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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퍼온글 ※
-질문 내용-
많은 고민 끝에 도움을 받고자 이렇게 글을 올려봅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소속의 교회를 다니는 40대중반의 남자입니다.
어떻게 제 마음을 글로 표현하여 여러 분들에게 조언과 질책과 권면을 받을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며 써 내려 갑니다.
첫 번째는
임직이었는데 저는 교회 생활을 그리 오래한 것도 아니고 신앙심이 좋은 것도 아닌데 어느 날 안수집사로 임명하시어 임직식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고 자격도 되지 않아 사양하려 했으나 다른 분들의 말씀 왈 하나님이 선택하신거니 순종하라 말씀하시더군요.
더 저를 놀라게 한 것은 임직식 때 감사헌금으로 일정금액을 봉헌하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때 당시 저는 전 재산을 잃고(사기) 어려울 때인데 목사님의 배려로 교회로 들어와 살고 있었습니다.
저는 처음 알았습니다. 임직을 받을 때 돈을 내야 한다는 사실을...
나중에 인터넷 등 여기저기 알아보니 저희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더군요.
회의가 느껴지더군요. 거부하자니 하나님이 세우셨다고 하고, 그리고 어려울 때 목사님이 많은 도움을 주셨는데......
결국은 없는 살림에 겨우겨우 조달하여 봉헌했습니다.
나중에 이 부분은 목사님과의 대화에서 제 의견을 말씀드렸습니다.
두 번째는
성도의 수가 많지 않은 터라 교회 증축은 하지 않아도 될 상황이었는데 그렇다고 재정이 넉넉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오랜 숙원사업(목사님 생각)임을 강조하시며 증축을 강행하였습니다.
3억이란 큰 금액이었습니다. 참고로 저희 교회 일년 예산이 1억 정도 됩니다.
암암리에 반대하시는 분들도 계셨지만 목사님의 의견에 반대의사를 밝히는 성도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문제는 증축하고 나서부터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를 거론하자면 너무 길어 간략하게 적습니다.
교회 증축을 하게 된 이유는 목사님의 목회 활동 중의 일부분이었고
또 때마침 수입이 될 만한 사업을 하고 있던 터라 교회 재정은 부족하지만
나머지 금액은 진행하는 사업을 통해 충족하면 되겠다라는 생각에 증축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당회 회의록에 기재되어 있음)
증축에 관련하여서는 장로(현 장로는 1명입니다) 및 권사, 안수집사의 의견은 무시되지 않았지만 반대의사를 밝힌 성도는 저 포함 아무도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진행되는 사업이 잘 되어 이래저래 공사비의 절반은 충당되었고 이런 식으로 진행되면 3년 안에 모든 빚을 갚을 수 있겠다 싶었지만
진행되는 사업은 점점 쇠퇴해져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빚을 갚는 속도는 더뎌지게 되었고, 성도들의 헌금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건축헌금을 거론하시면서
항존직들은 무조건 월 10만 원 이상 해야 한다며 공식예배석상에서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리고 일반 집사 및 성도들은 5만원씩..... 현재 건축헌금 봉헌이 잘 안됩니다. 다들 경기가 없어 그런지...
세 번째는
십일조에 관련된 것입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십일조에 관련된 설교를 많이 하시더군요.
문제는 기복신앙을 따라가는 듯한 설교를 많이 하십니다. 십일조 하면 복 받는다. 그 복이 어떤 복이겠습니까? 물질의 복이었습니다.
헌금(십일조 포함) 잘하면 물질의 복 받습니까?
그래서 헌금 잘 하신 분들 모두가 다 물질의 복 받으셔서 부자되셨습니까?
그 외 다른 말씀은 전혀 언급하시지 않습니다. 물질의 복을 받습니다라는 말뿐...
죄송합니다. 갑자기 흥분되어서요...
처음 목사님을 뵈었을 때의 감정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무너지기 시작했고 인간적인 생각이 앞서 본 교회에 십일조를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5년 가까이 새벽예배(교회 옆에 살았기 때문)에 참석했던 자가 어느 날 갑자기 십일조 생활을 하지 않고 새벽예배까지도 참석하지 않게 되자
찾아와 물으시더군요.
갑자기 왜 신앙생활이 엉망이 되었냐면서요...
저는 달리 목사님에게 드릴 말이 없었습니다.
7년 가까이 교회를 다녔지만 이때 처음으로 목사님과 신앙에 관련하여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목사님과의 대화가 끝난 시점으로 약 3개월이 지난 어느 주일 오후 예배 때 교회법을 말씀하시면서
십일조를 내지 않는 자는 기도도 안시키고 교회와 관련된 그 어떠한 직책도 맡길 수 없다고 하시더군요.
그리고 임식식때 봉헌한 금액에 대해서는 저는 그러한 관행에 대해 반대의사를 나타냈을 뿐
그 외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언성을 높이시며 돈을 개인적으로 착복한 것도 아닌데… 라며 당회를 열어… 실명은 거론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주일날 참석 성도수가. 50여명정도 되는데...
저는 차라리 당회에 거론하여 출교를 시키시던가 어떠한 판단을 내리시는게 더 좋은데..
참 장로교 헌법에 ‘십일조 하지 아니한 자에게는 기도를 시키지 않는다’ 라는 항목이 있습니까?
학교에서도 학생이 잘못하면 불러다가 자초지종을 묻고 충고를 해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데
교회안에서 이러한 생각을 가진 성도가 있다면 목회자로서 당연히 성도를 불러다 권면을 할 수도 있을 터인데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다가 어느 날 공식 예배 석상에서 실명을 거론하지 않았지만
그러한 말들을 내뱉어 놓는 경우가 어디에 있는지...
아쉬운 것은 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7년 가까이 교회를 다녔지만 목사님과의 신앙관련 대화는 단 한번있었습니다. 전혀 없으신 성도 많습니다.
목사님 스타일이 말이 없으십니다.
사택의 문턱이 너무 높다는 생각이 깊게 듭니다.
사택을 찾는 성도가 없습니다. 예전 교회옆에 살 때 저의 아내와 2~3명의 여집사님 외에는 사택을 찾는 성도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저는 모릅니다. 알고싶은 생각도 없고 아내는 알고 있다고 하지만 묻지 않습니다.
말이라는게 너무 많아도 너무 적어도 이렇게 사람을 힘들게 만듭니다.
두서없이 써내려간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직 신앙의 뿌리를 재대로 내리지 못한 상황에
이러한 일들로 인하여 목회자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이로 인해 본인의 신앙에도 큰 상처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에게 강력하게 제 의견을 제시한 적은 없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목사님과 대화를 나눌 때는 그저 네네 응대만 했을 뿐 저의 주관적인 반론은 하지 않았습니다.
대적하는 것 같아서요. 하지만 임직건은 아직도 제 마음속 한구석에 쭈그리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며 저의 잘못된 믿음과 구원의 사고를 되새겨보는 것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어떤 집사님은 그냥 목사님 찾아뵙고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라고 하는데 저는 그러고 싶지는 않습니다.
충고와 기도 부탁드립니다.
-답글 내용-
집사님~
먼저 마음을 내 비치며 공유하는 카페에서 글을 남겨주신 결단적 용기에 경의를 표합니다.
저도 한 교회를 책임지는 담임목사로써 글을 읽는 중 그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번째,두번째,세번째 사항,,
그리고 집사님의 간증글을 성경말씀과 비추어봤을때 결과적으로 그 담임목사님이 잘못된 부분이 크다고 느껴집니다.
물론
자세한 상황과 경위는 잘 모르겠지만 그 목회자의 교회운영방침은 "그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기에
저도 분한 마음이 들어 키보드를 두들겨봅니다.
저의 사견으로 보기에는 집사님의 언행은 오히려 그 목회자님이 더 본받아야 할 부분이 많다고 느껴집니다.
사람은 직접적으로 만나 부딪혀보고 대화를 나누어봐야 그 속 마음의 인품을 어느정도 알 수 있겠지만..
집사님의 글로만 봤을때는 임원직의 자질로써 "신중성"을 소유하신 인품의 향기가 느껴집니다.
아무쪼록
교회증축을 시작했고 마무리가 된 상황이라지만 그 교회 목회자를 위해서나 집사님을 위해서나 그 교회를 위해서나
충고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화평(和平)된 마음으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어보고 싶습니다.~
그 교회의 상황과 형평성의 경위는 자세히는 모르기에 혹시나 오해스러운 부분의 내용이 있다면 이해바랍니다.
그리고 저또한 잘나서 자존감의 어덕으로 적은 사항이 아니옵고 단지 성경적 말씀의 분별력으로 좀 더 조명해보고자 적은 의도이니..
이 점도 양해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먼저는 십일조사항을 두고 교제를 나누고 싶습니다.
저도 굳이 교단을 적어보자면 장로교에 속해 있습니다.
집사님이 속해있는 그 교회법이 십일조를 내지 않은 성도는
기도도 안시키고 교회와 관련된 그 어떠한 직분도 맡길 수 없다라는 그 목회자의 말을 들으니
정말 어이가 없을 뿐더러 인본주의,물질주의,현세주의 신앙을 추구하는 것 같아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설사 장로 헌법이 존재하며 적혀있는 사항일찌라도 그와 비슷하게 교회법의(십일조) 말을 했다는 거 자체가
십입조의 개념과는 거리가 아주 멀 뿐더러
그 목회자분이 십입조의 개념을 많이 착각하고 있는 듯 싶습니다.
아무리 증축헌금이나 십일조의 헌금이 중요하다고는 하나
경제적으로 힘든 가정도 있을 것이고 힘들게 연명해야 하는 상황의 가정도 있을터인데
그러한 교회법의 설교가 과연 누구의 배를 채우기 위한 욕심인지 그 근본적 개념의 터(基初)부터 묻고 싶은 마음입니다.
물론 교회를 운영함에 있어서 십일조,증축헌금,타 외 헌금은 중요합니다.
또한 직분자의(교회운영위원회,임원직당회) 위치에서 솔선수범하여 헌금을 내는 것도 본(本)으로써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무엇이든지 집사님의 가정처럼 피치못할 상황과 형편성으로 살아가는 분들이 분명 존재하기에..
같은 목회자로써 그 교회 운영 방침을 읽자니 부끄럽기 그지 없습니다.
십입조를 내야하는 원칙은 기록된 말씀에도 나와는있지만..
그 십일조의 원칙을 기준삼아 믿음을 테스트하기위한 방편으로 설교해서는 안된다고 여겨지며
어려움 가운데 힘드신 성도님들이 있기에
십일조가 사람을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성도님들을 힘들게 하는 율법의 법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사실 목회자인지라 주님의 복음을 위해 사용하는 목적의 푯대가 있기에
경제적 여유가 있으신 가정들이 더 많은 헌금을 냈으면 하는 바램은 있습니다.
하지만
생활이 어려운 분들이 헌금하시는 걸 보면 좀 마음이 불편하긴합니다.
그 돈의 금액이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그저 교회를 위해..공동체를 위해..
천원짜리 한장이라도 내고 싶어하는 그 마음이 아름답고 소중해 보일뿐입니다.
아울러 교회내에서 조금만한 일이라도
섬기고 봉사할려는 그 마음또한 돈을 떠나서 몸으로써 온전한 십일조를 바친 산 제사라고도 여겨집니다.
십일조의(헌금) 대한 성경구절의 말씀은 많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민수기) 18:2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레위인에게 말하여 그에게 이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받아 너희에게 기업으로 준 십일조를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때에 그 십일조의 십일조를 거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말라기) 3:10-12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와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마태복음) 6: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가복음) 12:38-40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가라사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1:1-4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킹제임스) And he looked up, and saw the rich men casting their gifts into the treasury.
And he saw also a certain poor widow casting in thither two mites.
And he said, Of a truth I say unto you, that this poor widow hath cast in more than they all:
For all these have of their abundance cast in unto the offerings of God: but she of her penury hath cast in all the living that she had.
(고린도후서)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다른버젼/기쁜마음/cheerful giver)"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저는 이런생각을 해 봅니다.
보물을 품고 있는 마음은 교회내에서 물질적,봉사의 행동이 자연스레 따라간다고 여겨집니다.
천원이든 이천원이든 몇만원이든 그저 양심껏.....주님께 "기쁜마음으로" 감사히 헌금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보며
각 형제 자매님들의 믿음의 분량도 있고 형편성의 분량도 있기에..
헌금의 금액도 물론 받으시겠지만 몸의 헌신도 우리 주님께서 받으실거라 확신합니다.
brusej집사님~
그 목회자분이 증축이 필요없는 상황인데도 교회를 늘려야하는 그 근본적 이유가 무엇이였는지 정말 직접적으로 묻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또한 그 교회법도 정말 기가막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그또한 직접적으로 묻고 싶은 사항이랍니다.
아무쪼록 자세한 그 교회의 경위는 모르기에 십입조의 관한 사항은 이런 말을 남겨보고 싶습니다.
누가복음18장 말씀과 마태복음 7장 말씀을 잘 아실것입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바리새인의 길과 세리의 길..모래위의 길과 반석위의 길..
가인의 길과 아벨의 길..이스마엘의 길과 이삭의 길..에서의 길과 야곱의 길..술맡은 관원장의 길과 떡 굽는 관원장의 길..
우리는 가인의 제사처럼 떡 굽는 관원장처럼 주님앞에 십일조를 했다 안했다의 행위적관점..금식도 했다 안했다의 언행적 관점이 있을 것입니다.
양면성을 두고 논하자면 길어질 듯 싶기에 생략은 하겠습니다.
즉 난 이것은 했고 저것은 안했다 저것은 했고 이것은 안했다 라는 자기 의, 자기 열심, 자신의 영광,
자신을 가꾸는 근본적 기초인 자존감(自尊感)이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한것인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것인지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께 양심(良心)적으로 기도로써 제사를 드릴것입니다
모래위에 제사를 지낸 사람도 있을 것이고 반석위에 제사를 지낸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 목적과 근본의 관점으로 본다면..그 모든 것들이
근본적 복음을 위한 증축의 목적인지..(갈라디아서 6:3-8, 사도행전 1:7-8, 고린도전서 1:18-31)
근본적 복음을 위한 설교의 목적인지..(마태복음 5:1-19, 디모데전서 4:7-13, 디모데전서 1:4-11, 디모데후서 4:1-5)
근본적 영혼을 치유하고자 하는 힐링의 목적인지..(에스겔 34:1-8)
그 근원의 출발점은 말씀을 통해 자세히 비춰볼 필요성은 있다고 보며 분별할 필요성도 있는 듯 싶습니다.
저는 brusej님의 글을 읽으면서 더 충격적인건
7년 가까이 교회를 다니신 분이 그때 처음으로 목사님과 신앙에 관련하여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었다는 얘기에 놀라웠고
7년동안 신앙과 관련된 대화가 없었다기에 더 놀라웠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과연 그 교회 담임목사님은 목사가 맞는지 정말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요즘 세상적인 대세의 말도 "힐링"(치유)이라는 말을 서로서로 주고 받는 것 같습니다.
세상사람들도 서로서로 치유하고자 어느정도 노력을 기울이는 마당에
목회자가 침묵으로써 자기 교회 성도님들을 돌보지 않고 영혼을 치유하는데 게으름을 피운다면
말씀을 가르치는 직분자로써 도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교회 외부의 치장도..하나님 나라의 확장도..선교의 복음도 당연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 먼저는
자기 교회 성도님들의 영혼을 살펴주는 것이 먼저된 자로써 실행해야할 지도자의 덕목(德目)인 줄 믿습니다.
지도자라면 직분자라면 거룩하신 성령의 말씀(聖經)으로 무장하여
때로는 아비의 화법,어미의 화법,때로는 직설적 화법,온유의 화법,공의의 화법,인애의 화법,예의의 화법을 가진
신의 성품을 소유할려는 열심의 노력은 기울여야 한다고 봅니다.
충무공 이순신의 리더쉽과[충(忠), 효(孝), 인(仁), 의(義)] 관련된 책중에 이런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의 인품이 훌륭한 점은 사람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진실된 인품에서 우러나오는 충효의(인애) 정신이 매력이 있다라고 주위에서 보필했던 사람들의 증언이 남겨져 있는걸 봤습니다.
그 중에 어느 한 사람의 증언으로써 억지로 사람을 리더할려는 모습이 아닌 현재의 위치에서 처해져 있는 상황에서
최선을 다할려는 지고지순한 인품이 매력을 느꼈다라고 적혀 있길래..저도 본받고 싶은 충효의 정신같아 교훈을 삼아봤습니다.
신앙의 위대함도 세월을 지내다보면 비록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때도 있겠지만..
외부적인 겉모습의 처세보다
자기 식구들,자기 양들,자기 주위 사람들을 먼저 챙기고 돌볼려는 힐링의 마음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지식도 마찬가지라고 여겨집니다.
10개국어를 능수능란하게 통달한 지도자의 직분자라 할지라도 강단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목회자라면
자기 나라, 자기 언어를 가진 동류의 사람들을 먼저 돕고 힐링(치유) 하는 것이 먼저는 당연하다고 보기에
사랑은 먼데서 실천하는 것이 아닌 가장 가까운(주변) 사람에게 표현하는 것이 덕으로써 아름다운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사랑의 고백도 마음(가슴)으로 표현해야 아름다운 것이지 결코 지식만을 추구하는 침묵의 삶은 옳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그러기에 brusej집사님이 다니신 그 교회 목회자와 같이 침묵의 힐링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을뿐더러 치유의 사역이 무엇인지 진정 모르는 듯 싶습니다.
정말 같은 장로교단 목회자로써 그 목회자님의 궁금한점은 너무도 많지만..어찌됐든 자세한 내막은 모르기에
끝으로 이런 간증으로써 매듭을 짓고 싶습니다.
목회자도 허물이 있을것이고 임원직도 허물이 있을 것이며 평신도분들도 허물이 있을 것입니다.
윤동주의 서시처럼 한 점 부끄럼없이 하늘을 우러러 떳떳하게 우리 예수님을 쳐다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다 왕같은제사장인 만인의법칙또한 성경에 기록되어져있지만..
직분자의 위치인 임원직이 하나가 되지 않고 분열이 된다면
어찌 교회의 방향성(푯대) 옳게 잡으며 교회가 하나되어 이방사람들에게 복음을 실천하는 사명의 전도자로써 사도(使徒)의 직분을 감당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다 주님의 종일뿐더러 서로서로 섬기는 종의 신분이며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교회내에서도 성도간에 상하 수직적관계가 아니라
좌우 수평적관계로써 수직적 하나님을 바라보며 복음을 실천하는 믿음의 푯대인 소망을 품고 서야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13-17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로마서) 15:1-2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갈라디아서) 6:5-10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찌니라
(히브리서) 13:16-17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9:14-17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로마서) 14:7-8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brusej집사님~ 마음고생은 심하겠지만 복음의 푯대인 말씀에 입각하여
화평의 길..협력의 길..배려의 길..인애의 길로써 서로서로 상의하며 뜻을 한군데로 뭉치고 합의점을 속히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목회자분과 진지한 대화를 다시 한번 나누어 보시고
주위의 직분자님들과도 성경의 기준점으로 많은 대화를 나누셔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더 분별의 확신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교회증축또한 어찌하겠습니까..
이미 엎그런진 물 담을 수는 없기에..그 교회 경제적 형편이 좋은 성도님들이 애쓰는 방법밖에는 없는 듯 싶습니다.
집사님의 글을 읽으면서 저또한 잘못된 점이나 그 목회자님에게 용서를 빌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 부분에(십일조,치유사역) 있어서는
그 목회자분이 임원직의 말을 더 귀담아 듣고 잘못된 점을 시인하며 고쳐야 될 줄 판단되어집니다.
나아만장군의 위대한점도 신하들의 말을 귀담아 들었던 인품이 훌륭하기에
요단강에서 그 무겁고 두터운 갑옷을 벗었기에
역사적 교훈으로써 우리 하나님께서 남겨주신 줄 믿습니다.
(잠언) 16:18-19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겸손한 자와 함께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언)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시편) 1:1-3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brusej집사님..아무쪼록 좋은 덕(德,忠,孝,仁,義)으로써 그 교회 재정문제가 속히 해결되길 바라며..
집사님의 임직건도 이왕 직분자의 위치를 맡았으니 처해있는 상황과 형편에서 최선을 다하며 더 힘을 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실천하지 못한 부분이 많아 송구스럽지만..조금이나마 집사님을 위해..그 교회를 위해..기도로써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shalom~