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새날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진이가 스스로 하는 일이 많아지니 돌봄이 훨씬 수월해졌습니다.
곧 할비 할미의 손길이 필요치 않은 시기가 올 것 같다고 말하니
그래도 자기를 꼭 보러 와야 한다고 합니다.
이 조손의 사랑이 주님이 주신 특별한 은혜임을 믿으며
장차 세대를 뛰어넘는 복음의 교제로 나아가길 원합니다.
오늘은 짬을 내어 서울의 형님을 만납니다.
저희의 모든 대화를 주관하여 주셔서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만남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
성령님, 말씀을 조명하여 주실 때
진리를 알아감으로 기쁨이 넘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24.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25.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
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28.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본문 주해)
21절 : 예수께서 괴로워하시며 제자들을 당황하게 하는 말씀을 하신다.
그것은 제자들 가운데 예수님을 팔 자가 있다는 말씀이었다.
22~26절 : 제자들은 예수께서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몰라서 서로 바라보았다.
그때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예수의 품에 누워있었다.
‘사랑하시는 제자’란 요한복음의 저자인 요한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누워 있었다’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식사하는 자세를 말한다. 그들은 옆으로 비스듬히 기댄 채 왼쪽 팔꿈치로 몸을 지탱하고 오른손으로 음식을 먹는 자세로 식사를 하였다.
베드로가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머릿짓 신호로 예수를 팔 자가 누구인지 물어보라고 하였다. 예수의 사랑받는 제자가 예수의 가슴에 바싹 기대어 그가 도대체 누구인지를 물었다.
예수께서 자신이 빵조각을 적셔서 주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대답하셨다.
이것은 예수가 그의 사랑받는 제자에게만 속삭이셨고, 나머지 제자들에게는 숨겨졌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떡 조각을 가룟 유다에게 주셨다.
27~29절 : 유다가 떡 조각을 받은 후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갔다. 마귀가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 유다는 그 생각을 버려야 마땅했지만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는 떡을 받은 후 사탄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만다.
예수께서 유다에게 주신 떡은 그가 돌이킬 최후의 기회를 주시는 예수의 사랑의 행위이다.
유다는 배반의 떡 앞에서 자기 뜻을 꺾고 긍휼을 구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배반의 떡임을 알고도 그것을 받음으로써 스스로 어둠 속에 거하였다.
예수께서 유다에게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고 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권세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아들은 자기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는 것이다.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배후에서 역사하는 사탄도 예수의 권세를 집행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유다가 사탄에게 사로잡혔으나 예수는 여전히 명령권을 쥐고 계신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이 유다에게 하신 그 말씀을, 유다가 돈을 맡고 있었으므로 일행이 쓸 물건을 사거나, 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라고 하신 말씀으로 생각하였다.
30절 : ‘밤’은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밤은 예수의 사역이 끝나는 시간이다. 그때는 어둠이 지배한다. 마귀에게 속한 자는 어둠에 속한 자이다. 유다는 예수를 떠나 그가 있어야 할 곳인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요12:35)
(나의 묵상)
믿음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으로 생각했던 과거에 가끔씩 드는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내가 유다처럼 주님을 배신하는 자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한 생각이었다.
인간의 본성상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의 삶이 순적할 때, ‘주님 사랑합니다!’ 했다가, 어려움이 닥치면 ‘뭐가 이래?’ 하며 얼마든지 돌아설 가능성이 있는 자, 내가 바로 유다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님이 가룟 유다를 불렀지만, 유다는 자신이 예수님을 선택했다고 생각했다.
나라를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예수님과 딱 연결되면서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물론 다른 제자들에게도 그러한 마음이 있었지만, 우왕좌왕하는 다른 제자들에 비해 유다는 자기만의 심지가 굳고 특심이었던 것 같다. 또 그가 돈궤를 책임진다거나, 나중에 예수님을 파는 과정에 대제사장들을 만날 정도가 되는 것을 보면 다른 제자들보다 훨씬 똑똑한 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의 꿈을 이루어 주실 줄 알았던 예수님이 나라를 구할 만한 그 어떤 제스추어는 조금도 보이지 않고 자꾸 엉뚱한 말씀만 하시더니 드디어는 죽는다는 말씀까지 하신다. 유다는 어떤 제자들보다도 먼저 사태를 파악하고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별 도움이 안 되겠다고 판단을 해버리고 예수님을 떠날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팔 생각까지 하게 된 것이다.
유다는 주님께서 빵조각을 적셔서 자신에게 주실 때 그는 돌이켜야 했다.
그 돌이킴은 세상에 뿌리 박은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두 눈을 크게 뜨고 영혼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사탄의 하수인이 되어 자기의 길을 걷게 된다.
그 길을 나섰는데 바로 그 세계는 ‘밤’이었다.
초두에 말했듯이 내가 유다처럼 주님의 배신자가 될까봐 은근히 불안했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믿음은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요, 전적인 주님의 선물인 것과 주님께서 십자가 에 죽으심으로 ‘다 이루었다’ 하신 그 다 이루심에 나의 신앙까지도 다 완성됨을 알게 되니 더 이상 걱정하지 않는다.
아무 능력도 없는 나를 믿을 필요도 없거니와, 신실하신 성령님이 계시지 않은가 말이다.
비록 지금은 이 현실 속에서는 넘어지고 자빠지지만, 나는 이미 하늘에 앉히운 자가 되었음(엡2:4~6)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밤에 다니는 자가 아니다.
유다는 자기의 야망에 사로잡혀 빛이신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고 밤에 거하는 자가 되어 멸망의 길을 걷는 자가 되고 만다.
나 역시 남은 이 땅의 삶을 육체로 살아가니 세상의 유혹과 시험과 핍박을 날마다 받으며 산다. 주의 일에 열심을 내다보면 ‘나의 생각’(자기주장의지, 자기의)이라는 것이 어느 새 떡하니 자리 잡고 있기도 한다.
하지만 날마다 말씀 앞으로 나아가면 ‘나의 생각’이 바로 그 ‘밤의 생각’이란 것을 보게 되고, 성령께서는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인도하신다.
그러면 나의 바벨탑으로 무겁고 어두컴컴했던 마음에 주님의 빛이 환히 비쳐진다.
사탄이 유다의 마음을 지배했던 것처럼 내 마음을 주관하고 싶어도 주님의 빛이 가득하기에 맥을 못 추는 것이다.
날마다 빛의 세계로 나가는 문을 여는 일, 말씀 앞으로 나아가는 일!
(묵상 기도)
주님,
날마다 빛의 세계로 문을 열고 나아갑니다.
밤의 생각과 밤의 일들이 끊임없이 생겨나도 빛을 이길 순 없습니다.
그 빛의 자리, 말씀의 자리로 이끌어 주셔서
밤에 다니는 자가 되지 않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