는 제목처럼 우리 스스로가 주님을 붙들고 살기 위해서 불필요한 모든 것을 스스로 ‘내려놓고, 버려두고’ 살자는 의미의 글입니다. 기도를 대신해서 옮깁니다. 『기왕 버릴 것 버려두고 가야 하는데 미리 버리는 것이 지혜인데 욕심 하나도 못 버리고 믿는다는 말 하나 가지고 여기까지 왔나이다. 세상을 쉴 사이 없이 걸어가는 인생인데 결국 버려두고 떠나는데 자존심 하나도 해결 못하고 분노만 가득 채워 왔나이다. 편한 세상이 없는데도 욕심에 속고 교만에 속으면서도 요령만 앞세워 실상은 속은 자가 되었나이다. 버려두고 가는 인생 그것이 나의 전부인데 모아두고 사는 것이 인생 전부인 것처럼 어제도 오늘도 걸었나이다. 이제부터라도 모든 것 버려두고 주님만 쫓아가는 믿음의 걸음 걷게 하소서. 아멘!(로뎀가페에서 이데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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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313년 로마 제국이 종교 자유를 허락하면서 상황이 180도 바뀌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성직자들에게 병역 면제, 세금 면제 등을 베풀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의 재산은 엄청나게 증가했습니다. 특히 종말을 걱정한 부자들은 유산 대부분을 교회에 기부했고, 가난한 사람도 죽을 때 구원을 위해 교회에 전 재산을 기부한다는 유언을 남기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의 재산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주어졌지만 이를 통해 교회의 발전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심각한 세속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또 발 빠른 사람은 자기 자녀를 성직자로 만들었습니다. 그것도 성직매매를 통해서입니다. 당시의 교회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헌금을 받아 부자가 된 주교들은 가마를 타고 화려한 옷을 입으며 호화스럽고 성대한 잔치를 벌인다. 그들이 벌인 잔치는 로마 제국 황제의 잔치들보다 더 성대했다.”
종교 자유는 분명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종교는 부패했고, 하느님의 뜻과 정반대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길은 편하고 쉬운 세속화에서 찾아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런 세속화 안에서 하느님의 자리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사랑의 하느님은 그런 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과 논쟁하면서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 놀라운 기적을 보고서 믿겠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느님의 일은 믿음을 통해서만 볼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은 세상의 기준을 통해서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기적들은 절대로 사소한 것이 아닙니다.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신 것, 빵의 기적 등을 어떻게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길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자기들 앞에서 직접 표징을 행하라고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이는 전형적인 태도이며 꼬투리를 잡으려는 시도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세상의 눈으로는 알아볼 수 없습니다. 과거 종교의 자유로 세속화가 이루어지면서 하느님으로부터 더 멀어졌던 것처럼, 세상의 눈으로만 바라보는 불신의 마음이 하느님과 절대로 함께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면서 말하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믿음은 세상 것에 기준을 내세울 때 절대로 생기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느님께 기준을 맞출 때 비로소 믿음이 생기고 계속된 하느님의 놀라운 표징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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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늘과 땅 사이에서>
마르코 8,11-13 (바리사이들이 표징을 요구하다)
그때에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마르 8,11)
하늘
내린
땅
고이
보듬어
땅
올린
하늘
고이
모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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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들어라>
미국에서 교포 사목을 할 때입니다. 성당 앞뜰에 성모님 상을 모시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 마음을 안 어떤 분이 “한국 어느 성당에 모셔진 성모님은 성모상에 머리를 갖다 대면 꼭 안수하는 모습인데 기적도 많이 일어난답니다. 그 성모님 상을 모신 곳이 어딘지 알아보고 그런 성모님을 모셨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쁜 성모님을 모시면 더 많은 관심을 지니게 되고 은총도 그만큼 더 크게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일반 판매용 성모상도 눈을 쌍꺼풀 해야 좋아한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만 사람들은 신비한 현상에 민감합니다. 어디에 어떤 기적이 있다고 하면 그곳에 쫓아가고 그 혜택을 입고자 애를 씁니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 신비한 현상이나 기적을 통하여 드러내 주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을 찾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현상에 더 많은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현실입니다.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고 주어진 은총의 열매에 매달리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찾기보다 자신이 하느님이 되기를 소망하는 착각에 빠집니다.
예수님께서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베풀어 주셨음에도(마르 8,1-10) 종교 지도자들의 불신은 계속되고 결국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집과 몰이해 속에 믿음이 없는 완고한 이들의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자기들의 욕구에 맞는 것만을 요구하고 이미 보여준 표징을 올바르게 보려 하지 않고 또 다시 표징만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바로 내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일도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보여주기 위해서 오신 쇼맨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결코 보여주기 위한 기적, 기적을 위한 기적을 행하진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기적을 많이 보고 체험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기적의 삶을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기적이 믿음을 가져오기보다 믿음이 기적을 낳습니다. 어떤 성모님 상을 모시든 그 앞에서 성모님과 일치한 마음으로, 그분의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다면 기적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랑을 베풀고,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며 소외된 사람들의 상황을 바꾸어 주시고 영원한 삶을 살게 해 주어도 그것을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살아있는 기적입니다. 그리고 어떤 특별한 기적을 베풀어 준 것은 그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적 사건 안에 담긴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현상을 쫓아다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지금 삶의 자리에서 기적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하늘의 기적이 아무리 많이 일어난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무엇을 보여 달라고 조르지 말고 우리가 머무는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14,12) 주님, 표징을 올바르게 볼 수 있는 눈과 깨닫는 마음을 주십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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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무지에 대한 답은 예수님뿐이다>
“행복하여라, 지혜로운 이들!”
지혜로운 사람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예수님뿐입니다. 무지의 어둠을 없애는 말씀의 빛, 하느님이 지혜인 예수님입니다. 부단히 자기를 넘어 예수님을 닮아가는 자아초월의 여정, 예닮의 여정을 통해 참으로 참으로 존엄한 품위의 사람, 지혜로운 사람, 자유로운 사람, 행복한 사람, 부요한 사람, 아름다운 사람이 됩니다. 바로 이것이 믿는 이들의 삶의 유일한 목표입니다.
진정한 부자는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필요한 것이 가장 적은 사람입니다. 예수님만으로 행복한 사람이 진정 부자입니다. 아주 오래전 써놓고 따뜻한 위로를 받았던 시가 생각납니다. 이 시로 한달간은 행복했습니다. 24년 전 짧은 자작시인데 방금 생각이 났습니다.
“민들레꽃
외롭지 않다
아무리
작고 낮아도
샛노란 마음
활짝 열어
온통
하늘을 담고 있다”-2000.4.20.
아마도 형제들 다 엠마오 산보 다 떠나고 수도원 집을 지키던 부활절 다음날 썼던 시일 것입니다. 하늘을 담아, 하늘을 닮아 행복한 부자처럼 보이는 작고 낮게 위치한 땅에 바짝 붙어있는 하늘을 가득 담고 있는 샛노란 민들레꽃이었습니다. 교회학자 성인 축일에는 이들의 지혜를 기립니다. 학식은 물론 지혜의 원천이신 주님께 뿌리내린 지혜로운 사람이, 진리의 연인이 진짜 교회학자들입니다. 교회학자 축일시 독서는 늘 고무적입니다.
“나는 지혜를 욕심을 채우려고 배우지 않았다. 이제 그것을 아낌없이 남에게 주겠다. 지혜는 모든 사람에게 한량없는 보물이며 지혜를 얻은 사람들은 지혜의 가르침을 받은 덕택으로 천거를 받아 하느님의 벗이 된다.”(지혜7,13-14)
하닮의 여정, 예닮의 여정중 주님과 깊어가는 우정과 더불어 주님의 벗이,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요즘 들어 자주 생각하는 사부 성 베네딕도의 말씀입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성규4,47)
이와 더불어 내 삶의 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일년사계로 압축할 때 어느 시점에 위치해 있겠는가 점검하는 것입니다.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하면 아마도 해지는 죽음의 시간을 오후 6시로 할 때 오후 4:30분, 일년사계로 압축하면 초겨울쯤 되지 않겠나 수차례 인용하여 나눴던 예화입니다. 이런 수행이 참으로 하루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삶의 환상이나 거품, 교만이나 집착이 말끔히 걷힌 본질적 깊이의 투명한 삶을 살게 합니다. 인생휴가 얼마 안남았는데 새삼 무슨 휴가인가 하는 생각에 이미 휴가를 접은지 수십년이 지난 수도생활입니다. 얼마전 써놓은 “인생휴가”라는 시입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휴가나온/인생인데
남은 휴가/얼마/안남았는데
지상에서의 삶자체가/날마다/휴가인데
죽으면 영원한 휴가인데
새삼 웬 휴가?
날마다/휴가처럼 사네”-2023.8.9.
어제 읽은 성염(요한 보스코) 교수 부인의 글이 생각나 인용합니다.
-‘요즘 보스코가 마루에 피어난 꽃들을 부쩍 오랫동안 들여다본다. 꽃을 좋아했어도 좀 낯선 버릇이라 “무슨 일이죠?” 물으니, “남은 날이 적어지니까 풀꽃 하나도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지 몰라. 보고 볼수록 신비롭기만 하거든.” 이 대답, 열심히 눈에 담아 놓았다, “이 세상 소풍이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씀드릴 준비중인가 보다.’-
우리 옛 선비들도 참 지혜로운 성인급의 학자들이 참 많았습니다. 오늘 다산 정약용 요한의 글도 마음에 와닿습니다. “읽기 버거운 책이 누구에게나 한 권쯤 있다. 독서는 그와 마주하는 경험이라야 한다.” 제게는 평생 독서의 대상인 성경이 이에 속합니다. “위로는 성현(聖賢)을 뒤따라가 짝할 수 있고, 아래로는 백성(百姓)을 깊이 깨우칠 수 있으니, 독서야 말로 우리 인간이 해야 할 본분이다.” 다산의 <여유당 전서>에 나오는 글입니다. 무지에 대한 해결책으로 평생독서와 평생공부를 참 많이 강조한 다산입니다.
참으로 인간의 고질적 마음의 병이 무지입니다. 하느님을 모르고 나를 모르는 무지의 병에는, 죄에는, 악에는 답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지혜의 주님과 무지의 바리사이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눈이 있어도 무지에 눈멀어 방금 4천명을 먹이신 주님의 기적의 하늘 표징을 목격하고도, 예수님 당신 자체가 하늘의 표징임을 모르고 시험하려 유혹하는 바리사이들에게 깊이 탄식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 자체가 빛나는 하늘의 표징이요 눈만 열리면 오늘 지금 여기서도 무수히 발견되는 하늘의 표징들인데 새삼 무슨 표징이 필요하겠는지요! 이들 무지한 이들을 버려두신 채 지체없이, 단호히 당신 삶의 여정에 오르는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가 빛납니다. 오늘 제1독서 야고보서에서 예닮의 여정에 충실했던 야고보 사도의 지혜가 보석처럼 빛을 발합니다. 시련과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그 인내가 완전한 효력을 내도록 하십시오. 그러하면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래서 한결같은 정주의 믿음, 정주의 인내를 통한 존엄한 인간 품위의 삶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지혜가 모자라면 하느님께 청하십시오. 그러면 받을 것입니다.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대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이런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은 어떠한 길을 걷든 안정을 찾지 못합니다.”
갈림없는 마음으로, 한결같은 믿음으로 한결같이 항구히 청할 때 선사되는 지혜의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지혜이신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예닮의 여정도 실현됩니다. 빈부에 초연함도 탁월한 지혜입니다.
“비천한 형제는 고귀해졌음을, 부자는 비천해졌음을 자랑하십시오. 부자는 풀꽃처럼 스러질 것입니다. 해가 떠서 뜨겁게 내리쬐면, 풀은 마르고 꽃은 져서 그 아름다운 모습이 없어져 버리니 바로 부자가 자기 일에 골몰하다가 그렇게 될 것입니다.”
많이 지녀서 부자가 아니라 필요한 것이 적을수록 부자입니다. 무욕의 지혜입니다. 최소한도의 의식주에 주님만으로 행복하고 부유한 자가 빈부를 초월한, 무지의 탐욕에서 해방된 참 부자요 복자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예닮의 여정에 항구할 때 주님을 닮아 참으로 아름답고 지혜롭고 자유롭고 행복한 존엄한 인간 품위의 삶의 실현이겠습니다. 제 좋아하는 예닮기도 한 대목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생명, 저의 사랑,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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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은총의 완성>
“여러분 가운데에 누구든지 지혜가 모자라면 하느님께 청하십시오.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너그럽게 베푸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야고보서는 지혜가 모자라면 청하라고, 그러면 하느님께서 너그럽게 베푸실 거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모자라고 청할 것이 지혜뿐이고,
하느님께서 주실 것이 지혜뿐이겠습니까?
우리는 모자라는 것투성이고, 그러니 우리는 청할 것을 특정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정 좋은 거라면 뭐든 청해도 되고 하느님께서는 너그럽게 주십니다.
여기서 야고보는 하느님께서 너그럽게 주신다고 하는데 이 말을 바꿔 이해하면 하느님은 은총의 하느님이라는 말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청하고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신다고
그 은총이 다 우리에게 진정한 은총이 되는 것인지,
그 은총이 진정한 은총이 되게 하려면 다시 말해서
은총을 완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것이 오늘 제가 얘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은총의 완성은 실천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이 우리에게 진정한 은총이 되게 하려면 주신 은총을 가지고 실천해야 한다는 말이고 이것이 야고보서가
줄곧 주장하는 바이며 우리 가톨릭이 개신교와 달리 얘기하는 바입니다.
개신교가 비판하듯 우리의 실천과 공로가 있어야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실천과 공로가 은총의 조건은 아닙니다. 우리의 실천은 주신 은총에 대한 합당한 노력입니다.
밥을 주십사 청하면 하느님은 밥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밥을 먹고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빈둥 놀면
그 밥은 우리의 힘이 되지 않고 살만 찌개하고 비만만 되게 할 뿐이지요.
밥이 우리의 힘이 되게 하려면 힘들어도 힘을 써야 합니다. 여러 차례 말씀드렸듯이 힘들다는 말은 힘이 들어온다는 말인데, 밥이 힘이 되어 들어오게 하려면 힘들어도 힘을 쓸 때 들어오는 것입니다.
오늘 야고보는 인내 또는 인내력이 어떻게 생기는지 얘기하는데 그 골자는 시련 없이 인내는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시련이 인내를 낳는다는 말이기도 한데 너무도 당연한 말입니다. 인내라는 것이 본래 싫어하는 것, 고통, 시련을 견뎌내는 것이지, 좋아하는 것, 즐거움, 순탄함은 견디지 않고 그저 즐기고 누리는 법이지요.
요즘 인내하는 힘들이 갈수록 떨어집니다. 역경에 조금만 처해도 쉽게 Burn out이 됩니다.
Burn out을 우리말로 무기력증이라고 번역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풀어서 얘기하면 스트레스가 지속되면 어느 순간, 심리적 정신적 에너지가 고갈되고 육체적으로도 무기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렸을 때부터 역경을 적당히 견디는 힘을 길렀어야 하는데 자식을 너무 사랑하여 그 나이에 맞는 역경을 겪지 않아도 되게 부모가 과보호했고 역경을 피해 가게 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역경을 견디고 이겨내는 힘이 세다고 하지요. 맞는 말이지만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아, 아니, ‘과잉 사랑’을 받아 힘든 것은 아무것도 스스로 하지 않고 컸다면 그 사랑의 결과는 완성이 아니라 실패이고 밥을 먹고 힘든 일을 하지 않아 비만이 되듯 사랑도 비만이 될 것입니다.
사랑이든 은총이든 많이 받았으면 많이 실천해야 사랑 비만 은총 비만이 되지 않고 완성될 것입니다.
내일부터 17일 토요일까지 강론을 올릴 수 없습니다.
돌아와서 기쁘게 다시 만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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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어찌하여 이 시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마르 8,12)
<회개의 표징>
오늘 복음(마르 8,11-13)은 '바리사이들이 표징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와서 논쟁하기 시작하면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메시아인지에 대한 시험이며, 당신이 메시아라면 한번 표징(기적)을 일으켜보라는 요구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 8,12)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많은 표징들(기적들)은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결정적인 때(kairos)'를 향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많은 표징을 일으키면서도 동시에 '함구령'을 내리신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일으키신 많은 표징들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결정적 표징을 통해, 우리 안에서 일어나기를 바라는 표징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의 표징'입니다. 곧 '어제보다 더, 지금 보다 더, 우리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커지는 회개의 표징'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예수님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님의 진리는 '십자가의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십자가의 생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은총은, '성령의 네 번째 열매'인 '인내'입니다.
이 '인내'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오늘 독서(야고 1,1-11)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1,2-3)
'인내'의 열매를 통해서, 회개의 표징이라는 기적을 만들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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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n_D_Te8Ogj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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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마르 8, 12)
소중한 일상
새로운 일상을
매일매일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소소한 일상을
너무 쉽게
건너뛰고
지나치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일상을
건너
뛰면서 까지
체험될 수 있는
평화란 없습니다.
일상을 부정하면
그 어떤 표징도
주님께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일상보다
더 아름다운
표징은 없습니다.
마음을
주님께 맡기는
기도의 표징이
일상의
가장 큰
은총입니다.
일상의 단절은
터무니없는
은총의 요구로
이어집니다.
일상이
바로
은총이며
표징입니다.
일상은
논쟁거리가 아닌
주님마저 시험에
빠뜨리게하는
욕망의
족쇄가 아닙니다.
단 한번도
우리의
소소한 일상에
감사하여 본 적이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우리의 일상이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일상이며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생명의 일상입니다.
일상의 방관자는
또한
은총의
방관자입니다.
우리는 이렇듯
일상을 통과하며
하느님 나라의
삶에 가닿게 됩니다.
소소한 일상을
모으니
감사가 되고
기적이 되고
은총이 됩니다.
일상을
되살려 표징이
되게하시는
일상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통하여
탄식이 아닌
기쁨의
탄성(歎聲)이
넘쳐나는
오늘의 일상이길
기도드립니다.
가장 좋은 일상
가장 좋은 표징은
바로 오늘입니다.
오늘의 표징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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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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